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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마을...29..130907
의흥 금융조합
지금의 농협이 옛 날? 의흥 금융조합. 이란 금융기관 이다..장소는 그데로 그 자리 변함없어나
이곳에서 보는 업무의 내용 을 말하자는 것은 아니고. 다만 이곳에 어린 추억만 되짚어 보려 한다,
이 금융조합 의 건물은 일제 때 지은 타일을 붙인 세멘콘크리트 조 이며 규모는 시골이라 작아도
지방의 금융업무 를 전담했던 한마디로 돈이 끓던 기관이다.
이 금융조합 직원은 지방사람은 없었고..있어도 정 직원이 아닌 임시 고용인이며 이들이 업무를
보조 하는 실태 였다. 소사는 없고 급사는 항상 의흥읍내 소년들이 담당 하였지..그 급사로 근무
하던 선배 친구 들이 있지만 생존중 인 분도 있어서 성명은 생략한다. 그리고 금융조합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모습은 깃대(국기 개양대) 와 높다란 계단위 타일붙인 건물의 번쩍임 이다.
옆문은 대문으로 되어 있고 내부가 마당이며 이 마당서편에 이사 사택이 있고 동쪽에는 짧은 회랑
과 숙직실 이 일제가 지은 목조 건물이 였고 이사의 사택은 기와지붕. 숙직실은 양철(함석)지붕
였고 숙직실 방 바닥은 다다미 가 아닌 온돌이며 이사의 사택은 다다미 와 온돌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의 창고가 있는 곳으로 가는 중간지점에 직원사택이 그 다음에는 작은연당(연못)이고
창고는 해영이 내 집 앞 에 있었다.일제 시대와 해방후 도 에도 같은 모습이 였다.
그리고 이사사택 동쪽대문 으로 들어서면 우매나무(매실) 나무 몇 그루가 봄이면 매실꽃이 함초롬
이 피고 여름마다 시디 신 우매(매일열매) 가 달리고 어릴적에는 이 우매를 살구인양 여기고 따
는 일도 많았다..이사의 사택에는 어릴 적 동무 들이 있었고 중학교 때는 이광봉. 조영수(여) 등
이 있었는대 이들도 그 선친들의 전근으로 타지로 간후 조영수는 소식조차 모른다.
이 이사의 사택은 6.25. 한국전쟁에도 폭격을 맞지 않았고 금융조합 건물도 폭격을 맞지 않은 의흥
읍내에 남은 전형적인 일본식 건물이 였다. 우체국.면사무소는 폭격으로 잿더미가 되었어도 이 건물 과 소학교 건물은 폭격을 맞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이르기를 이 두곳은 의흥읍내동 전체 중에서 가장 명당이라 는 말을 했고..실지 풍수설 상 그러하다고 한다.
6.25.한국전쟁 직후 피난에서 돌아온 해 에는 지서가 폭격으로 없어 저서 이곳 금융조합이 지서로
이용되었고 금융조합은 아직 업무를 시작하지 못한 그런 시점이다..여기가 지서로 상용될 적에는
주로 전쟁중 피난가지 않고 남아 적에게 부역한 사람들을 색출하고 처벌하는 일이 주업무 였고 그
영향으로 우리집 일꾼이 걸려들어서 몽둥이 로 찜질을 당하고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금융조합 근방을 지나다 보면 신작로 쪽으로 판자로 담장을 치고 검은색 콜탈 을 발라서 시커먼
모습이 참 특징 스러웠고 일본냄새가 나는 듯 했는데..이 사택이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금융조합은 본시 농촌상대 금융기관이여서 농민들과 불가분의 관계였고 일제 공출시절 에는 어떠
했는지 는 몰라도 여기에서 농자금 을 대출했고 사체보다 싸서 많이 이용 했다.
이자가 싸고 대출이 용의하기 때문에 농민들이 농토를 담보로 하여 대출을 많이 받았고 이를 변제
하지 못해 대출기간이 지나면 농토가 가압류되고 우선 지급명령이 법원으로부터 날아들고 심하면
경매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으나 경매까지 가는 경우는 더물었고 대게는 담보로 재공된 농토를 타인
에게 매도 하여 그 대부받은 돈을 변제하였다..이런 것이 농총빚 의 시작이다.
그 가압류나 지급명령신청 대행은 당시 사법서사(법무사)셨던 선친이 군위군 4개면(의흥.산성.고로
우보) 의 사건을 담당 하셔서..먼저 지급멍령을 받을 채무자 에게 옆서를 보내 알려드리고 양해를
구하며 변제를 유도하셨고..최후에는 지급명령 신청를 법원에 하면 지급명령이 발해지고 변제기를
늘릴 요량으로 무조건 이의 신청을 하여 그 기일을 늘린후 변제토록 하신 것을 안다.
그리고 대출시 채무자 제공담보 물 은 대부분 농토라서 금융조합(채권자)는 근저당권설정 등기를
해야 대출을 해 주기 때문에 이 근저당권 설정등기 사건을 들고 군위등기소 에 간간이 내가 심부름
을 가기도 하고 경매사건이라도 생기면 의성지원(대구지방법원 의성지원) 에도 다녔다..
이런 식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 에 법원서류 절차와 작성방법 을 조금 익힌 것 같다.
그 당시 선친의 도우미??역활을 좀 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법무사 업무를 통달할 지경이 되었지..
그 밑골미가 나중에는 몇 년간 밥벌이 수단이 된 적도 있다. 점점 세월이 가니 농산물 수득세.
도 받아 들이고..비료 와 농기구 등도 취급대행을 하는 농협으로 이름조차 바뀐것 이지..
그 수득세 수납 때 품질검사를 하는데 이에 종사하는 사람은 타처 의 직원들 이 였다.
품질 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고 이 등급에 따라 가격이 형성되며 생산자 농민은 정부수매로 그해
농사를 마무리 하는 시절이라 이 등급을 매기는 직원들 에게 뒷거래(와이로?) 를 쓰고 기를 쓰며
한푼 이라도 더 받으려고 노력들을 했고 부정이 난무하는 현장을 목격하기고 했다..자유당시절..
그레서 품질검사 를 하는 직원들은 원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검사하는 모양을 보면 쇠창 꽂일대로 곡식 가마니 찔러서 낱알을 빼내어 육안으로 1등2등 판정
을 하고 조수가 다니며 퍼런 물감이 뭍은 소위 도장 둥그런 놈을 가마니 에 콱 찍고 나면 다른
직원이 와서 기입을 하고 3인 1조가 되어 탁배기에 얼굴 달아오른 농사꾼 들과 시비도 하고..
내 나락 보다 못한 저것은 1등이고 더 좋은 내 나락은 2등이냐...주정섞인 항의도 하고..
농촌삶이 여과 없이 담겨나던 그 금융조합 그런 애환과 사연을 품은 장소가 바로 금융조합..
우리 친구 영호의 선친도 여기에 서기로 근무하시다가 타지로 전근가시고 그 밖에도 타지인 으로
서 금융조합 에 근무하다가 의흥에 정착하신 유XX 씨등 아직도 그 때 그 사람들이 생존했거나 그
후손들이 있고..이들도 잘 아는 사람들이다..
의흥의 농민치고 예나 지금이나 이 금융조합(지금 농협) 과 관계 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
이다..지금은 농약. 비료.농기구. 농자금. 그리고 일정량의 금융 까지 포함하는 실정이고 인근에
은행등 다른 금융 기관도 없기에 의흥주민 들과 불가분의 관계가 된 기관이다.농촌 농민 농협 이것은 한몸 같은 존재로 탈바꿈 한 오늘이지만 나는 수득세 수납하던 금융조합 시절이 그립다..
의흥 우편국(우체국)
의흥 우편국(지금 우체국) 은 지금의 농협 바로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지만 일제 때부터 6.25.
한국전쟁 이전에는 그 보다 한참뒷 자리에 있었고 주위에는 이름모를 일본나무 들 숲이 있었다
우편국 하면 전신 전보 우편 이 가장두드러진 업무이나 지금은 금융창구로서 역할도 대단하며 나도
우체국 예금자 이며 고객이다..그런 우체국을 회상 해 본다.
일제시 업무태양이나 직원 장비 등은 너무 어려서 모르는 일이나 6.25.한국전쟁 무렵 전후 한
우편국 의 모습은 생생히 기억된다..직원은 두셋 심하면 국장겸 직원일 경우도 있었고 그 국장을
하시던 이종환 어른은 선친의 절친한 벗이 였어며 기독교 신앙의 동지 이 시기도 했다.
우체국에는 전보를 치는데 필요한 장비가 전쟁중 폭격으로 소실되고 없어서 구두로 전보를 쳤다.
이 구두로 전보 치는 풍경을 보면...다다 쓰쓰 쓰다단..모르스 부호로 전화기 귀에 데고 전보 를
치는데 그 속도감 박자감 들이 참으로 좋아보였다..전보를 치는 직원이 별도로 있는 것도 이니며
인력이 부족한 시대라 배달부나 급사? 까지 전보치는 것은 쉽게 소화할 만큼 숙달되어 있었고 우리
친구도 종사 한 적이 있고 그 때 모르스 부호를 호기심에서 잠시 배운적이 있다.
전화도 주민(고객)이 원하면 수수료 를 받고 걸어주고..의흥읍내에도 전화가 가설되지 않았던 시절
이다, 그후 60년대말 70년대초 에 수동핸들 돌리는 전화가 가설되고 교환수도 생겻고 교환수를 내
동무(여자)가 하기도 햇다..헨들 돌리고..교환..몇번 하면 척 알아 듣고 그 번호에 연결 해 주고
그 까만 헨들식 전화기 참 많이도 그리고 한참동안 사용한 보물? 급 통신기계다.
배달부 는 두엇명 이 되었는데 이들의 업무는 의흥면 고로면 심지어는 산성면 일부 까지 마크했고
이동수단은 “도보”.. 우 라고 쓰여진 가방메고 걸어걸이 몇십 백리길 을 다닌 배달부..편지한통
전하러 고로로 배달다가 공비와 만나 죽도로 얻어맞고 풀려나 허리를 다쳐 못일어나니 “똥물”을
떠다먹고 시체 뼈를 고아먹고 등등 하여 회복하시던 배달부 아제..들
이들은 박봉이라 자녀교육 은 꿈 일뿐 시키지는 못하고 겨우 입을 사는 처지들 이였다..그런 아제
들을 생각하면 우리가 얼마나 포시럽게 자란것 인가..특히 의흥우체국 하면 xx.xx.xx. 등등 우리
동무도 많이 그친곳 이고 선배들도 더러 거치기는 했어나 평생을 우편업무로 일관 하신이 들은
좌상님은 아시리라..그 분들 온집안이 배달로부터 여러업무에 종사하는 모습을 우리는 보았고 ..
지금은 일부 금융업과 보험대리업도 하고 있지만 그 시대 우체국은 전신.전보.우편물 취급이 업무
의 전부였다..우편국앞 에는 빨간칠 한 우체통 동그랗게 섯고 마을가운데 는 판자로 만든 우체통이
뎅그라니 놓이고 자전거도 귀하디 귀한 물건이라 우체국에도 한 대도 없던 그 가난하던 그 시절 이
어제 같은데 나도 미쳐 깨닫기 전 세월이 먼저 가서 지금이 모양이고 나는 옛날을 회상 한다..
고향마을...30..130907
의흥면사무소
의흥면 사무소는 일제 때부터 지금까지 같은 장소에 있다..6.25.한국전쟁으로 사무소 건물은
잿더미 가 되고 다시 신축 했고..사무실 앞 프라타나스(일명 탱주나무) 와 우물 이 멋진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면 사무소의 직원을 면서기라고 칭 했다. 이 직원들은 세월따라 부모님 뻘에서
부터 시작해 우리대 그리고 지금은 한참 후배들이며 면장도 그러 하다.
옛적 시골의 면 사무소는 지역의 가장 어뜸으로 중요한 기관이 였고 그 기관이 수행하는 업무는
작은 지방정부? 꼴 이라고 해야 할 만큼 다양했던 것 이다. 지금도 별로 변함없는 업무범위일
터이고..오히려 시대의 변천으로 인해 수행해야 할 업무가 늘어난 것으로 안다.
우리가 소년시절 놀이터인 면사무소 마당..그 프라타나스 그늘..나무 타고 올라 매미도 잡고..
그런 면 사무소인데 .. 의흥면 면장을 지낸인물들의 면면은 잘 모르나 서서익. 박훈. 님 이며
이분들은 일제시대 면장 출신이 시며 우리가 초등학교 졸업때 까지 일본망토를 걸치고 다니신
분 들 이다..이분들은 특히 청렴성이 뛰어나 면민들 에게 인심을 얻었고 존경도 받은 인물이 시며
특히 박훈님은 의흥에 처음으로 고등공민학교와 중학교 교장선생 님이 되었다.
박훈님이 일제시 면장(관료) 이기는 하셨으나 면민의 신망이 두터운 분이 셨기에 해방후에도 중
학교를 지방에 개교 하는 공로를 새울 수 있었고..평생을 교육자로 지나실 수 있었던것 이며 이분
은 딸만 일곱명을 두셨고 아들은 없어서 큰 딸이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니 박훈님의 가정에 외손자
가 생기고 이 외손자를 입양하여 아들로 삼아서 이 아들된 외손자는 외할아버지를 아버지 불렀다.
이처럼 옛부터 내려오는 아들 선호사상이 박훈님을 비켜가지 않은 모습이 였고 주변사람들은 놀라
워 하면서도 당연한 것 처럼 받아 들였다..그 일곱자매 들도 교사로 진출하는 등 교유적인 직업에
종사하고..당시로서는 앞서가는 모습을 보여 주었고 그 딸 자매들이 우리들 의 누님뻘이고 후배도
있었지..늘 엺은 웃음끼를 담은 얼굴이시고 아침마다 텃밭 배추.무 에 조로로 물은 주던 분이시다.
이처럼 선비? 이 시면서 농부의 모습을 보이셨고..실지로 농사를 짓기도 하셨다..내가 꼴다래끼
메고 안보도랑 끄터머리 지나면 나를 보시고 바지런 한 놈이라고 칭찬도 해 주신 분이시며. 그
일족은 골안(토곡동) 박씨 문중이시며 일제시대 에 고등교육을 수학하신 점을 고려한다면 아마
제산도 조금 누린것 으로 안다..그리고 인심도 넉넉하신 편이시며 인격적으로 도 존경되는 분이다.
한국전쟁 이후 공산주의자(빨갱이)들이 많이 설치고 마을까지 공비가 휩쓸어가고 부자들이 수난을
당하던 시절이 였어도..평소 인심을 잃어 버리지 않은 분 들이시라..박훈 전 면장의 집과 서서익
전 면장의 집에는 공비도 피해를 주지 않고 비켜 갔다고 할 정도의 후덕하신 인물 들이 시다..
이것이 전통이 되어 의흥면 사무소 직원들은 비리로 인한 지탄을 받는 것 을 보지 못 했다.
의흥면의 근간? 이라 할 수 있는 면 사무소 터는 담장넘어 서편이 옛 의흥현 현령이 있는 관청이
있던자리며 현령의 사택도 함께 있던자리다. 그리고 그 자리들이 의흥에서는 어뜸가는 명당이라는
풍수설이 있다,,터값을 톡톡히 하고 그 덕을 면민에게 끼친 기관이 면사무소 인가 한다.
우리친구가 면장을 할 만큼 시간이 지난 일 들이지만..
면사무소 병사계 를 드나들며 입영지원서 를 제출하고..인감증명을 발급받고 호적등본을 발급받고
제산증명을 발급받고..등등 한시절은 타인의 위임을 받아 소소한 행정에 관한 심부름도 많이 했다.
그런 면사무소 라서 남다른 깊은 정이 많이 들어 버린 듯 하다. 생각하면 반세기 넘는 흘렀지만
면사무소 출입을 하고 그 우물을 마시고 그늘아래 쉬고.매미 울어데던 소리가 아련히들리는 듯하다
산 도감
산 도감은 산림을 관리하는 관리인데 이 들은 일제시대부터 있었고 해방후 에도 한참이나
존재 했다..주로 산으로 다니며 벌목이나 심지어 솔가지 하나만 꺽어도 산림법 위반으로 입건을
시키는 그 산도감을 나무꾼 들에게는 저승사자 였다. 산을로 다니기 때문에 일본도를 허리에 차고
제복? 인지 뭔지??경찰들의 복장비슷 한 것을 착용하고 모자도 쓰고 다닌 산도감 들이다..
세월이 가니 산도감업무를 지서에서 담당하고 산림단속을 하다가 산림청이 생기고 나서 그곳으로
업무가 이관 된 듯 하다..그 시절에 는 산도감의 감독이 없었다면 민둥산이 아마 마당처럼 되었을
것이다..쉼 없는 사방공사와 연료의 변환으로 나무꾼 도 없어지고 벌목도 그의 사라진 지금 이지만
그 시절은 산도감이 산림보호에 공로가 컷다. 비록 욕을 먹은 산도감 이지만..아~ 그시절이여..
배급소
의흥읍내 서쪽신작로 끝에 배급소 가 있었고 일제가 이땅을 지배할 시절에 농촌의 곡식을 수탈해
가고 곡식대신 콩껫묵 부스러기 같은 것 등 지금의 짐승사료 로 쓰이는 곡물을 먹으라고 그것도
배급을 주었는데 이 배급소 는 해방과 더불어 없어 졌어나 우리 어릴적 그러니 태평양 전쟁 말기
인 셈인데 그 때 시행되던 제도이다. 그 책임자 어른도 우리 옆집에 거주 하셨다.
일제시대 에 시행된 온갖공출 농가에서는 곡물을 비농가나 농가 구분없이 동원되던 근로동원 전쟁터로
보내던 남정내 들의 수난..이 시절에는 놋수저 심지어 요강주걱 까지 걷어갔다..여성들
은 정신대로 나이많은 여성들은 산에 올라 송진체취..등등 민족의 기름을 짜먹던 그 시절의 일본.
우리가 겨우 일어서서 걷고 말을 할 수 있을 즈음 일이다..
그 시절 의 배급소는 먹거리의 공급처인 지라 줄을서서 식량배급을 타고 한톨의 곡식이 금싸라기
취급을 했던 시절이며...구슈게이요..왜치고 지서싸이랜 앵~~불고 귀막고 엎드리고 ..개이까이
개이요..하면 일어고 무슨 뜻인지 모르고 시키는 데로 나도 했다..후일 알고보니 그것이 공습경보
와 공습 해지 경보였다..이 통에도 의흥면은 정신대로 끌려간 사람이 없음은 앞에서 말한 면장님
들의 노력이며 공로가 아닌가 여겨진다..그러나 징병과 보국대는 많이 뽑혀 간 모양이 더라..
당시 우리집 환경은 선친은 신병치료차 만주로..이 만주에는 백부님이 일본관리(제판소) 시라 먼저
만주로 발령을 받아 가 계셨고 큰집 식구 전부가 만주 봉천.신경. 등을 전전 하면서 사셨기 때문에
선친도 신병치료차 만주로 가셔버리고 모친과 어린 우리들 이 의흥에 살다가 견딜 수 없어 만주로
이주도 아닌 어정쩡한 행각을 하고..그 너댓살 적의 기억으로 상새한 것은 없어나 지금도 뚜렸이
남은 기억은 기차를 타고 만주로 가는 길 창밖풍경이다..창밖을 내다보면 어린눈에 천지가 빙빙 돌
기만 하는 같아 어지럼 증이 나던 것과..만주에서 지겹게도 내리던 눈..얼붙은 빙판길 마차들이
다니며 쮸쮸 따따 말 모는 소리..놀랄 정도 의 석탄더미 와 춥고 배고프던 기억 뿐 이다.
배급타 콩껫묵 씹을 적에도 새끼인 우리에게는 밥을 먹이던 그 억척인가 정성인가 가 우리를 키우
고 보호한 선친들..우리는 이렇게 어린시절을 보낸것이다..해방과 더불어 배급소는 자연히 문을
닫고 일본인 들도 물러 갔어나 어릴적 잠시의 기억이 지금도 일본을 미워하게 하는 내심을 기른 것
같다..아무리 글로벌 시대라고하나 쉽게 일본의 만행을 잊지는 못 하는 우리다..
고향마을...31..130908
의흥 예배당(의흥 성결교회)
의흥 성결교회 는 의흥읍내리 동창마(동창마을) 에 있어다..동창마 라고 하니 생소할 것이라 좀더
설명을 한다면 의흥면사무소에서 이지동(배일) 가는 큰 길 중간쯤이라고 해야 하나?(서인혁 집 앞)
설립된 시기는 일제때 부터며 해방후 에도 그 자리 그 모양이 였고 6.25.한국 전쟁 때 폭격을 맞지
않았다..바로 옆집은 폭격을 맞아 잿더미 가 되었어도 예배당 은 아무피해 가없었다.
이 예배당 에 관해서는 6.25.한국전쟁 이전일들은 잘모르나 그 후 일들은 시시콜콜 한 부분 까지
잘 안다..왜냐 하면 내가 몇십년을 다녔기 때문이지..서인혁 이네 집 바로앞 이 예배당 대문이며
이 좁다란 대문 들어서면 약 백여평의 예배당 건물이 있는 목조 기와지붕 으로 통으로 한간 그
넓이는 50여평은 족히 되는 바닥에 마루가 노이고 한가운대 기둥이 있었다.
예배당 건물 북동(北東) 편에 쪽대문이 있고 예배당 내부는 정 동(東) 편에 강대상(설교하는 상)이 있고 마루 한가운대 겨울이면 난로를 피웠고 예배당 동서 로 철사줄을 매고 호야(렘프) 를 뛰엄
뛰엄 달아서 조명을 했고..마루의 북쪽은 남자들의 자리..남쪽은 여자의 자리로 구분하여 앉았고
이처럼 남녀의 자리가 구분된 것은 당시에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였지(지금은 이상한 일 이라도)
아마도 남녀7세 부동석(男女七歲 不同席) 의 유교의 사상 탓인가??한다..그만큼 예배당 의 역사는
깊다는 말과도 통하고..그러나 기독교의 윤리나 교리 상으로 봐도 이상한 일은 일이다...
성서 어느 구절에도 男女七歲 不同席 이란 말씀은 없다..이는 민족의 전통과 희석된 짬뽕? 이다.
유일의 진리요 유일의 교리요 등등 주장을 하고 배타적인 종교가男女七歲 不同席 이라니 황당한 일
말씀(성서) 을 지키지 않으면 죄가 되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 그 다음은 지옥이 정해진 길 인데..
말씀에 없는 짓은 해도 탈이 없나 보다.. 하여간 당시의 男女七歲 不同席 은 웃기는 일이다..
그리고 신자가 수백명 이라고는 하나 예배 때는 많아야 60~70 명 보통은 50여명이 였고. 신도들의
분포지는 의흥읍내.파전.신덕.원산(원당골) 사래.가지골. 배양동..이며 수북동이나 지호동 엔 없다
그리고 신도들의 연령별로 보면 유년에서 학생 이 50% 까 넘었고 그 나머지는 청 장년 이중에서도
장년(어른)은 몇몇..이 였는데 그 어른들 중 선친.을 비롯해서 누구누구 등 열손가락 내 의 인원이
였다..신도의 수를 왜 이처럼 장황하게 논 하는 가? 하면 당시예배당 전반을 설명할 중요한 배경
이기 때문이다..나는 유년 시대부터 장년에 이르도록 예배당과 관계를 가졌다..명색이 신자로서..
6.25.한국전쟁 탓으로 마을곳곳 에 폭발물(지뢰.대포알.소총탄알.수류탄.박격포 탄 등등) 이 널렸
는데 안전차원에서 이 들을 수거하여 한데모아 한독골 입구(공동묘지) 에 구덩이를 파고 일시에
폭파 했다. 그 폭파소리 꽝~~~천지가 진동하고 대지는 흔들렸고 이 흔들림으로 인해 천정이 흙과 회 로 설치된 지라 무개를 못이겨 일시에 마룻바닥으로 내려 앉는 소리 꽝~~~
이 꽝~~ 소리 나는 시간에 나는 소전걸 마당에 있었고 예배당 내부에는 아무도 없어서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이 꽝~~ 소리는 평생 잊혀지지 않는다..이로 인해 예배당 천정은 없어지고 석가래가 들
어 나고 만 것 이다..당시에는 교역자도 없이 예배드리든 시절이고 ..진태형의 선친. 삼촌. 등
오래된 신자들이 예배를 인도 했고..창호지 에 찬송가 적어 쳐다보며 찬송을 했지..
그 예배당 시절 신앙생활 에 관해서는 다음으로 미루어 두고..예배당 의 풍경만 서술 본다.
수요일 밤 이나 일요일 에는 의흥 읍내 예배당에서 주물로 된 종(교회종) 이 땡땡 울리고 신자들
이 모여드는데..파전.신덕.사래.가지골.냉수지.배양동. 사람들이 걸어 걸어 모여든다..4계절중 다른 계절은 그렇다 치고 여름은 땡빛 을 보릿집모자로 가리고 아낙은 흰수건으로 가리고...
오는데..일요일에는 헌금할 돈이 없으니 성미를 바친다..끼 때 마다 조금씩 모아 일요일 예배시 에
성미를 바치고..남자는 현금약간 그리고 맥추감사 헌금. 추수감사 헌금. 기타 개인적인 감사 헌금
이것이 교회의 재정이 되고 별도로 교회 소유의 논이 있어서 공동 작업을 하기도 했다.
특히 나의 모친이 쓰시던 성미 담든 주머니 가 눈에 아롱 덴다..
이 예배당이 6.25. 한국전쟁에 학교가 폭격을 맞아 없어진지라 학교교실 로 쓰였는데 우리가 초등
학교 6학년 적에는 소학교에는 수험반 이라 하여 한반..나머지 또 한반은 예배당..에서 배웠다.
예배당 아렛채 방하나 부엌하나 툇마루 로 된 건물이 있었고 우물이 있고 전면에는 교역자 사택
이 있었고 한시절 심심하면 교역자 없는 사택이 청년들의 집회장 또는 교제 장 이 되기도 했다.
그 시절이 아마도 청년시절 까지 였나보다..그 후로는 학업으로 인한 이주와 군대. 사회진출 등등
사정으로 의흥예배당 에 들릴 수 없었고 지금 2층 은 불럭 시멘트조 콘크리트 지붕2층으로 된
예배당이 되어 있고 풍금도 없던 시절이 변해서 피아노가 노여지고 많은 변화가 있는 그 예배당을
아무도 몰래 들어가 가만히 앉아 묵상하며 눈물을 흘렸다..여러 마음에서 눈물이 나더라..
나름데로 의 신앙이라는 이름의 것에 심취해 보기도 하도록 나를 이끈 곳이 이 예배당 이고 지금도
정신.마음.진리. 영. 등 의 분야를 해매다가 지금은 한곳 나홀로 겠지만 맞다고 여겨지는 부분의
수련을 하고 있다..나의 정신영역의 첫장을 연 곳이 이곳 예배당 이고 여러 착오를 겪고 지금 안정
을 찾게 한 곳도 이 예배당 이다..영적인 영역에 발을 들이게 한 동기가 담긴곳이라 는 거다.
공동무지(공동묘지)
공동묘지는 용덤아래 한독골 입구에서 서편으로 수백기 의 무덤이 있는(있던?) 곳을 말 하는데.
그 시절은 신작로 가의 언덕에 아름들이 소나무 가 있었고 그기를 작은 공동묘지라고 불렀으며
그기에 비교적 봉분이 높고 규모가 큰 무덤 두엇이 있었는데 지금을 그 아름들이 소나무를 누가
어떻게 회손 했는지 알길 없어나 없어지고 말았다..정녕 안타까운 일이다.
선산이 없거나 멀리 모시기 어려운 죽음의 장례는 고새이 집 상여에 얹혀 누구나 이 공동묘지 로
갔다..이 공동묘지의 지질은 그의 가 황토며 간간이 바위도 있었고 배수되는 골(도랑) 도 있었지.
수 많은 사연들을 품은 혼령들이 잠든곳 공동묘지 며 간간이 성묘하고 벌초 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버려진듯 풀이 무성하고 밤이면 혼 불이 날아다니고. 귀신이 울었다..
죽음과 호곡 소리 그칠난 없던 그 공동묘지 는 세월 따라 조금씩 잠식 되어 개발? 되어 갔는데..
지금은 어떤 형태로 변했는지 궁금하다..딱골 시절에는 담력을 키운다고 밤마다 찾았고 고세이집
상여 있는 곳에 한밤중에 문을 열어도 보았고..한시절 나름데로 의 잊혀지지 않는 장소가 여기다.
공동묘지 치그리 그리고 한독골 입구 계곡가 바위 그 위에 새겨진 사연들~~이를 어쩔고...
고세이 집
고세이 집은 남천방 들머리 천방둑 비탈에 있었고(있고?) 여기에는 마을에서 일어나는 죽음을 싣
고갈 상여가 보관되어 있었다..이 고세이 집 관리는 마을사람 전체의 공동관리며 이 시설과 장비
를 유지하고 보수 하는 일도 공동의 일이 였다. 상여에 칠이 벗겨지면 제사를 지내고 보수하며 칠
도 하고 앞에는 닭? 한 마리 그리고 혼백을 실어 모시는 앵이(작은 상여) 들이 있었지.
상여에 죽음싣고 마포비단 으로 가리고 한지 물들여 꽃을 만들어 장식하거나 생화로 장식하거나
했고 운반과 기타 장례절차 의 도우미 와 실무 동원인원 은 상도계 를 조직하여 윗대 어른들의
죽음을 대비하다가 초상이 나면 모여 상여를 꾸미고 매고갈 광목이나 굵은 새끼(줄) 로 멜 감을
만들고 밤새워 준비를 했다..상도계의 자금은 곡식이며 철따라 얼마간씩 출연하여 모았다.
죽음 싣고 묘지로 나가는 상여의 모습은 상여 앞 부분에 앞소리꾼이 타고 앞소리를 먹인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북망산천 나는 간다..앞소리 먹이면 상여를 메고가는 사람들(상여꾼)들은
어화호 어화호 어화남다 어화호..상주는 상복 두건 트드레 쓰고 새끼 나 삼배로 허리끈 하여 매고
이이고 아이고 어이어이..엉엉..곡하며 뒤 따른다.
그 뒤로는 만장를 치겨든 무리들이 만장을 깃빨인양 펄럭이며 뒤따르고..가다가 험한길이나 추억의
길 들을 만나면 앞소리 꾼이 가기싫다 더는 가지 싫다..위협을 하면..상주나 친지가 돈를 걸어둔
새끼에 꽂아주고 달래며 가도록 하고..아무리 어렵고 험한 길이라고 상여 멘 사람들 다치지 않고
징금다리 외길 좁디 좁아도 물 안무치고 건너는 것은 앞소리꾼의 요령이다..
매장할 곳 에 도착하면 미리 매장할 구덩이 을 파두는 것이 보통이여서 곡하고 절하며 하직인사 드
리고 맏 상주가 오지랖에 흙을 담아 세 번 덮고 나서 일꾼들이 수굼포(삽)로 흙을 덮는다..봉분이
만들어지고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봉분에 돌축도 두르고 관 주변에 횟가루를 채우기도하고..다래질 하여 봉분을 마든다..어히 어히 다레야..이무덤이 왠말인고 앞소리 하면 모두는 어이 다레야~~
다래질 이는 무덤을 단단히 다지는 일이고 다래하는 기구는 나무둥치며 새끼로 줄을 에어 두세사람
이 들었다 노았다 하며 다지고 그 외 일꾼들은 삽질을 하거나 발로 무덤을 밟아 다지기도 했다.
다래 질이 시원찮으면 무덤 가운데 새워둔 막대에 새끼줄을 메고 돈을 꽂아 준다..이건 다래질 수입으로 공동기금이 된다..묻힐 때 까지의 정성이 축제같이 진행 된다,
무덤 두고 돌아오면 빈소차리고 초하루 보름 날 맞으면 삭망이라 하여 절 하고 곡하며 정성이 지극
한 사람들은 시묘 살이 도 몇 년 혹은 몇 달 까지 하고..죽어서 삼일 후 제사 를 무덤앞에서 올리고..보통은 49일 되는 날 상복을 벗는 탈상을 하나..옛 풍습은 3년이다..이 3년상 을 치르는
것은 임금님도 신하에게 허락하는 일이며 민간에서는 필수 였는데..
장례치른 상여는 다시 고세이집 으로 돌아와 보관되고 설치물들을 해체하고 고이 고이 상여를 모신다..우리 대 까지는 의흥읍내동 에 상도계 가 있었고 매호와 함께 상도계 를 하다가 나는
타지로 나오는 바람에 그만 둔 일이 있다..이처럼 고세이 집은 죽음을 품고 있는 엄숙한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