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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가운 시선과 손가락질 감수하며
- 대한해협 넘나들며 선택했던 사랑
- 조선인 천재화가에게 아내 남덕은
- 반역과 배신의 징표로 따라다녔다
- 기름때 묻은 손으로 부두 막노동
- 돈이 없어 담배 은박지에다 그림
- 빗물 새고 바람 파고드는 판잣집
- 부산 피란생활은 그렇게 고달팠다
나무를 흔들고 간 바람의 느낌이 심상치가 않았다.
칼날처럼 차가운 빗줄기가 남덕의 야윈 종아리를 후려치자 허리가 휘청했다.
남덕은 칭얼거리는 태성이의 엉덩이를 다독이며 비를 피해 점포 밑 차양으로 들어섰다.
조금 전에 다녀간 S화백 부인의 걱정 어린 얼굴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평소 시래깃국이라도 끓이면 한 냄비 떠서 가지고 오곤 하는 정말 고마운 부인이었다.
"이화백님 아직 안 들어오셨지요?"
"네, 어쩐 일이세요?"
"무슨 이야기 못 들으셨어요?"
"무슨…?"
"태현이 엄만 이제 완전히 한국사람인데 사람들 왜 그러는지 모르겠네…."
힘내라는 듯 남덕의 어깨를 두드리고 나가면서도 부인 얼굴엔 애잔함이 가득 묻어 있었다.
또 어디서 중섭의 일본인 아내에 대한 시비가 붙은 모양이었다.
조선남자와 일본여자와의 결혼이었다.
극복해 나가야할 문제는 산더미였다.
아무리 힘들어도 차근차근 풀어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산더미는 더 높아만 갔다.
이중섭이 그린 '범일동 풍경'. |
이국의 바람은 아직도 익숙하지 않았다.
후퇴하는 국군 화물선을 타고 원산에서 부산으로 내려와
범일동 피난민수용소에서 몇 달을 지냈다.
북에서 피란 온 이들에게 할당된 수용소는 일제 당시 가축대기소로
이용하던 아카자키 창고였다.
시멘트 바닥과 벽에서는 지린내와 오물내가 코를 찌르고, 넘치는 분뇨로
변소 주변은 늘 질척거렸다.
몇 달의 수용소 생활 후 서귀포로 이송되었다가 다시 범일동으로
돌아오는 고달픈 피란생활이 이어졌다.
이번엔 다행히 중섭의 오산학교 후배를 만나 판잣집을 얻을 수 있었다.
범일동 경사진 언덕 끝자락에 위치한 판잣집은 여전히 빗물이 새고
주변은 쓰레기로 넘쳐났지만 그래도 가족끼리 함께 있을 수 있어서 좋았다.
원산이나 서귀포보다 부산은 더욱 정이 들지 않았다.
토박이 여자들은 싸움을 걸 듯 악을 써댔고, 남자들은 한결같이 퉁명스럽고 불친절했다.
특히나 남덕이 일본인이라는 것을 알면 금방 잡아먹을 듯이 눈알을 부라렸다.
그럴 때마다 절실하게 중섭이 필요했다. 하지만 중섭은 종종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온종일 부두에서 막노동을 하고 받은 일당 몇 천원을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데 써버리곤 했다.
"맨날 얻어만 먹잖아. 미안해서 그냥 있을 수가 있어야지. 술빚이야, 술빚."
중섭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중섭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림을 그리지도 못하고 부두에서 막노동 하는 일이 그의 영혼을 얼마나 갉아대고 있을지
훤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화가 친구들과 만나는 것만으로도 그에게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보상이 될 터였다.
물감이 아닌 시커먼 기름때가 묻은 그의 손을 볼 때마다 남덕은 가슴이 무너지는 듯했다.
비는 범일동의 누추한 판자촌 거리를 자우룩하게 덮어 눌렀다.
남덕은 사흘 전 중섭이 그린 마을 그림을 떠올렸다.
동네는 어둡고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검고 거친 나뭇가지들이 전면에 드리워진 마을은 고독과 슬픔이 깊숙이 숨어있는 듯 보였다.
어쩌면 전쟁이 휩쓸고 간 이 나라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그림 제목을 뭐라고 하면 좋을까?"
"…범일동 풍경이네요. 범일동 풍경."
그래, 당신 말대로 하지, 중섭이 헤벌쭉하게 웃으며 그 말을 했을 때 남덕은 폐부 깊숙이 박히는
날카로운 칼날을 느꼈다.
중섭의 그림과 달리 이 동네는 시끄럽고 무질서했다.
지저분한 난민들과 깡통 찬 거지들은 문밖만 나서면 언제든지 마주칠 수 있었다.
피란민 수용소에서 생활할 때나 지금이나 딱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여전히 찢어지게 가난하고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남덕에게 범일동 풍경은 그런 것이었다.
그림=박호·화가 |
남덕은 어둠과 함께 몰려온 알 수 없는 무섬증에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칭얼대던 태성은 그새 잠이 들었는지 조용했다.
남덕은 끓어오르는 기침을 참지 못하고 뱉어냈다.
손바닥에 붉은 꽃잎 같은 핏방울이 점점이 묻어났다.
허기가 아득한 잠처럼 몰려왔다.
남덕은 길 한쪽에 버려진 사과껍질을 저도 모르게 주워 입에 넣었다.
빗물에 씻겨서 그런지 사과의 단맛은 이미 날아가고 서걱서걱한 느낌만 남아 있었다.
아마도 어느 집에서 제사를 지낸 모양이었다. 꾹꾹 씹자 향긋한 사과향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남덕아, 추운데 왜 나와 있는 거야?"
씹던 사과껍질을 꿀꺽 삼키고 남덕은 뒤를 휙 돌아보았다.
중섭이었다.
어디서 한 잔 했는지 잘생긴 그의 얼굴은 불콰해져 있었다.
중섭이 남덕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그의 커다란 손바닥이 남덕의 얼굴을 이불처럼 덮었다.
"태성이가 아버지 어디만큼 오는지 보고 싶다고 하도 징징거려서요."
"그런다고 비 오는데 나와 있으면 어떡해. 남덕이도 태성이도 꽁꽁 얼었겠다."
중섭이 자신의 코트를 벗어 남덕의 등에 씌워주었다.
"당신 추워요. 그림 그려야지, 당신 손 얼면 어떡하려고요."
"애들이랑 당신이 얼면 난 더 아무것도 못하니까…."
방으로 들어가서 태현이 옆에 태성이를 눕히자 중섭이 남덕의 손을 얼른 잡아끌었다.
"우리 예쁜 남덕이 왜 이렇게 말랐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중섭이 남덕의 손을 꾹꾹 누르며 주무르기 시작했다.
중섭의 얼굴을 그윽하게 바라보던 남덕이 아, 하는 외마디와 함께
이마 아래로 흘러내린 중섭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중섭의 이마에 옆으로 길게 상처가 나 있었던 것이다.
"아고리상, 이게 뭐예요?"
"어, 이거 아무 것도 아니야."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잖아요. 상처가 깊어요."
중섭은 그제야 이마를 손등으로 스윽 훔쳤다.
아직까지 핏물이 배어나왔다.
광복동의 다방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발단은 그림을 공부한다는 한 청년이 친구들과 중섭이 앉은 테이블에 합석하면서부터였다.
청년은 벌겋게 달아오른 굳은 얼굴로 중섭을 똑바로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선생님의 소 그림을 보면 우리 민족의 투지, 슬픔, 한, 가슴을 비틀어 짜는 한민족의 응어리가 보입니다.
그런데…. 붓으로만 민족을 찾으면 되는 겁니까?
우리의 영혼까지 수탈해간 일본의 여자랑 살면서 어떻게 조선의 혼을 이야기할 수 있단 말입니까?"
친구들이 이중섭을 향해 돌진하려는 청년을 황급히 막아섰다.
"나라 팔아먹은 놈들보다 당신 같은 사람이 더 나빠!"
청년이 탁자 위의 잔을 깨어 중섭을 향해 휘두른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중섭의 이마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다방 레지가 비명을 지르고 친구들이 청년의 어깨를 잡았다.
피가 얼굴을 타고 흘렀다. 중섭은 때에 전 손수건으로 이마를 누른 채 다방을 빠져나왔다.
K화백이 뒤에서 중섭을 불렀지만 중섭은 손을 내저었다.
휘휘 내젓는 중섭의 손에 그득 들어찬 비애 덩어리가 비에 젖은 빨래처럼 출렁였다.
"아아, 남덕아, 사랑하는 내 아내, 남덕아!"
사랑했다.
그 사랑을 외면할 수 없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따가운 시선을 감수하며 사랑을 선택했다.
중섭은 입술을 깨물었다.
가족 때문에 붓을 잡는 대신 막노동을 시작했는데 정작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생활비를 갖다 주지도 못했다.
어쩌면 자신은 가정을 이룰 자격이 없는 형편없는 사내일지도 몰랐다.
한낮의 소동을 떨쳐버리기라도 할 듯 체머리를 흔들며 중섭은 남덕의 어깨를 가만히 안았다.
그녀의 어깨는 마치 옷걸이처럼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얼마나 아름다운 여인이었던가.
희고 탐스러운 피부를 볼 때마다 눈이 부시었다.
뿐만 아니었다.
프랑스 유학을 준비할 정도로 그림에 대한 열정도 깊었고, 남부러울 것 하나 없는 부유한 집안의 여식이었다.
남덕은 천재 화가의 아내로 살겠다며 자신의 꿈을 접고, 그 당시 너무나 위험해서 죽음의 대한해협이라고
불리었던 바다를 건너 왔던 것이다.
중섭의 아픈 목구멍 안에서 뜨거운 단내가 치밀었다.
"S화백 부인한테 이야기 들었어요. 당신, 낮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아냐, 아무 것도 아니라니까."
"저 때문에 모순덩어리가 된 당신, 가장 민족적이고 토속적인 작가가 이 땅의 배신자가 되었어요. 저는 끊임없이 방해만 되는군요."
"그게 아니야, 남덕아, 당신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야."
남덕은 중섭의 머리를 꼭 껴안았다.
제 몸이 아픈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를 위해서 놓아주어야한다는 생각이 남덕의 머리를 가득 메웠다.
중섭이 호주머니에서 은지화를 꺼내 남덕의 손에 쥐어 주었다.
부두에서 막노동을 하면서도 잠깐 동안의 틈새를 이용해서 못으로 은박지를 꾹꾹 눌러 그린 그림이었다.
"내 새끼들…, 우리 태현이와 태성이 그리고 하늘나라로 먼저 가버린 우리 첫째 아들이야. 그리고 요 귀여운 여인은 당신이고, 이건 나. 우리가족 행복하게 살라고…."
"아이들과 당신과 제가 끈으로 이어져 있어요."
"맞아, 그게 우리 가족 울타리야."
남덕이 은지화를 가슴에 품었다.
아까 먹은 사과껍질이 목구멍에 걸린 듯 목이 아려왔다.
종이를 사지 못해 담배 속지에다 그림을 그리는 중섭이 너무나 안타까워
남덕은 제 머리카락이라도 잘라 팔고 싶은 심정이었다.
갑자기 남덕의 어깨가 힘없는 나뭇잎처럼 흔들리더니 기침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남덕의 얼굴과 손이 온통 피로 얼룩졌다.
중섭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남덕의 얼굴에 번진 피를 닦아냈다.
"아고리상, 미안해요. 당신한테 도움도 못주고 이렇게 당신을 걱정만 시키고….
천재 화가의 손에 폐병균이나 묻히다니…."
"남덕아, 남덕아…."
중섭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남덕이 중섭의 젖은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남덕의 입속으로 짭짤한 남자의 눈물이 흘러들어왔다.
눈물은 마치 그의 피처럼, 그의 땀처럼, 그의 사랑처럼 짙고 슬프고 고독했다.
이마에 약을 발라주고 이부자리를 펴주었더니 피곤했던지 중섭은 금방 잠이 들었다.
남덕은 자신을 껴안고 있는 중섭의 팔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양해야 하는 가족에 대한 책임이 없다면 그림을 그려야 할 손으로 부두에서 막노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민족의식으로 똘똘 뭉쳐져 있는 이 사람에게 일본인 아내는 반역과 배신의 징표였다.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주는 것이 이 사람을 위한 최선의 방법일지도 몰랐다.
폐병에 걸린 자신의 몸이나, 허기지고 아픈 아이들은 그에게 짐이 될 뿐이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떠날 생각을 한다고 하면 누군가는 비웃을까.
남덕은 중섭의 손을 잡아 제 가슴에 대었다.
그의 순수함, 그의 따뜻함, 그의 사랑이 가슴 속으로 길게 파고 들어왔다.
몸은 헤어지더라도 중섭이 그린 은지화처럼 중섭과 아이들, 그리고 남덕은
그렇게 이어져 있을 것이었다.
그가 그린 울타리 안에 있는 한 가족은 사랑하고 행복할 것이었다.
얼기설기 엮어놓은 판자 틈으로 차고 시린 부산의 겨울바람이 비명을 지르며 들어왔다.
온기 없는 방안이 더욱 썰렁해졌다.
남덕은 가족들이 나란히 누워있는 판잣집 작은 방 한 칸의 풍경을 가만히 응시했다.
남덕의 눈에 서럽고도 뜨거운 눈물이 한없는 애수로 차올랐다.
박향 소설가
※공동기획: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부산광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