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낭송시]
해, 저 붉은 얼굴 (외9편)
이영춘
아이 하나 낳고 셋방을 살던 그 때
아침 해는 둥그렇게 떠 오르는데
출근하려고 막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데
뒤에서 야야! 야야!아버지 목소리 들린다
“저어—너—, 한 삼 십 만 원 읎겠니?”
그 말 하려고 엊저녁에 딸네 집에 오신 아버지
밤 새 만석 같은 이 말, 그 한 마디 뱉지 못해
하얗게 몸을 뒤척이시다가
해 뜨는 골목길에서 붉은 얼굴 감추시고
천형처럼 무거운 그 말 뱉으셨을 텐데
철부지 초년 생, 그 딸,
“아부지, 내가 뭔 돈이 있어요?!”
싹둑 무 토막 자르듯 그 한 마디 뱉고 돌아섰던
녹 쓴 철대문 앞 골목길,
가난한 골목길의 그 길이만큼 내가 뱉은 그 말,
아버지 심장에 천 근 쇠못이 되었을 그 말,
오래오래 가슴 속 붉은 강물로 살아
아버지 무덤, 그 봉분까지 치닫고 있다
어머니의 강, 그 눈물
이영춘
밤마다 갈잎 부서지는
바람소리를 듣습니다.
어머니 상처 난 심장의
여울물 소리를 듣습니다.
어머니,
한 생에 온통 달빛 속 같으시더니
아직도 마른 한 구석 눈물이 고여
그토록 많은 눈물 밤마다 길어 내십니까
늘, 가을 잎새처럼 젖어 떨고 있는 어머니
이제 어머니의 날개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미 깃털 빠진 상처뿐입니다
간밤에는 별이 지고
어머니 숨결처럼 고르지 못한 미풍이
문풍지를 흔들다 갔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작은 가슴에
큰 불씨로 살아 계신 어머니
깜박이는 등불 앞에
어머니의 실낱같은 한 생애를
누군가, 보이지 않은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자꾸 끌어 당기고 있습니다.
저 광활한 안개 속으로
따뜻한 편지
이영춘
은행 창가에서 아들에게 편지를 쓴다
“춘천 우체국에 가면 실장이 직접 나와 고객들 포장박스도 묶어 주고
노모 같은 분들의 입. 출금 전표도 대신 써 주더라.“고 쓴다
아들아, 이 시간 너는 어느 자리에서 어느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돌아보라고 쓴다
나도 내 발자국 수시로 돌아보겠지만
너도 우체국 실장처럼 그렇게 하라고 일러 주고 싶은 시간이다
겨울 날 창틈으로 스며드는 햇살 받아 안듯
“비오는 날 문턱까지 손수 우산을 받쳐 주는 그런 상사도 있더라.”고 덧붙여 쓴다
살다보면 한쪽 옆구리 뻥 뚫린 듯 휑한 날도 많지만
마음 따뜻한 날은 따뜻한 사람 때문이란 걸 알아야 한다
빗줄기 속에서, 혹은 땡볕 속에서
절뚝이며 걸어가는 노인을 볼 때가 있을 것이다
네 엄마, 네 외할머니를 만난 듯
그들 발밑에 채이고 걸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마음속 눈에 옷을 입혀야 한다
공부라는 것, 성현의 말씀이란 것,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사람 위에 사람을 보지 말고
사람 아래 사람을 보는 눈을 키워라,
그러면 터널처럼 휑한 그들 가슴 한복판을 가득 채우는 햇살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아들아,
비 오는 날 은행 창가에서 순번 기다리다 지쳐 이 편지를 쓴다
빗길을 걸으며
이영춘
빗길을 걷는다 걷는 발자국마다 채이는 생각의 알갱이들,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낮은 것들이 내 눈길 끌어당기는
생각의 알갱이들,
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름 없는 풀꽃들, 풀꽃의 이름들
비는 주룩주룩 내리는데
함지박에 푸성귀 몇 다발 얹어 놓고
풀잎 같은 할머니들이 풀잎처럼 앉아 있다
빌딩의 모서리 발밑에서 혹은 남의 집 담벼락 끝에서
비는 주룩주룩 내리는데
학교에서 돌아올 손자의 해진 양말을 생각하거나
집 떠나간 며느리를 원망하거나
알 수 없는 빗물의 내력,
맨바닥이 내 집 단칸 셋방보다 더 편안할 수도 있는 저 풀꽃들,
비는 주룩주룩 내리는데,
배추 몇 포기, 도라지 몇 뿌리, 토란 몇 알갱이가 그네들 목숨이 되는
목숨들이 하루를 노랗게 물들이고 있다
함지박에 빗물은 고이는데, 고여 흐르는데
빗물이 그네들의 목숨이라면
세상을 허물고 세우는 일도 그네들 함지박 속 빗물 같은 것,
빗길을 걷는다 걷는 발자국마다 질퍽하게 젖은 얼굴들이
내 발자국에 감긴다
비는 주룩주룩 내리는데
어느 날 강가에서
이영춘
저 강물에도 욕심이란 게 있을까
무엇이든 버리고서야 가벼워지는 몸,
가벼워져 흐를 수 있는 몸,
나는 하늘처럼 호수를 다 마시고도 늘 배가 고프다
셀로판지처럼 반짝이는 물결무늬 끝자락에 눈을 맞추고
오래오래 강가를 서성거린다
어쩌면 저 물결무늬는 이 세상을 버리고 떠난 이의 눈물이거나
밤에도 잠들지 못하는 어느 별의 반쪽이거나
오랜 침묵이 눈 뜨고 일어서는 발자국 소리 같은 것,
나는 오늘도 싯다르타처럼 강가에 앉아
돌아올 수 없는 그 누군가를, 그 무엇인가를 기다린다
물결무늬 결 따라 강 하류에 이르면
누대에 세우지 못한 집 한 채 세우듯
조약돌 울음소리 가득 차 흐르는 강변에서
나는 싯다르타처럼 혼자 가는 법을 배운다
바라문을 뛰쳐 나온 그의 황량한 발자국에 꾹꾹 찍힌
화인 같은,
세상 그림자를 지우며 가는 법을 배운다
아들과의 산책
이 영 춘
서른을 훌쩍 넘긴 아들과 강둑길을 걷는다
오래 묵은 이야기들이 체증을 뚫는 듯
강물도 흥겨워 흥얼거린다
느닷없는 아들의 말, 심장을 파고든다
“엄마, 우리들 키우느라고 고생하셨어요.
그 어려운 시절에
우리를 이 집 저 집에 맡기면서......
직장 다니시느라고......“
아들은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노을이 걸린 하늘을 올려다본다
나는 하늘이 쿵- 내려앉는 듯
오래오래 삭혔던 눈물이 혈관을 타고 올라온다
“죽은 시인의 사회” 같은 사각의 틀(型) 속에서
화장실에 가 젖을 꾹꾹 짜 버리면서도 먹이지 못했던
한의 눈물, 한의 핏물, 거꾸로 솟는다
하늘이 버얼겋게 눈을 뜬 채 내 얼굴을 포옥 감싸 안는다
아들은 어느 새
이 어미의 몸과 마음이 불꽃처럼 아프던
그 나이에 이르러
어미 발자국에 고인 눈물의 내력을 알아차렸는가
어미의 뒷모습에 걸린 고단한 그림자의 기억을 읽어내었는가
나는 오래도록 숨 죽이며 내 안에 흐르는 강물 소리를 듣는다
아들과 잡은 손에 따뜻한 피가 돌아가는 소리를 듣듯이
보편성
이영춘
하늘은 참 파랬는데
어머니는 이른 봄날 아침
옆집에 돈을 꾸러 갔다
객지에 나가 있는 막내아들 학비 때문에
옆집 사립문으로 들어가는 어머니의 등허리는
여느 날보다 더 구부정하게 보였고
길 가는 사람들은 슬금슬금 곁눈질로
괴상한 짐승 보듯 훔쳐보며 지나갔다
아들은 멀뚱멀뚱 길가에서
그 어머니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장승처럼 서서 기다리고
어머니는 땀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물기를
치마 섶으로 훔치면서
사립문을 나오고 있었다.
아들의 손을 덥석 잡는 어머니의 손 ,
손은 꽁꽁 언 빈 가슴이었다
포개진 두 손등 사이로 뜨겁게 떨어지는 물방울
아침 햇살은 두 사람의 손등 위에서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백야, 그 사랑
이영춘
달빛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의 어깨에 손 얹고 싶었다
담 모퉁이를 돌아가던 달그림자 어깨에 손을 얹듯이
천 년 동안 고였던 물방울들이 주르르 빙하를 타고 쏟아지듯이
그에게로 기울었던 장미꽃들이 우르르 쏟아지는 눈물이 되고 싶었다
둘이면서 하나였던 푸른 빙벽의 길, 길 무늬 따라 무지개 꽃 수 놓으며
우리는 걷고 또 걸었다 길이 없어도 있는 듯이 길이 있어도 없는 듯이
고전의 문지방을 깨고 러시아의 백야에 홀로 서듯
우울과 생각이 잠 못 들게 하는 밤,
나는 몽상가처럼 저무는 창가에 오래도록 앉아
백야를 꿈꾸었다
그가 떠난 길 위에서 그와 만난 길 위에서
잠들지 못하는 밤을 위하여
백야, 너를 위하여
겨울 편지
이영춘
흔들리는 바람의 가지 끝에서
셀로판지처럼 팔딱이는 가슴으로 편지를 쓴다
만국기 같은 수만 장의 편지를 쓰던 그 거리에서
다시 편지를 쓴다
그대와 나 골목 어귀에서 돌아서기 아쉬워
손가락 끝 온기가 다 식을 때까지
한 쪽으로 한 쪽으로만 기울던 어깨와 어깨 사이
그림자와 그림자 사이
그림자처럼 길게 구부러지던 길 모퉁이에서
뜨겁고 긴 겨울 편지를 쓴다
오늘은 폭설이 내리고 대문 밖에서 누군가 비질하는 소리
그 소리에 묻혀 아득히 멀어지다가 다가오는 소리
그대, 눈雪이 되어 눈발이 되어 나에게 돌아오는 소리
이 겨울밤 내 창 문풍지 뜨겁게 흔들리는데
나는 그대의 언 땅에 편지를 쓴다
달빛 휘어진 어느 길모퉁이에서 헤어진
꽃잎 같은 사랑으로 꽃잎처럼 사라져간 그대에게
편지를 쓴다
사직지신 社稷之神
이 영 춘
검은 신들이 밭고랑에 엎드려 있다
허리 한 번 펴 보지 못한 허리들이 누워 있다
목숨처럼 지구 한 귀퉁이를 붙잡고 살아온 갈퀴손과 허리들
숨 가쁜 목숨들이 밭고랑에 엎드려 강물이 되고 있다
해발 천이백 미터 산간 오지 마을
문명의 강물은 저만치 먼발치로 흘러가고
하늘이 갈아 놓은 밭고랑에 이삭 줍듯 땅에 엎드려
우물 같은 생을 파다가
노을처럼 소리 없이 넘어가는 저 처연한 목숨들,
신들이 엎드려 있다 저 깊은 밭고랑에
한숨과 눈물과 잘려 나간 손톱들이 거름이 된 저 깊은 밭고랑에
흙구덩이처럼 허물어져 내려가기만 하던 저들의 삶,
진흙 같은 얼굴들이 잠들어 있다
한 켤레 신발,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다시 일어설 수 없이 잠든 몸,
밭고랑에 엎드려 있는 저 지친 몸들
흙덩이처럼 돌덩이처럼 입 다문 신들이
하늘로 가는 길을 내고 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천상의 길을.
**이영춘 약력 **
*봉평출생 *1976년『월간문학』등단. *경희대국문과 및 동,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 졸업.
*시집:『시시포스의 돌』『귀 하나만 열어 놓고』『네 살던 날의 흔적』『슬픈 도시락』』『시간의 옆구리』
『봉평 장날』『노자의 무덤을 가다』『신들의 발자국을 따라』 『따뜻한 편지』.『오늘은 같은 길을 세 번 건 넜다』.
『그 빠가 아파서 울었다』. 시선집『들풀』 『오줌발,별꽃무늬』 *시 감상해설집 『 시와 함께, 독자와 함께 』 등.
*수상:제3회윤동주문학상. 제12회고산문학대상. 제1회인산문학상. 제8회시인들이뽑은시인상.
제19회강원도문화상. 제9회동곡문화예술상. 제5회대한민국향토문학상 제6회한국여성문학상.
제14회유심작품상특별상. 제5회난설헌시문학상. 제15회천상병귀천문학대상. 제16회김삿갓문학상대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