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목대
전주사범에서 전학 수속을 밟아주신 분은 이범삼(李範森) 교감이었다.
이때 교장은 김형배(金亨培) 선생님이었는데 그 분은 동경고사 수학과를 나오고
서울에서 명문 중학의 교유로 계신 분으로 늘 나비 넥타이를 매고 국경일에 모닝코트를 입는 신사였다.
이 교감은 삐쭉 야위고 뼈만 남은 분이며 동경물리학교를 3년에 졸업한 수재로서 원칙론자인데
47년 2월에 해양대학으로 영전하셨다.
이 교감과 음악 담당의 황덕철(黃德喆) 선생은 일제시대에 단 두 분의 한국인 교사였고
해방 후 학교 재산을 지키는데 진력하셨다고 한다.
처음 본 전주사범학교의 모습은 오랜 전통을 풍기고 중후한 느낌이었다.
서양식 정원에는 키가 큰 가이쓰까 향나무와 히마라야시다가 하늘 높이 솟아있고,
그 앞에 키가 낮은 회양목이 정돈되어 있었다. 정원 뒤의 팥죽색 본관은 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게 하였다.
2층 본관의 중간쯤에는 지붕 없는 평슬라브 지붕이 끼어 있어
옛날에 화재로 서쪽 반을 태웠던 쓰라린 사연이 깃들어 있었는데, 동쪽을 구관, 서쪽을 신관이라 불렀다.
본관의 마루는 목재이지만 벽은 두꺼운 벽돌로 쌓고 창문은 철제여서 재정이 넉넉할 때 지었음을 말해주었다.
본관의 동쪽에 일본 냄새를 풍기는 고풍각(나중에 여자 기숙사로 이용)이 놓여 있었다.
감수성이 예민할 때 다닌 학교이기에 전주사범의 교사배치도는 눈을 감고서도
그릴 만큼 머리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본관 뒤에는 기다란 복도가 남북으로 반듯하게 통해 있다.
나무 발판이 깔려있는 복도를 따라 본관에서 남쪽으로 걸으면 오른쪽에 넓은 강당이 있고,
왼쪽에 숙직실, 특별교실 그리고 음악실이 나란하고 마지막에 기숙사에 닿는다.
음악실 건너에는 공작실이 있고, 음악실과 특별교실 사이에는 여러 종류의 식물을 전시한
아름다운 교재원(敎材園)이 있으며,
교재원과 복도 사이에는 조선지도를 본뜬 연못[朝鮮池]이 있어 물이 채워질 수 있다.
이처럼 전주사범은 신발을 신지 않고서도 본관에서 어느 교실이든 갈 수 있도록 건물이
편리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대운동장 옆에는 농구장과 수영장이 있고 정구장이 따로 분리되어 있다.
학교의 동쪽에는 정원수로 둘러싸인 교장 관사와 사택이 있고 그 건너편에 농장(밭)이 있다.
또 서쪽에는 또 하나의 농장(논)이 대운동장과 부속국민학교 사이에 있다.
학교의 모든 시설은 네모꼴 부지 안에 배치되어 있고 그 남쪽에는 우뚝 솟은 학교림이 부지를 내려다보고 있다.
내가 정을 붙이고 이상(理想)을 불태우며 공부했던
전주사범학교는 1923년 4월 17일에 3․1운동 이후 총독부의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설립되어
도립 전주사범학교로 인가를 받아 강습과(3년제) 학생을 길러냈다.
36년에 관립 전주사범학교로 개칭하여 심상과(5년제)와 강습과(1년제)를 두었다.
광복 후 47년에 학제 개편으로 국립전주사범학교로 개칭하고
중학과(3년제)와 사범과(또는 본과, 3년제)의 6년제로 되었다.
이때부터 관비제가 폐지 되었으므로 졸업후의 의무 연한이 없어졌다.
62년에 전북대학교 병설 전주교육대학(2년제)으로 승격하였다가
1년 뒤인 63년에 전주교육대학으로 독립하고,
같은 해 전주사범학교는 23회 졸업생을 마지막으로 문을 내린다.
그 이후 전주교육대학은 양과 질로 크게 발전하였다.
한때는 학생정원이 20 학급 800 명으로 커질 때도 있었고, 83년에 4년제 교육대학으로 승격하였다.
개교한 지 70년이 지난 93년에는 드디어 국립 전주교육 대학교로 종합대학 승격이 이루어진다.
나는 전학 수속을 가장 빠르게 마쳤고, 그 후 친구들이 줄줄이 전학해 왔다.
긴장한 가운데 인사하러 학급에 들어갔는데 친구들은 무척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요즘처럼「왕따」같은 따돌림이나 텃세가 전혀 없었다.
그 이유는 재학생의 순수성과 작은 내 체구와 얼굴의 순진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광복 후 많은 일본 학생이 떠난 뒤였기에 학생이 적어서 2학년은 두 학급만 남아 있었다.
나는 2학년 2조에 배속되었다.
경기전 정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