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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백제, 신라의 3국시대
청동기 문화가 끝나고 철기문화가 시작되면서 한반도에 3국, 즉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세워졌다. 고구려 시조인 주몽은 알에서 태어났고,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나 가야를 세운 김수로왕도 알에서 태어났다. 백제를 세운 온조는 주몽의 아들이라고 전해진다.
삼국시대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 나라가 정립(鼎立)하였던 한국사의 한 시기를 의미한다. 남북국시대, 후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처럼 한국사 속의 주요 국가를 중심으로 한 시대 구분 용어의 하나로 사용되고 있다.
현전 역사서 중에서 삼국을 하나의 시대로 구분한 것은 고려 전기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의 『삼국사기(三國史記)』(1145)가 가장 이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통해 고려보다 앞선 왕조를 삼국으로 제시하고, 그의 역사를 기전체(紀傳體)의 형식으로 정리하였다.
신라와 고구려 그리고 백제의 왕조사를 각기의 본기(本紀)로 구성하였고, 그의 문물과 인물을 각각 지(志)와 열전(列傳)으로 서술하였다. 『삼국사기』는 고려 이전의 왕조를 삼국으로 파악하였다. 이와 같은 이해는 이른바 『구삼국사(舊三國史)』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삼국사기』 편찬 이전부터 마련되어 있었고, 이는 신라의 삼한일통(三韓一統), 즉 삼국통일 의식에서 시작되었다고 보이는데, 후대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고려 후기의 일연(一然, 1206~1289)은 『삼국유사(三國遺事)』를 편찬하면서 고조선(왕검조선), 위만조선, 북부여, 동부여, 가야 등 삼국 이외 여러 나라의 역사를 포함하였고, 왕력편(王曆篇)에서 삼국뿐만 아니라 가락국(駕洛國)주1, 즉 가야의 왕계(王系)까지 수록하였다. 다만, 기이편(紀異篇)에서 드러나듯 신라의 제왕(諸王)을 중심으로 하였고, 삼한(三韓)과 삼국을 중심으로 한 왕조의 계보와 그 역사를 중시하였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 등이 편찬한 『동국통감(東國通鑑)』(1484)을 비롯해서 조선 시기에 편찬된 여러 역사서 역시 그러하였다. 정통을 설정하는 데서 차이를 보이기도 하였지만, 대체로 고조선과 삼한에서 삼국으로 이어지는 왕조의 계보를 중시하였고, 삼국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였다.
이는 개화기 역사 교과서 이후 근대 역사학의 형식과 방법으로 편찬된 20세기 전반의 여러 역사서에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하였기에 비록 직접적으로 삼국시대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어도, 삼국의 건국에서 신라의 통일까지가 하나의 시기로서 구분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삼국시대가 시대 구분의 용어로서 엄밀히 정의된 것은 아니었다.
본격적인 시대 구분 논의는 일제 시기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 수용되면서부터 전개되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영향을 받아 한국사의 보편적인 발전 과정이 탐구되었고, 이를 염두에 두고 한국사 속에서 고대 · 중세 · 근대 등의 시대를 구분해 보려고 한 것이다. 백남운(白南雲, 1894~1979)의 『조선사회경제사(朝鮮社會經濟史)』(1933)가 대표적이다. 백남운은 고대 노예제 국가로서 고구려 · 백제 · 신라의 삼국을 제시하였고, 통일신라에서 중세 봉건제 국가가 형성되었다고 하였다. 삼국시대를 고대사의 시대 구분 속에 위치시킨 것이다.
백남운의 시대 구분과 삼국시대사 이해는 여러 학자로부터 비판받기도 하였지만, 이후의 논의에 중요한 토대를 제공하였다. 고대 · 중세 · 근대 등의 시대 구분이 한국사 연구의 중요한 과제로 부각된 것이다. 여기서 고대는 사회 발전에 따라 성립된 시대의 하나로, 원시 사회의 해체와 이를 바탕으로 형성된 국가를 핵심적인 지표로 하였다. 8 · 15광복 이후 한국과 북한의 한국사 연구 역시 이와 같은 이해의 연장선상에서 고대 국가의 형성을 해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때 국가는 학자마다 다양하게 정의되었지만, 적어도 일정한 범위 내에서 권력이 지속적으로 행사될 수 있어야 한다는 데 큰 이견이 없다. 이에 일찍부터 주목한 것이 세습 왕권과 관료 제도였다. 현재 한국의 역사학계에서 삼국이 고대 국가를 형성한 시점에 대해서는 대략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대체로 1세기 고구려의 태조대왕(太祖大王), 3세기 백제의 고이왕(古爾王), 4세기 신라의 나물마립간(奈勿麻立干) 재위기를 전후해서 삼국이 고대 국가를 형성하였다고 본다. 이러한 고대 국가는 중앙집권적 영역 국가의 체제를 갖추면서 완비되었다고 이해하는데, 4세기 고구려의 소수림왕(小獸林王), 4세기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 6세기 신라의 법흥왕(法興王) 재위기가 바로 그러한 시점으로, 율령(律令)의 반포가 고대 국가의 완비를 의미한다는 관점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한국 고대사 속의 여러 나라 중에서 고대 국가의 체제를 완비하는 데까지 나아간 것은 삼국이었다. 따라서 4~6세기 삼국의 중앙집권적 영역 국가 체제 완비는 한국 고대사의 발전 과정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해에 따르면 고대 국가를 완비하기 이전의 역사는 그 이후의 역사와 구분된다. 따라서 삼국시대란 하나의 시대 구분 속에 포함시켜 보기가 어렵다.
고고학 분야의 경우 서기전 1세기에서 서기 3세기까지를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라고 한다. 초기 철기시대에 해당하는데, 철기가 보급되어 널리 사용된 4세기 이후의 삼국시대와 구분해서 별도의 시대를 설정한 것이다. 서기전 1세기~서기 3세기의 고구려와 부여, 옥저와 동예, 그리고 삼한의 여러 나라가 원삼국시대에 해당한다.
고고학 연구만 아니라 문헌 사료를 통해 보아도 서기전 1세기~서기 3세기는 삼국시대라고 말하기에 어려운 점이 있다. 비록 『삼국사기』에서는 삼국의 시조(始祖)가 왕조를 개창하며 곧 급격히 영역을 확장하였고 국가의 제반 제도를 갖추어간 것처럼 서술하고 있지만, 이는 후대의 윤색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후한서(後漢書)주2』와 『삼국지』를 비롯해 동시기 중국 측의 역사서를 보면 3세기까지 삼국은 주변의 여러 나라를 압도하지 못하였다. 백제와 신라의 경우 아직 삼한의 여러 작은 나라 중 하나에 불과하였다. 3세기까지 삼국이 정립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이처럼 고고학과 역사학 방면의 연구를 종합해 보면 삼국은 4세기 이후 정립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현재 삼국시대라고 하면 대체로 4세기 이후부터 신라의 삼국통일까지를 의미한다. 그러나 다수와 다른 이해와 설명 역시 상당하였다.
일부 학자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그대로 믿어 삼국의 국초부터 고대 국가를 형성하였다고 보는데, 이 경우 삼국시대의 범위는 국초를 포괄한다. 또한, 일부 학자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비판적으로 보지만, 삼국의 고대 국가 형성에 주목하고 삼국시대를 전기와 후기 등으로 구분함으로써 보다 이른 시기부터 삼국시대의 범위 속에서 설명하기도 한다.
이상과 같이 현재 삼국시대란 용어는 한국 고대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서로 달리 사용되고 있다. 삼국이 고대 국가의 체제를 완비해 간 4세기 이후부터 신라의 삼국통일까지를 의미하는 것이 다수이지만, 삼국의 국가 형성부터 삼국시대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한편 가야의 역사에 주목해 삼국시대가 아닌 사국시대(四國時代)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적어도 4~6세기 가야는 삼국에 못지않은 고대의 주요 국가 중 하나였으므로, 그를 포함해 사국시대란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대의 중국 정사에서 삼국이 중시되었고, 특히 『구당서(舊唐書)주3』를 비롯한 이후 중국 측의 역사서에서 삼국이 하나의 지역적 · 역사적 단위로 묶여졌으며, 전통시대 역사 인식에서 삼국이 강조되었다는 점에서 여전히 삼국시대란 용어가 더 널리 사용되고 있다.
삼국 간의 항쟁은 고구려와 백제의 대립에서 시작하였다. 4세기 후반 백제는 예성강 너머 지금의 황해도 남부까지 세력을 확대하였다. 이로써 고구려와 백제는 황해도 일대를 두고 경쟁하였다. 근초고왕은 371년 평양성 공격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그러나 고국원왕의 전사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평양성을 잃지 않았고, 양국의 충돌은 더욱 격화되었다.
4세기 후반 이후부터 고구려와 백제의 대립에서는 고구려의 군사적 우위가 확고한 모습이었다. 396년 고구려는 백제의 58성(城) 700촌(村)을 획득하였고, 한성(漢城)을 포위하였다. 백제 조정은 굴복하고 양국은 화친을 맺었다. 그러나 곧이어 백제는 왜와 연계하여 고구려에 대항하였고, 신라를 압박하였다.
400년 고구려의 5만 명이 신라에 파병되어 왜와 가야군을 격파하고 낙동강 유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백제는 한강 이북 지역에 대규모 공세를 감행했지만 고구려에 의해 격파되었다. 4세기 전반을 거치는 동안 백제는 고구려의 군사적 우위를 넘어서지 못하였다. 백제는 한강 하류의 북쪽 지역과 북한강 · 남한강 상류 지역을 상실하였다. 427년 고구려의 평양 천도 이후 고구려의 압박은 더욱 강화되었고, 백제의 위기의식은 고조되었다.
백제의 개로왕(蓋鹵王, 재위: 455~475)은 서방의 북위(北魏) 및 북방의 물길(勿吉)과 연합해서 고구려를 견제하고자 하였고, 고구려를 상대로 북진을 도모하였다. 고구려의 동맹국이었던 신라도 긴장하였다. 이제 고구려와 신라의 동맹이 동요하였고, 신라는 백제와 화친하고자 하였다. 이른바 나제동맹이 체결된 것이다.
비록 나제동맹의 체결 시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평양 천도 이후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가 소원해졌고, 백제와 신라의 관계가 우호적으로 변모하였다는 데에는 대부분이 동의하고 있다. 454년부터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어 6세기 중반까지 고구려와 나제동맹의 군사적 대립이 지속되었다.
비록 나제동맹이 고구려의 남진에 맞섰다고 하지만, 5세기 전성기를 맞은 고구려를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5~6세기 중반 동아시아에서는 절대적인 강국이 없었다. 북위를 비롯한 북조(北朝)의 여러 나라가 가장 강성하였지만, 남조(南朝)의 여러 나라[송(宋) · 제(齊) · 양(梁) · 진(陳)]를 압도하지는 못하였다.
4세기 후반~6세기 중반 북방 유목지대의 유연(柔然)과 4~7세기 전반 서방 유목지대의 토욕혼[吐谷渾]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강국이었다. 다수의 강국이 병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아시아의 주요 강국은 다원적인 국제질서를 형성하였고, 이 속에서 역관계(力關係)의 균형을 추구하였다. 고구려는 이와 같은 동아시아의 다원적 국제질서 속에서 여러 강국 가운데 하나로 인정받고 있었고, 동북아시아 지역 내에서 패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5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이와 같았으므로, 고구려는 더욱 적극적으로 남진을 추진할 수 있었다. 475년(장수왕 63) 9월 장수왕은 직접 3만 명의 군대를 지휘해서 백제를 공격하였고, 백제의 도성 한성을 함락하였다. 백제의 개로왕을 사로잡아 아차산 아래에서 처형하였다.
고구려가 백제의 한성을 함락함에 따라 본격적인 한강 유역 경영이 시작되었다. 고구려의 한강 유역 경영은 6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적어도 장수왕의 뒤를 이어 그의 손자 문자명왕(文咨明王, 491~519)이 재위하였을 때까지 고구려의 전성기는 지속되었다. 그런데 문자명왕의 사후 그의 두 아들 안장왕(安臧王, 재위: 519~531)과 안원왕(安原王, 재위: 531~545)이 재위하며 정치적인 안정이 동요하였다.
이와 같은 모습은 『일본서기(日本書紀)』를 통해 살필 수 있는데, 『일본서기』에서는 531년 3월에 “고구려에서 그 왕 안(安)을 시해하였다.”고 하였다. 안장왕이 피살된 것으로 나오는 것이다. 『일본서기』에서 박국(狛國)은 ‘이리의 나라’라는 뜻으로서 백제 측에서 고구려를 낮추어 부른 표현이었다. 향강상왕(香岡上王)은 안원왕을 가리킨다. 이에 따르면 고구려에서는 안원왕의 죽음에 즈음해서 왕위 계승 분쟁이 있었고, 이로 인해 수천 명의 규모의 무력 충돌이 있었다. 6세기 전반 연이어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정변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와 같은 6세기 전반의 왕위 계승 분쟁은 고구려의 평양계(平壤界) 귀족 세력과 국내성계(國內城界) 귀족 세력의 충돌이었다고 파악한다. 고구려 귀족사회 내부에 분열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6세기 중반 고구려는 대외적으로도 위기 상황이었다. 유목지대의 돌궐(突厥)이 연을 대신해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하며 고구려 서방의 위협으로 등장하였다.
이처럼 대내외적으로 불안정한 정세가 지속되었던 시기에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이 북상하였다. 551년 백제가 먼저 한강 하류 지역을 공격하고 이어서 신라가 상류 지역을 공격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하류 지역의 6군을 백제에게 빼앗기고, 상류지역의 10군을 신라에게 빼앗겼다.
고구려의 정세는 6세기 후반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이 재위하며 안정을 되찾았다. 평원왕은 한강 유역을 수복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는 『삼국사기』의 온달전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589년 수(隋)가 중원 지역을 장악하고 동아시아의 최강국으로 부상하면서 고구려의 남진 정책은 지속되기 어려웠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까지 한강 유역은 삼국의 각축장으로 부단한 변화의 한가운데에 놓였다.
5~6세기 중반 동아시아에서는 주요 강국이 병립하였다. 중원 지역은 북조(北朝)와 남조(南朝)로 나뉘어 여러 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하였다. 북방에는 유연, 서방에는 토욕혼이란 유목국가가 흥성하였다. 그리고 동북방에 고구려가 또 하나의 강국으로 자리하였다. 이렇듯 다원적인 국제질서 속에서 고구려는 오랜 기간 동북아시아의 패권국(覇權國)으로 전성하였다.
동아시아 국제 정세의 변화는 6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동아시아의 북방에서 유연을 대신해 돌궐이 신흥 강국으로 등장하면서 고구려의 서방 변경을 위협하였고, 남방에서는 백제 · 신라의 연합군이 북진해 온 것이다. 그러나 이때 고구려는 귀족세력의 내분으로 인해 양면으로부터 몰려온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결국 남방의 한강 유역을 상실했는데, 대신 서방 변경의 안정은 유지할 수 있었다.
6세기 후반부터는 서방 변경의 정세 역시 변화하였다. 581년 수립된 수(隋) 왕조는 589년 진(陳) 왕조를 병합하고 중원 지역을 통일하였고, 돌궐을 제압하면서 동아시아 최강국으로 부상하였다. 수의 국력이 동아시아 여러 나라를 압도하였고 다원적인 국제질서가 재편되었다. 그 여파는 동북아시아 지역까지 미쳤다. 고구려 서방 변경의 요서(遼西) 지역까지 수의 세력이 침투하였고, 거란(契丹) · 말갈(靺鞨) 등 고구려에 신속(臣屬)되어 있었던 여러 종족집단이 동요하였다.
고구려의 긴장감은 높아졌다. 군사체제를 정비하고 군량을 축적하기 시작하였다. 수에 첩자를 보내 쇠뇌 제작 기술을 입수하는 등 신무기를 개발하였고, 변경에서 발생한 국지적인 분쟁에 단호히 대처하였다. 더 이상 수의 세력이 동북아시아 지역까지 확대되지 못하도록 견제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동아시아 최강국으로 부상한 수의 태도는 고압적이었다.
598년 고구려는 수의 요서 지역을 공격해 수를 견제하고자 하였고, 수는 즉각 30만의 대군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598년 수의 고구려 공격은 실패하였다. 장마와 태풍으로 교통로가 차단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수는 고구려 공격을 포기하지 않았고, 612년과 613년 · 614년의 대규모 전쟁을 추진하였다.
612~614년 고구려와 수의 전쟁은 고구려가 수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종결되었다. 그런데 이 전쟁은 양국만 아니라 삼국 간의 국제관계와 무관할 수 없었다. 백제와 신라는 수의 동향에 예의주시하면서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였다. 다만 고구려와 수의 전쟁이 삼국 항쟁에 결정적인 변화를 초래하지는 못하였다. 보다 직접적인 관계는 고구려와 당의 전쟁에서 촉발되었다.
618년 건국한 당(唐)은 620년대를 거치면서 동아시아 최고의 강국으로 부상하였고, 차츰 고구려를 압박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642년 고구려의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정변을 통해 집권하였다. 비단 고구려만 아니라 백제와 신라에서도 정치적 변화가 있었다. 641년 즉위한 백제의 의자왕은 정변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였고, 신라를 압박하였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압박에 맞서 당과 교섭하면서 위기를 넘어서고자 하였다.
645년 당 태종은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고구려는 요동 지역의 주요 성을 상실하였고, 이른바 주필산(駐蹕山)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그러나 안시성에서 강력히 저항함으로써 당의 공세를 막아냈다. 당 태종은 결국 철군하였다. 640년대 후반에도 당은 지속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고구려와 당의 전쟁이 전개되며 백제는 표면적으로 당의 고구려 공격을 지원한다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참전하지 않고 관망하였다. 신라는 당에 호응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이에 백제는 신라의 북진을 틈타 신라의 서부를 공격하였고,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다.
신라의 김춘추(金春秋)주6는 다각도로 외교적 교섭을 시도하였고, 마침내 648년 당과 군사 동맹을 체결하였다. 이제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신라-당의 동맹 대 고구려와 백제-왜의 연합이 대치하는 형국이었다. 비단 삼국과 왜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주요 세력이 대부분 어느 한쪽에 가담하였다. 동아시아 국제전으로 확대될 가능성을 내재하였던 것이다.
660년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협공해 백제의 수도를 함락시켰다. 이어 신라와 당은 고구려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때에 연개소문이 사망하였고, 그의 아들 남생(南生) 등이 권력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남생 형제는 반목하였고 형제의 대립은 국가적인 내분으로 전개되었다. 고구려는 내분으로 저항력이 약화되었고, 신라와 당의 공세는 지속되었다.
668년 마침내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의 평양성이 함락되었다. 비록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운동이 이어졌고, 신라와 당의 갈등이 잠재되어 있었지만, 이로써 삼국시대는 종결되었다. 고구려와 수 · 당의 전쟁 그리고 삼국 간의 전쟁은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중앙집권성을 강화하였고, 교통의 발달을 동반하였다. 이로써 동아시아 국제관계망을 확대하였다.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은 이와 같은 역사적 변화의 결과였다. 중앙집권의 강화가 내재한 모순과 국제관계망의 확대가 가져온 국제적 갈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결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는 지속되었다. 고구려의 멸망 이후 동아시아의 주요 국가는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를 한층 정비하였다. 신라와 발해, 그리고 일본은 당제(唐制)를 수용해 각국의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 정비에 활용하였다. 그리고 한자에 기초한 각종 문물을 공유하며 한층 보편적인 문명세계를 지향하였다.
삼국 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의 흥망성쇠
삼국 시대는 고구려, 백제, 신라 세 왕국이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서 경쟁하고 협력하며 번영한 시기입니다. 이 시대는 기원전 1세기부터 7세기까지 이어졌으며, 각 왕국은 독특한 문화와 정치체제를 발전시켰습니다. 삼국 간의 전쟁과 외교, 문화적 교류는 한국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결국 신라의 통일로 이어집니다. 이 글에서는 삼국의 기원과 발전, 주요 전쟁과 사건들, 문화적 성취, 그리고 통일 과정에 대해 자세히 살펴봅니다. 삼국 시대의 역사를 통해 한국 고대사의 복잡성과 위대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삼국 시대의 한국 역사 고구려, 백제, 신라의 흥망성쇠
1. 삼국 시대의 기원과 발전: 고구려, 백제, 신라의 형성
삼국 시대는 기원전 1세기경부터 7세기 후반까지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세 왕국이 경쟁하며 번영했던 시기입니다. 이 시기의 시작은 각 왕국의 형성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주몽에 의해 건국되었습니다. 초기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 성장하며, 점차 주변의 소국들을 정복하고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고구려는 강력한 군사력과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북방의 유목 민족들과 중국의 여러 왕조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큰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특히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대에는 한반도 중부 지역과 만주 일대를 지배하며, 삼국 중 가장 넓은 영토를 자랑했습니다.
백제는 기원전 18년, 온조에 의해 한반도의 남서부 지역에서 건국되었습니다. 초기 백제는 마한의 소국들을 통합하며 성장했고, 이후 한반도 중서부와 남부 지역을 지배하며 강력한 해상 왕국으로 발전했습니다. 백제는 일본과의 교류를 통해 선진 문물을 전파하며 문화적 성취를 이룩했으며,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통해 국제적 위상을 높였습니다. 근초고왕 시대에는 한반도 남부와 중국 산둥반도까지 영향력을 확장하며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신라는 기원전 57년, 박혁거세에 의해 한반도의 동남부 지역에서 건국되었습니다. 초기 신라는 경상도 일대를 중심으로 성장했으며, 점차 주변의 소국들을 통합하며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게 발전했지만, 6세기 중반부터는 화랑도를 통해 군사력을 강화하고, 법흥왕과 진흥왕 시기에는 삼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특히 진흥왕은 한강 유역을 점령하며 신라의 세력을 크게 확장했습니다.
2. 삼국 간의 전쟁과 외교: 끊임없는 갈등과 협력
삼국 시대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간의 끊임없는 전쟁과 외교가 특징입니다. 이들 왕국은 서로 경쟁하면서도 때로는 동맹을 맺어 공동의 적에 대항하기도 했습니다.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 모두와 전쟁을 벌였으며, 중국의 여러 왕조들과도 치열한 전쟁을 치렀습니다. 고구려는 북방의 유목 민족들, 특히 거란과 말갈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북방 경계를 안정시켰습니다. 598년과 612년, 수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며 국력을 과시했으며, 645년 당나라의 침략을 물리치며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서의 패권을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지속적인 전쟁으로 인해 국력이 소모되었고, 결국 668년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백제는 초기에는 고구려와의 경쟁 속에서 성장했지만, 후반기에는 신라와의 전쟁에 집중하게 됩니다. 백제는 4세기 후반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남진 정책을 통해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백제는 일본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문화적 교류를 촉진하였으며, 이러한 관계는 일본 아스카 시대의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백제는 멸망하게 됩니다.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늦게 발전했지만, 6세기 중반부터 군사력과 외교력을 강화하며 삼국 통일을 목표로 했습니다. 신라는 초기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을 받아 어려움을 겪었으나, 점차 내부 개혁과 군사력을 증강시키며 힘을 키웠습니다. 신라는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강화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공격하였고, 결국 676년 삼국을 통일하게 됩니다. 신라의 삼국 통일은 한반도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었으며, 이후 통일 신라 시대의 번영을 이끌었습니다.
3. 삼국의 문화적 성취: 독특한 문화와 예술의 발전
삼국 시대는 각 왕국이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키고, 이를 통해 한국 고대 문화의 기틀을 마련한 시기입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각각 독창적인 예술과 문화를 꽃피우며,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구려는 뛰어난 벽화와 건축물로 유명합니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는 당시의 생활상과 종교, 예술을 잘 보여주며, 특히 무용총과 각저총의 벽화는 고구려인의 활기찬 삶과 전투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건축물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평양에 위치한 안악 3호분과 장군총으로, 이는 고구려의 뛰어난 건축 기술을 보여줍니다. 고구려는 또한 불교를 수용하여 불교문화가 발전하였으며, 고구려 양식의 탑과 석불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백제는 예술과 건축에서 뛰어난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백제의 건축물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으로, 이는 백제의 뛰어난 건축 기술과 예술성을 잘 보여줍니다. 또한, 백제는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여 일본의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백제의 금동대향로는 백제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걸작으로, 그 섬세한 조각과 정교한 디자인은 백제인의 예술적 감각을 잘 나타냅니다. 백제의 문화는 한반도 남부와 일본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에도 그 유산이 남아 있습니다.
신라는 불교문화의 발전과 함께 화려한 금속 공예로 유명합니다. 신라의 불교문화는 황룡사와 불국사, 석굴암과 같은 뛰어난 불교 건축물을 통해 그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특히 석굴암의 석가여래좌상은 신라의 석조 예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그 정교함과 예술성은 세계적으로도 인정받고 있습니다. 또한, 신라의 금관과 금제 유물들은 신라의 뛰어난 금속 공예 기술을 잘 보여줍니다. 신라의 문화는 통일 이후에도 번영을 이어가며, 한국 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형성하였습니다.
4. 삼국 통일과 신라의 번영: 한반도 역사의 새로운 장
삼국 시대의 마지막은 신라의 삼국 통일로 마무리됩니다. 신라는 7세기 중반, 당나라와의 연합을 통해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정복하였습니다. 660년, 신라는 김유신 장군의 지휘 아래 백제를 정복하고, 668년에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습니다. 이로써 신라는 한반도 대부분을 통일하게 되었습니다.
통일 신라는 내부의 반란과 외부의 침략을 막아내며, 한반도 역사에서 안정된 통일 국가를 이루었습니다. 신라는 통일 이후,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강화하고, 경제와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특히, 불교는 통일 신라 시대에 더욱 번성하여, 불교 예술과 건축이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이 시기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 오늘날에도 그 아름다움과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신라는 또한 당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며, 이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신라는 한반도의 통일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고려 왕조의 성립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신라의 삼국 통일은 한반도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었으며, 이후의 역사적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5. 결론: 삼국 시대의 역사적 의의
삼국 시대는 고구려, 백제, 신라 세 왕국이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서 경쟁하며 번영한 시기입니다. 이 시기는 각 왕국이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키고, 이를 통해 한국 고대 문화의 기틀을 마련한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삼국 간의 전쟁과 외교, 문화적 교류는 한국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결국 신라의 통일로 이어졌습니다.
삼국 시대의 역사는 고대 한국의 정치, 군사, 문화적 발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합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각각 독창적인 문화와 예술을 꽃피우며,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삼국의 역사적 유산은 오늘날에도 한국 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들의 성취와 유산은 한국사의 중요한 장을 이루고 있습니다. 삼국 시대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고대 한국의 복잡성과 위대함을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백제의 건국과 성장
백제 시조 온조는 졸본지역에서 한강유역의 위례지역으로 이동해 와서 정착하여 나라를 세웠다.
백제는 한국의 고대국가 가운데 한 국가였다. 기원 전 18년에 건국되어 660년 멸망할 때까지 약 700년 동안 31명의 왕이 재위하였다. 백제는 초기에 한강(현 서울)의 중하류에 위치한 소국이었지만, 점차 주변 소국들을 병합하며 성장하였다. 한강 유역에 위례성을 쌓고 도읍을 삼은 백제는 국가의 중흥을 위해 웅진(현 공주)과 사비(현 부여)로 두 번이나 도읍을 옮기기도 하였다. 기원 전 18년부터 기원 후 475년 고구려에게 수도였던 서울을 빼앗겨 웅진으로 천도하기 전까지를 한성시대라고 부른다. 475년부터 공주에 도읍을 정했던 시기를 웅진시대라 부르며, 이후 538년에 성왕이 다시 도읍을 사비로 옮긴 이후부터는 사비시대라고 한다. 웅진시대와 사비시대를 거치면서 백제는 바다 건너 외국들과도 적극적인 외교 관계를 펼쳤다. 이 과정에서 과학과 기술을 발달시키고 우수한 문화를 꽃피워 선진문화국가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660년 신라와 당의 침략으로 도성이 함락되고, 이어 3년에 걸친 치열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백제는 끝내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국가의 운명을 다하였다. 백제는 고구려·신라와 함께 한국의 고대문화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동아시아의 한 국가로서 문화교류의 중심에 위치하였다. 백제는 선진적인 문화를 수용하여 이를 다시 발전시킴으로써 수준 높은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였다. 그리고 이들 문화를 주변국들에게 전파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동아시아 문화발전에 기여하였다. 비록 백제라는 국가는 망하였지만 백제인들이 창조한 풍부한 문화는 백제의 고토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 결과 백제의 왕도가 있었던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백제문화의 중심지로서 새로운 문화 창조의 토대가 되고 있다.
⇨백제의 시작-백제의 건국과 도읍
백제는 부여계통의 여러 이주민 세력이 한강유역의 선주민과 결합하여 형성된 국가이다. 백제가 건국되기 전 한반도 남쪽에는 이미 마한이라는 나라 안에 여러 소국들이 있었다. 백제는 이러한 마한의 여러 소국들을 병합하여 고대국가로 성장·발전하였다.
한국에서 현존하는 최고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에는 고구려를 세운 동명왕의 셋째 아들인 온조가 기원 전 18년에 백제를 건국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온조는 형인 비류와 함께 신하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향하다가 한강 주변에 위례성이라는 성과 궁궐을 짓고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이후 형인 비류가 죽자 그를 따르던 백성들은 온조에게 통합되고, 나라의 이름도 ‘모든 백성이 즐겨 따랐다’라는 뜻으로 백제라고 하였다고 한다.
⇨백제의 성장
백제가 주변 소국들을 병합하며 연맹왕국으로 성장한 시기는 제8대 왕이었던 고이왕대(재위 234~286)부터였다. 고이왕은 246년 낙랑의 변방지역을 공격하는 등 중국의 군현세력과 대립하면서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넓어진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삼국 가운데 가장 앞서서 행정 조직을 정비하였는데 관직의 등급을 매기고(16관등 제도) 등급에 따라 옷의 색깔을 정하였다. 또한 261년에 행정기구인 6좌평을 설치하고, 율령을 반포함으로써 이전보다 더욱 발전된 통치조직을 갖추었다. 그리고 대규모의 왕성을 축조하여 방비체제를 구축하였다.
백제가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제13대 근초고왕(재위 346~375)대였다. 근초고왕은 전라도 지역의 마한세력을 통합시키고, 가야지역까지 그 영향력을 끼치면서 점차 영역을 남쪽으로 확대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효율적으로 저지하면서 371년에는 친히 정병 3만을 이끌고 평양성까지 공격하여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그 결과 근초고왕 때는 현재의 경기도·충청도·전라도를 포함해 황해도 일부지역까지 포괄하는 광대한 영역을 확보하였다. 이렇게 넓어진 영역을 다스리기 위해 근초고왕은 지방 행정 조직을 정비하였다.
근초고왕은 대외교류도 활발하게 추진하였다. 중국 동진과 공식적인 관계를 맺었으며, 신라에는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며 말을 선물하였다. 그리고 일본에는 학자와 기술자 등을 파견하여 학문과 기술을 전해주기도 하였다. 일본에 파견된 사람들 가운데는 박사라는 전문가들도 있었다. 백제는 일찍부터 학문과 기술 등 여러 분야에 박사제도를 두어 그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에게 박사라는 칭호를 주고 벼슬도 내렸다.
한편 백제는 4세기 후반부터 약 100여 년간 고구려와 대립하였다. 백제와 고구려의 갈등은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남진정책을 추진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고구려 장수왕이 427년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백제는 고구려의 직접적인 위협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 시기에 제21대 개로왕(재위 455~475)은 왕족중심의 지배체제와 대규모 토목공사 등을 진행하면서 전제왕권을 추구하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서 중국 북위와의 외교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개로왕의 정책은 내부적인 분열과 함께 대외적으로 고구려의 남침을 초래하였다. 백제의 수도였던 한성은 장수왕이 이끈 고구려군에게 7일만에 함락되고, 개로왕은 붙잡혀 살해당하였다. 이때 왕을 비롯해 태후·왕자 등이 몰살되었으며, 8천 명의 남녀가 포로가 되었다.
⇨백제의 건국설화
고려시대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백제의 시조는 온조왕이다. 그의 아버지는 추모(鄒牟)로서 주몽(朱夢)이라고도 하는데, 북부여로부터 난을 피해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졸본부여의 왕에게는 아들이 없고 단지 딸만 셋이 있었다. 주몽을 보더니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의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을 비류(沸流)라고 하고 둘째 아들을 온조(溫祚)라고 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었다. 그러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다가 마침내 오간(烏干) · 마려(馬黎) 등 10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가니 백성 가운데 따르는 자가 많았다.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살만한 땅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서 살고 싶다고 하니 10명의 신하가 간하였다. “생각하건대 이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 한수(漢水)를 끼고, 동쪽으로 높은 산악에 의지하며, 남쪽으로 기름진 들을 바라보고, 서쪽으로 큰 바다에 막혀있으니, 그 천혜의 험준함과 땅의 이로움은 좀체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이곳에 도읍을 만드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말을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가서 살았다. 온조는 강 남쪽의 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하고 10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았으며,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고 하였다.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의 홍가(鴻嘉) 3년이다.
비류는 미추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히 살 수 없었는데, 위례에 돌아와 보니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하였다.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 죽으니, 그 신하와 백성이 모두 위례로 돌아왔다. 나중에 백성들이 올 때 즐거이 따라왔다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로 바꾸었다. 그 세계(世系)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부여(扶餘)를 성씨로 삼았다.
백제의 중흥과 발전
⇨웅진천도와 중흥
475년 고구려에게 한성이 함락되자 제22대 문주왕(재위 475~477)은 그해 10월에 웅진(현 공주)으로 도읍을 옮겼다. 웅진시대 백제는 개로왕의 죽음과 갑작스런 수도의 천도 등으로 인해 내부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문주왕은 신하인 해구에게 시해되었으며, 문주왕을 이어 즉위한 제23대 삼근왕(재위 477~479)은 재위 3년 만에 죽었다.
이어 동성왕(재위 479~501)이 정치적 혼란 속에 제24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동성왕은 어수선한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금강지역의 새로운 세력을 등용하여 한성에서 이동해 온 귀족 세력과 힘의 균형을 이루게 하였다. 이때 새롭게 등용된 귀족세력은 진씨를 비롯하여 백씨·사씨·연씨 등이었다. 그리고 신라 이찬 비지의 딸을 왕비로 맞이함으로써 신라와 동맹을 맺었다.
그렇지만 동성왕은 재위 말기에 들어와 과대한 토목공사, 사치 등으로 국내정치에 소홀하였다. 결국 그는 501년 11월 마포촌(현 서천 한산)에 사냥을 나갔다가 가림성(현 임천)의 성주였던 백가가 보낸 자객에 의해 상해를 입고 12월에 사망하였다.
⇨백제의 중흥
동성왕에 이어 제25대 무령왕(재위 501~523)이 즉위하면서 백제의 국력은 점차 회복되었다. 무령왕은 즉위 후 바로 백가의 반란을 진압하였고, 고구려를 공략하기 시작하였다. 즉위 해인 501년에 고구려 수곡성(현 신계)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513년에는 위천에서 고구려군을 대파하였다. 이 시기의 전투는 주로 한강유역에서 벌어졌는데, 대부분 승리를 거두면서 고구려에 빼앗겼던 한강유역의 일부를 회복하게 되었다. 무령왕을 이어 제26대 성왕(재위 523~554)이 즉위하였다. 성왕은 중앙과 지방의 행정 및 군사 조직을 재정비하였다. 즉 중앙의 행정조직을 22부로 재정비하고, 지방의 행정 및 군사조직을 방군성(方郡城) 체제로 전환하는 등 대대적으로 조직을 정비하였다. 성왕의 업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538년에 도읍을 웅진에서 사비로 옮긴 것이다. 이로 인해 웅진시대를 마감하고 사비에서 새로운 도약을 모색할 수 있게 되었다. 웅진 즉 지금의 공주는 64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백제의 도읍이었지만 무령왕릉을 비롯한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을 중심으로 백제의 우수한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들을 통해 백제가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비천도와 발전
성왕은 538년 사비로 천도하면서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백제라는 국호가 그대로 사용되었다. 공주는 지리적으로 강과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방어에는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대외적으로 진출하기에는 불리한 입지였다. 반면에 부여지역은 금강과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방어에 적합하였을 뿐만 아니라 넓은 평야가 있어 경제적으로도 풍요롭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지리적으로 금강을 통한 남부지역 및 가야지역으로의 진출과 서해를 통해 중국 및 일본과의 교류가 한층 용이했다.
성왕은 사비천도를 전후하여 도성제도를 마련하였다. 왕성은 부소산성을 배후산성으로 하고, 부여를 둘러싸는 나성을 축조하여 이중적인 방어체계를 갖추었다. 그리고 도성 안은 5부(部)로 구획하고, 각 부는 다시 5항(巷)으로 세분하였다. 통치체제도 새롭게 정비하였는데, 22부사의 중앙 관부와 5방의 지방 통치조직을 완비하였다.
대내외 정책을 통해 국력을 강화시킨 성왕은 신라 진흥왕과의 연합작전을 통해 고구려가 점유한 한강유역에 대한 회복에 나섰다. 551년 백제는 한강 하류의 6개 군을, 신라는 한강 상류지역의 10개 군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553년 다시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하류지역까지 점령함으로써 양국의 동맹관계는 파탄을 맞았다. 이에 성왕은 554년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전쟁 중에 적에게 붙잡혀 사망하였다.
⇨백제인의 정신세계, 불교의 발전
백제는 중국 남조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백제만의 독특하고 새로운 예술의 세계를 개척하였다. 특히 백제인의 온화하고 섬세한 면이 곳곳에 잘 배어 있는 곳이 불교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왕도에는 많은 사찰과 불탑이 건립되었고, 불교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그 결과 웅진 및 사비지역에는 불교유적이 다수 남아있으며,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이 밖에도 태안마애삼존불, 서산마애삼존불 등은 백제 불교문화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 사비시대에는 각종 공예품과 미술문화도 발전하였다.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된 백제금동대향로, 각종 문양전, 토기와 와당 등은 백제인들의 의식세계와 기술수준을 잘 나타내고 있다. 백제는 이런 우수한 문화를 일본에 전해 아스카 문화를 꽃피우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무왕의 익산경영
제30대 무왕(600~641)은 대내적으로 왕권을 회복하고 대외적으로 신라와의 전쟁에 총력을 기울였다. 무왕은 재위기간 중 신라와 10여 차례에 걸친 전쟁을 치렀다. 또한 무왕은 왕도를 사비에서 익산으로 옮기려고 하였다. 그것은 익산에 왕궁성을 조영하고, 대규모 사찰인 미륵사를 창건한 사실을 통해 확인된다. 특히 익산 왕궁성에서는 사비도성에서 출토되고 있는 것과 유사한 고고학적 유물들이 다수 출토되고 있어 상당한 기간 동안 무왕이 익산에 머물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무왕은 도교와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미륵사의 창건과 동시에 왕흥사를 크게 중창하였다. 그리고 재위 35년 3월에는 궁의 남쪽에 연못을 만들어 20여리에서 물을 끌어들이고, 연못 가운데 인공섬을 만들어 신선들이 살고 있다고 전해오는 산을 조성하였다.
⇨백제의 멸망
700년의 왕국이 사라지다
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제31대 의자왕(재위 641~660)은 태자 때 부모에게 효성스러웠고, 형제간에는 우애가 돈독했었다고 한다. 의자왕은 즉위 이듬 해 7월 자신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하여 40여 성을 함락시키는 대성과를 거두었으며, 8월에는 윤충을 보내 대야성(합천)을 함락시켰다. 이후에도 신라의 서부지역에 대한 공략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의자왕은 전투에서 계속 승리를 하게 되자 어느덧 자만심에 빠져 독재군주로서의 한계성을 드러내었다. 이러한 상황은 왕비의 지나친 권력욕에 의한 국정운영을 통해 나타났다. 또한 의자왕은 당시 삼국을 둘러싼 국제관계의 변화에도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당시 수세에 놓여 있던 신라는 당에 사신을 보내 백제에 대한 압력을 요구하였으며, 이에 당에서는 백제에게 신라와 화평관계를 유지하도록 요구하였으나 의자왕은 이를 무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652년 이후 더 이상 사신을 보내지 않음으로써 당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였다.
이에 신라는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공략하였다. 백제는 계백이 이끄는 5천결사대가 황산벌에서 신라 5만군을 저지하였으나 실패하고, 신라와 당군은 사비도성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660년 7월 12일 나·당연합군이 사비도성에 이르자 13일에 의자왕은 태자 효와 함께 북방 웅진성으로 피신하고 나당군은 사비성을 포위하여 결국 함락시켰다. 이어 웅진성으로 피신했던 의자왕과 태자도 항복하였으며, 의자왕과 태자, 여러 왕자들, 다수의 고위직 관료, 그리고 백성 12,807명은 당의 수도로 보내졌고, 백제지역에는 당에서 5개의 통치조직을 두었다.
⇨백제 부흥의 꿈
660년 사비도성 함락이후 전국 각지에서 부흥운동이 전개되었다. 백제의 부흥운동은 사비도성이 함락된 직후부터 시작되어 663년 11월 예산 임존성이 함락될 때까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부흥운동의 가장 중요한 거점은 주류성과 임존성이었다.
그러나 백제는 왜의 지원군과 함께 663년 8월 백촌강에서 벌인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부흥운동도 종말을 고하게 된다. 백촌강에서 수군의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주류성에서는 백제군과 나당군의 전투가 벌어졌다. 백제부흥군은 663년 9월 1일 더 이상의 전투를 진행하지 못하고 왜군과 함께 신라군에 항복하였으며, 주류성은 마침내 함락되었다. 주류성이 함락되자 두량윤성을 비롯하여 주변의 여러 성들도 따라서 항복을 하였다. 이로써 3년 동안의 백제의 부흥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약 700년을 이어져 온 백제 왕조는 그 역사를 마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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