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년보다 춥다는 겨울이 끝자락을 보일만한데…. 입춘을 이레 앞둔 수요일 아침도 영하권 날씨는 풀리지 않았다. 나는 집 앞에서 220번 버스 타고 창원중앙역으로 갔다. 그곳에서 무궁화호열차를 타고 어디 한 곳 다녀올 요량이었다. 내가 가려는 목적지는 대구나 서울도 아니고 목포나 부산도 아니었다. 삼랑진에서 부전역을 거쳐 해운대를 지난 어느 바닷가 근처 내릴 작정이다.
나는 올겨울 산에도 오르고 들길을 걸었다. 강둑이나 바닷가도 부지런히 거닐었다. 다구에서 명주를 지나 욱곡까지 걸었다. 가덕도 연대봉에 올라 쪽빛 남녘바다를 내려 보았다. 낙동강이 바다와 만난 다대포와 몰운대에도 서 보았다. 엊그제는 진해 속천갯가를 걸었다. 그러면서 넘실대는 파도에 가없는 수평선인 강릉바다를 떠올렸다. 꿩 대신 닭이라고 가까운 바다를 찾아 나섰다.
순천에서 포항 가는 무궁화호열차는 해운대부터 차창 밖으로 바다가 드러났다. 나는 남녘의 양곡 창고가 있었다는 곳에서 내렸다. 남창(南倉)은 산업화가 되면서 농경시대 명성은 빛이 바래져도 의미 있는 새로운 명소가 생겨났다. 한국전쟁 무렵 경북 영덕에서 피난 내려온 한 옹기장이가 터 잡은 외고산마을이 가까이 있었다. 모처럼 나선 바깥나들이인데 그곳을 놓칠 일 없었다.
남창역에서 옹기마을까지는 오 리 정도였다. 울산광역시는 지난해 가을 외고산마을에서 옹기문화축제를 열어 많은 사람들을 모은 바 있다. 마을안내센터에 먼저 들렀더니 마침 자리를 지키던 문화해설사로부터 친절한 안내를 받았다. 옹기문화와 오지그릇 질그릇을 만드는 과정에 대해 까다로운 문답을 주고받았다. 여러 곳 있는 덕실마을과 옹기가마에 대한 연관성은 더 캐지 못했다.
마을 한 가운데 여러 번 실패 끝에 완성했다는 세상에서 제일 큰 옹기가 있었다. 예로부터 옹기는 우리네 살림에서 친근한 생활용품이었다. 우리나라 장류문화에서 옹기는 뺄 수 없는 그릇이다. 과학의 힘을 빌린 김치냉장고라할지라도 옹기의 자연 숙성과 보존력을 따라갈 수 없다. 전문 사진작가 카메라도 의식 않고 물레를 돌려가며 질그릇을 빗는 일성토기 장인은 거룩해 보였다.
나는 외고산마을을 뒤로 하고 울산광역시에서 변방으로 나가는 715번 버스를 타고 갯가로 갔다. 아까 내렸던 남창역을 지나 발품을 팔아 진하해수욕장이 내려다보이는 서생포왜성 정상까지 올라갔다. 왜성은 우리의 읍성과 산성과는 다른 축성술임은 나는 익히 알고 있었다. 진해 안골포왜성이나 웅천왜성에 들렀을 때 내 마음과 마찬가지였다. 사백여 년 전 상처가 남은 흔적이었다.
아침나절 내가 창원중앙역에서 그냥 불쑥 나선 걸음이었다. 어느 새 정오를 넘어 내 몸을 따라오던 그림자는 길어져 가고 있었다. 해송이 에워싼 겨울해수욕장 들머리에서 나는 요기를 해결하고 간절곶을 향해 나아갔다. 눈앞에 망망대해가 펼쳐졌다. 멀리 온산과 장생포 앞 바다는 화물선과 유조선이 떠 있었다. 간절곶에만 와도 울진이나 강릉 앞바다 못지않은 넓디넓은 바다였다.
바다가 육지 속으로 파고든 지형을 만(灣)이라고 한다. 바다 쪽으로 부리 모양 뾰족하게 내민 곳은 곶(串)이라 한다. 만으로는 진해만이나 원산만이 있고 곶으로는 장기곶이나 장산곶이 있다. 내가 찾은 곳은 유라시아대륙에서 해가 가장 일찍 뜬다는 간절곶(艮絶串)이다. 지명유래로 바다에 나간 어부가 이곳을 바라보면 대나무 장대의 경상도말인 간짓대처럼 보였다는 얘기가 전해왔다.
바다 쪽으로 난 길 따라 걸었다. 자갈돌은 쉼 없이 다가와 부서졌던 파도에 몽돌이 되었다. 갯바위에도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지는 파도였다. 해돋이가 아닐지라도 관광객들이 더러 보였다. 이들은 삼삼오오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남겼다. 소망우체국 안에도 들어가 보고 등대박물관에도 올라가 보았다. 나는 지는 해 따라 해변을 계속 걸어 나사리까지 갔다. 그곳에서 월내역을 찾았다. 11.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