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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43) 번영의 뒷자리, 대탕녀 바빌론(묵시 17,1-6)
대탕녀 바빌론은 번영과 우상숭배의 다른 이름
드디어 대탕녀가 모습을 드러낸다. 요한 묵시록의 무대 위에 나타난 그녀는 등장과 동시에 심판을 선고받는다. 처음부터 이 인물에게 허락된 존중은 없다. 그리스어 ‘포르네(πόρνη)’를 우리말 번역은 ‘탕녀’라 하여 방탕의 이미지를 강조하지만, 정작 본문이 고발하는 바는 더 노골적이다. 땅의 임금들과 몸을 섞은 여인(17,2), 그러니 차라리 ‘창녀’라 부르는 것이 정직하다.
이 단어는 듣는 이를 불편하게 한다. 그러나 불편을 피하려 돌려 말하는 순간, 이 계시의 순수성과 급진성이 희석된다. 그녀는 그냥 창녀가 아니다. ‘큰’ 창녀다. 이 과장된 수식은 우연이 아니다. 요한 묵시록 17장 5절에서 밝혀지는 그의 진짜 이름, ‘큰 바빌론’과 닿아 있고, 다시 예레미야서 51장 13절이 말하는 대바빌론의 패망을 반사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예레미야가 말하던, “큰 물 가에 살며 보화를 많이 가진 자”, 그 바빌론을 요한 묵시록은 ‘물 위에 앉은 창녀’라는 표현으로 다시 고치며 심판의 대상을 분명히 한다. 예레미야의 바빌론은 요한 묵시록 시대에 로마로 은유되며 심판은 그러므로 특정한 한 개인이 아니라, 당시 가장 강력하고 화려한 제국이라는 체제를 향하고 있다.
그녀가 심판받는 이유는 불륜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불륜은 육체적 타락의 문제가 아니다.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결탁의 비유다. 땅의 임금들은 바빌론, 즉 로마와의 동맹 속에서 경제적 평온함을 확보한다. 요한 묵시록은 이 현실을 곳곳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본다.(묵시 2,9.13; 13,16–17 참조) 요한은 이 상황을 한 단어로 비유한다. ‘취기.’ 그는 말한다. 땅의 임금들이 창녀의 포도주에 취해 있다고. 취한다는 것은 판단력을 상실한다는 뜻이다. 오로지 성장과 돈의 감미로운 향에 취한 삶, 그것이야말로 예언자들이 경고하던 영적 실명이다.(이사 29,9; 호세 4,11–12 참조)
구약의 예언자들은 정치·경제적 번영과 그에 수반한 우상숭배를 흔히 불륜과 창녀의 이미지로 그렸다.(이사 23,18; 1열왕 5,1–12; 아모 1,9; 요나 3,5–10; 에제 16,33–34 참조) 요한 묵시록은 이 오래된 언어를 끌어와 18장(3.9–19)에서 경제적 번영을 곧 ‘불륜’과 ‘취기’라고 단언한다. 고대 창녀가 몸을 팔고 돈을 받았듯, 제국의 번영을 함께 누리는 땅의 임금들은 경제적 이익을 위해 기꺼이 몸을 내어준 셈이다.
오늘의 독자에게 이 이미지는 낡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국제 무역의 복잡한 외교와, 그 틈바구니에서 소외되는 가난한 나라들의 현실을 생각해 보라. 번영의 논리는 언제나 누군가를 배제한다. 요한의 언어는 우리에게 묻는다. “네가 누리는 번영이 혹시 누군가의 피를 대가로 얻은 것은 아니냐?” 이 질문을, 우리는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장면은 갑자기 광야로 이동한다. 광야는 시선의 전환을 위한 공간이다. 하느님의 관점으로 현실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장소.(이사 21,10 참조) 이사야는 그곳에서 바빌론의 몰락을 보았고(이사 21,1–10 참조), 요한도 같은 자리에서 바빌론과 로마의 종말을 조망한다. 광야의 시선은 제국의 거대함을 상대화한다. 현실 세계에서 바빌론과 로마는 든든히 서 있다.
그러나 광야에 서면, 그 찬란함은 한순간에 사라진다. 권력과 돈과 명예는 광야에서는 설 자리가 없다. 영원하지 않은 것들에 과도한 무게를 실어 온 우리의 삶을 뚜렷이 보게 되는 자리. 광야는 그런 곳이다.
그런데 그 광야는 단순히 거룩한 공간만은 아니다. 그곳에서 요한은 진홍빛 짐승을 탄 여인을 본다. 머리 일곱, 뿔 열.(17,3) 12장 3절의 붉은 용과 동일한 형상이다. 광야는 하느님의 시선이 열리는 곳임과 동시에 악이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다. 요한 묵시록은 선과 악을 단순히 공간으로 분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적 통찰이 깊어질수록 악의 본질이 더욱 분명하게 보인다.
창녀가 그 짐승을 타고 있다. 이는 곧 제국의 경제적 번영이 악의 시스템과 분리 불가능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짐승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이름으로 가득하다면, 그 번영 역시 하느님을 모독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해석을 우리는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가. 번영이라는 이름의 신전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쉽게 무릎 꿇어왔는가.
4절로 넘어가면 창녀의 외양은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하다. 견고한 번영의 색깔인 자주와 진홍 그리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치장한 큰 창녀 바빌론. 그녀의 손에는 금잔이 들려 있는데, 그 안에는 불륜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 담겨 있다. 이 화려함은 로마 제국의 무역 품목들과 정교하게 연결된다.(묵시 18,12–14 참조) 상업적 성공이 창녀의 유혹과 동일시된다. 사람들은 이런 비유에 불쾌함을 느낄 수 있다. “부유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 왜 창녀의 짓인가?” 그러나 질문을 바꿔보자. 그 번영이 만들어낸 자리는 누구에게 열리고, 누구에게 닫히는가.
고대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연대기」에서 로마를 이렇게 말한다. “세상의 모든 끔찍하고 수치스러운 것이 모여 유행이 되는 곳.” 요한은 창녀를 “역겨운 것들의 어미”라고 부른다. 유행과 번영이 결합한 자리를 ‘어머니’라 이름 붙인 것은, 문명이 만들어낸 모든 욕망의 근원을 가리키기 위함이다.(예레 27,12 참조) 다시 말해, 세상이 탐하는 모든 화려함의 모태가 그 창녀라는 선언이다.
그리스도인은 그 화려함 앞에서 박해를 받는다. 창녀는 성도들의 피와 예수님 증인들의 피에 취해있다는 것이다.(6절) 그리스도인은 번영의 행렬에서 낙오한 이들의 자리를 기억하는 사람들, 그 곁에 서려는 사람들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가 운명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슬픔의 본질이다. 화려함의 앞줄에서 환호하는 대신, 뒤편에서 울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존재론적 운명, 예수님의 운명도 그러했다. 세상은 그런 그리스도인을, 그런 예수님을 미련하다 조롱할 것이다. 그러나 질문은 간명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후손인가, 아니면 창녀의 후손인가.
나는 때때로 백화점에서 그 질문을 떠올린다. 명품매장 앞에 늘어선 줄, 그 긴장된 눈빛들. 갖고 싶고, 소유하고 싶고, 누리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을 나는 누구보다 이해한다. 우리 인간은 그러하니까. 그러나 그 눈빛들 사이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 단지 ‘좋은 삶’인가, 아니면 ‘옳은 삶’인가.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95) 예수님을 죽인 바리사이파 사람들
지금은 이스라엘 성지순례가 어렵지만 시간이 지나서 전쟁 상황이 정리되면 많은 분들이 이스라엘의 성지를 찾을 것이다. 과거에도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할 때 안식일이 되면 상점들이 모두 문을 닫거나 시내가 텅텅 비고 호텔 엘리베이터도 정지되는 경우가 많다.
유다교의 중심은 율법이다. 율법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토라’는 본래 ‘가르침’이란 뜻이다. 율법이란 십계명을 중심으로 한 하느님 백성의 생활과 행위에 관한 하느님의 명령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 모든 이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도록 율법이 만들어진 것이다.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받은 십계명 등은 바로 율법의 뼈대가 된다.
사회가 복잡하게 발달하면서 율법도 세분됐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은 613개 조항으로 세분되고, 248개의 명령과 365개의 금령으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율법 중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들 같은 경우에도 아주 자세하게 열거되어 있다. 나뭇가지와 잎을 뽑거나 자르기, 잔디 깎기, 화초에 물주기도 할 수 없다. 밭을 갈거나 씨를 뿌리기, 타작하기, 알곡 고르기, 빻기나 찧기도 금지된다. 심지어 불 켜기와 끄기도 할 수 없다.
특히 바리사이파(Pharisees)는 예수님이 활동하던 시기에 유다교의 중요한 분파이다.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에 함락된 후 바리사이파는 유다교의 기초가 되었다. 신약성경에서도 바리사이파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되고 이들은 율법을 중심으로 한다. 율법 학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모세 율법을 가르치기 때문에 가장 존경받았다.
그런데 예수님이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라며 율법 학자들을 직접 공격하는 장면이 나온다.(마태 23,1-36 참조) 율법은 이스라엘 교육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은 교육을 받을 수 없고 율법을 모르니까 지킬 수 없어 이미 죄인으로 판단 받을 수밖에 없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죽이려 작정했을까? 예수님이 반대한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형식적으로 지키는 율법주의이다. 예수님은 율법의 중심은 바로 하느님과 이웃사랑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예수님은 율법의 준수와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율법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이 중요하다는 새로운 율법을 선언했다.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고 완성했다.(마태 5,38-48 참조)
시간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의 기본 정신을 잃어버렸고 모세가 전해준 율법은 변질되었다. 예수님 자신이 길이고 생명이므로 그분이 곧 율법의 완성이 되는 것이라 했다. 예수님이 선포하는 복음을 따르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사람들에게 인기도 높아졌다,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해칠 것으로 생각되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작정했다. 유다교에서는 현재도 예수님을 한 사람의 예언자로 여길 뿐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유다교는 여전히 다윗 왕조를 다시 회복할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기혼 샘과 실로암
예루살렘의 구도시(old city)에 가면 ‘기혼 샘’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마르지 않은 이 샘 덕분에, 예루살렘은 광야를 낀 건조한 기후에도 유구한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이런 중요성을 반영하듯 솔로몬은 기혼 샘에서 기름부음을 받아 왕위에 올랐고(1열왕 1,45), 이후 샘 위로 자리한 산 정상에 성전을 봉헌하였습니다. 지금은 그곳에 회교 사원이 지어져 있지만, 한때는 에덴 동산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성지였습니다.
원조들이 살았던 동산 “에덴”은 ‘풍요’ ‘즐거움’ ‘기쁨’을 뜻합니다(시편 36,9: “당신께서는 그들에게 당신 기쁨[아다네하]의 강물을 마시게 하십니다” 참조). 이 뜻처럼 에덴동산은 ‘파라다이스’라 칭해지는데요, 파라다이스는 페르시아어 [파이리다에자]에서 나온 말로 ‘과일나무 정원’ ‘울타리가 쳐진 공원’을 의미합니다. 이 페르시아어가 에덴동산과 관련하여 최초로 쓰인 곳은 그리스어 번역 성경인 <칠십인역>입니다. 거기서 에덴동산을 그리스어 [파라데이소스]로 옮겼는데(창세 2,8.16 등), 이는 에덴에 과일나무 정원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에덴동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간-에덴]도 ‘에덴 정원’으로 직역되므로 ‘파이리다에자’와 상통하며, 울타리가 쳐진 점도 닮았습니다. 원조들이 에덴에서 쫓겨난 뒤로 에덴 입구는 커룹이 불 칼을 들고 지키게 되었지요(3,24). ‘파라데이소스’는 이후 라틴어 번역 성경 <불가타>에서 라틴어 [파라디수스]로 옮겨져 우리에게 파라다이스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에덴에는 무화과, 선악과, 생명나무 등이 자랐고, 에제 31,8에 따르면 향백나무, 방백나무(사이프러스), 버즘나무(플라타너스 종류)도 있었습니다. 또한 창세 2,5-6에 따르면, 에덴에는 비가 내리지 않고 땅 밑에서 올라오는 안개 같은 물이 지면을 적셔주었습니다. 이 물이 네 강줄기가 되어 흘러나갔으니, 에덴 동산은 가히 생명수의 원천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넷 가운데 “기혼”(13절)이라는 강이 상징적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샘의 이름과 같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창세기의 저자는 잃어버린 에덴동산을 기혼 샘 위로 지어진 예루살렘 성전에서 찾을 수 있다고 암시한 듯합니다. 오늘 제1독서의 에제키엘도 비슷한 신탁을 전합니다. 새 성전에서 흘러나올 생명수가 가는 곳마다 생기를 넣어주어, 에덴동산에서처럼 온갖 과일나무들이 자라게 되리라고 말입니다. 바로 이 예언은 훗날 몸소 성전이 되시는 예수님에게서 실현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는 사람은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요한 7,38)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구나 기혼 샘은 기원전 8세기 유다 임금 히즈키야가 터널을 뚫어 실로암 못과 연결되었는데, 예수님께서 태생 소경을 보내 고쳐 주신 곳이 실로암이니(요한 9,1-12), 그 소경은 에덴의 생명수에 힘입어 새 삶을 되찾은 셈입니다.
[성경 속 희망의 순례자들] 희망의 순례자 토비야
갈릴래아의 납탈리 지방에서 아시리아의 니네베로 유배를 온 한 가족의 이야기는 어떤 상황에서든 희망의 꽃이 필 수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이 가족의 가장인 토빗은 고국에서나 외국 땅에서나 한결같이 주님께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친척과 동족에게 자선을 베풀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버려진 동족의 주검을 거두어 준 자선 행위 끝에 눈이 멀게 되었고, 아내의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토빗은 아들 토비야를 라게스에 사는 친척 가바엘에게 보내어 예전에 맡겨 둔 돈을 찾아오게 합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설고 먼 길을 가야 했던 토비야는 그와 동행할 안내자를 구하였고, 다행스럽게도 동족 청년 아자르야를 만나게 됩니다. 토비야는 아자르야와 그 집의 개와 함께 길을 떠납니다. 토비야에게 이 여정은 위기의 연속인 동시에 성장과 성취, 우정과 사랑을 얻는 하나의 모험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는 부모에게는 믿음과 의심, 확신과 불안이 뒤섞인 기다림과 인내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믿음과 확신이 희망을 꽃피게 한다면, 의심과 불안은 희망을 시들게 합니다.
토비야가 이 여정에서 마주한 모든 위기는 아자르야의 도움으로 전화위복의 계기가 됩니다. 토비야는 강에서 발을 씻다가 커다란 물고기에게 물릴 뻔 하였지만 그 물고기를 잡아 양식을 마련하고, 쓸개와 염통과 간은 따로 보관하였습니다. 라게스로 가는 도중에 있는 엑바타나에서는 친척 라구엘의 집에 묵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라구엘의 딸 사라를 불행에 빠트린 아스모대오스라는 악귀를 물고기의 염통과 간을 태워 쫓아내고, 토비야는 사라를 아내로 얻습니다.
혼례를 치르자마자 토비야는 서둘러 길을 떠나 집으로 돌아옵니다. 빈 손으로 길을 떠났던 그는 아자르야가 가바엘에게 가서 대신 받아온 열 탈렌트라는 엄청난 돈과 아내 사라, 그리고 장인의 재산의 절반을 받아 돌아옵니다. 그리고 아자르야의 안내에 따라 토비야는 물고기 쓸개를 아버지 눈에 발라 시력을 되찾게 합니다. 이렇게 하여 이 가족에 드리운 불행의 그림자는 사라집니다. 그러자 온 가족이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하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그들은 이 모든 복의 원천이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며 크게 기뻐합니다.
마지막으로 토비야의 동행자인 아자르야가 자신의 정체를 밝힙니다. 그는 토빗과 사라가 바친 눈물 젖은 기도를 들으신 하느님께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기 위해 파견하신 라파엘 천사였습니다. 천사는 그들에게 하느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분을 찬미하고 찬양할 것을 명합니다. 그리고 진실한 기도와 의로운 자선이 이런 복을 가져왔음을 강조합니다. 토비야의 여정은 분명 불행 가운데서 시작된 것이었으나 이 여정이 희망의 순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자르야, 곧 라파엘 천사 덕분이었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에서 눈을 떼지 않는 한 우리의 순례 역시 희망찬 순례가 될 것입니다.
[열두 소예언서의 지혜] 말라키 예언서
시대 배경의 이해
예언서를 탐구할 때, 시대적 배경을 아는 것은 예언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말라키서는 연대기, 역사적 사건, 임금의 이름 등 역사와 관련된 그 어떤 정보도 우리에게 제공하지 않아 시대적 배경과 저작 연도를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저 말라키서의 내용을 토대로 시대를 유추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용을 보면 말라키서는 성전에서 행해지는 그릇된 경신례를 비판하고, 잘못된 십일조와 부정한 예물 봉헌을 지적합니다. 그러니 귀환 후에 제2성전이 지어진 다음 경신례가 행해지고 있는 시대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에서 다룬 이방 민족과의 혼혈혼에 대한 비판도 등장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말라키 예언서가 작성된 시대는 성전이 지어진 기원전 515년 이후에서 느헤미야의 개혁이 있었던 기원전 455년 사이로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들뜬 희망과 부푼 기대를 안고 귀환한 이스라엘은 성전의 완공과 함께 다윗의 황금 시기가 곧 시작될 거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그렇지 못했죠. 여전히 강대국의 지배와 지배층의 억압은 끊이지 않았고 백성들의 가난과 불평등으로 불안한 삶을 이어갔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 백성은 실의와 절망에 빠지게 되었고, 신앙의 열정은 식어버렸습니다.
여섯 번의 논쟁
이런 시대에 말라키 예언자는 당시 백성 안에 자리 잡고 있던 문제들을 논쟁 형식으로 고발합니다. 연속성이 없는 개별 주제를 담고 있는 여섯 개의 논쟁은 하느님의 호소, 이에 반대하는 사람의 말이나 행위, 예언자의 변론을 통해 전달되는 의미라는 일정한 틀 속에서 전개됩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논쟁을 보면 하느님께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1,2)라고 하시고, 이에 백성이 “어떻게 저희를 사랑하셨습니까?”(1,2)라고 반문합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에돔에 내린 심판으로 유다에 베푸신 사랑을 입증하십니다. 이와 같은 형식 안에서 참다운 경신례, 혼혈혼과 이혼, 심판과 정화, 올바른 십일조와 예물 봉헌, 주님의 날에 드러나는 정의 등의 다양한 주제가 이어지죠.
사실 말라키 예언서에서 논쟁의 주제보다 더욱 눈에 띄는 것은 질문으로 표출되는 백성의 반박입니다. “어떻게 저희를 사랑하셨습니까?”(1,2), “저희가 어떻게 당신의 이름을 업신여겼습니까?”(1,6), “저희가 어떻게 당신을 더럽혔습니까?”(1,7), “어찌 이러십니까?”(2,14), “저희가 어떻게 싫증 나게 해 드렸습니까?”(2,17), “저희가 어떻게 당신을 약탈하였습니까?”(3,8) “저희가 당신께 무슨 무례한 말을 하였습니까?”(3,13).
하느님을 향한 백성의 이 같은 질문이 여러분은 어떻게 들리십니까?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고, 기대가 좌절로 변화된 백성의 처지가 이해는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죄를 짓고도 당당하며 하느님을 이겨 먹으려 대드는 오만함이 엿보이기도 합니다. 그런 까닭에 이런 오만함이 지금 나의 모습은 아닌지 성찰하게도 되지요.
“하느님의 감추어짐”
각기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는 여섯 개의 논쟁은 형식이 같다는 공통점 외에도 ‘하느님의 감추어짐’을 주제로 다루는 접점이 있습니다. 실망과 좌절과 절망이 가득했던 시대에 지쳐버린 백성은 정의로우신 하느님의 현존에 의심을 가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의인에게 복을, 악인에게 벌을 그 행실대로 갚아주시는 분이라 믿어왔는데 정작 현실은 착하게 살아도 복을 받지 못하고, 악하게 살면서도 잘 먹고, 잘 살기만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눈에는 악한 일을 하는 자마다 다 좋고 그분께서는 그러한 자들을 좋아하신다.”(2,17)라며 비아냥거립니다. 심지어 주님을 경외하는 자마저도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 만군의 주님의 명령을 지킨다고, 그분 앞에서 슬프게 걷는다고 무슨 이득이 있느냐?”(3,14)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 번성하고 하느님을 시험하고도 화를 입지 않는다.”(3,15) 이렇게 ‘굳이 하느님을 섬기며 착하게 살 필요가 뭐 있나?’ ‘힘들게 법을 지키고, 남을 배려할 필요가 뭐 있나?’라는 마음 깊은 곳에는 ‘하느님은 보지 않고 듣지 않으신다. 어차피 하느님은 모르신다. 하느님은 없다.’라는 의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같은 백성의 반문에 하느님이 응답하십니다. “주님을 경외하며 그의 이름을 존중하는 이들이 주님 앞에서 비망록에 쓰였다.”(3,16) “의인과 악인을 가리고 하느님을 섬기는 이와 섬기지 않는 이를” 가릴 것이다(3,18 참조). 하느님은 다 보고 계시며, 다 알고 계시고, 반드시 갚아주신다고 합니다. 나아가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온다.”(3,19)라고 하시며 심판 날에 악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반드시 올 그날을 준비하기 위해 “모세에게 내린 규정과 법규들을 기억하여라.”(3,22)라고 합니다. 심판 때에 악인은 징벌로, 의인은 구원으로 보상이 주어진다는 말씀도 위로가 되지만, 하느님이 다 보고 계시고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이 더 큰 위안이 됩니다.
“다 알고 계시는 하느님”
사제에게 찾아오는 사람 중에는 평범한 신앙 상담 외에도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러 오거나 남의 잘못을 일러바치러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간혹 공동체 안에서 누명을 쓰고 억울함을 호소하며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러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교우를 마주할 때, “그런 일이 있었냐? 정말 몰랐다.”라고 하면 더 마음이 격해져 호소가 길어집니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라고 하면 놀란 눈빛을 보내며 한결 마음이 누그러집니다. 때로는 ‘알고 있다’라는 말 한마디가 놀라운 힘을 발휘합니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의 현실도 말라키 예언자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정의보다는 불의가 더 큰 힘을 발휘하고, 봉사와 희생의 가치는 평가절하되어 헌신하는 사람이 비난의 대상이 되기까지 합니다. 마치 하느님은 눈을 감고 계시고, 아무것도 모르시는 것만 같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활동과 기도가 무의미해 보이고 단원으로서의 열심이 억울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말라키서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주님을 경외하며 그의 이름을 존중하는 이들이 주님 앞에서 비망록에 쓰였다.”(3,16) 사랑하는 레지오 마리애 단원 여러분! 힘을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다 알고 계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