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ncisco Tarrega Eixea(1852~1909)
Recuerdos de la Alhambra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Sarah Brightman
추억을 회상한다는 것은 아직 그리움이 남은 까닭이다.
음악의 선율 속에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면
그 음악과 깊은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추억 하나쯤 있다면 나그네가 된 인생길에 동행이 되고
더러는 활력이 되기도 하리라.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듣노라면 생각나는 친구가 있다.
시월 어느 날, 먼길을 달려 빨간 단풍잎처럼 팔랑팔랑 다가왔던 친구다.
그때 나는 창문 밖을 내다보며 친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창문 밖으로 단풍잎이 하나둘 바람에 흩날리고
하늘은 온통 코발트 빛으로 부서지고 있는데 손때 묻은 CD 플레어에선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가을 속으로 흐르고 있었다.
먼길을 달려온 친구는 단풍잎만큼이나 붉은 석양빛으로 노을져 있었다.
나는 이 친구를 만나면서 학창시절에 꿈꾸었던 예술적 감성들이
이른 봄에 부활하는 나뭇잎처럼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문학과, 음악을 밤새도록 얘기해도 대화가 끊이지 않을 친구,
문화유적을 탐방하고 그 유적에 대해 토론하기를 좋아하는
역사에도 혜안이 깊은 그런 친구였다.
그 친구는 크리스털 컵에 담긴 육각수처럼 순백의 결정체가 있었다.
물푸레나무가 앉았다 간 푸른 물처럼 싱그러운 친구였다.
나는 그 친구의 절제된 예의와 경박하지 않은 언어의 품격을 좋아했다.
꾸미지 않는 웃음, 거짓 없는 목소리,
의리를 목숨처럼 여기는 선비정신이 있어서 좋아했다.
때로는 위트로 대화를 반전시킬 줄 아는 여유가 있어서 좋아했다.
그 친구는 세월이 흐를수록 맛과 향을 더해가는 진한 포도주처럼
감미롭고 품위 있는 친구였다.
사람들은 말하곤 한다. 이성친구가 가능하냐고.
그 물음엔 부정적인 대답이 더 지배적이다.
이성 친구는 왜 가능하지 않은 것일까. 하지만, 내게는 가능했다.
그러나 나는 그 친구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 친구는 모를 것이다.
마음을 주는 사람보다 그 마음을 받아줄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더 힘든 것인지를…. 좋다고 다 곁에 둘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나는 그를 떠나보냈지만 마음으론 보내지 못했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흐를 때면
그 친구가 생각나 만나보고 싶다가도 마음을 접는다.
홀로 들어온 찻집에서 음악 하나 주문해서 커피와 함께 추억도 마셔버린다.
알함브라 궁전은 '붉은 성'이란 뜻으로
스페인의 남부 안달루시아 주 ‘그라나다’에 있는 궁전이다.
그곳은 1년 내내 흰 눈이 머무는
3,470미터의 시에라네바다 산맥이 있는 곳으로
영화 '닥터 지바고'를 촬영했던 곳이기도 하다.
시에라 네바다의 산맥에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
‘그라나다’의 깎아지른 벼랑 너머 작은 언덕엔 붉은 지붕에
하얀색 집들이 줄지어 서 있는 아름다운 곳으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알함브라 궁전은 에스파냐(스페인)의 대표적인 유적지이지만,
원래 건물을 세운 민족은 이슬람인이다.
이슬람의 중세문명은 732년부터 1492년까지
약 8세기 동안 스페인 영토를 포함한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했다.
르네상스 이전까지 서구문명은 후진문명에 속해있었지만
이슬람 문화는 세계 최고의 수준이었다.
그 가운데 알함브라 궁전은 이슬람 건축의 최고 걸작이며
이슬람 문화의 최고 결정체라 할 수 있다.
당시 이슬람 왕이었던 모하메드 13세는 이 왕궁을 완공하고
10년 뒤 기독교도에 의해 쫓겨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넘으면서,
“스페인을 잃은 것은 아깝지 않지만
알함브라를 다시 볼 수 없는 것이 원통하다.”며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스페인의 전설적인 기타리스트인 ‘프란시스코 타레가’가 작곡한 곡이다.
타레가는 근대 기타연주법의 틀을 완성한 전설적인 기타리스트로서
제자인 콘차 부인을 사랑했다.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였지만
정숙한 콘차부인은 그 고백을 받아주지 않았다.
이에 상심한 타레가는 스페인 곳곳을 여행하다가 알함브라 궁전에 머물게 되었다.
타레가는 실연의 아픔을 안고
알함브라 궁전에서 창밖으로 달을 보며 불면의 밤을 보냈다.
밤새 불면 속에 콘차 부인을 생각하며 작곡한 것이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다.
어쩌면 이들은 소문대로 이 아름다운 궁전에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룻밤 서로를 탐닉하였는지도 모른다.
낙심한 타레가가 여행에서 돌아와 다시 그녀 앞에서
“ Recuerdos de la Alhambra “ 를 연주하게 되었는데
이때는 콘차 부인도 마음의 문을 조금 열었다고 한다.
하지만, 드러내놓고 사랑할 수 없었던 이루지 못한 사랑의 상처에
전곡을 흐느끼듯 흐르는 트레몰로는
타레가의 마음을 담은 듯 깊은 애수를 띠고 있다.
이 곡은 원래 ‘알함브라 풍으로’라고 이름 짓고 ‘기도’라는 부제를 덧붙였는데
출판사에서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라고 고쳤다고 한다.
에스파냐(스페인)는 전통적으로
기타 음악을 기본으로 하는 기타음악에 강세를 보이는 나라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에스파냐에서 클래식 기타의 표본이라 불릴 만큼
최고의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타레가는 사망하기 3년 전에 오른팔이 마비되어
더 이상 기타를 연주할 수 없게 되자 이를 비관하며 슬픈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클래식 기타를 하는 사람이라면
타레가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 흐르는 트레몰로에 매료되지 않고는
배겨낼 수 없을 것이다.
나 또한 이 음악에 푹 빠져
기타음악학원에 등록하여 클래식 기타를 배웠던 적이 있었다.
은구슬을 뿌리 듯 낮은 저음으로 관통하는 트레몰로의 테크닉은 너무도 매혹적이다.
트레몰로(tremolo)란 떨린다는 뜻에서 나온 말로
연주에서 음이나 화음을 빠르게 규칙적으로 되풀이하여 떨리듯이 흐르게 하는 주법이다.
현악기에서는 활을 빠른 동작으로 상하 움직여 음을 되풀이하여 극적 효과를 준다.
17세기 초부터 사용된 이 주법은 악기뿐만 아니라
성악에서도 적용되어 극도의 비브라토를 형성한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트레몰로 주법이 가장 완성된 극치를 보여주는 기타의 진수라 할 수 있다.
이 주법으로 클래식 기타가 다른 악기와 다름없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설명하고 있다.
황혼이 다가오는 저녁이나 빗물이 나뭇잎을 쓸어내릴 때,
이 음악을 듣고 있으면 아름다운 선율에 몰입되어 한없이 빨려들곤 한다.
'타레가'가 창밖으로 내다본, 고궁 아래 연못이나 분수로 꾸며진 정원에
달빛이 쏟아진 알함브라 궁전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또 타레가의 애정을 거부한 콘차 부인은 어떤 도도함이 흐르는 여인이었을까.
나는 이들의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인해 이토록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하게 된 동기와
그런 배경을 허락한 알함브라 궁전의 모습이 너무도 궁금해서
반드시 알함브라 궁전을 여행해 보고 싶다.
시나 음악엔 그 동기나 배경이 있다.
작품이 지니고 있는 사연을 알고 감상하면 훨씬 더 감동적이다.
실연의 아픔을 떨쳐버리려고 여행하던 중 알함브라 궁전에 머물면서
짧은 시간이나마 행복했던 여인과의 사랑에 대한 추억을 회상으로 그려내고 있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그런 배경 때문인지 더욱 애틋하다.
'타레가'가 콘차 부인으로부터 사랑을 거절당하고 방랑하다가
아름다운 알함브라 궁전에 머물면서 작곡한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나는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그 친구를 보내야만 했던 아쉬운 마음으로 듣곤 한다.
지금 그 친구는 없지만 이 음악의 중심엔 항상 그 친구가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난 추억은 아름다웠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속에 흐르는 트레몰로의 흐느낌처럼 격정을 주며…….
2007년 7월 22일
영암에서 호동대장 이행도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