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본과 자본주의와 자본가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혼동하고 무분별하여 동일시한 결과; 자연 생명 생물 단풍 관광 놀이 감상 죽음 현상 손가락부림
☞ 생물 인간 자연 야생 사회 욕망 적자생존 약육강식 생존방식을 착각 혼동하는 사고습성의 흉과
☞ 생물론 연애론 암수관계 꽃 벌나비 바람에 얽힌 생각 습관 습성 사고방식 고정관념 재고
☞ 이즘(ism; 주의; 主義)들의 권력투쟁; 사디즘과 마조히즘; 자연성과 인간성; 반자연성(反自然性); 자본 사랑 정치; 사도마조히즘
☞ 자연 죽음 삶 투쟁; 자연론; 대안만 급구하는 졸속한 대안론을 경계하는 급진적 문제의식
☞ 상식계(常識界)와 탈상식계(脫常識界)를 겨눈 기하학적 시언 시념: 점, 사막, 선, 면, 입체 과학 철학 애인 가족사회 국가 야훼, 신, 모나드 원자 화폐 자본 투쟁 기업 로마 진리 노예 헤겔 마르크스
☞ 사회적 불행을 개인적 불행으로 착각시키는 만고의 불행론을 겨눈 의혹; 인간자본론
☞ 자연 범죄 사회 대세 본성 욕망 권력 자본
☞ 두 가지, 아니, 세 가지 자연,
☞ 세이렌, 사이렌 유혹 바다 신화 오뒤세우스 폭풍요정 침묵 파도
윗그림 네 편 중에 맨윗것은 러시아 출판인 표트르 페트로비치 소이킨(Pyotr Petrovich Soikin, 1862~1938)이 발행한 과학문예잡지 《자연과 인민(Nature and People)》(1915년 5월 28일자 통권 제30호, p. 467)에 수록된 러시아 신원미상화가의 〈살라미스해전을 개시하기 전에 승전을 기원하며 페르시아 처녀 세 명을 희생시키는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 sacrifices three Persian girls before the Battle of Salamis)〉이다.
살라미스해전(Salamis海戰)은 서기전480년에 고대 그리스 장군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 Themistokles; 서기전524~459)가 그리스 도시국가연맹군을 지휘하여 그리스 본토와 살라미스섬(Salamis island) 사이의 해협에서 페르시아 황제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I, 서기전518~465)의 군대를 격퇴한 전투이다.
가운뎃것은 브리튼 화가 제임스 폴라드(James Pollard, 1792~1867)의 그림을 밑그림으로 삼은 브리튼 판화가 리처드 길슨 리브(Richard Gilson Reeve, 1803~1889)의 1827년작 채색동판화 〈잉글랜드 동부의 서퍽주(Suffolk州) 뉴마킷 히스에 내리치는 뇌우(雷雨) 속을 달리는 우편마차(The Mail Coach in a Thunder Storm on Newmarket Heath)〉이다.
밑왼것은 미국 모험가·화가·작가 조지 캐틀린(George Catlin, 1796~1872)의 1834년작 〈와쉬-임-페-쉐, 광인(狂人), 특출한 전사(Wash-im-pe-shee, Madman, a Distinguished Warrior)〉이고, 밑오른것은 스위스 화가 프랑수아 바로(Francois Barraud, 1899~1934)의 1930년작 〈자화상(Autoportrait)〉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자연의 개념은 “사람의 힘을 받지 아니하는 세상에 스스로 있거나 우주에서 저절로 이뤄지는 모든 것곳과 그것들의 모든 상태,” “저절로 생겨난 산, 강, 바다, 공기, 동식물 따위와 그것들의 물질환경,” “사람과 사물의 본성이나 본질,” “의식(意識)되거나 경험되는 모든 현상”이라고 후다닥 정의된다.
하여간 이런 자연은 여태껏 적어도 ‘거의 모든’ 이족보행포유개체(☞ 참조)에게 아예 무지무식(無知無識)되지는 않았을망정 여전히 미지(未知)되고 미식(未識)된다.
그래서 그랬는지 자연은 여태껏 모든 이족보행포유개체를 낳아죽이며 그들에게 병주거나 약주면서도 워낙 미지되고 미식되어서 자본주의시대에는 마침내 “보호받아야 한다”고 미신(迷信)될 만치 가련한 것이나 말랑물렁한 곳이라고 오인되는 듯이 보인다.
심지어 감히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고 미신하거나 “자연을 보호할 수 있다”고 자신하여 “자연보호론”이나 “환경보호론”마저 들먹이는 자본주의식 만용까지 부려버릇하는 이족보행포유개체도 드물잖다.
어쩌면 그런 개체는 칼(카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와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의 1848년판 공저 《공산당(공산주의) 선언(The Communist Manifesto)》 제1장에 지적된 “모든 단단한 것을 용흡(鎔吸)하는(녹여서 빨아들이는) 공기(空氣)” 같은 것으로 변이한 자본주의(資本主義; capitalism)를 자연과 혼동하여 동일시하면서도 아예 자각하지 못하거나 않고파 안달해버릇하는 무분별한 자연개체(自然個體)일 확률이 상당히 높을 것이다.
그런 자연개체가 “자연날조꾼(nature-faker: 아랫그림 참조)”의 농간에 속아서 우롱당할 확률도 만만찮게 높을 것이다.
자연 속에서는 한갓 티끌보다 더 미미(微微)할망정 적어도 이따위 무분별한 혼동을 티끌만치라도 모면하고픈 죡변처럼 얄궂고 불온불순한 개체는, 설마 그런 개체가 더 있기는 있다면, 적어도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와 마르키 드 사드(Marquis de Sade, 1740~1814) 사이에서, 그러니까 ‘《인간불평등기원론(Discours sur l'origine et les fondements de l'inégalité parmi les hommes)》(1755)이나 《에밀, 혹은 교육론(Émile, ou De l’éducation)》(1762)’과 ‘《소돔 120일(Les 120 Journées de Sodome ou l'école du libertinage)》(1785)이나 《쥘리에트(L'Histoire de Juliette ou les Prospérités du vice)》(1797)’ 사이에서, 자연을 초미세먼지 한 낱만치라도 더 깊숙히 천착(穿鑿)하고 더 정밀하게 현미(顯微)하며 더 심원하게 망원(望遠)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모든 딱딱한 것을 녹여서 빨아먹어버리는 공기” 같은 자연으로 ‘거의’ 완변(完變)하여 ‘거의’ 자연화(自然化; naturalization)되어버린 자본주의가, 그러니까 “모든 견고한 것을 용흡해버리는 공기” 같은 자본주의로 ‘거의’ 완변해서 ‘거의’ 자본주의화(資本主義化; capitalistization)되어버린 자연이, 그런 개체의 초미세먼지보다 더 미미하고 불온불순한 천착, 현미, 망원조차 히스테릭하게 묵살해버리든지 막무가내로 겁박하거나 훼방할 확률은 결코 0으로 수렴되지는 않으리라.
그리고 이런 용흡성 공기 같은 자연과 자본주의는 여전히 미지되고 미식미식되는 만큼이나 날조되고 오인되어 미신되든지, 아니면, 여전히 날조되고 오인되어 미신되는 만큼이나 미지되고 미식미식되기 십상일러라.
(2023.03.24.19:51.)
아랫그림은 1933년에 퓰리처 만평상(Pulitzer Peize for Editorial Cartooning)을 받은 미국 만평가·삽화가 해럴드 모턴 탈버트(Harold Morton Talburt, 1895~1966)의 1920년작 〈자연날조꾼(The Nature-Faker)〉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