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기관(Vestigial organ)이란 동물의 기관 중에서 퇴화하여 원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흔적 정도만 남아 있는 기관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바다에서 사는 고래류는 발이나 다리가 없지만, 고래의 지느러미와 몸속에는 다리뼈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는 물론 고래의 조상이 오랜 옛날에는 육지에서 살았던 동물임을 의미한다.
뱀 역시 고래처럼 다리의 흔적을 지니고 있고, 캄캄한 동굴에 사는 동물이나 심해에 사는 물고기 등은 눈이 퇴화하여 거의 흔적만 남아 있다.
따라서 많은 동물이 지금은 기능을 거의 상실한 흔적기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진화론의 유력한 증거가 되기도 한다.
사람의 몸에도 여러 흔적기관이 남아 있는데, 귀를 움직이는 이각근, 꼬리뼈, 맹장의 충수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일찍이 흔적기관에 대해 연구했던 한 해부학자는 19세기 말에 출간한 책을 통하여 사람의 흔적기관이 무려 86개나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오늘날 인정되는 것은 위의 예를 포함하여 10개 정도이다.
흔적기관인 사람 귀의 이각근 ⓒ 위키미디어
토끼나 개 등은 귀를 쫑긋 세우기도 하고 귓바퀴를 움직여서 방향을 바꿀 수도 있지만, 사람의 경우 극히 소수만이 귀를 조금 미동할 수 있을 정도일 뿐이다. 사람의 귀에도 근육이 여러 개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귀를 움직이는 기능은 크게 퇴화한 셈이다.
사람의 꼬리뼈(coccyx) 부위 ⓒ 위키미디어
꼬리뼈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물론이고 사람과 가장 비슷한 유인원류, 즉 동물분류학상 영장목 사람상과에 속하는 침팬지, 오랑우탄, 고릴라 등도 다른 원숭이 무리와 달리 꼬리가 없다. 꼬리를 지닌 다른 동물들은 꼬리를 매우 유용하게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소처럼 꼬리를 움직여서 파리를 쫓기도 하고, 몸의 균형을 잡는 데에 꼬리를 이용하기도 한다.
사람과 유인원은 비록 외형적으로는 몸 밖으로 돌출된 꼬리가 없지만, 이들의 몸속에는 옛 꼬리의 흔적인 꼬리뼈가 남아 있다. 사람의 꼬리뼈(Coccyx)는 미저골(尾骶骨) 또는 미추(尾椎)라고도 하는데, 척추의 끝부분에 붙어 있는 형태로 되어 있다. 태아의 시기에는 10개에 가까운 꼬리뼈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성장하면서 점차 소실되어 일부만이 결합한 형태로 꼬리뼈를 형성하게 된다.
그런데 사람의 꼬리뼈와 같은 흔적기관은 퇴화하여 이제는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즉 사람의 꼬리뼈는 엉덩이에 있는 대둔근 같은 중요한 근육의 작용점으로서, 직립 자세에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또한 앉을 때에도 골반의 다른 뼈들과 함께 몸을 지탱해주고 균형 유지를 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보고 있다.
맹장과 충수의 구조 ⓒ 위키미디어
인체의 또 다른 흔적기관인 맹장의 충수 역시 상당한 논란이 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맹장과 여기에 붙어 있는 충수를 구분하지 않고 같은 의미로 사용하지만, 사실 이 둘은 구분이 되는 장기이다.
맹장(Caecum)은 인체의 소화기관인 창자 중에서, 소장의 말단부에서 대장으로 이행하는 부위이다. 우리말로는 막창자라고 불리는데, 파충류 이상의 고등동물에 존재하는 장기이다. 그러나 포유동물 중에서도 맹장이 없는 동물도 있고, 초식동물들은 대체로 맹장이 길고 발달해 있는 반면에 사람처럼 잡식성 또는 육식동물은 맹장이 짧은 편이다.
사람들이 흔히 맹장이라고 말하는 막창자꼬리는 충수(Vermiform appendix) 또는 충양돌기라고도 지칭한다. 맹장의 아래쪽 끝에 붙어 있는 길이 6∼7cm 정도의 작고 가느다란 벌레 모양의 관으로서 사람과 유인원 등에게만 있는 기관이다.
사람의 충수는 여러 이유로 염증을 일으키기도 하는데, 흔히 맹장염이라 불리지만 이는 사실 잘못된 표현이고 충수염(Appendicitis)이라고 지칭해야 옳다. 맹장 수술 역시 맹장 본체를 수술하는 것이 아니라, 염증이 생긴 충수 부위를 제거하는 것이므로 의학적으로는 충수절제술(Appendectomy)이 된다.
충수가 없어도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별지장이 없으며, 충수염을 앓아서 수술을 통하여 충수를 제거한 사람들은 전체 인구 중에서 약 6% 정도가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충수는 골치 아픈 충수염이나 일으킬 뿐, 흔적기관으로서 아무런 쓸모가 없는 장기일까? 최근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충수가 나름의 기능이 있는 장기라고 주장하는 과학자들이 적지 않다.
특히 장내세균 즉 박테리아의 역할과 면역체계에 있어서 그들의 중요성 등이 새롭게 밝혀지면서, 충수의 기능 역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박테리아와 충수에 관해 오랫동안 연구해온 학자에 의하면, 충수는 사람의 몸에 유익한 박테리아들을 생성하고 보관하는 제조창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한다. 즉 장내 박테리아는 면역작용을 하는 분자들과 함께 생체막과 같은 것을 형성하여 사람의 면역체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러한 생체막의 밀도가 가장 높은 곳이 바로 충수 부위라는 것이다.
충수를 장과 같은 소화기관의 하나로만 본다면, 소화되는 음식물이 충수 부위를 거쳐서 지나가지는 않으므로 당연히 쓸모가 없는 기관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충수를 소화기관이 아닌 ‘면역기관’의 하나로 본다면, 나름 중요한 기능이 있다는 주장인 셈이다.
각종 질병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은 어쩔 수 없이 항생제들을 복용하기 마련인데, 항생제의 부작용 중의 하나는 인체에 해로운 세균뿐 아니라 유용한 균까지도 죽일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충수가 없는 사람은 항생제를 사용한 후에 건강한 몸으로 회복하는 데에 더 시간이 걸릴 수 있는데, 임상 의사들의 확인 결과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항생제 과용이 문제가 되기도 하는 오늘날, 충수는 쓸모없는 장기가 아니라 더욱 도움이 되는 중요한 장기인 셈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인체의 흔적기관 리스트에서 충수를 제외해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충수는 사람의 조상이 초식동물이던 시절에 발달한 맹장이 퇴행하면서 주름처럼 쭈그러들어 생긴 흔적기관의 하나일 뿐이라는 전통적인 설명을 완전히 뒤집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충수가 그처럼 중요한 기관이라면 사람과 유인원을 제외한 수많은 동물들이 충수가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사람의 충수염은 왜 발생하는가 등에 대한 의문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더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성과를 거두어야 충수와 같은 인체 흔적기관의 수수께끼가 완전히 풀릴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