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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공간과 SNS에서 언어폭력과 불교적 대응 / 박수호
특집 | 좋은 말 나쁜 말 그리고 불교
1. 악플과의 전쟁은 언제까지?
새로움 혹은 ‘미지’의 세계는 설렘과 흥분의 원천이자 혼돈과 불안의 기저이기도 하다. 문명사적 전환으로 평가되는 인터넷의 출현과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은 인류에게 극명하게 대비되는 빛과 어둠을 동시에 선사했다. 다양한 층위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관계의 확장과 소통의 증대, 방대한 정보량과 신속하고 광범위한 정보 유통은 정보사회라는 새로운 사회의 도래를 이끌었고, 사람들의 삶은 보다 편리하고 스마트해졌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하위문화의 분화가 일어나는 동시에, 사회의 각 구성단위는 상호의존적이고 역동적인 관계로 재편되었다. 또한 사회적 · 공간적 이동성의 증대로 인해 조성된 이질적인 사회 환경은 생활세계의 다원화를 고무시켰으며, 사회 내의 갈등 현상이 빈발하고 중첩되며, 심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림 1〉 악성 댓글과 관련된 언론 보도 사례
특히 쌍방향 의사소통을 특징으로 하는 인터넷은 새로운 갈등 이슈가 출현할 가능성을 높이고, 누구나 자유롭게 갈등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러한 갈등의 편재적 상황 속에서 다양한 유형의 사이버폭력들이 일상화되고 있다. 비대면적 소통 환경이라는 구조적인 특성 때문에 사이버폭력은 대체로 언어폭력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이버폭력으로 여겨지는 악성 댓글은 피해자 개개인이 감내해야 할 스트레스가 엄청나고, 명예훼손이나 자살 등의 범죄 및 사회문제로 비화하는 경우가 많다. 〈그림 1〉에서 알 수 있듯이 악성 댓글의 대상은 연예인, 소설가, 대학 등 범위를 특정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전쟁’이라는 자극적인 표현으로 묘사될 정도로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 있다.
악성 댓글을 포함한 사이버범죄에 대한 처벌 규정이 빠르게 강화되고 있지만, 현실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게다가 문자언어를 중심으로 소통하는 인터넷과 사회연결망 서비스(이하 SNS)에서는 항시 ‘표현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근본적 가치를 둘러싼 논란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악성 댓글과 관련된 문제가 발생하면 일시적으로 이에 대한 우려와 비난 여론이 비등할 뿐, 효율적인 대응방안은 아직까지도 요원할 따름이다. 이처럼 처벌과 통제라는 방법으로 사이버공간 및 SNS에서 나타나는 언어문화의 폐해를 극복하는 것이 쉽지 않다면 새로운 관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는 것을 신중히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사이버공간과 SNS를 중심으로 나타나는 언어문화의 특성과 문제점을 개괄하고, 불교적 관점에서 이를 이해하고 대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2. 사이버공간과 SNS의 특성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사이버공간은 서로 다른 장소에 있는 사용자들을 컴퓨터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함으로써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서로 떨어진 사람들의 의사소통을 매개한다는 점에서 전화도 동일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전화와 비교할 때, 사이버공간이 갖는 특별한 점은 사람들의 메시지가 정보화되어 컴퓨터 네트워크에 저장되고, 가공 및 재가공 된다는 것이다. 즉, 전화는 엎어진 물처럼 통화 내용을 보관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전달할 수도 없지만, 사이버공간은 저장, 전달, 처리 등이 자유롭다. 이를 통해 사이버공간은 동일한 시간대에 같은 공간에 있어야 소통이 가능하다는 구어(口語) 기반의 의사소통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게 해준다.
사이버공간은 직접적으로 대면하여 상호작용하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가 원하는 한 익명성을 보장받을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기존의 모든 사회적, 귀속적 지위의 구속에서 벗어나 누구나 대등한 관계에서 자유롭게 소통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은 양날의 칼과 같다. 상대방에 대한 사회적 맥락을 알 수 없다는 사실과 익명성에 기대어 비난이나 욕설, 루머 등을 정제되지 않은 상태로 내뱉기 때문이다. 악성 댓글에 대한 대안으로 가장 먼저 ‘실명제’가 시행되었던 이유는 익명성이 사이버공간의 일탈적 언어문화에 미치는 주요 원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명제 시행 이후에도 악성 댓글로 인한 피해는 줄어들지 않았고, 결국 실명제는 폐지되었다.
한편 SNS는 정보통신망을 통해 자기 표현, 정보 공유, 인맥 관리 등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형성하고 관리하는 서비스이다. 불특정 다수와의 비대면적 소통을 기본 특성으로 하는 사이버공간과 달리 SNS는 ‘나’를 중심으로 점차 확장되어 가는 관계망이다. 보다 정확히는 친구 혹은 친구의 친구처럼 직 · 간접적으로 서로 연계되어 있는 사람들의 의사소통망이라고 할 수 있다.
SNS는 이용자들로 하여금 짧은 대화를 지속적으로 자주 나누게 함으로써 지인들 사이에 서로 시공간이 접합되는 것과 같은 체험을 제공한다. SNS를 통해서 유지되는 사회적 관계는 높은 접촉 빈도에 비해 이를 유지하기 위해 투여되는 시간이나 비용 등 자원의 양은 많지 않다. 또한 관계의 관여도도 그다지 높지 않다. 오프라인 공간에서는 만남을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고, 함께하는 동안은 상대방에 집중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비용이 발생한다. 그러나 SNS를 이용하면 굳이 따로 시간을 내지 않아도 되고, 다른 활동과 병행하면서 상대방과 소통할 수 있고, 비용도 훨씬 적게 든다. 나아가 상대방의 행동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아도 소통이 이어지는 데 문제가 없다. 바로 이런 점이 대면적 상황에 비해 보다 효율적으로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 발전시킬 수 있는 SNS의 매력이다. 아주 친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마치 친밀한 관계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필요할 때 언제든 접촉할 수 있도록 유연하게 거리를 조절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SNS에 열광하는 또 다른 요인은 정보습득의 효율성이다. 정보사회에서는 정보가 가치를 만들어내는 원천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 정확하고, 더 빠르고, 더 많은 정보를 갈구한다. 인터넷이 출현하면서 사람들이 환호했던 것은 정보의 바다라고 일컬어질 만큼 무궁무진한 정보가 축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어떤 정보가 가치 있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인지를 구별해내는 데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정보의 유효기간이 짧아지면서 정보 가치가 떨어지는, 그래서 쓸데없는 쓰레기 정보가 그런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불특정 다수에 비해 신뢰도가 높은 지인들의 네트워크인 SNS는 보다 효율적으로 정보를 선별해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SNS를 통해서 얻게 되는 정보들은 출처를 알 수 있고, 상대적으로 자신의 관심의 부합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SNS에서의 소통은 낯선 타인과의 피상적 소통보다 친밀한 지인들과 교류하는 관심의 연대가 중심이 되며, 이용자들이 서로의 관심사에 대해 자유롭게 피드백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공개된 쌍방향적 대화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볼 때, SNS는 사이버공간과 달리 상대적으로 익명성이 낮은 소통구조로 되어 있다. 그러나 SNS에서도 악성 댓글을 비롯한 일탈적 언어문화의 폐해는 여전하다. 이것은 정보와 오락이 섞여 있고, 공적 · 사적 대화 주제와 양식이 함께 존재하며, 내가 잘 아는 사람과 잘 모르는 사람이 한데 어울려 있는 SNS의 특성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우선 SNS는 사이버공간에 비해 익명성이 상대적으로 낮을 뿐이지, 비익명적인 소통 공간은 아니다. ‘친구의 친구’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고, ‘사돈의 팔촌’은 모르는 사람과 마찬가지이다. 즉, SNS를 통해 관계를 맺는 사람들의 수와 범위가 확장되는 만큼 모르는 사람과의 소통 또한 늘어날 수밖에 없다. 사이버공간을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된 무대에 비유할 수 있다면, SNS는 관계자만 출입할 수 있는 무대 뒤편의 대기실에 비유할 수 있다. 소수의 관계자만 함께하는 대기실은 배우의 사적인 공간이라고 볼 수 있지만, 팬들이 몰려든 대기실은 더 이상 배우의 사적 공간이 아니다.
이러한 특성을 가진 SNS의 부정적 측면으로 거론되는 주요한 쟁점들은 원치 않는 사생활 노출과 그로 인한 사람들의 비난과 공격, 비대면적 소통으로 인한 소통의 왜곡, 민감한 이슈를 둘러싼 첨예한 대립의 증가, ‘키보드 워리어(자판 싸움꾼)’의 증가와 그에 따른 언어폭력의 심화 등이다. 가까운 지인과만 공유하고자 했던 프라이버시가 내가 알지 못하는 ‘지인의 지인’을 통해 사람들에게 공개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비난이 주는 충격과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전후 사정이 배제된 채 감정을 알 수 없는 글로만 혹은 생각을 알 수 없는 이모티콘만으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은 말하는 사람의 의도와 무관하게 듣는(정확히는 보는) 사람의 관점에서 해석됨으로써 왜곡의 가능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 서로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지인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민감한 이슈에 대한 대립은 상대방에 대한 서운함과 함께 더욱 첨예화되고, 자기 의사를 보다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극단적 표현의 사용을 주저하지 않는다. 이런 현상들이 비단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SNS는 이를 빈번하게 보여줌으로써 보다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3. 통신언어의 특성과 문제점
통신언어는 간단히 말해 인터넷이나 SNS 등 사이버공간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지칭한다. 사이버공간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문자언어, 이른바 ‘글말’이다. 문자언어는 대체로 기록되어 오랫동안 보존되고, 불특정의 사람들에게 공개될 수 있기 때문에 공적인 성격을 갖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이유로 문법의 영향이 구어보다 더 강하고, 절제된 표현을 하는 ‘글’로 나타난다. 그런데 통신언어는 문자로 기록된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읽고 쓰는 글보다는 하고 듣는 ‘말’에 더 가깝게 인식된다. 채팅방에서 상대방의 반응을 기다리며 “써봐.” “읽고 있어?” 등의 표현보다 “말해.” “듣고 있어?” “얘기해.” 등의 표현이 더 익숙한 것이 하나의 사례이다. 그런 점에서 통신언어는 ‘글’이 가진 구조적 특성 속에서 ‘말’을 표현해야 하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 통신언어는 1990년대 중반 무렵부터 일반화되었다. 처음에는 인터넷 게시판과 채팅방으로 한정되었던 통신언어는 어느새 인터넷을 벗어나 일상생활 속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일상어가 되었다.
이정복은 이제는 일상어가 되어버린 통신언어의 특징을 간편하게 쓰기, 생생하게 쓰기, 재미있게 쓰기, 친밀하게 쓰기, 자유롭게 쓰기 등 다섯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말을 글로 옮기는 과정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간편하게 쓰기는 줄임말의 사용, 소리 나는 대로 적기, 자음만 적기, 띄어쓰기를 하지 않고 붙여 적기, 맥락에 비춰볼 때 충분히 알 수 있는 문장 구성요소 생략하기 등을 통해 글로 옮기는 과정의 시간과 노력을 줄이는 현상을 의미한다. 생생하게 쓰기는 의미 전달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방법이다. 의성어나 의태어를 자주, 그리고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 음절을 늘이는 것, 이모티콘의 사용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재미있게 쓰기는 무미건조한 분위기를 전환해 소통(대화)에 집중하게 하는 효과를 갖는다. 의도적인 오타를 쓰거나 영어나 숫자, 이미지 등을 이용한 글자 바꾸기 등 다양한 ‘말놀이’가 여기에 해당한다. 친밀하게 쓰기는 은어나 전문 용어, 사투리 등을 사용함으로써 특정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유대감이나 동질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방법이다. 여기에는 즐거움이나 슬픔 등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의 사용도 포함된다. 자유롭게 쓰기는 억압적인 사회 규범의 틀에서 벗어나 해방감을 느끼기 위한 표현 방식이다. 의도적이고 적극적으로 규범을 비틀고, 해체하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형식을 위반하는 경우가 많다. 비속어의 빈번한 사용, 차별과 무시, 비하 등을 내포한 혐오 표현, 적대적이고 공격적인 표현 등이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통신언어는 다양한 분야에서 꾸준하게 신조어들을 만들어내고 유행시키면서 일상화되고 있으며, 표준어 등재를 통해 당대의 세태를 언어문화 속에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언어의 왜곡과 문법 및 맞춤법 파괴, 세대 간 · 집단 간 의사소통의 단절 등과 같은 부정적 측면도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우선 통신언어의 오 · 남용은 의사소통의 왜곡을 초래한다. 통신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예 소통에서 배제되거나 상대방의 의도를 오해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간편하게 쓰기, 생생하게 쓰기, 재미있게 쓰기, 친밀하게 쓰기 등의 특징을 보여주는 통신언어들은 자유롭게 쓰기에 해당하는 통신언어들에 비해서 겉으로 보기에 큰 문제점이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간편하게 쓰는 과정에서 의미 전달의 명확성이 약화되고, 생생하고 재미있고 친밀하게 쓰는 통신언어의 사회적, 상황적 맥락들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면 소통 과정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 이는 예기치 못한 반응을 이끌어냄으로써 긴장과 갈등 상황을 만들게 된다. 또한 자유롭게 쓰기 유형에 해당하는 통신언어들의 상당 부분은 그 자체로 이미 갈등과 대립의 불씨들을 안고 있다.
생생하게 쓰기나 재미있게 쓰기, 친밀하게 쓰기 등의 통신언어는 비대면적 상황에서 소통해야 하는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언어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상대방의 관심과 재미를 이끌어내기 위해 사용하는 자극적인 표현은 상대방을 조롱하거나 무시하는 의도로 읽힐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친밀함을 표시하거나 동질감을 드러내는 표현이 지나치게 되면 편 가르기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상대방의 동조를 구하기 위해 사용하는 표현도 때로는 선동적이고 억압적으로 인식되며, 이런 맥락에서 사용되는 단정적 표현은 폭력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이러한 양상은 소통의 주제가 첨예한 대척점을 내포하고 있는 여성, 난민, 소수자, 지역, 이념 등일 경우에 ‘혐오 발언’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높다. 혐오 발언은 그 자체로도 폭력적이고 갈등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되지만, 혐오 발언을 비판하는 경우도 악성 댓글이 폭주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더욱 큰 문제점을 안고 있다.
4. 사이버폭력의 통제와 불교윤리의 적용 가능성
1) 사이버폭력에 대한 기본 이해와 기존의 대안
사이버공간에서 나타나는 폭력적 현상에 관한 기존의 연구들은 폭력의 양상으로는 언어폭력과 성폭력에 주의를 기울였고, 폭력의 원인과 대응방안에 대한 논의에 관심을 집중했다.
사이버공간에서 발생하는 언어폭력 대부분은 플레이밍(flaming, 불붙이기)이나 악성 댓글에 의한 모욕이나 명예훼손 등이다. 플레이밍은 욕설이나 거친 표현 등을 통해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유발하는 행위이다. 채팅이나 게시글, 댓글 등에서 절제되지 않은 플레이밍은 다른 인터넷 이용자들을 감정적으로 도발하게 되고, 이러한 도발은 사이버공간상의 말다툼으로 쉽게 전이된다. 사이버공간에서 발견되는 갈등 상황은 이러한 플레이밍으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인터넷을 통해 개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의 게시물을 유포하는 것이 사이버 명예훼손이다. 사이버 명예훼손은 현실공간에서의 명예훼손과 달리 인터넷이 가지는 신속하고 광범위한 파급효과 때문에 그 피해는 상상하기 어렵다. 또한 인터넷의 특성상 최초 게시물이 삭제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이전에 다른 컴퓨터나 네트워크에 옮겨 저장되고 편집된 게시물은 삭제할 수 없다. 최근 나날이 발달하고 있는 검색 기술은 과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방대하고 정확한 정보들을 검색해 내고 있다. 따라서 인터넷을 이용한 명예훼손은 언제든 되풀이될 가능성이 상존하는 원죄와도 같다.
사이버 성폭력은 사이버공간에서 타인에게 성적인 수치심이나 혐오감 또는 불쾌감을 유발하는 행위이다. 대부분의 사이버 성폭력은 대화방이나 쪽지 보내기 등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상대방 의사를 무시하고 음담패설을 계속하거나, 채팅 중 성적인 질문을 하는 것, 상대방의 동의 없이 ‘컴섹’을 요구하고, 성적 모멸감을 유발하는 게시물이나 자료를 올리는 행위, 메일이나 메모를 통해 일방적인 만남을 강요하는 등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심한 경우는 채팅 중 번개 모임을 통해 만난 뒤 실제로 성폭력을 가하는 예도 있고, 사이버스토킹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종종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
사이버폭력의 원인과 관련한 연구들은 사이버공간의 기술적 속성에서 원인을 찾는 입장과 사이버공간을 통해 유통되는 컨텐츠의 내용에 초점을 맞춘 시각, 이용자가 사이버공간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를 중심으로 설명을 하는 상황 중심적 접근법, 사이버문화의 구성적 속성 등이 있다. 즉, 사이버공간의 익명성으로 인해 사회적 통제가 약화되었기 때문에 사이버폭력이 나타난다는 설명, 사이버공간을 통해 유통되는 음란 · 폭력물에 자주 접하게 되면서 일탈행동이 늘고 있다는 주장, 사이버공간을 기존의 사회적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욕구충족의 공간으로 인식하면서 사이버폭력이 증가한다는 입장, 사이버문화 자체가 기존 질서와 현실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속성을 갖고 있으므로 사이버폭력을 조장할 수 있다는 입장 등이 그것이다.
갈퉁이 제시한 폭력의 유형론을 중심으로 이상의 논의들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비대면성과 익명성, 탈맥락성이라는 사이버공간의 기술적 속성으로 인해 사이버폭력이 발생하는 구조적 틀이 형성되어 있으며, 빈약한 토론 문화, 감정적이고 선동적인 군중심리에 대한 사회적 취약성, 집단주의를 통해 강화되는 배제와 소외의 문화 등이 사이버폭력을 정당화하는 문화적 토대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적, 문화적 토대 위에서 직접적인 사이버폭력은 소통의 왜곡과 그로 인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현실공간의 의사소통 과정에서 주고받는 메시지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단서들이 차단되고, 약화된 신뢰성, 개인 간에 나타나는 문자해득력 편차 등이 사이버공간의 이용자들 사이에 오해를 불러일으키면서 사이버폭력으로 전화되는 것이다.
사이버폭력에 대한 이러한 인식을 토대로 제기된 대응방안은 주로 법적, 제도적 장치들을 통한 통제와 규범 문화의 재정립으로 요약할 수 있다. 사이버폭력을 통제하기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들은 이미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다. 그럼에도 사이버폭력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그 정도나 심각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는 것은 법이나 제도만으로는 통제가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성찰을 기초로 사이버공간에서의 바람직한 행위규범을 정립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네티켓을 강조하고, ‘선플 달기 운동’을 전개하는 등의 활동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2) 사이버폭력의 통제를 위한 불교윤리의 적용 가능성
사이버공간은 불교적 세계관과 친화성이 높다. 정보는 항상 새로워지고 다듬어지기 때문에 끊임없이 변화하며,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삼법인의 내용과 개념상 일치하고 있다. 네트워크에 기반한 사이버공간은 각 결점 사이의 관계 유지가 중요한 과제로 부각된다는 점에서 행위자 및 관계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업의 논리는 상관성이 높다. 또한 업의 논리와 연기론은 사이버사회의 가치관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다.
또한 사이버공간의 바람직한 행위규범을 만들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사이버공간이 공식적 공간이든, 욕구충족을 위한 놀이 공간이든 간에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공간이라는 점을 자각하는 일이다. 혼자서 컴퓨터 속의 세상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은 무수한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세상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서로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당위가 성립되고, 그 위에서 행위규범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감안했을 때, 불교윤리의 적용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업과 연기의 가르침에 기초한 동체대비(同體大悲) 정신과 보은(報恩)의 개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간에 대한 존중, 약자에 대한 보호, 서로에 대한 호혜, 사회에 대한 책무 등 사이버윤리의 실천 덕목들은 동체대비와 보은이라는 불교윤리를 통해 더욱 큰 의미를 포괄할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존중과 약자에 대한 보호는 동체대비의 정신을 기초로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과 보호로 확장되며, 호혜와 사회적 책무는 보은의 윤리를 통해서 보다 긍정적인 방향성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몇 가지 핵심적인 불교윤리의 적용 가능성을 검토해 보았다.
(1) 사섭법(四攝法)
사섭법은 보살이 중생을 친애하는 마음을 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보살을 믿게 하고 결국은 불교에 귀의시키는 네 가지 행위를 일컫는다.
보시(布施)란 진리를 가르쳐줌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재물을 기꺼이 베풀어주는 것을 말한다.
애어(愛語)는 사람들에게 항상 따뜻한 얼굴로 부드러운 말을 하는 것이다.
이행(利行)은 중생을 이롭게 하는 여러 가지 행위를 일컫는 것이고,
동사(同事)는 중생에 가까이하여 중생 속으로 들어가 중생과 고락을 같이하고 삶을 같이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섭법은 중생을 결합시켜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사회윤리이다. 따라서 사섭법은 네트워크에서 배제된 개인들을 공동체로 다시 끌어안기 위한 불교 윤리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사섭법에 기초한 정보격차의 해소 노력은 불평등 구조의 극복을 넘어서 다양한 네트워크 구성원들의 조화로운 공존을 추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불교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2) 삼법인(三法印)
삼법인, 즉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은 불교 근본 교리의 핵심이다. 일체의 사물이나 마음의 현상은 생주괴멸(生住壞滅)하기 때문에 고정되고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음을 밝히는 것이 제행무상의 가르침이다. 제법무아는 모든 것은 조건 즉, 인연에 의해 생긴 것이므로 인연에 따라 변천하고 사라지는 것이므로 영원히 변하지 않으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주체로서의 아(我)는 존재하지 않음을 가르치고 있다. 또한 열반적정은 괴로움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하나의 상(相)을 고정불변하는 영원한 실체로 보고, 그것에 집착하는 것에서 연원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집착에서 벗어나 열반에 세계에 도달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삼법인의 가르침은 고정불변하는 단일한 정체성을 상정하고 있는 산업사회적 사회질서와는 맞지 않는다. 그러나 다중정체성 혹은 유연적 자아와 같이 보다 유연한 퍼스낼리티 개념을 상정하고 있는 정보사회와의 친화성은 매우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3) 십선계(十善戒)
십선계는 보살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윤리규범으로 대승불교의 대표적 계율이다. 십선은 삼업(三業) 중에서 현저히 뛰어난 열 가지의 선한 행위를 의미하고, 열 가지 악한 행동을 각각 여의는 것이 곧 십선이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열 가지 악한 행동은 살생(殺生, 생명을 빼앗는 일), 투도(偸盜, 도둑질), 사음(邪淫, 음란한 행위), 망어(妄語, 거짓말), 양설(兩舌, 이간질), 악구(惡口, 욕설, 비방), 기어(綺語, 남을 속이는 말), 탐욕(貪慾), 진에(瞋恚, 노여움), 사견(邪見, 잘못된 생각)을 지칭한다. 이상의 열 가지 악행을 하는 사람은 인과의 논리에 따라 삼악도(三惡道)에 태어나거나 불행한 삶을 살게 되는 반면, 열 가지 악행을 끊고 십선을 행하면 좋은 과보를 받게 된다는 것이 십선계의 기본 골격을 형성하고 있다.
소통의 왜곡과 관련하여 십선계를 주목하는 이유는 열 가지 선행 중에서 네 가지가 언어와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거짓말, 이간질, 욕설과 비방, 남을 속이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하는 십선계의 가르침은 현재 사이버공간에서 나타나고 있는 왜곡된 소통 상황에 즉시적인 적용이 가능하다. 최근 심각성을 더해가는 악플이나 사이버 명예훼손 등은 바로 이 네 가지 말로 짓는 악행들에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십선계의 실천윤리는 사이버공간의 윤리적 쟁점을 해결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고 판단된다.
십선계는 결국 인과응보의 가르침을 주고 있는 업설(業說)에 근거하고 있다. 선한 행위는 좋은 결과를 가져오고, 악한 행위는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갈파하고 있는 업의 논리는 결국 행위자의 책임을 강조하는 불교윤리이다. 때문에 십선계의 언어 관련 계율들은 문자언어에 의해 상호작용 하고 있는 사이버공간의 행위 주체들로 하여금 소통의 왜곡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를 주문하고 있는 동시에 공존을 위한 책임도 일깨우고 있다.
한편 인터넷은 현실공간보다도 훨씬 역동적이고 ‘과정’이 중요해지는 공간이다. 우리가 별다른 의미 없이 누르는 마우스나 키보드 하나하나가 인터넷을 매 순간 변화시켜가고 있다. 따라서 행위자 개개인의 책임이 무엇보다 중요해지는 것이 정보사회 혹은 인터넷이다. 깨달음을 통한 자아의 완성과 그것의 사회적 회향을 강조하는 불교는 행위자 개인의 문제와 사회적 과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윤리적 기준들을 제시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자세히 논의하지는 않았지만 팔정도와 육바라밀 등도 이러한 기준들에 맞게 재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
5. SNS 언어폭력에 대한 불교적 이해와 그 의미
위에서는 사이버공간상의 불특정 다수와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폭력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불교윤리가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논의하였다. 그렇다면 지인들과의 소통을 기반으로 하는 SNS로 범위를 좁혀서 논의를 이어가 보자. 구체적으로는 SNS상에서 나타나는 언어폭력을 불교적 맥락에서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 살펴보고, 언어폭력을 멈춰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
SNS에서 나타나는 폭력적 상황은 언어에 의해 촉발된다.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이는 구업(口業)과 직결되어 있다. 이는 SNS상의 언어폭력이 외형상 구업으로 분류할 수 있다는 것이지, 신업(身業) 및 의업(意業)과 무관한 것은 결코 아니다. 사피어와 워프는 언어에 의해 인간의 사고가 규정된다는 가설을 제기한 바 있고, 옹(Ong)은 문자는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술이라고 주장한다. 즉, 문자를 통해 의식의 형성과 생각의 재조정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한편 생각과 말은 행동을 촉발하는 중요한 기제가 된다. 생각한 대로 말하고 행동하며, 말이 씨가 되기 때문에 행동하기에 앞서 신중히 생각하고 말을 조심하도록 교육을 받으며 자란다. 또한 생각과 말과 행동은 피드백을 통해 서로를 강화하는 효과를 갖는다. 자기가 한 말이나 행동 때문에 더 강한 어조로 이야기하고, 자기 생각에 더욱 확신을 갖게 되며, 더욱 적극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이런 관계를 도식으로 표현하면 〈그림 2〉와 같다.
〈그림 2〉 생각-말-행동의 관계
이렇게 볼 때, SNS상에 나타나는 언어폭력은 말로 짓는 악업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 모두에 걸쳐서 악업을 짓는 동시에, 악업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불교의 업설은 업에는 과보가 필연적으로 수반된다고 가르치며, 그 바탕 위에서 악업을 소멸하고 선업을 증장해야 한다는 윤리적 규범을 제시한다. 별생각 없이 올린 악플 하나가 상대방에게 괴로움을 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옭아매는 악업의 사슬이 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폭력적 언어 사용을 지양하고, 좋은 말을 하는 것이 곧 업장을 소멸하고 복덕을 짓는 구도이자 수행임을 깨달아야 한다.
SNS상의 언어폭력이 의사소통의 왜곡을 초래한다는 것은 앞에서 충분히 논의한 바 있다. 그런데 언어가 사회 실재와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인식하게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면 의사소통을 왜곡시키는 행위는 연기의 실체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이는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불교의 궁극적 목표와 상충한다. 또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즉, 집단을 이루어 살아가는 존재이다. 집단생활의 기초는 구성원 상호 간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통해서 형성된다. 따라서 의사소통의 왜곡은 인간의 존재 기반을 허무는 위험한 행동이기도 하다. 이렇게 볼 때, SNS상의 언어폭력은 스스로의 존재 기반을 위협하는 동시에 불자로서 삶과 구도행을 방해하는 걸림돌일 수밖에 없다.
최근 더욱 심화되는 SNS상의 언어폭력은 혐오발언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혐오발언은 편을 가르고 상대편에게 고통을 가중시킨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악업이다. 그런데 혐오발언에는 혐오의 대상이 되는 존재에 대한 비뚤어진 욕망이 내재해 있다. 차별하고 무시하고 배제함으로써 혐오의 대상에 비해 우월한 지위를 갖겠다는 탐심(貪心)이 밑바탕에 깔린 것이다. 혐오발언의 상당 부분은 대상에 대한 분노 표출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분심(憤心)이 강하게 배어 있고, 혐오 대상에 대한 편견을 고착시킨다는 점에서 치심(癡心)과도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불교적 관점에서 혐오발언은 삼독(三毒)을 심화시키는 행위이다. 삼독은 열반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는 근본적인 번뇌이다. 결국 혐오발언은 번뇌 망상을 떨치는 것이 아니라 번뇌의 불구덩이로 스스로를 밀어 넣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이상에서 간략히 살펴본 바와 같이 SNS상의 언어폭력은 폭력의 대상에게 고통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결국은 수행에 장애가 되는 마군인 셈이다. 또한 언어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스스로 마군이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구도의 길을 걷는 수행자로서 어찌 마군으로 전락하는 것을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박수호
중앙승가대학교 불교사회학부 교수. 고려대에서 인터넷을 이용한 종교활동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사회학 전공) 취득. 덕성여대 사회학과 겸임교수 역임. 불교를 중심으로 한 종교사회학적 연구와 이를 포교에 응용하기 위한 대안 모색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