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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3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절 후 제24주)
사랑의 훈련
신6:1~9; 히9:11~14; 막12:28~34
오늘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가장 으뜸가는 계명이 어느 것인지를 묻는 한 율법학자의 질문에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한 율법학자를 향해 예수님은 “너는 하나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고 그 율법학자의 슬기로움을 칭찬하셨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오늘 우리가 읽은 신명기 말씀에서 온 것이며,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레위기(19:18)에서 온 것입니다. 둘 다 율법서(토라)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모든 삶의 기준이요 판단근거인 율법 말씀을 한 마디로 정리하기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 특히 율법을 가장 잘 알고 있으며 지킨다고 자타가 공인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얼마나 대립되었으며, 예수님의 말씀을 얼마나 경원시했고, 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까지 했는지를 말입니다. 그 모든 일을 그들은 율법 준수를 위해, 율법 때문에 한다고 했습니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일어나는 많은 “불행한 일”들이 “율법”으로, 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는 이 땅에 사랑을 배우러 왔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사랑을 배운다는 말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른다는 것인데,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만큼, 즉 사랑의 용량(capacity)만큼, 사람으로 제대로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능력은 바로 여기에서 왔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온전히 아셨고, 그래서 사랑이 되셨으며, 삶을 제대로 사는 참 사람이 되었고, 그래서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다 떠나서 우리는 사랑한다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이웃은 고사하고 가까이 있는 가족도 사랑하기 힘들고, 하나님은 고사하고 나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도 힘이 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사랑을 배우러 왔다는 말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제대로 된 사랑은 사람에게 그냥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배워서 얻는(혹은 경험하여 얻는) 후천적 기능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사랑함으로써만 점점 사람이 되어 갑니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였던 스캇 펙은, 사랑을 “자기 자신이나 혹은 타인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라고 말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라는 말은 사랑이 단순히 감정이나 기분이 아니라, 노력이 따라야 하는 것이며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자로 나 아(我)자를 다 아시지요? 외고집 아(我)자라고도 합니다. 이 글자는 삼인칭 대상으로서의 “사람”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라(그때는 사람인(人) 자를 씁니다. 그때 사람은 서로 기대고 있습니다), 일인칭의 “나”를 의미할 때 쓰입니다. 그런데 이 글자는, 창과 방패를 들고 있는 것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손에 창과 방패를 들고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존재가 아니라, 창과 방패를 들고 있는 존재 - 옛사람들의 “나”에 대한 놀라운 통찰이죠? 그러니까 “나”는 본디 나 자신의 안전과 생존을 방어하게 되어 있고,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서, 우리의 “나”는 근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이 될 수 밖에 없는데, 바로 이것을 초월하는 책임과 임무가 우리에게(사람이라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과 방패로 무장하면 나는 강한 사람이 되고 안전과 생존이 보장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말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아주 부자유한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창과 방패가 이미 내가 다루기 힘들 정도로 큰 짐이 되어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구약에서 다윗이 골리앗의 대결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블레셋의 골리앗은 요즘으로 하면 3미터가 넘는 거인이었고, 그는 갑옷, 투구, 다리에 차는 각반, 창으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비해 다윗은 평소대로 목동의 지팡이를 들고 시냇가에서 돌 다섯 개를 골라서 바랑에 넣고는 물매를 손에 들고는 가볍게 해서 골리앗 앞으로 나갑니다. 사실, 다윗도 놋투구와 갑옷을 입고 사울의 칼을 차고 나가려고 했지만, 그는 그렇게 무장해서는 몇 걸음도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말하지요. “이런 무장에는 제가 익숙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무장한 채로는 걸어갈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이라는 전쟁터(세상이 전쟁터라면 말입니다)에 나가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잘 말해주는 좋은 은유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가볍고 자유로워야 합니다.
사실, 사랑하는 능력(용량)은 무엇을 많이 가져서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자유로우냐에 달려 있습니다. 즉 사랑하는 능력은 자유로울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집착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기희생도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씀하지요. “내가 모든 소유를 나누어 줄지라도, 내가 내 몸을 불사르기 위해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고전13:3) 그러니까 스캇 펙이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라는 말은 “자유로워지려는 의지”라고 말해도 무방합니다. 사랑은 자유라는 정원에서 피어나는 꽃입니다.
헨리 나우웬이 7개월간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들어가 머물면서 쓴 일기가 있습니다. <제네시의 일기>라는 책이지요. 거기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평소에 자신이 사랑을 받는다고 할 때, 자신 안에 사랑을 받을 만한 어떤 것이 있어서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는 거라고 생각을 했답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친절하고 다정하게 굴 때, 자신이 행복을 느끼는 것은 그들이 자신에게 매력을 느끼고 또 자신을 특별한 형태로 좋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수도원에 들어와서 보니 자신에게 친절하게 잘 대하는 수도자가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한테도 똑같이 친절히 잘 대하는 것을 보고는 당혹스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 수도자가 나에게는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어떤 특별한 것 때문에 나를 사랑한다고 믿기가 이제 힘들어 졌고,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매력이 있는 것도, 덜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는 처음에 고통까지 느꼈다고 합니다.(참 정직한 자기직면이지요)
그래서 처음에는 이런 식으로 생각을 했답니다.
“좋아, 그가 나에게 친절하듯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대한다면 그 우정은 결코 진실된 것일 수 없어. 그 수도자는 그저 겉치레요 수도자로서 습관적인 억지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일꺼야. 겉으로 나타난 그의 친절은 단지 수도자의 겉치레요 단지 그의 습관이지, 그가 진정 나에게 그다지 마음을 쓰고 있지 않는거야.”
그런데 나우웬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자신의 사랑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좁고 불완전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구체적인 상황들 안에서 어떤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실제로 사랑을 어떻게 생각해왔는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내 사랑관은 배타적이고(“당신이 남들을 나보다 덜 사랑할 때에만이 비로소 당신은 나를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다”), 소유지향적이며(“당신이 진실로 나를 사랑한다면 내게 특별히 신경쓰기 바란다”), 상대를 조종하려고 드는(“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나에게 특별한 일들을 해 줄 것이다”) 그런 것이다. 이런 사랑관은 그로 하여금 쉽사리 허영에 빠져들게 하고(“너는 틀림없이 내 안에서 아주 특별한 무엇을 발견하고 있을 것이다”), 질투에 빠져들게 하고(“너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갑자기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그토록 관심을 보이는 거지?”), 분노에 빠져들게(“네가 나를 실망시키고 배척했으니 어디 두고 보자”)하여 사랑을 왜곡시켰다는 깨닫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랑이란 진정 “오래 참고 친절하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사욕을 품지 않는다. 사랑은 성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는다”는 바울의 말씀을 기억해 냅니다.
사랑이 얼마나 자유로운 꽃밭에서만 피어나는 꽃인지 바울은 잘 알았던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을 배우려면, 진정 자유로워져야 되는구나, 가벼워져야 되는구나, 집착과 애착을 내려놓고, 좀 초연해져야 하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정화이며 영적 훈련이고 마음 훈련입니다. 영성훈련, 마음공부를 한다고 하면서 자기중심, 자기애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이것이 더 강화된다면, 그런 사람은 자기의 훈련을 잘 돌아봐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계명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계명은 하나님 사랑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신명기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들으십시오<쉐마 이스라엘>,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오, 주님은 오직 한 분 뿐이십니다. 당신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서 이 계명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언제든지 가르치고, 손에 매여 표로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고, 집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서 붙이라고 명합니다.
여러분, 제가 늘 말씀드리듯이, 하나님은 이 세상의 어떤 것과 비교해서 세상 최고의 대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이라는 것이, 하나님을 세상의 어떤 것보다 더 사랑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세상의 모든 것은 비교 대상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대상이 아니라 바탕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숨겨진 사랑의 바탕”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 자체가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진정 사랑하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있는 그 속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사랑은 그 사람이 얼마나 힘이 센지,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지, 얼마나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지, 심지어 그 사람의 종교가 무엇인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신명기에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라는 말은 주님이 유일한 대상이라는 말이 아니라, 모든 것의 바탕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나의 바탕을 알아차리는 것이고, 나의 바탕을 알아차리는 것은 참 나(사랑)를 아는 것이라고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말을 합니다. 이렇게 보면, 사랑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입니다. 내가 본디 사랑임을, 내가 사랑 자체요, 사랑 덩어리임을!
여러분, 로고테라피의 창시자였던 빅터 프랭클 이야기 많이 들으셨지요. 그가 나치의 수용소에 잡혀가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부모와 형제, 막 결혼한 아내, 그리고 외투 안쪽에 꿰매어 보관하고 있던 심리학 원고조차 다 잃어버리고),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 자신에게 삶의 의미가 있는가를 결정해야 하는 문제 앞에 서게 되었다고 하지요. 그는 한 시간 내에 그 답을 찾았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기고 배당받은 옷, 이전에 어떤 수감자가 입고 있던 옷에서 발견한 기도문, 바로 <쉐마 이스라엘>에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읽었을 때였습니다. 그는 그 말씀을 정통적인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이것은, 고통이나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삶을 긍정하라는 명령으로 들렸다고 했습니다. 그 기도문은 단순히 종이 위에 쓰여진 문구가 아니라 강제수용소라는 혹독한 실험실에서 자신의 삶을 검증하라는 일종의 “상징적 소명”이었다고 그는 말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발견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를 우리는 한참 더 알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괜찮은 교인”이 되는 것 이상이라는 것도 깨달아야 하겠지요. 그런데, 진정 자기의 삶을 깊은 의미에서 긍정하지 않고서는(다시 말해, 우리가 사랑 자체임을 긍정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것을 진정 알게 될 때, 우리는 이웃사랑을 당연히 하게 될 것입니다. 집착과 조종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이웃사랑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별개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동전의 양면임을 알게 됩니다.
사랑을 위한 가장 좋은 훈련은 기도입니다. 침묵기도입니다. 제대로 하는 침묵기도는 우리에게 “숨겨진 사랑의 바탕”을 알게 할 것이고,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를 알려 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으로 이 땅에 온 것을 알려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