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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에 대한 권면
고린도전서 14:1-40(신p.279) 찬송 183장 / 사도신경 / 찬송 195장 20151110
오늘도 고린도전서 14장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우리가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지금 고린도교회는 성령이 주시는 은사를 오해해서 잘 못된 은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분란을 일으키고 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2장부터 14장까지 은사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12장에는 성령의 은사는 교회와 성도를 유익하게 하고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각자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설명을 하고, 또 13장에서는 이런 은사들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은사를 통해 서로를 인정하고 섬기고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14장에는 잘 못된 은사를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 특히 “알아 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는 자들”을 책망하는 말씀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잘 못된 방언과 예언을 비교하면서 어떤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지를 잘 분별하라고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라고 시작을 합니다.
여기에 “신령한 것, 영적인 것”을 사모할 때 사랑을 따라서 행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말씀합니다.
영적인 것을 사모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하려고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서 “영적인 것을 사모한다고 하면서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면서 서로 자랑하고 사람들을 무시하면서 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2장부터 길게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구분을 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사도행전 2장에 처음 성령이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게 될 때 “방언의 표적이 나타나면서 한 사람이 말을 할 때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다 자기 나라의 언어로 알아듣는 방언의 표적이 나타났습니다”이 표적은 성령이 이제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니라 요엘 선지자의 예언처럼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때가 되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알아듣는 방언, 언어로서의 방언”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고린도교회에서 나타난 이런 방언은 “언어로서의 방언이 아니라 사람들이 언어로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은 우상을 섬기고, 이방신을 섬기던 사람들이 하는 이방의 방언이 교회 안에 들어 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방언이 성령의 은사로 임한 방언인지, 이방인의 방언인지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혼란에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차근 차근 설명을 하면서 성도들에게 잘 분별해 보라고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절에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이것은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만 하라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3절에는
“그러나 예언하는 자(말씀을 풀어주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에 덕을 세우나니 / 나는 너희가 다 방언을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라고 말씀합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하나님께서 교회에 유익을 주기 원하는 방언이라면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만약 이런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있다면 개인이 하나님께서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듣도록 말하고 교회에 덕을 세우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기서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는 사람들에게 의혹을 제기 하는 것입니다.
6절에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말씀합니다.
그처럼 7절에 보면 바울이 비유로 설명을 합니다.
“피리나 거문고”같은 악기도 소리를 낼 때 “음의 분별, 음정을 분명하게 연주하지 않고, 아무 소리나 막내면”이게 피리소리인지 거문고소리인지도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8절에도 “나팔을 불 때”분명한 소리를 내지 않으면 어떻게 전쟁에 나갈 사람이 알아듣겠는가? 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9절에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이렇게 세상의 소리도 뜻이 없는 소리가 없고, 사람들이 다 알아 듣는 소리를 내는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은사를 주셨다고 하는데 우리가 알아듣지 못한다면 뭔가 좀 이상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제안하는 것은 만약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은사가 맞다면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 통역의 은사도 주실 것이니 기도해 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11절에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라고 말씀합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면 통역도 하게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알아듣지 목사는 방언을 계속하면 영은 기도 한다고 해도, 내 이성은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아무런 유익도 없고 열매도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14절을 잘 보면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이성)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러면 바울이 생각할 때 이렇게 기도하기 보다는 영과 이성이 알아듣게 기도하는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15절에
“그러면 어떻게 기도할까(어떻게 기도하는 게 맞을까) 내가 영으로(도)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도)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이게 맞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기도를 할 때 내 영혼도 기도하고 마음도 기도하고, 찬송을 할 때도 내 영혼이 찬송하면 내 이성도 찬송하는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만약 방언으로 말하고 찬송하고 사람들에게 축복을 한다면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 듣지 못하면 어떻게 그 찬송과 축복에 아멘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18절에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여기 방언은 여러 가지 언어을 말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19절에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하는 것이 감동을 주기도 하고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알아듣지 못하는 말은 일만 마디를 한다고 해도 시간만 허비할 뿐이지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교회에 유이기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인지 한번 분별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두 번째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에 대해서 다른 방법으로 설명을 합니다.
21절에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해서 설명을 합니다.
21절에는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을 잘 이해 하셔야 합니다.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기다가 앗수르에게 망하게 되었을 때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이방인들이 와서 이스라엘을 심판하게 될 때까지도 순종하지 않았다 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는 것은 “믿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기 위한 표적이라”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2절을 잘 보면
“그러므로 방언(알아듣지 못하는)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3절을 보면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온 교회가 다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교회 와서 알아듣지를 못하니까 회개하지도 않고, 도리어 미쳤다고 말하면서 함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24절에 보면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알아듣게 설명을 하면서 죄를 회개하고 하님을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심판의 표적이고,
예언은 믿게 되는 사람들을 위해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두 번째 제안에서 말하는 것은,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은 믿지 못하는 자들에게 심판하려고 주신 것이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는 이런 방언보다는 예언을 하는 것이 훨씬 유익된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을 보면서 한번 분별해 보아라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세 번째 제안을 합니다.
26절에 보면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성령의 은사는 “교회가 덕이 되고 유익하게 하려고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을 하든, 말씀을 전하든, 방언을 하든, 통역을 하든 목적이 다 교회가 유익이 되고 덕을 세우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기 때문에 만약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라는 것을 증명하려면 “두 세 사람, 증인의 원리에 따라 말하고 반드시 통역을 하도록 하라”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27-28절에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방언이라면 알아듣지 못하게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통역이 안되면 못하게 할 수는 없고, 개인적으로 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언도 마찬가지 입니다. 두 세 사람이 말을 하고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맞는 지 분별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여러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다면, 차례대로 말씀을 전하라고 말씀합니다.
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이 말하고 저 말하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 예언하는 자들은 서로를 존중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33절에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라”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사라고 할 때 자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든 은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은사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마지막으로 이런 방언의 은사를 가지고 문제를 만드는 사람들이 주로 “여자들”이었기 때문에 여자들은 교회 안에서 만큼은 좀 “잠잠하라”라고 권면을 합니다.
그래서 34-35절에
창세기 3:16절에 “아담이 하와를 다스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창조의 원리를 따라서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남편에게 배우고 다스림을 받으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36절에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라면서 책망을 합니다.
아마 성령의 은사를 주장하면서 여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해석을 하면서 말씀을 전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강하게 책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성령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바울이 말을 존중히 여길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37절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지금 14장을 천천히 살펴 보았지만, 바울이 이 글을 쓰는 의도를 잘 알고 바로 읽으셨다면 바울의 생각이나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바울의 말 중에 한 부분만 잘라서 잘 못 이해를 하면 오해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많은 사역자들이나 성도들이 12장부터 차례대로 읽지 않고, 내가 필요한 부분만 읽고 잘 못 해석을 해서 방언에 대해서 혼란스러워하시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바울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깨달으셔서 정말 교회가 유익한 것이 무엇인가? 잘 분별하여서 나도 유익이 되고, 교회도 유익이 되는 지혜로운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권면을 합니다.
39-40절에 보면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교회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하고 해석하는데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고, 방언을 하는 자들도 무시하지는 말라고 말씀합니다.
서로 존중히 여기되 다만 서로가 “품위 있게, 질서를 따라 행하라”라고 말씀합니다.
품위 있다는 말은 “단정하고, 예의 바르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절대로 혼잡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공감하고 다 이해를 하고 다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을 은사로 주십니다.
아무도 모르고 자기만 알고, 자랑하게 하고 교만하게 하는 은사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품위가 있고, 서로를 존중히 여기면서 아름답게 섬기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각 성도들에게 다 은혜와 은사를 주셨습니다. 내게 주신 은사를 따라서 품위 있고 질서를 지키며 말씀대로 순종하며 섬길 때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나가는 저와 여러분의 영적인 모습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