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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8월 13일 목요일
[(녹)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홍] 성 폰시아노 교황과 성 히폴리토 사제 순교자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이스라엘이 유배를 당해 끌려갈 것을 미리 보여 주는 예표로 삼으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해야 한다고 하시며,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임금의 비유를 말씀하신다(복음).
제1독서
<대낮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유배를 가거라.>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2,1-12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사람의 아들아, 너는 반항의 집안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다.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기 때문이다.
3 그러니 너 사람의 아들아,
유배 짐을 꾸려 대낮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유배를 가거라.
그들이 보는 앞에서 네가 사는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유배를 가거라.
행여 자기들이 반항의 집안임을 그들이 깨달을지도 모른다.
4 너는 짐을 유배 짐처럼 싸서 대낮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내어놓았다가,
저녁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유배를 떠나듯이 떠나라.
5 그들이 보는 앞에서 벽을 뚫고 나가라.
6 너는 어두울 때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짐을 어깨에 메고 나가는데,
얼굴을 가리고 땅을 보지 마라.
나는 너를 이스라엘 집안을 위한 예표로 삼았다.”
7 나는 명령을 받은 대로 하였다.
짐을 유배 짐처럼 싸서 대낮에 내어놓았다가,
저녁에 손으로 벽을 뚫고,
어두울 때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짐을 어깨에 메고 나갔다.
8 이튿날 아침에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9 “사람의 아들아, 저 반항의 집안인 이스라엘 집안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하고 너에게 묻지 않았느냐?
10 그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이 신탁은 예루살렘에 있는 수장과
그 안에 있는 온 이스라엘 집안에 관한 것이다.’
11 너는 또 말하여라. ‘나는 여러분을 위한 예표입니다.
내가 한 것과 똑같은 일이 그들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그들은 유배를 당해 끌려갈 것입니다.’
12 그들 가운데에 있는 수장은 어두울 때에 짐을 어깨에 메고,
사람들이 그를 내보내려고 벽에 뚫어 놓은 구멍으로 나갈 것이다.
그는 자기 눈으로 그 땅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21─19,1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19,1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들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 나오는 종은 만 탈렌트의 빚을 탕감받는 것도, 자신의 돈 백 데나리온을 돌려받는 것도 모두 당연하게 여기는 듯합니다. 그러나 정말 두 경우가 모두 당연한 일일까요? 이러한 종의 모습에서 당연함의 기준에 대하여 생각하게 됩니다. 누구에게나 당연한 것이 있는 반면에, 나에게는 당연하지만 다른 이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기에 그분께 사랑받는 것은 당연하고,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아도 될까요? 인간이기에 그럴 수 있는 것일까요? 어떤 일을 당연하게만 받아들인다면 감사하는 마음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위하여 하는 일을 의무로만 느낄 수 있습니다. 때때로 호의가 계속되면 당연하게 여기는 경우를 봅니다. 하느님의 호의가 그러합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느님의 호의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호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보다 우리가 부족한 데도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끊임없이 초대하신다고 여겨야 합니다. 그럴 때 하느님 사랑을 조건 없이 이웃과 나누는 기쁨을 진정으로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종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나 자신을 돌아봅시다. 나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막히지 않기를 기도하며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3)(유청 안셀모 신부)
용서에도 과정이나 절차가 필요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힘든 일이지만,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일이 있다면 바로 용서일 것입니다. 어떤 분 말씀하시기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용서하랍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용서에도 과정이나 절차가 필요합니다. 저쪽에서는 전혀 용서 청할 의지도 없고, 자신의 잘못에 대한 죄책감도 없으며, 피해자의 고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희희낙락하며 지내는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나와 내 가족에게 씻을 수 없는 수모와 상처를 준 그, 백번 천번 생각해도 납득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행동으로 내 인생, 한 가정을 철저하게 파괴한 그를 아무런 절차도 없이 용서한다는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행동입니다.
참된 용서는 가해자 측의 진심 어린 사죄와 합당하게 치러진 대가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아무런 노력도 없이, 그 어떤 사죄의 제스처도 없이 용서를 청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에사우로부터 장자권을 빼앗아 달아난 야곱은 오랜 객지 생활을 하며 대가족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형과 재회를 하는데, 형에게 용서를 받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어마어마한 숫자의 가축들을 미리 사죄의 선물로 보냈습니다. 야뽁강을 건너기 전 사절을 형에게 미리 보내는데, 자신을 완전히 낮추었습니다. 자신을 에사오의 종이라고 칭합니다.
마침내 야뽁강을 건넌 야곱은 형 에사우를 만나기 직전 식솔들과 함께 형 앞으로 나아가면서 7번 큰절을 했습니다. 동생의 그 진정성 어린 사과의 모습에 형 에사우는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자 에사우가 야곱에게 달려와서 그를 껴안았다. 에사우는 야곱의 목을 끌어안고 입맞추었다. 그들은 함께 울었다.”
보십시오. 야곱은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14년 세월 동안 처절히 반성했습니다. 그의 마음 안에는 빨리 용서를 청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가득했습니다.
그 마음의 표현이 선물이요, 자신을 종이라고 칭한 것이요, 7번 절한 것입니다. 진정한 용서에는 바로 이런 진정성 있는 반성과 성찰과 구체적인 노력, 그리고 목숨 건 간절한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야곱은 형 에사오를 향해 주인이라고 칭합니다. 형의 얼굴을 보는 것을 하느님 얼굴 뵙는 듯한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에게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상대방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하게 될 때 진정으로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게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산책 중에 강의를 듣는 것이 저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며칠 전에는 4복음서에 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하는 기쁨이었습니다. 같은 예수님을 전하지만, 4복음서는 저마다 다른 빛으로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께서 유다인의 왕으로 오셨음을 전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예수님의 족보로 복음을 시작합니다. 왕에게는 나라가 있고, 백성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나라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 나라의 백성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온유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에는 구약의 예언이 자주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 예언을 완성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마르코 복음은 “곧”, “즉시”라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하느님 나라는 먼 과거의 이야기도 아니고, 막연히 기다리는 미래의 사건도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는 하느님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은 긴 설명보다 예수님의 행동, 표징, 기적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시작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루카 복음은 구원의 보편성을 전합니다.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동전, 돌아온 아들의 비유는 하느님께서 잃어버린 이를 얼마나 애타게 찾으시는지 보여줍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와 자캐오의 이야기는 구원이 유다인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음을 알려줍니다. 루카 복음의 하느님은 죄인과 가난한 이, 병든 이와 소외된 이를 먼저 찾아가시는 자비의 하느님입니다.
요한 복음은 예수님께서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라고 선포합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있었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문이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단순히 위대한 스승이나 예언자를 넘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보여줍니다. 이렇듯 4 복음서는 하나의 보물을 네 방향에서 비추는 빛과 같습니다. 그 보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의 밭에서 또 하나의 보물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라는 보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용서는 계산이 아닙니다. 횟수를 세는 용서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닮아 가는 삶의 태도입니다.
은을 제련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숙련된 제련사는 용광로 위의 은을 유심히 바라본다고 합니다. 은이 불 속에서 녹아 불순물이 빠져나가면, 어느 순간 은의 표면이 거울처럼 맑아진다고 합니다. 그때 제련사의 얼굴이 은 위에 비치면, 제련사는 불을 끈다고 합니다. 은이 온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제련사가 은을 끝까지 지켜본다는 것입니다. 너무 일찍 불을 끄면 불순물이 남고, 너무 늦게 두면 은이 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숙련된 제련사처럼 우리의 마음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분노, 원망, 불신, 미움, 욕망이라는 불순물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빠져나가면 마음은 호수처럼 맑아집니다. 그리고 그 맑은 마음 안에 하느님의 얼굴이 비치기 시작합니다. 용서는 바로 그때 시작됩니다. 마음이 맑아지면 굳이 용서를 말하지 않아도, 용서가 주는 자유와 기쁨을 알게 됩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심고,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심고,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심고,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전하게 됩니다.
영어로 용서는 “Forgive”입니다. 이 말을 묵상해 보면 “위하여 준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용서하는 것일까요? 첫째, 용서는 나를 위하여 주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가장 실질적인 이유일 수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분노와 원망을 품고 있으면 가장 먼저 상처받는 사람은 나 자신입니다. 상대방은 잊고 살아가는데, 나는 그 일을 붙잡고 밤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마음 안에 미움을 품으면 몸도 마음도 병들게 됩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있다는 ‘화병’도 어쩌면 풀지 못한 원망, 내려놓지 못한 미움에서 오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용서는 상대방에게 주는 선물이기 전에, 나 자신에게 주는 자유입니다. 용서하면 내가 먼저 평화를 얻습니다.
둘째, 용서는 상대방을 위하여 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 있습니다. 옛사람들은 그것을 ‘수오지심’이라고 했습니다. 잘못 하고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많은 사람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마음 깊은 곳에 무거운 짐을 안고 살아갑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음식을 먹어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용서받지 못한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백성사는 그런 사람에게 하느님의 이름으로 용서를 선포하는 은총의 자리입니다. “너는 용서받았다.” 이 한마디가 사람을 다시 살게 합니다. 셋째, 용서는 하느님을 위하여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넘어져도, 진심으로 뉘우치면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도 당신을 못 박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용서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면,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하느님의 더 큰 자비 안에 머물게 됩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이 용서하지 못해서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또 많은 사람이 용서받지 못해서 마음의 감옥에 갇혀 살아갑니다. 용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눈물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용서는 말씀의 밭에 숨겨진 보물입니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미움의 감옥에서 나와 자유를 얻습니다. 원망의 어둠에서 나와 평화를 얻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얼굴이 비치는 맑은 마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말씀의 밭에서 우리는 용서라는 보물을 발견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용서하셨으니, 우리도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기를 청합니다. 내가 용서함으로써 내가 자유로워지고, 상대방이 다시 살아나고, 하느님의 자비가 이 세상에 드러나기를 청합니다.
<하느님처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2)
하느님께서
나를 있게 하시니
나도
스스로뿐만 아니라
나 너머 벗을 있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너그러우시니
나도
스스로뿐만 아니라
나 너머 벗에게 너그럽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부드러우시니
나도
스스로뿐만 아니라
나 너머 벗에게 부드럽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품으시니
나도
스스로뿐만 아니라
나 너머 벗을 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씻으시니
나도
스스로뿐만 아니라
나 너머 벗을 씻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일으키시니
나도
스스로뿐만 아니라
나 너머 벗을 일으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살리시니
나도
스스로뿐만 아니라
나 너머 벗을 살립니다
오늘의 성인
성 폰시아노(Pontian)
신분 : 교황, 순교자
활동지역 : 활동연도+235년
같은이름 : 본시아노, 본시아누스, 폰시아누스,폰씨아노, 폰씨아누스, 폰티아노, 폰티아누스
로마인 칼푸르니우스(Calpurnius)의 아들인 성 폰티아누스(Pontianus, 또는 폰시아노)는 230년 7월 21일에 교황 성 우르바누스 1세(Urbanus I, 5월 25일)를 계승하여 교황직에 올랐다. 그는 232년 로마(Roma) 교회회의를 주재하여 그리스 신학자 오리게네스(Origenes) 일파에 대한 단죄를 확인하였다.
235년 즉위한 막시미누스 트락스 황제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의 관용 정책을 철회하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를 시작하면서 그는 최초의 희생자가 되어 사르데냐(Sardegna) 섬으로 추방되었다.
여기서 그는 함께 추방된 대립교황 성 히폴리투스(Hippolytus, 8월 13일)를 만나 교회와 화해하도록 했다.
그는 235년 10월 29일 또는 30일에 이탈리아의 사르데냐(Sardegna) 섬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시신은 성 히폴리투스의 시신과 함께 성 파비아누스(Fabianus, 1월 20일) 교황에 의하여 로마의 성 칼리스투스(Callistus) 카타콤바에 새로 마련된 교황 묘지에 묻혔다.
그의 예전 축일은 11월 19일이었으나 현재는 성 히폴리투스와 함께 8월 13일에 기념한다.
성 히폴리토(Hippolytus)
신분 : 교부, 순교자, 대립교황
활동지역 로마(Roma)
활동연도 : 170/175?-235년
같은이름 : 히뽈리또, 히뽈리뚜스, 히폴리또, 히폴리뚜스, 히폴리투스
학덕이 뛰어난 로마의 사제였던 성 히폴리투스(또는 히폴리토)는 리옹(Lyon)의 주교인 성 이레네우스(Irenaeus, 6월 28일)의 제자이며 초대교회의 저명한 신학자였다.
그는 교황 성 제피리누스(Zephyrinus, 8월 26일)를 공공연하게 비난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 로마에서 퍼지기 시작한 그리스도론적 이단, 특히 모달리즘(Modalism, 삼위일체 하느님은 한 분이신 하느님의 세 형태에 불과하다는 양태설)과 사벨리우스주의(Sabellianism, 사벨리우스의 이단적인 삼위일체설)에 대한 교황의 관대한 태도 때문이었다.
교황 성 칼리스투스 1세(Callistus I, 10월 14일)가 217년에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때, 성 히폴리투스는 자신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대립교황으로 등극하고 성 칼리스투스의 후계자인 교황 성 우르바누스 1세(Urbanus I, 5월 25일)와 교황 성 폰티아누스(Pontianus, 8월 13일)를 극구 반대하고 나섰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그는 235년 막시미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교황 성 폰티아누스와 함께 사르데냐(Sardegna) 섬으로 추방되었는데, 여기서 그는 교황과 화해하였다.
그는 사르데냐 섬에서 운명하였는데, 갖은 고문 끝에 죽었기 때문에 순교자로 간주되고 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모든 이단 반박"(Refutatio omnium haeresium)이란 저서이다. 이외에도 그는 "다니엘서 주석"(Commentarium in Danielem)과 "아가서 주석"도 저술하였고, "사도 전승"(Traditio Apostolica)이란 책을 저술하였다.
그는 그리스 교부의 한 사람으로 교회 저술가이자 최초의 대립교황이었다. 동방교회에서는 그의 축일을 1월 30일에 기념한다.
성녀 라데군다(Radegund)
활동년도 : 518-587년
신분 : 왕후, 수녀원장
지역 :
같은 이름 : 라데군드, 라데군디스
성녀 라데군다(Radegundis)는 프랑크족의 침략으로 인하여 고향을 등지고 독일 중부 튀링겐(Thuringen)으로 이주하였고, 20세 때에 클로테르 1세 왕과 정략적인 결혼을 하였다. 남편의 성격은 매우 난폭하였지만, 그녀는 인내하여 10여 년을 살다가 자기 오빠가 살해되는 기회를 이용하여 왕을 떠났다. 그녀는 누아용(Noyon)에서 주교의 도움을 받아서 은신하다가 푸아티에(Poitiers)에 수녀원을 세웠다.
그녀는 이곳에 살면서 시인 성 베난티우스 포르투나투스(Venantius Fortunatus, 12월 14일)와 우정을 나누었는데, 그는 나중에 이 수녀원의 고문이 되었다. 이 수녀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정되는 유물로써 유명한데, 성 베난티우스는 이 수녀원의 십자가를 보고 저 유명한 찬미가인 “왕의 깃발이 앞장서니…”(Vexilla Regis), “내 혀는 영광스런 승리를 노래하리…”(Pange, lingua, gloriosi lauream certaminis) 등을 만들었다. 또한 그는 성녀 라데군다의 전기도 썼다.
성 요한 베르크만(John Berchmans)
활동년도 : 1599-1621년
신분 : 증거자
지역 :
같은 이름 : 베르크만, 요안네스, 요한네스,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성 요한 베르크만(Joannes Berchmans)은 어느 구두 수선공의 맏이로 벨기에 브라반트(Brabant)의 디스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사제가 되는 꿈을 꾸다가 13세 때 요한 프로이몬트(John Froymont)라는 사람의 하인이 되었다. 마침내 그는 1615년 말리네스(Malines)에 새로 세워진 예수회 대학에 들어갔고, 그 다음 해에 예수회 수련자가 되었다. 그는 1618년 로마(Roma)로 가서 학업을 계속하였는데, 미소한 일에서 완덕을 추구한 그의 성덕이 널리 알려지고 그의 근면함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은 감명을 심어주었다. 그의 사후에는 수많은 기적들이 일어났다. 그는 1888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요한 베르크만은 복사들의 수호성인이다.
성 막시모(Maximus)
신분 : 수도원장, 증거자
활동지역 :
활동연도 : 580-662년
같은이름 : 막시무스, 막씨모, 막씨무스
성 막시무스(또는 막시모)가 증거자로 불리는 이유는 참 진리를 전하려는 그의 노력과 그가 받은 고통 때문이다.
그는 7세기 최고의 정통교리 수호자였고, 성좌의 최고 권위를 열렬하게 옹호했던 인물이다. 그는 콘스탄티노플 태생으로 헤라클리우스 1세 황제의 비서로 있다가 사임한 뒤에 크리소폴리스(Chrysopolis)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그는 그 후 그곳의 원장으로 여러 편의 신비적인 논문들을 남겼다.
그는 특히 그리스도 단성설을 주장하는 이들과 또 이를 옹호하는 칙서를 낸 콘스탄틴 2세 황제와 투쟁하는 사람들의 지도자로 활약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교황 호노리우스 1세(Honorius I)를 도와 교황권의 확립을 위해 적극 헌신했으며, 콘스탄틴 황제의 단성설을 옹호하는 ‘티포스’라는 칙서를 단죄하기 위하여 649년의 라테라노 공의회(Council of Laterano)에 참석하여 맹활약하였다.
그는 그 때문에 비치아(Bizya)로 유배되었고, 그 후 페르베리스에서 6년을 지내야만 하였다.
그 후 그는 또 콘스탄티노플로 송환되어 고문을 받고 투옥되었는데, 이 무시무시한 여행으로 인한 후유증 때문에 흑해 연안에 있는 라지카에서 662년 8월 13일 운명하였다. 막시무스는 비잔틴 신비주의의 핵심 인물이며 신학, 신비신학 그리고 수덕신학에 대한 많은 글을 포함하여 성서주석, 영적인 대화집 및 전례적인 상징에 관한 논문 “신비 안내서”(Mystagogia)를 저술한 장본인이다.
복녀 제르트루다(Gertrude)
신분 : 동정녀
활동지역 : 알텐베르크(Altenberg)
활동연도 : +1297년
같은이름 : 거트루드, 게르투르다, 게르투르데스, 게르투르디스, 게르트루다, 제르뜨루다, 제르뜨루디스, 제르트루디스, 젤뚜르다, 젤뜨루다, 젤투르다,젤트루다
1227년 9월 성지의 십자군에 가담했던 남편이 죽은 뒤에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Elisabeth, 11월 17일) 왕비는 세 번째 딸을 낳고 제르트루다(Gertrudis)라고 불렀다. 남편이 출정에 앞서 만일 딸을 낳으면 알텐베르크의 프레몽트레 수녀회에 입회시키라고 했기 때문에 어린 제르트루다는 곧 그곳으로 보내졌다. 장성한 그녀는 본인의 의사에 따라 수녀가 되었고 22세 때에는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어머니의 뜻을 따라 그녀는 자신이 물려받은 유산 대부분을 수도원을 짓거나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에 사용하였다.
그녀는 15년 동안 원장직을 맡아 봉사하다가 운명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