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열전]
<17> 충무공의 단짝 선거이 장군
“국은 입은 몸으로… 어찌 공을 내세우겠느냐?”
임진왜란서 이순신 장군 도와 맹활약
평산포 전투 대승…조정 보고 만류, 敵유탄에 상처 싸매고 독전하다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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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전사에서 선거이(宣居怡·1550∼1598) 장군의 업적은 눈부시다. 자는 사신(思愼), 호는 친친재(親親齋)다. 9대조인 윤지(允祉)는 명나라 문연각(文淵閣)의 학사로 사신으로 고려에 왔다. 고려에서 호남백으로 봉했다. 왜구를 격퇴한 공을 세웠는데 고려가 망하자 벼슬하지 않고 퇴휴당(退休堂)이라 자호(自號·자기 칭호를 스스로 지어 부름)해 전라도 보성(寶城) 땅에 은거하며 본관도 보성으로 했다.
선거이는 1550년 8월 20일에 태어났다. 이날 밤 큰 호랑이가 와서 모셨는데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7세에 효경을 통달해 앉은자리 오른쪽에 위아래로 크게 ‘충효(忠孝)’ 자를 쓰기에 사람들이 쓴 글자가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자식 된 자는 마땅히 효도해야 한다는 뜻이요, 신하 된 자는 마땅히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내 어버이에게 효도함으로써 남의 어버이에게까지 미치고 내 마음에 충성함으로써 남의 마음에까지 미친다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1569년에 황명인(皇明人·중국에서 귀화한 사람)의 후손들을 발탁하라는 선조(宣祖) 임금의 명령이 있었다. 스무 살의 선거이는 응시하려 상경해 국왕을 알현했다. 선조가 선거이에게 선조(先祖)를 물으니 문연각 학사 윤지의 후손, 판서 형(炯)의 증손이라고 아뢰자 선조가 기뻐하며 이르기를 “너의 모습을 보니 네 선조의 유풍(遺風)을 충분히 계승할 수 있겠다”라며 태복시(太僕寺·궁중의 수레와 말을 관리하는 일을 관장하던 관청)의 내승(內乘·궁내에서 말과 가마를 맡아보던 벼슬)을 제수했다.
1570년에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인사차 유성룡을 만났는데 “내가 이순신을 보고, 그대를 보니 모두 훌륭한 장군감이로다”라며 극찬했다. 그 후 충무공 이순신과 선 장군은 함경도에서 같이 근무했다. 이때 선 장군의 큰 조카인 의경(義卿)이 진도군수로 있었는데, 생사를 알 수 없는 일이 생겨 선 장군이 조카를 찾으려고 떠날 때 충무공이 전별의 시를 지어 주었으니 두 사람의 각별한 관계가 나타나 보인다.
임진왜란 당시인 1594년 정월 11일에는 이순신이 어머니를 뵈러 잠시 자리를 비우자 선 장군 홀로 진을 지키고 있는데 갑자기 왜적이 나타나 이를 격퇴했다. 8월에는 도체찰사(都體察使·전쟁 시 왕명으로 군정과 민정을 총괄하던 최고 군직) 이원익(李元翼)이 영루(營壘)를 살펴보고는 경탄하기를 “이절도(李節度·절도사 이순신)의 재국(才局)과 선절도(宣節度·절도사 선거이)의 담략은 비록 옛적의 명장이라 하여도 뛰어넘지 못할 것이오”라고 칭찬했다. 12월에 남해의 진영에 도착한 선 장군에게 7도의 병사(兵史·군사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리)를 겸하게 했다. 부임한 공은 시를 지었다.
장하다! 문무의 장사여 (壯哉文武士·장재문무사)
오늘날 영웅은 몇이나 되는고 (此日幾英雄·차일기영웅)
삼군의 북소리는 산하(山河)에 진동하고 (山動三軍鼓·산동삼군고)
바다 가득한 전선의 깃발은 바람에 나부끼네 (海 萬幕風·해번만막풍)
잠 못 이루는 한밤중 대궐만 바라보니 (中宵瞻北闕·중소첨북궐)
흐르는 눈물을 창공에 흩뿌리네 (涕淚透蒼穹·체루투창궁)
판탕된 이때에 참된 신하 있어 (板蕩誠臣在·판탕성신재)
한 번 싸워 국은(國恩)에 보답할 충심뿐이네 (一戎報國衷·일융보국충)
1597년 정월에 일본이 다시 군사를 일으켜 경상남도 장문포(長門浦)에 정박했다. 당시 이순신이 참소(讒訴·헐뜯어 죄가 있는 것처럼 꾸며 윗사람에게 고해바침)를 당해 모든 업무를 선거이에게 위임했다. 이순신이 하옥되자 선 장군은 분개해 군관 송희립(宋希立)을 보내 옥중으로 서신을 올려 위로했다.
4월에 적선 수십 척을 경상남도 평산포(平山浦)에서 불태웠다. 이 싸움은 대승이라 부사 이규문(李奎文)·홍운룡(洪雲龍) 등이 전공을 조정에 보고하려 했다. 그러나 장군이 말하기를 “내가 국은을 입은 몸으로 한 가지도 보답한 일이 없다. 사나이는 마땅히 전장에서 죽어야 하고 연후 말 가죽으로 시체를 싸서 장사지낼 뿐인데, 어찌 공을 내세우겠느냐?” 하니 모두 탄복했다.
결전을 위해 조카인 진도군수 선의경, 강진현감 송상보(宋尙甫), 해남현감 유형(柳珩), 사량만호 김성옥(金聲玉), 제포만호 주의수(朱義壽)에게 명령해 크게 싸웠다. 공이 금빛 투구에 붉은 갑옷을 입은 적장을 보자 화살 한 발로 명중시켜 떨어뜨려 죽였다. 다음 날 그 진영으로 돌진해 목을 벤 것이 70여 급이었다.
그러나 선거이는 적의 유탄에 맞아 땅에 떨어져 혼절했다. 부하들이 울부짖기를, “사방에 적병이 퍼져 있고, 믿는 이는 오직 선 원수뿐인데 탄환에 맞았으니 하늘은 어찌하여 우리를 돌보지 않는가?”라고 탄식했다. 공이 상처를 싸매고 독전했으나 상처가 심해져 결국 군중에서 운명했다. 이날 밤에 적병이 습격해와 휘하 일곱 장수와 2만의 군사가 모두 죽었다. 고을 사람들이 공의 자손들과 함께 공을 보성 선영의 청룡동에 엄숙하게 장사를 지냈다.
보성 선씨 혈통은 의협심이 강하고 용감무쌍해 무과 제자 24명을 배출했다. 문과 7명에 비하면 많은 숫자다. 육군참모차장과 전쟁기념관장을 역임한 선영제 장군은 선거이 장군의 13세손, 프로야구의 스타 선동열 선수는 14세손이니 명문의 혈통을 이은 사례다. 더구나 많지 않은 인구(1만94가구·3만8849명, 2005년 기준)에 비하면 과거 급제자도 많이 배출된 명문가다.
<.박희 한국문인협회 전통문학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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