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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라는 전차를 세울려면-제10계명
20: 17
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찌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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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6:6-12
6.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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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을 묵상하며 교훈을 받고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출 20: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탐심은 인간이 범할 수 있는 모든 죄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탐심 때문에 범죄 함으로서 인류의 비극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살았던 롯과 그의 아내의 비참한 말로도 탐욕에서부터 시작 되었고, 야곱이 험악한 세월을 살았던 이유도 과도한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라반과 야곱의 갈등과 암투도 탐욕 때문이고, 거짓 선지자로 전락하여 하나님께 버림받은 발람의 저주스런 사건도 탐욕에서 시작되었고, 엘리의 아들들의 성적인 타락도 탐욕에서 나온 결과이며, 사무엘의 아들들이 아버지와는 달리 뇌물을 받고 불공정한 판결을 한 도 탐욕 때문이고, 사울왕의 타락과 버림받는 모습을 보면서도 우리는 탐욕이 가져오는 비극을 봅니다.
아합은 북이스라엘의 왕 중에서 우상숭배와 탐욕스런 모습을 가장 많이 보여준 악한 왕이었는데 바알을 숭배하는 이세벨과 정략 결혼함으로써 탐욕은 극에 달합니다. 심지어는 평범한 백성인 나봇의 포도원까지 빼았습니다. 다윗의 일생의 큰 흠이 생긴것도 탐욕을 이기지 못한 결과이며, 게하시는 나아만 장군이 가져온 재물을 탐내다가 문둥병이 걸립니다. 그리고 구약의 많은 제사장들이 바로 이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신약에도 이 죄는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납니다. 슬픈 모습으로 예수님을 떠나갔던 부자 청년, 성전에서 돈 바꾸다가 예수님의 진노를 샀던 무리들, 스승을 배반한 가룟 유다, 바리새인, 농사를 잘 지었던 어리석은 부자, 초대교회의 역사를 더럽힌 아니니아와 삽비라 부부, 돈으로 성령을 사려고 했던 시몬 같은 사람들이 모두 탐심의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이렇게 탐심은 인간에게 가장 보편적으로 퍼져 있는 죄악입니다.
1. 탐심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골 3:5을 보면 바울사도는 탐심의 정체를 규명해 놓았습니다.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에 집착하고 그것을 극도로 탐하게 되면 우리가 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관심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결국 그것이 하나님의 자리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말은 안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숭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탐심이란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생각이고, 또 가져보아도 자기에게 소용없는 것을 가지려는, 가질 수 없고 이룰 수 없는 것 헛된 욕심입니다.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이 되었습니까?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서 번 은30을 잘 썼나요? 아간은 그 외투를 입고 추운겨울을 잘 지냈을까요?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감춘 것으로 집샀나요? 마술사 시몬이 돈으로 성령을 샀나요? 탐심은 하나님의 거룩한 명을 짓밟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파괴하며, 자신도 불행에 빠지게 하는 것으로서 모든 죄악의 근본이 바로 탐심입니다.
본질적으로 세가지 관계를 위협합니다…..
우상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건강한 관계를 위협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건강한 관계를 묘사할 때 그것을 '경건'이라고 부릅니다. 겨건이란 '하나님을 닮아 가는 바른 자세'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바울사도는 딤전 6:6에서 탐심을 극복한 자족의 마음이 있으면 경건에 큰 유익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반대로 탐심은 결정적으로 경건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딤전6:10의 경고를 읽어보십시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도다" 탐심이 우리를 참 믿음에서 떠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탐심의 가장 큰 위험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탐심은 우리로 이웃과의 건강한 관계도 위협합니다. 돈 문제가 끼어드는 순간 얼마나 많은 인간관계가 왜곡되고 파괴되고 있는지 아실것 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돈의 탐심이 작용하는 순간 우리는 이웃을 섬김의 대상이 아닌 이용의 대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닌 것을 봅니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군대간 그리스도인이 하루는 너무 너무 배고파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신자 친구가 빵을 혼자만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 열을 받아 "야, 이 친구야, 너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도 모르냐?했더니 그 친구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야, 이 친구야, 너는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도 모르느냐"고 하더랍니다.
탐심이 작용하는 순간 우리의 인간 관계는 즉각적으로 부자연스럽게 됩니다. 그래서 순수한 관계일수록 돈의 지배를 받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동업하다가 인간관계가 망가진 사람들… 비지니스 욕심 때문에 교회생활도 잘 못하고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돈의 이기심에서 자유할 수 없다면 동업도 조심해야 합니다. 돈을 꾸어주는 것도 바람직 하지 못합니다. 아예 주든가 안주든가 하는 것이 더 성경적입니다. 탐심은 언제라도 우리의 관계를 위협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탐심은 자신의 행복을 위협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딤전6:9에서 탐심은 탐심 그 자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여러 가지 시험에 들어가게 한다고 경고합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절에서는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 욕심을 저항하지 못하고 욕심에 굴복하는 순간 욕심은 죄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자리잡기 시작한 이 탐심의 죄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안에서 여러 형태로 계속 자라납니다. 많은 경우 이 죄는 우리 자신을 완전히 파멸 시킨후 우리를 놓아줍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파멸의 순간이 오기 전에 미리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레슨이 있다면 자족의 레슨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예수 믿고 평생을 통해 배우고자 한 가장 중요한 삶의 레슨이 바로 이 자족의 교훈이었던 것입니다. 빌4:11을 보십시오."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오늘 딤전 6장에서 바울은 동일한 진리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는 특히 자족의 삶을 위해 무엇보다 우리가 인생의 출발점과 골인 지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세상에 올 때 우리는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세상을 떠나는 날, 지금의 우리의 사회적 신분과 경제적 상황과 상관 없이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7절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8절입니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는 것입니다. 자족… 자기주제와 분수에 넘치는 것을 탐하지 않는 자족이 필요합니다.
열 번 계명은 아주 구체적입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무려 일곱 번이나 3인칭 소유격을 사용하여 이미 남의 것이 된 것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탐심은 자기가 가진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헛된 욕심입니다. 자기는 이미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남이 가진 것을 또 가지려는 마음이 탐심이고, 그것은 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 10계명은 이미 남의 소유가 된 것을 가지려고 하는 악한 마음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본분에 “네 이웃의 남종이나 여종도 탐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요즘 헤드헌팅 회사가 많고 인재스카우트가 합법적이고 당연한 일상사로 벌어지고 있지만 이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남이 길러 놓은 인재를 탐내지 말고 자기가 일군을 훈련시켜 쓰라는 말씀입니다. 심지어 선교지에서 일어나는 현실을 봐도 기가막힙니다… 자기 사역이 변변치 않으니까 현지인 사역자를 돈으로 매수해서 마치 자기가 한 것처럼 자랑할려는 욕망의 동기에서 다른 교회들…현지인교회들을 맘 아프게 만드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것도 돈이면 무엇이든지 된다는 탐욕의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2. 타락한 인간에게 탐심은 본성이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탐구한 사람은 프로이드라는 심리학자입니다. 그는 인간의 마음속에는 잠재의식이라는 것이 있고, 그것이 그의 성격을 형성하거나 어떤 활동을 하게 만드는데, 그 사람의 잠재의식 속에는 이드(id) 라는 욕망이 가득 차 있다고 보았습니다.
사람 속에 있는 본능인 ‘이드’는 자꾸 무엇을 가지라는 탐심을 일으키고, 의식은 그것을 억제하기 때문에 정신병이 생긴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그런데 프로이드가 ‘이드’ 라고 본 본성에 잠재한 욕망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는 죄로 삐뚤어진 마음, 즉 죄성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전혀 통제되지 않는 짐승이 한 마리씩 들어있습니다.
평소에는 이 짐승이 잠을 자고 있기 때문에 괜찮은 것 같은데, 이 욕망을 한번 건드려 놓으면 그때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도 자기가 통제를 못하고 욕망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자기의 본성의 욕망을 이긴 사람이 없습니다. (서론에 말씀드린 사람들…)
사람들은 이 탐심이 죄인 줄도 몰랐습니다. 당연한 본성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같은 율법학자조차도 롬 7:7에서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 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죄로)알지 못하였으리라.” 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인간의 욕망이라는 이 본성 앞에 인간의 지식이나 의지가 얼마나 무기력한지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롬7:16-19입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 도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는 우리 안에서 군림하는 이 욕망을 이긴 사람이 없었습니다. 바울사도도 자기의 의식은 의로운 삶을 사모하지만 속에 있는 본성은 죄만 따라가는 모순을 고백하면서 이를 어쩌면 좋으냐. 누가 나를 이 모순에서 건져줄 수 있느냐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수양으로 고쳐지는 것이 아니고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사람이 남의 눈을 의식해서 죄를 짓지 못할 때가 있는 것이지, 남만 보지만 않는다면 누구라도 욕망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말았습니다. 욕망을 이긴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이 열 번째 계명은 의문의 계명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도무지 지킬 수도 없는 이런 계명을 주셨단 말인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후로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은 믿는 사람에게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믿는 사람은 이미 성령을 모셨습니다. … 믿는 사람 가운데 이미 들어오신 성령은 내 속에 있던 본성, 즉 프로이드가 이드라고 말한 죄의 본성과 싸워서 우리가 본성의 욕구대로만 할 수 없도록 막아주십니다.
이때 나타나는 현상이 영적인 싸움입니다. 전에는 이 싸움에서 당연히 악한 욕구가 늘 이겼습니다. 가책도 느끼지 못하면서 당연히 육신의 욕구대로 행동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들어오신 후에는 마음이 괴롭습니다. 자신의 육체의 악한 본성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이 주시는 선한 생각은 육체의 욕심을 거스릅니다. 그래서 마음 안에서 전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성령께서 잠든 양심과 패배한 의지를 깨워서 악한 본성과 맞서 싸우게 하시는 결과입니다. 이제는 이 싸움이 팽팽해졌는데 누구도 이기지를 못합니다.
이 싸움을 해본 사람은, 자기 안에는 선한 소원은 있지만 선을 행할 능력은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한탄하게 됩니다. 바울사도는 롬7:24에서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라고 자신의 무기력을 탄식했습니다.
신앙을 갖기 전에는 죄를 짓는 것이 그리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될 수도 있고, 당장에는 유익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난 후에는 죄짓는 쾌락은 그야말로 잠깐이고 그 후에 엄청난 후회와 고통이 밀려온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성령은 끈질기게 권고하여 더 이상 죄를 즐기지 못하게 하시고, 죄 때문에 고통하게 하시어 결국 버리게 만드십니다. 자기의 본성은 틀렸고 주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때가 중요합니다. 이때 탐심을 따르지 말고 성령을 따라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육체의 욕구를 쳐 복종시키는 데까지 가야 합니다.
성령님을 따라서 본성을 억제하면 얼마든지 죄 된 본성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깨우치심을 거역하고 또 다시 육체를 따라가면 여전히 본성의 노예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열 번째 계명은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성령께 의지하라는 계명입니다.
3.왜 하나님께서는 이 계명으로 결론을 내리셨을까요?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탐심이 얼마나 심각한 죄가 되는가 볼까요?
제 1계명은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 하나님만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와에게 탐심이 들어가자 하나님처럼 되려고 지엄하신 하나님의 명을 어겼고, 자기가 가지 않아야 할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먹지 말라고 엄명하신 선악과를 먹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는 그가 하나님을 대행해서 하나님처럼 되어보려고 하는 탐심이었습니다. 탐심은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제 1계명을 여지없이 허물어 버립니다.
탐심은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제 2계명을 범하게 만든 원인입니다.
우상은 무엇입니까? 우상은 사람이 자기를 위해서 만들어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제 2계명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이지요? 자기를 지켜주고, 복주고 인도해 주고, 돈 벌게 해주고, 높여 달라고 만들어 놓고 비는 것이 우상을 만들고 섬기는 목적입니다. 우상숭배의 동기는 바로 탐심이고, 탐심의 결과가 우상인 것입니다. (중국식당 등)
그러나 하나님은 섬기는 신앙은 다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은 탐심 때문에 신을 섬기는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으신 분이시고 생명을 주신 아버지 이시며, 내 죄까지 해결해주셨고, 나를 사랑하여 영생으로 인도하고 계시니 너무나 감사와 찬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제 3계명은 주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말라고 하셨는데, 탐심은 자기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팔게 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기도 치게 합니다. (어제도 이메일..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거창한 간증을 늘어 놓는 꽃디부아르 사람…. 사기군들이 득실거립니다. 에디오피아 사람도…)
탐심은 주의 날에도 돈을 벌거나 재미를 보거나 자기를 위해서 시간들을 다른 날과 똑같게 사용함으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라’는 제 4계명을 결국 어기게 만듭니다.
제 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셨지만, 탐심은 부모의 재산에만 관심을 갖게 하고 부모를 모시는 것은 부담스럽다고 기피하게 만듭니다. 심지어 존속 살인까지 생겼습니다. 돈몇푼 때문에 부모를 죽이는 패륜아들이 많습니다.
제 6계명은 살인하지 말라고 엄명하셨지만, 탐심은 남의 것을 빼앗으려고 전쟁을 일으켜 사람을 죽이고, 자기 유익을 위해서 술과 마약을 팔아 사람들을 망치고, 돈을 빼앗으려고 직접 살인 강도짓도 합니다.
제 7계명은 간음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탐심은 남의 여자를 욕심부려 간음죄를 짓고 자신과 남의 가정을 망가뜨리며, 수많은 남녀를 돈과 탐욕을 위해 술집에서, 유흥업계에서 매춘행위에 종사하게 합니다.
제 8계명은 도적질 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탐심은 남의 물건에 손을 대게 합니다. 남의 주머니도 뒤지고, 남의 보석도, 자동차도 가져갑니다…
제 9계명은 거짓증거를 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자기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의인을 악인이라고 거짓증언을 하고, 악인을 의인이라고 주장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제 10계명을 범하면 다른 모든 계명이 무너지게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제 10계명은 덜 중요해서 가장 뒤에 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결론을 삼으려고 맨 뒤에 주신 것입니다.
4. 탐심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요?
1) 마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엡 4:22입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하면 심령이 새로워 질수 있을까요?
성경이 말씀하는 가장 적확한 해답은 이것 입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5:16
우리들이 아무리 아홉가지 계명들을 잘 지키겠다고 결심한다 할지라도 우리 뿌리 깊은 죄 된 본성이 우리를 지배하는 한 그 누구라도 율법 준수는 불가능하다는 것 입니다. 다만 우리의 욕된 본성을 어거해 주실 성령을 의지하는 사람만 자기의 욕된 본성을 제어하고 이 계명들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라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2) 습관을 바꿔야 합니다.
좋은 습관만이 나쁜 습관을 대체할 수 있습니다. 탐심의 습관을 대체하는 성경적인 경건의 습관 두 가지를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께 드림을 습관화하십시오.
저는 목회생활을 하면서 종 종 사람도 좋으시고 교회도 비교적 열심히 나오시는데 정기적이고 규칙적인 헌금의 습관이 없으신 분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의 신앙행태를 알아보면 거의 예외 없이 믿음의 고백이 불확실하고 신앙이 자라지 않고 계심을 봅니다. 그런데 그런 분중에 어느 날 갑자기 놀라운 변화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대개 이런 변화는 어떤 신앙의 체험을 수반함과 동시에 물질적인 헌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 분들은 예외없이 은밀한 욕심이 깨어짐과 동시에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하게 됩니다.
무엇인가를 처음으로 내 놓는 순간….욕심이 깨지면서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탐심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막고 있다가 그 둑이 터지는 순간 은혜의 강이 영혼에 밀려오는 것입니다.
아직도 헌금의 습관을 갖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지금 그렇게 해 보십시오.
고전16:2에 보면 바울 사도는 "매주 첫날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드리는 규칙적인 헌금 습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배의 시간마다 드림을 생활화해 보십시오.
이웃과의 나눔을 습관화하십시오.
잠21:26에 보면 "어떤 자는 종일토록 탐하기만 하나 의인은 아끼지 아니하고 베푸느니라"고 했습니다. 탐심은 베품으로만 나눔으로만 극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이 의인의 모습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의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인됨을 증명하는 것은 나눔의 삶입니다. 이제부터 얼마나 나누며 살아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열 명의 여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힌 여자가 하리우드에 연설자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사회자가 몇 마디 말을 요청했을 때 그녀는 “신사 숙녀 여러분! 저는 연애중이예요. 저는 지금 사랑에 깊이 빠졌어요.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관중들은 손뼉을 치며 환호했습니다. 그리고 “그 행운아는 도대체 누구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저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와 깊은 사랑에 빠졌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장래성 있는 영화계를 결별하고, 자신의 삶 전체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바치기로 했다고 선언을 하였습니다. 그 후 그녀는 목사와 결혼하고 선교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콜린 타운센드 에번스’였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저녁을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빌리 그래함 목사가 “콜린, 당신은 혹시 당신이 택한 현재의 신분을 후회 해본 적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대답하기를 “저는 헐리우드의 대인기 배우나, 영국의 여왕이나, 미국의 대통령과도 자리를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저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위대하시고 감격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이 시간 여러분께 묻습니다. 주님은 여러분들에게도 그와 같은 분이 되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도 찬송가 작시자 밀러 여사처럼, 이 세상 부귀와, 이 세상 명예와, 이 세상 행복과, 예수님을 바꾸지 마시기 바랍니다.
시편 기자는 “내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치 말게 하소서”라고 기도 하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우리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을 온갖 탐욕으로 채우는 대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시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열정과 사랑으로, 여러분의 영혼과 가슴을 가득 채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탐심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부요함과 하나님께서 보장하시는 복된 삶을 누리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