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3088] 金方慶 (김방경)장군시-복주(福州)
題福州映胡樓(제복주영호루)
- 金方慶(김방경).
山水無非舊眼靑(산수무비구안청)
대자연은 예전에 보던대로 푸른지 않은 것은
樓臺亦是少年情(누대역시소년정)
누대 또한 젊은 시절 그대로 정겹네
可憐故國遺風在(가련고국유풍재)
자랑 스럽구나 고향의 옛 풍속 남아 있어
收拾絃歌慰我行(수습현가위아행)
풍악을 울리며 나를 위로하네
征: 정: 칠, 갈, 취할.
次: 차: 버금, 다음, 둘째, 차례. 자리에 나아감.
福: 복: 복, 상서로울,
州: 주: 고을,
登: 등: 오를,
映: 영: 비칠, 비출. 영):
舊:구: 예, 오랠, 낡을, 부엉이.
眼: 안: 눈, 볼.
憐: 련: 불쌍히 여길, 가엾게 여길.
遺: 유: 남겨 물려 줄, 잃어버릴.
收: 수: 거둘, 거두어들일, 잡을, 잡아넣을.
拾: 습: 주울, 거둘.
絃: 현: 악기 줄. :
歌: 가: 노래, 노래할.
慰: 위: 위로할
我: 아: 나, 우리. 고집 쓸.
원문=동문선 제20권 / 칠언절구(七言絶句
東文選卷之二十 / 七言絶句
복주(福州)-안동
福州 辛巳歲。東征日本。班師至福州。
金方慶 (김방경)
山水無非舊眼靑。樓㙜亦是少年情。
可憐故國遺風在。收拾絃歌慰我行。
산과 물은 모두 옛 눈에 보던 푸르름인데 / 山水無非舊眼靑
누대도 또한 바로 소년 때 정일러라 / 樓臺亦是少年情
기특하여라 고국에는 옛 풍속 남아서 / 可憐故國遺風在
악기와 노래를 모두 거두어 모아 내 걸음을 뒤로하네 / 收拾絃歌慰我行
[주-D001] 복주(福州) : 안동
“신사년(辛巳年)에 동으로 일본을 치다가 군사를 돌이킬 때 복주에 이르다.”
라는 제주(題註)가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달진 (역) | 1968
김방경(金方慶, 1212~1300)은 고난의 시대에 살면서 그 주역의 한 사람으로 항쟁과 굴욕을 함께 맛본 역사의 증인이다. 그는 처절한 대몽 항쟁을 겪으면서 우리 겨레가 쓰러지는 참담함을 보았고, 끈질긴 항쟁도 끝내 좌절되자 타협의 길을 걸어야 했다. 시대가 인물을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시대가 인물을 삼키기도 한다. 그는 어느 쪽일까?
김방경 영정
고려 후기의 명장이며 정치가이다. 삼벌초의 난을 평정했고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할 때 고려군 도원수로서 종군했다. 그림은 김송배 화백이 그린 영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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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태종)는 아버지가 채 아우르지 못한 금나라 정복전쟁에 나서면서 이참에 후방의 고려도 함께 정복하려고 했다.
1231년 살레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은 압록강을 건너 물밀듯이 쳐들어오면서 학살과 약탈을 저질러 댔다. 각지에서 고려군사는 피나는 항전을 벌였으나 무신정권의 실력자 최우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강화를 모색하고 있었다.
몽골군은 이때 8000여 명의 병력으로는 고려를 굴복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형식상의 예물을 받고 황급히 철퇴했다. 이어 고려의 왕족과 벼슬아치를 볼모로 보낼 것과 물품의 공납을 요구하기도 하고, 일종의 감독관이라 할 다루가치(達魯花赤)를 보내 내정간섭을 일삼았다. 이에 고려에서는 외교적 관계로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철저히 항전하기 위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해서 30여 년 동안 대몽 항쟁이 벌어졌고, 몽골에서는 여섯 차례에 걸쳐 침략전쟁을 감행했다. 강화도에서는 건축공사를 크게 벌여 궁궐과 관청을 새로 지었다. 섬 둘레에 방어성도 굳건히 쌓았고 갑곶진, 광성보, 덕진 등의 보루도 완성했다. 결코 임시수도의 면모가 아니었다. 그리고 1000여 척의 전함과 수만 명의 군사를 집결시켰다.
몽골은 고려가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1232년 다시 침략하여 강화도에서 나올 것과 고려 왕 고종의 입조(入朝, 원나라에 들어가 황제를 알현하는 것)를 강요했다. 이때도 고려에서 거절의 의사를 밝히자 일단 물러갔다. 몽골은 곧이어 금나라를 완전히 정복하고 만주 땅을 차지했으나 고려와 남송(南宋)만 굴복하지 않자, 다시 1235년 고려를 침략하여 4년 동안 분탕질을 쳤다.
김방경의 아버지는 병부상서를 지낸 김효인(金孝印)이다. 그는 아버지의 덕으로 차가타이가 황제에 오르던 1227년 산원(散員, 정8품의 낮은 무관)이 되어 벼슬길에 나왔고 이어 감찰어사로 창고를 감독했다. 이때 그가 재상의 청탁을 들어주지 않자 그 재상이 어느 권신에게 고자질을 했고, 권신이 나서서 김방경을 꾸짖었다.
“지금 어사가 옛 벼슬아치의 봉직만 못한 것 같소.”
김방경이 그에 맞서 강직함을 굽히지 않았다.
“나도 옛 어사와 같이 할 수 있으나, 나는 오로지 나라의 재정을 비축할 뿐 뭇사람의 입을 맞추어 줄 수 없습니다.”
1248년 몽골군이 침략하여 성을 공략할 때, 그는 서북면 병마판관으로 위도(葦島, 정주군에 있음)에 들어가 방어하고 있었다. 그는 섬에 제방을 쌓아 농사를 짓게 해서 식량을 자급했다. 또 백성들이 물을 얻기 위해 육지로 나갔다가 몽골군에게 포로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군인과 민간인을 동원해 웅덩이를 파서 빗물을 받아 식수를 해결했다.
그는 강화도에 들어가지 않고 최전선에서 몽골군과 싸웠다. 끓어오르는 적개심과 백성의 고통을 함께 푸는 일이 자신의 임무라는 것을 뼈에 사무치도록 새기고 있었다. 더욱이 몽골군은 가을에 침략을 감행해 와서 곡식을 약탈했기에 민생은 더욱 가련했다. 게다가 흉년까지 겹쳐 굶어죽은 시체가 논밭에 질펀하게 널려 있었다. 이런 광경이 그의 의식세계를 변화시켰을 것이다.
삼별초 토벌에 나서다
1258년에는 김인준 등이 정변을 일으켜 최씨 무신정권이 무너졌으나 새로운 무신 김인준 일파와 임금 사이에 권력다툼이 치열해졌다. 이 틈을 타서 몽골은 마지막 침략전쟁을 일으켰는데 그들은 고려 태자를 몽골에 보내는 조건을 제시하고 철수했다. 몽골은 30여 년 동안 끝내 고려를 굴복시키지 못하고 태자의 입조(立朝, 벼슬에 오름)만 성사시켰고, 태자(뒤의 원종)가 연경에 들어가 새 황제 쿠빌라이를 만나게 되었다. 쿠빌라이는 고려의 태자를 보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고려는 당태종도 굴복시키지 못했는데 그 나라 태자가 찾아왔으니 하늘이 시킨 일이로다.”
쿠빌라이는 마침내 고려의 영역과 왕권을 인정했다. 태자는 곧 돌아와 고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이때 새 왕인 원종(元宗)과 김방경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원종이 왕권의 보호를 원나라의 힘에 의지하려 하자, 김인준 일파가 이를 간파하고 왕을 제거하려고 했다. 원종은 이제 왕의 신분으로 연경 방문길에 나섰고, 몽골 조정은 실권을 쥐고 있는 김인준을 몽골에 내조(來朝)하라고 강요했다. 이때 무신 임연(林衍)이 김인준을 죽여 새로 실권을 잡았고 친몽의 태도를 보이는 원종을 갈아 치우고 새 왕을 추대했다. 몽골에서 돌아오던 태자(뒤의 충렬왕)가 이 소식을 듣고 몽골 조정에 구원을 요청하여 원종이 다시 왕위에 올랐다.
원종은 다시 몽골에 가서 무신들을 없애고 수도를 개성으로 옮길 것이니 군대를 보내 달라고 요구했다. 고려 왕실은 점점 자주권을 상실하고 있었다. 끝내 원종이 임씨 무신정권을 타도하고 왕권을 제대로 잡으니, 이로써 무신정권은 100여 년 만에 끝장을 보게 되었다.
김방경은 무신이면서도 절대 무신정권에 가담하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그는 1265년 대장군의 직함을 지니고 몽골에 사신으로 갔고 북계병마사로 재직하면서는 몽골 수중에 있는 북계의 40여 성을 회복했다. 1269년 몽골군이 원종을 지원하러 왔을 때, 몽골군의 장수 몽가독이 서경을 지키면서 사냥 따위를 핑계대며 대동강 이남으로 넘어오려 했다. 그는 몽가독과 함께 있으면서 미리 황제의 허락을 받아 두었다고 질책하면서 대동강을 넘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김방경은 민폐를 염려하여 미리 쿠빌라이의 다짐을 받아 둔 것이다.
고려 왕실과 문신들이 무신정권을 타도하고 개성으로 수도를 다시 옮기자, 삼별초는 철저히 항전을 다짐하며 반기를 들었다. 농민과 노비로 이루어진 직업군인인 삼별초는 문신정권 타도에 나섰고, 지도자 배중손(裵仲孫)과 김통정(金通精) 등은 진도와 제주도로 진출하여 3년간 끝까지 대몽 항쟁을 펼쳤다.
김방경은 역적추보사(逆賊追輔使)로서 삼별초 토벌의 고려 쪽 책임자로 나섰다. 이어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정벌에도 한 번은 도독사(都督使), 한 번은 도원수(都元帥)로 고려군사를 지휘했다. 그는 고려 왕실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일본 정벌전쟁에 끌려 나간 것이다. 이때 그는 전쟁터를 누비며 여러 차례 큰 시련을 겪었는데, 진도의 삼별초를 공격할 때 삼별초와 내통하고 있다는 밀고를 당했다. 개성으로 끌려와 문초를 받고 혐의가 풀렸는데, 몽골군의 장수 아해(阿海)와 알력을 빚었기 때문이었다. 또 그가 원나라(1271년 국호를 원으로 고침, 이하 원으로 호칭)의 성절사로 다녀왔을 때 “김방경이 400여 명과 함께 강화도로 들어가 다시 항쟁반란을 계속했다”는 혐의를 입어 다루가치에게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으나 무죄로 풀려났다.
그 다음 해에도 다시 “김방경 부자가 400여 명과 함께 왕과 다루가치를 죽이고 강화도를 점거하여 항쟁을 벌이려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는 왕과 다루가치 앞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한 끝에 대청도(大靑島)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내 몸도 마음도 내 것이 아니었다
이렇듯 그는 끊임없이 원나라의 장수들에게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그는 굴욕을 참고 원나라 사신으로 가서 고려의 실정을 호소하여 양곡 공급을 줄이고 원군이 차지한 둔전(屯田, 군대 양곡을 공급하는 농토)의 이전을 요구하여 성사시키기도 했다.
그는 1283년(충렬왕 9) 70세가 넘은 나이로 퇴직하여 한가한 노년을 보내다가 89세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그런데 그의 공적과는 달리 쓸쓸하게 장례를 치러야 했다. 그에 대해 사관은 이렇게 기록했다.
방경은 충성스럽고 신의가 있으며 그릇이 커서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았다. 평생 동안 임금의 득실을 말하지 않았으며 비록 벼슬자리에 물러나 한가히 있을 적에도 나라 근심하기를 집일과 같이 했고 큰 논의가 있으면 임금이 반드시 자문했다.
- 《고려사》 〈열전〉
그는 무신이면서 무신정권에 가담하지 않았고, 철저히 대몽 항전을 벌였다가 뒤에는 삼별초 토벌에 동원되었다. 고려왕실을 위해 몽골에 외교 솜씨를 보였으며 강요에 따라 일본 정벌에도 나섰다.
그는 심한 갈등을 겪으며 몽골의 장수들과 계속 알력을 빚어 여러 번 문초를 당했다. 그런 와중에도 늘 민생문제와 국가 피폐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신명을 바쳤다. 그는 항몽(抗蒙)과 부몽(附蒙) 사이에서 번민과 눈물을 가슴속에 묻어 두고 고려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는 비겁하거나 눈치를 살피는 타협주의자가 아닌 고려의 버팀목이었다. 뒷날 병자호란 때의 최명길의 행동과 아주 그럴싸하게 비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