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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 (마24:32-51절)
말세의 시대에 일어날 징조를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자신이 속히 재림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눈은 대자연을 확실히 볼 수 있습니다. 푸른 하늘과 아름다운 산,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도 확연히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귀는 자연의 아름다운 소리와 신비한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과 귀는 이러한 자연적이고 물질적인 것만 보고 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과 귀는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하고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범죄한 자를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다가오는 세상의 종말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삶의 모든 것을 보고 듣되 특별히 하나님의 뜻과 교훈을 깨달을 수 있는 복된 눈과 귀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마24:32-33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마치 천기의 징조를 통해 지혜를 얻듯이 무화과나무의 변화를 보면서 그 변화가 주는 의미를 배우라는 말입니다. 즉 종말의 징조는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으로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부풀어 수액으로 연하여지고 잎사귀가 돋아나면 여름이 가까운 것과 같이 종말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이 종말의 시대에 일어나는 모든 일 즉 적그리스도가 일어나고 난리와 전쟁의 소문이 파다하며 처처에 지진과 기근이 발생하는 재난이 임하며 서로 미워하고 잡아 죽이고 사랑이 식어지며 불법이 성하게 되면 인자가 가까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끝 날에 관한 지식은 만인에게 공개된 명백한 진리입니다. 이것은 자연계나 영계의 공통된 진리입니다. 이것은 모든 피조 세계에 적용되는 천정의 법칙입니다. 모든 피조세계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날 때가 있었는가 하면 죽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에게 오는 종말은 죽음의 날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개인적인 종말이라고 합니다. 모든 피조세계에 함께 임하는 종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우주적인 종말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끝날 종말을 예비하고 살아야 된다고 부탁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종말 앞에서 눈과 귀를 통하여 주의 재림이 임박함을 맞이하는 삶, 재림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이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몇 가지 유형을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1. 현실주의 스타일이 있습니다.
*마24:37-39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예수님의 재림의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몰라서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날과 그 때를 안다고 예언해서도 안 되며 경거망동해서는 더욱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아버지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에 대하여 일임한 자세로 재림의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재림의 날과 시간은 비밀 속에 감추어진 초월적인 하나님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등불과 기름을 준비하고 깨어서 기다리는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깨어 있으라.’ 고 하신 말씀은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기도로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눅21:34-36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끈기 있게 드리는 부단한 기도는 굳이 환난의 때가 아니라 하더라도 죄악의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은혜 중에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마25: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일회적인 은혜 체험이나 행함이 결여된 믿음, 그리고 영적 건강이 상실한 상태로는 예수의 재림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의 재림을 늘 염두에 두면서 날마다 은혜로운 삶을 살아야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성결함에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롬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영의 권능으로 강하여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으로써 모든 성결의 의무를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임하심도 노아의 때와 방불하여 홍수의 심판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면서 홍수가 나서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한 것처럼 예수의 재림 시에도 방탕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져서 교회의 문이 닫히고 불의 심판이 나타나는 그 최후의 순간까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라오디게아 교회 형입니다.
*계3:15-16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이 교회의 특색은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미지근함이었습니다. 이 교회는 소아시아에서 제일가는 금융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양모산지로 의류 제조업과 향료와 약제업이 유명하여 물질이 풍부했습니다. 그 결과 자연히 배금사상이 행복의 조건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습니다. 저들 교회는 금전의 부를 자랑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부심을 느끼며 안위를 받았습니다. 아름다운 옷으로 육체를 꾸미고 좋은 약으로 치료를 받아서 항상 눈이 밝다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저들은 영적 세계에 대하여는 전혀 관심 밖의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의 구원에 대한 감격이 없었습니다. 복스러운 예수 재림의 소망에 대한 마음속의 기쁨이 고동치지 않았습니다.
저들의 눈은 구름을 뚫고 오시는 주님의 세계를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저들의 귀는 천군천사들이 부르는 우렁찬 예수 재림의 나팔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하늘 나라의 완전한 만족에 대하여 아무런 기대감이나 매력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그저 생각하기를 ‘나는 부자다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하며 현실에 만족하였습니다. 영적 문제에 대한 무신경, 때와 징조에 대한 무분별, 선한 일에 대한 무관심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노아의 때와 같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드는 현실 생활이 저들의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롯의 때에 소돔과 고모라에서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집을 짓는 현실 생활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홍수 심판에 대한 끝 날의 진리를 외면하였습니다. 롯의 때의 사람들은 불과 유황으로 심판하는 끝 날의 진리에 대하여 심상히 여겨버렸습니다. 그러나 끝 날을 예비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현실주의는 실제로 곤고하고 가련하고 궁핍하고 눈 멀고 벌거벗은 수치의 삶이라고 하였습니다.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이러한 현실주의는 이사야 선지자가 잘 지적하였듯이 항상 소를 잡고 양을 죽여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고 하는 사상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상을 가리켜 육체주의, 향락주의, 쾌락주의라고 정의합니다.
이것은 내세를 무시하는 금세 제일주의요, 금세 만족주의요, 금세 지상주의입니다. 오늘 날도 교회 안에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2. 현실 도피주의 스타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데살로니가 교회 중의 어떤 사람들과 같습니다.
*살후3:11-12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데살로니가 교회는 영적으로 부흥하고 뜨거운 교회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믿음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사랑의 수고가 있었으며 소망의 인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교인에게 똑 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들 중에 혹자들은 예수님의 재림 소망에 너무 흥분하고 초조한 나머지 신경과민적인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예수 재림이 저들의 신앙의 전부가 되고 관심의 전부가 되어 어떤 이들은 세상의 직장을 버리고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가사를 돌보지 않았고 예수의 재림을 핑계 삼아 모든 일손을 놓아버렸습니다. ‘예수 재림이 박두 하였는데 이 세상에서 썩어져 버릴 일을 해서 무엇하는가. 하늘의 보화가 우리에게 도래하고 있는데 왜 세상일로 시간을 소모하는가.’
‘기도만 해야지, 은혜만 받아야지, 신령한 일만 열심히 해야지.’ 라고 하는 생각에 젖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미래에 대하여 추측하기를 좋아하고 어떤 예언적인 주제 앞에서 설교 듣기를 좋아하고, 미래사에 대한 논쟁으로 일과를 소모했습니다.
저들은 미래에 대한 감정과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결과 이 세상 생활을 등한히 하게 되고, 죄악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정의 질서가 파괴되고 교회 안에 혼란이 오고, 이상과 현실의 부조화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마침내 저들은 세상을 등지고 현실 도피주의 생활과 경향으로 흘러가 버리게 되었습니다. 주의 종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중에 있는 이러한 극단주의적인 감정주의자들에게 엄히 책망하였습니다.
이런 종류의 교인들은 규모 없이 행하는 자요, 일하지 아니하는 자들이요, 일을 만드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자들은 형제 중에서 떠나야 할 것이요 먹지도 말고 사귀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전9:10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사도 바울은 ‘부지런히 일하여 자기 식량을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복음 전파를 빙자하여 자신의 생업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아니함으로써 근면의 본을 보였습니다. 성경은 노동을 신성시하고 존중합니다.
이방 종교들은 모두 일하지 않는 귀족적 신을 두고 있으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일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고 하시며 성실하게 사셨습니다.
‘이마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으리라.’ 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교훈하기를 ‘아들에게 일을 가르치지 않는 사람은 그를 도둑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노동은 우리의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도 건강하게 하고 윤택하게 합니다. 노동은 또한 도덕적 생활에도 매우 유익합니다. 일하는 사람은 일에 바빠서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일하는 것은 귀한 것이며 하나님이 주신 축복인 동시에 명령인 것입니다.
3. 깨어 충성하는 스타일이 있습니다.
*마24: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주님은 도적같이 생각지 않은 때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도적이 언제쯤 침입할 것인지 집 주인이 알고 있다면 깨어 있어 방비하고 있기 때문에 도적이 그 집을 뚫지 못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항상 주의 재림을 맞이하기 위해 예비하고 있다면 생각지 않은 때에 주께서 오실지라도 기쁨으로 영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지혜롭고 충성된 청지기처럼 때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교훈하는 종은 복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종에게 천국의 모든 직무를 맡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시악하고 사특한 종과도 같아 주의 재림이 더딜 것이라고 짐작하여 동역자들을 오해하고 비속한 종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며 타락한 생활을 하면 위선자의 형벌대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생각지 않는 때’ 라는 말의 의미는 안일과 방탕에 빠져 있는 순간의 만족이 깨어지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재림의 그날에는 두 사람이 밭에서 함께 일하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합니다. 두 여자가 같이 밭을 갈고 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입니다.
노아처럼 준비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고 예비치 않는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주의 재림 때에 구원 받을 사람도 있고 구원 받지 못할 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주의 재림 때까지 성도들과 불신자들이 육신의 사업에 있어서는 함께 활동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또 우리가 이 세상의 육신의 사업을 하는 중에 주님의 재림이 있으니 영적으로 항상 깨어 있어서 범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막13:36-37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이 비유의 말씀은 그날이 오기 전에 맡겨진 직분을 게을리 하지 말고 늘 충성하며 맡겨진 자리에서 봉사하라는 말입니다.
아시아 일곱 교회 중 서머나 교회는 박해자들로 인한 많은 환난과 궁핍으로 저들의 육신 생명의 위험까지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에게는 영적 부요가 있었습니다.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충성심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저들에게는 더 큰 환난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저들에게 죽기까지 충성하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그렇게 충성하였습니다.
종말 앞에 사는 서머나 교회의 기본 태도는 한 마디 말로 ‘충성’입니다. 죽기까지 가는 충성인 것입니다. 그 충성은 신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른 관계’입니다.
그 바른 관계는,
첫째, 하나님과 바른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오직 믿음입니다. 믿음을 잃지 않고, 저버리지 않고, 배반하지 않습니다.
둘째는, 사람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이것은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 사랑은 희생하는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셋째는, 물질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열심히 일하고 수확한 것을 먹으며 나누는 것입니다. 주님 재림 시까지 신자들도 밭에서 일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자와 불신자가 다 같이 세상 노동의 현장에서 일한다고 하였습니다.
두 여자는 똑 같이 맷돌질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데려감을 당하는 그 순간까지 일하고 수고하는 것입니다. 각자가 일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여 일하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지혜 있고 충성된 종은 주인의 일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어떤 종말의 현상이 나타날지라도 묵묵히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데려감을 당한다’ 고 하는 말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 말은 수동형이기 때문에 데려가거나 남겨두는 선별과 행동의 원인자가 성도들이 아닌 그리스도 주님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은 종말을 대비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이 아니라 맡겨진 직분에 충성하면 때가 올 때에 반드시 주께서 데리려 오실 것이며 주님께서 데려가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계는 지금 종말의 현상들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종말의 징조들을 증거하면서 마지막 때가 가까웠다고 말합니다. 밥코드 칩의 이야기로부터 유비커토스 사회가 도래했음을 알리고 적그리스도 정부의 출현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민등록증 대신 밥코드를 몸에 넣어 사용하게 되면 은행거래는 말할 것도 없고 신분증, 위치 확인, 모든 질병의 추적 등 살아가는 모든 면에서 일일이 감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외국에서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이에 동참하고 있고 우리나라도 점차적으로 시행 단계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인천 신도시에 지은 아파트는 나의 적성에 알맞게 컴퓨터가 작동되어 습도, 온도, 환기 등 모든 일상생활이 자동적으로 움직인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이 우선은 편리하겠지만 사실은 내가 감시를 받고 통제를 당하는 것입니다.
몇 시에 일어나고, 밥은 언제 먹었으며, 누구를 만나고, 무슨 일을 하였는지 일일이 통제를 받습니다. 이런 시스템 때문에 범죄가 많이 줄었다고 하지만 실상은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다 기록으로 남아있고 남들이 항상 나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삼성전자 같은 회사에서는 이미 이 시스템을 적용하여 직원 신분증을 달면 그 신분증에 칩이 저장되어 화장실에 가는 시간, 휴게실에서 쉬는 시간, 사람과 대화하는 시간, 식사하는 시간이 일일이 컴퓨터에 나타납니다.
복도마다, 문마다, 구석구석에 감시 카메라가 작동되고 인식하고 점검합니다. 잠시도 몰래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미래에는 철저한 통제 속에서 통치자의 지배를 받으며 저항하거나 거부하면 칩을 꺼버려 아무 일도 못하게 합니다.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은행에서 찾을 수 없고 병을 고치려 해도 병원 치료가 불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면 쌀알 크기 만한 전자칩을 몸속에 넣어야 그때부터 출생신고가 되고 모든 면에서 법적인 보장을 받으며 사회 활동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666이라고 부릅니다.
짐승의 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짓 유대인들이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사람에게 적용하기 전에 애완견에게 이식하는 것을 의무화 하였습니다. 앞으로 사람에게 적용할 때는 부자부터, 고관대작에게 먼저 하고 일반 백성들은 나중에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 신자는 세 가지 시제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하나는 과거라고 하는 시간 세계입니다. 또 하나는 현재라고 하는 시간 세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미래하고 하는 시간 세계입니다.
우리의 과거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되었습니다. 우리의 현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화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바로 개인의 종말에서 우주적인 종말로이어지는 날이 될 것입니다.
기독 신자의 미래는 너무나 확실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전개되는 새 하늘 새 땅에서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종말은 너무나 확실하고 영화롭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종말의 진리 앞에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늘 준비하고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신랑이요 우리는 그의 신부입니다. 신부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혼인잔치에 참여할 예복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 예복은 바른 신앙생활을 통해 얻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열 처녀의 비유를 들어 우리에게 준비의 필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날이 오면 성령의 기름을 준비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혼인잔치에 들어갈 것이며 성령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성도는 멸망의 심판을 받기 위해 버려둠을 당할 것입니다.
연병장의 고된 훈련은 내일의 백전백승을 위함이요 시험장의 긴장과 지옥 같은 훈련은 유능한 성공자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산모가 극한 고통을 겪듯이 우리는 십자가의 고통을 두려워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마지막 때에는 신자나 불신자나 한 번은 종말 앞에 서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 종말을 예비하지 않고 현실주의에 도취되어 육체로 마치는 삶에 오용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반면에 이 종말 앞에 흥분한 나머지 광신주의자가 되어 현실을 외면하고 마침내 도피주의자가 되어서는 더욱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어진 현실을 직시하고 깨어서 오늘 나에게 주어진 크리스찬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바른 종말관이 있는 신자는 그 날이 가까워 옴을 볼수록 자기에게 주어진 이 세상의 생활을 바르게 하는 자입니다.
이유는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두는 진리를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진실하고 착하고 충성된 종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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