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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믿나이다] (24) 베드로 사도
연약함에도 선택받은 반석, 베드로
베드로는 사도들의 으뜸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고 가장 먼저 대중 앞에서 선포한 사도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를 형성해 교회의 최고 목자, 곧 초대 교황이 됐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갈릴래아 벳사이다 출신이자 요나(또는 요한)의 아들로 동생 안드레아와 어부 생활을 하다 예수님 부르심을 받고 주님의 사도가 됐습니다. 주님 부르심을 받을 때 그는 기혼자로 카파르나움에서 장모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마르 1,29-31) 그는 평범한 어부였으나 주님을 만난 이후 삶이 완전히 뒤바뀝니다. 결정적 예가 바로 이름이 바뀐 것입니다. 그의 원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말로 ‘바위’를 뜻하는 아람어 ‘케파’라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를 헬라어로 옮긴 것이 ‘베드로’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으로부터 새 이름을 받은 것은 그가 사도들의 으뜸이 되는 것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마태 16,13-20 참조) 예수님께서 당신 신원에 대해 제자들에게 물으시자 시몬이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이다”라고 하십니다.
이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6,18-19)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특별히 주목할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 베드로를 초석 삼아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가 고백한 신앙 때문에 교회의 흔들리지 않는 반석으로 남을 것입니다. 둘째, 시몬 베드로에게 교회를 다스릴 권한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교황 ‘수위권’과 ‘무류성’의 근거가 되는 주님 말씀입니다.
복음서는 베드로 사도가 용기 있고 과단성 있는 성격의 소유자임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로 부르시자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따라나서는 모습(마르 1,16-20), 예수님께서 붙잡히셨을 때 지니고 있던 칼로 대사제의 종을 내리치는 모습(요한 18,1-11) 등은 이런 면을 잘 보여줍니다.
복음서는 그의 단순성도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는 자신도 물 위를 걷겠다고 나섰다가 바람이 불자 두려워져 물에 빠지게 되어 살려달라고 외치는 모습(마태 14,22-33),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해 칭찬을 받았지만 곧 이어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시자 안 된다고 펄쩍 뛰는 모습(마태 16,13-23) 등이 그러합니다.
비겁하고 소심한 성격도 지녔습니다. 안티오키아에서 이방인 신자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누다가 할례받은 유다인 신자들이 오자 음식 규정을 어겼다는 지탄을 받을까봐 몸을 사리는 태도를 보입니다.(갈라 2,11-14)
붙잡히신 예수님을 뒤따라 대사제 집으로 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다가 예수님과 눈길이 마주치자 밖으로 나가 슬피 우는 모습(루카 22,54-62)은 심성이 착하지만 연약한 인간 모습을 매우 잘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충정이 대단한 제자였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시신이 사라졌다는 전갈에 무덤으로 달려가고(루카 24,1-12),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에 나타나셨을 때 “주님이시다”라는 말을 듣고는 호수로 뛰어드는( 요한 21,1-14) 모습이 이를 말해줍니다. 이런 시몬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교회의 양 떼를 잘 보살피라고 간곡히 당부하십니다.(요한 21,15-19)
사도들의 으뜸이 된 베드로는 주님 승천 후 성령 강림을 기다리며 먼저 유다 이스카리옷의 빈자리를 채울 사도를 뽑는 일을 주도합니다.(사도 1,15-26) 아울러 성령 강림 후 그는 다른 사도들과 함께 담대하게 대중 앞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사도행전은 그의 첫 설교를 듣고 3000명이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됐다고 합니다.(사도 2장) 이후 베드로 사도는 예루살렘뿐 아니라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예수님 이름으로 치유 기적을 행하고 복음을 선포합니다.
이 일로 예루살렘 감옥에 갇히고 매질을 당하는 등 박해받았고, 예루살렘 사도 회의를 주재합니다.(사도 15장) 베드로는 사도 회의에서 하느님께서 유다인이나 이방인에게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으시며, 이방인이나 유다인이나 할례를 통해서가 아니라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설파함으로써 할례 논쟁을 끝내는 데에 주도적 역할을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후 지중해 해안 도시인 카이사리아와 야포, 소아시아의 안티키아와 갈라티아, 로마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네로 황제 박해 때에 로마 바티칸 언덕에서 순교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똑바로 매달릴 자격이 없다며 거꾸로 달려 순교했다고 합니다.
[박모란 교리교사의 교리, 궁금한 건 못 참지] (48) 성수대와 세례대
성수 찍어 성호 그으며 세례 서약 되새겨
성수대
성수의 의미 : 성수는 사제가 주님의 은총으로 거룩하고 깨끗하게 축성해 종교적으로 사용하는 특별한 ‘물’을 의미합니다. 성수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특별한 관계를 가지도록 요구하심을 알려줍니다. 성수를 찍어 성호를 그을 때마다 이러한 친분관계가 재확인됩니다.
성수의 종류 : 성전 입구 성수반에 담긴 보통 성수와 세례성사에서 쓰이는 세례수, 주님 부활 대축일에 특별한 예식으로 축성되는 부활절 성수 등이 있습니다. 모두 자연수를 축성한 것입니다.
성수의 기원 : 구약 시대부터 유래(탈출 30,18-21), 2세기경 집을 축성하면서 사용한 기록이 있습니다. 동방 교회에서는 4세기경, 서방 교회에서는 5세기경부터 성당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성수대의 기원과 의미 : 바실리카(대성전)의 주랑 현관에 있던 샘으로부터 유래됐습니다. 이 샘은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손과 얼굴을 씻는 곳이었습니다. 성수대가 널리 사용된 때는 주일 미사 이전에 신자들에게 성수를 뿌리는 관례인 ‘성수 예절’이 널리 행해지게 된 9세기쯤이었습니다. 성수 예절은 세례에 대한 기억을 되새겨주는 예절입니다. 이는 성전 입구에 놓인 성수대에서 성수를 찍어 성호를 긋는 것으로 대체됐습니다.
성수대의 모양과 위치 : 원형(부활을 의미)과 사각형(그리스도의 무덤)·육각형(그리스도의 죽음)·팔각형(그리스도의 부활)·십자형 등 여러 모양이 있습니다.
성수대는 세례를 기억하며 악의 지배를 끊고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기에 성전 안쪽보다는 입구 또는 밖이 올바른 위치입니다.
세례대
세례대의 의미 : 세례대와 세례수를 보관하는 장소는 특히 중요합니다. 여기서 첫 성사인 세례성사가 집전되며, 신앙인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며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리기 때문입니다.(요한 1,12; 로마 9,8) 이처럼 세례는 온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이므로 모든 성당에는 세례소 또는 세례대가 설치돼야 합니다.
세례대의 변천 : 세례대(Baptismal font)는 샘처럼 흐르는(살아있는) 물을 의미합니다. 가장 초기 형태는 사각형이었는데, 점차 육각형·팔각형·십자형으로 변화됐습니다. 그 다음으로 원이나 타원형이 사용됐으며, 6세기에는 네잎 무늬형도 나왔습니다. 십자형과 네잎 무늬형은 동방 교회의 산물로, 서방(이탈리아·프랑스)에선 육각형과 팔각형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세례대가 등장한 배경은 세례 예식이 몸을 물에 담그는 침수례에서 세례수를 붓는 관수례로 변화하면서입니다.
세례대의 모양과 재질 : 세례수를 보관하는 저장 용기인 세례대는 고정돼 있고 청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상징으로서 알맞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경우에 따라 예비신자의 몸이 충분히 잠길 정도의 크기일 필요가 있습니다. 재질은 다양하나 주로 대리석이나 목재 또는 금속을 조각해 만듭니다. 세례대는 위엄이 있고 아름다우면서도 빛이 넘치는 ‘샘’을 암시해야 합니다.
세례대의 위치 : 공동 세례를 줄 수 있도록 세례대 주변은 넓은 공간이어야 합니다. 세례대를 성전 내부에 만드는 것도 방안입니다. 직사각형 성당이라면 그 정면 좌우 어느 편도 좋습니다. 다만 세례대가 있을 장소는 성전 내부와 확실히 구별되며, 한 단계 낮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 세례성사만을 위해 마련한 자리로서 신자들이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의미를 지닌 만큼 품위를 갖춰야 합니다.
[매주 읽는 단편 교리] 봉헌(Oblatio)
지난번에 살펴본 감사기도 중 ‘기념’(Anamnesis)에서처럼, ‘봉헌’(Oblatio)의 경우도 역시 성찬 제정 축성문으로 희생 제물의 봉헌이 온전히 이루어졌음에도 별도의 봉헌 기도를 바칩니다. 「미사 경본 총지침」은 이 봉헌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교회, 특히 지금 여기에 함께 모인 교회는 이 기념제로 흠 없는 제물을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봉헌한다. 교회는 신자들이 흠 없는 제물뿐 아니라 자신도 바치기를 바란다”(79항).
고대교회부터 거의 모든 전례는 ‘기념’과 ‘봉헌’을 연결하였는데, 그중 ‘봉헌’에 더 큰 비중을 두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로마 전문, 곧 제1양식에 잘 드러납니다. 우리말 번역문은 “… 기념하나이다. … 봉헌하나이다.”이지만, 라틴어 원문에는 “… 기념하면서 …봉헌하나이다.”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기념 기도의 문장이 봉헌 기도문에 종속되어 있을뿐더러 봉헌 기도의 내용이 훨씬 길게 나옵니다.
먼저, “저희는 아버지께서 베풀어 주신 선물 가운데서 이 깨끗한 제물, 거룩한 제물, 흠 없는 제물, 영원한 생명의 빵과 구원의 잔을 존엄한 대전에 봉헌하나이다.”라는 구절에서는 교회가 바치는 성체와 성혈이 가장 깨끗하고 거룩하며 흠 없는 제물이라는 점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제물을 인자로이 굽어보시고 일찍이 주님의 의로운 종 아벨의 제물과 저희 조상 아브라함의 제사와 대사제 멜키체덱이 바친 거룩하고 흠 없는 제물을 받아 주셨듯이 이를 받아들이소서.”라는 구절에서는 구약 시대에 올바른 제사를 바친 인물들, 곧 아벨과 아브라함과 멜키체덱을 언급하는데, 이는 거룩한 제물을 바치는 우리가 스스로 부당함을 절감하기에, 구약의 제사를 상기하면서 우리의 제사도 그와 같이 받아달라고 하느님께 청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아버지, 간절히 청하오니 거룩한 천사의 손으로 이 제물이 존엄한 천상 제단에 오르게 하소서.”라는 경문은 묵시 8,3-5에 나오는 환시를 연상시키며, 제물을 받아달라는 청원을 반복하는 구절입니다.
제2양식의 봉헌 기도는 기념 기도와 한 문장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기도 자체가 간단명료합니다: “(저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며) 생명의 빵과 구원의 잔을 봉헌하나이다.” 이 기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가져오는 생명과 구원이라는 효과를 명확히 밝힙니다. 이어서 나오는 “또한 저희가 아버지 앞에 나아와 봉사하게 하시니 감사하나이다.”라는 경문은 히폴리토의 봉헌 기도를 그대로 인용한 것인데, 기념하고 봉헌하면서 다시 감사로 되돌아가는 내용이 특별합니다.
제3양식의 봉헌 기도도 기념 기도와 연결되어 있는데, 제2양식처럼 간단합니다: “… 감사하는 마음으로 거룩하고 살아 있는 이 제물을 아버지께 봉헌하나이다.”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 세상의 모든 죄를 씻어주는 “거룩한” 제물이며,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부활하시어 영광중에 계신 “살아 있는” 제물이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제4양식은 성체성사를 통해 봉헌하는 제사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봉헌하나이다. 이는 주님께서 기꺼이 받으시는 제사이며, 세상에 구원을 주는 제사이옵니다.” 이로써 성찬례가 예수님의 희생 제사와 다른 제사가 아니라, 성부께서 기꺼이 받으시고 모든 이에게 구원을 주는 십자가 제사와 같은 제사임을 밝힙니다.
[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12)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시작이다, 「교회헌장」 5항
「교회헌장」 2항~4항은 교회의 신비를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설명하였습니다. 이제 5항에서는 3항에서 이미 언급되었던 “하느님의 나라”를 독립된 항으로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이 항은 제1회기에 제출된 「교회헌장」의 새로운 의안에는 없었으나, 공의회에 참석한 교부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2회기에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가 필요하다고 제안하였고, 그것이 총회에서 받아들여졌습니다.
「교회헌장」 5항은 이전 항들과 다르게 교회의 신비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교회의 창립에서 바라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공생활의 시작에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라고 선포하시며, 교회를 시작하셨습니다. 이렇듯 교회의 시작은 성경에 약속된 구원의 기쁜 소식인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예고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 안에서, 곧 그리스도의 “말씀과 활동과 현존” 안에서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그 말씀을 듣고 믿어서 그리스도의 양 떼에 속하게 된 사람은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구약에서 ‘양 떼’는 교회를 나타내는 표상입니다(「교회헌장」 6항 참조). 따라서 말씀으로 교회의 구성원이 된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온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뿌려진 것은 땅에 씨가 뿌려진 것(마르 4,1-20 참조)과 같고, 이 씨앗은 수확 때까지 저절로 줄기와 이삭이 나오고 낟알이 영급니다(마르 4,26-29 참조).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습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그리스도의 활동’으로 증명됩니다. 예수님은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며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세상에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사람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마르 10,45) 오셨습니다. 그분 자신이 하느님의 나라를 드러내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창립자의 은혜로 하느님의 나라 곧 그리스도의 나라를 선포하고, 모든 민족 가운데 하느님 나라를 세우며,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싹과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싸우고, 그리스도와 영광스럽게 결합하기를 희망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와 그분이 설립하신 교회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면서도 동일한 실재는 아닙니다. 곧 교회가 하느님 나라 자체는 아니며, 다만 하느님 나라의 성사적 실재와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언어] προσεύχομαɩ (프로세우코마이, 기도하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 6,6; 1열왕 18,26-28 참조) 이 말씀에 담긴 의미는 ‘기도하다.’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어 동사 προσεύχομαɩ(프로세우코마이)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동사는 전치사 πρός(프로스, -을 향하여)와 동사 εὔχομαɩ(에우코마이, 희망하다/바라다)의 합성어입니다. 곧, 기도한다는 것은 아무 생각 없이 빈말을 내뱉는 행위가 아니라 명확한 ‘대상’을 향하여 내가 원하는 바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을 향하여 기도합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의 바람을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과 확신이 기도의 근본이며 조건입니다. (마태 18,19; 21,22; 루카 8,50) 하느님은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시기에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마태 6,8) 계시는 분이심을 믿고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며 항구히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가톨릭 교리 상식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고해성사를 볼 때 무슨 말부터 해야 하나요? 예식이 따로 있나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화해의 직무를 맡기시어, 그들의 후계자인 주교들과 사제들이 성품성사의 힘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할 권한을 가진다고 가르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461항 참조)
현재 교회가 사용하는 <고해성사 예식>은 1973년에 반포되었고 한국어 본문은 2019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예식서의 지침 11항은 “고해성사에서 고해자가 직접 하는 부분도 대단히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38항은 “각 지역의 필요에 맞게 조정하여 지역 예식서를 마련”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다만, 시작할 때 십자 성호를 그으며 성호경(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을 외우고,(16항) 지역의 관습이 있다면 죄를 고백하기 전에 먼저 고백기도(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를 바치고,(18항) 사제가 고해자에게 지은 죄에 대해 아파하도록 권고하면 통회기도(하느님, 제가 죄를 지어 참으로 사랑받으셔야 할...)를 드릴 수 있습니다.(19항) 이에 더해 <가톨릭 기도서>는 “고해한 지 ooo(기간) 됩니다.”와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도 모두 용서하여 주십시오.”를 더 추가하였습니다.
1931년 조선 지역 공의회의 결실로 1934년에 간행된 교리서 <천주교요리문답>에는 <고명규식>이라는 제목으로 고해성사 예식이 실려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외우고 있는 “신부는 죄인에게 강복하소서.”와 “나의 범한 모든 죄를 전능하신 천주와 (...) 신부께 고합니다.”가 이곳에 있는데, 이는 1973년 개정 이전의 <로마 예식서>와 그에 기초한 다른 언어권의 예식서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으로 사용하고 있는 부분이 <고명규식>에서는 더 길고 내용도 많은데 다음과 같습니다.
“이 외에 나 성찰치 못한 죄와 알아내지 못한 죄와 남이 나로 인하여 범한 죄 있을 것이니 신부는 도무지 나를 벌하고 사하소서.”
이 부분은 어떻게 작성된 것인지 아직까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성찰치(엑사미나레) 못한 죄’와 ‘알아내지(데테제레) 못한 죄’가 어떻게 다른 죄인지도 지금의 한국어로는 잘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남이 나로 인하여 범한 죄’라는 구절도 눈에 띄는데, 이는 비록 죄가 개인적 행위이지만 다른 사람들의 죄에 협력함으로써 죄의 구조를 만들어 결과적으로 유비적 의미로서의 사회적 죄를 초래한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되새기게 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868-1869항 참조)
[가톨릭 신학] 그리스도인의 기복신앙
‘기복신앙’은 종종 물질적인 복만을 추구하는 왜곡된 신앙이라고 비판을 받습니다. 하지만 기복신앙이 우리 삶에 해롭기만 한 것일까요? 인간이 신에게 간절하게 도움을 구하는 행위는 가장 원초적인 종교의 모습이며, 신앙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모든 종교에는 고통과 질병에서 벗어나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간구하는 기복적인 요소가 존재합니다.
성경에서도 복은 하느님의 약속으로 표현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창세 12,2) 야곱도 야뽁 강가에서 하느님과 씨름하며 “저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창세 32,27)라고 말하며 주님께 간절히 복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9.11)
이 말씀을 근거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께 청하면 복을 받고,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무게 중심을 지나치게 기복에만 치우치게 된다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실패를 경험하거나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 믿음과 기도가 부족했다고 자신을 탓하거나 하느님을 원망할 수 있습니다.
둘째,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행복만을 바라게 되어,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려는 복음의 본질을 외면할 위험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가르쳐 주신 ‘참 행복’을 생각해 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3.9) 여기서의 복은 단순한 물질적인 축복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향한 영적인 갈망을 가진 이들이 누리는 영원한 행복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재물보다 더 가치 있는 천상의 유산을 상속받는 기쁨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기도와 미사 안에서 주님께 복을 청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삶을 돌아보면, 기복적인 것에만 매달릴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십자가의 고통을 선택하셨고, 우리에게 완덕에 이르는 길을 알려 주시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낮은 자리에서 겸손하게 그분의 삶을 따를 때, 비로소 진정한 지복(至福, beatitudine, 완전한 선)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길 끝에서 누리는 축복은 그 어떤 물질적인 복보다 더 크고 깊으며, 영원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