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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교회의 성도가 대기업 사장인 장로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 집은 천 평이상되는 큰 대지에 각종 수목과 장식용 석재가 가득한 정원이 있고 그 정원의 안쪽에 거주하는 주택이 있었습니다. 그 성도가 그 집 육중한 대문앞에서 집까지 들리도록 큰 소리로 손님이 왔다고 외쳤지만 어느 누구 하나 나와 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분명 외부에 사람이 찾아오면 집안에 알릴 초인종이 어디 있을텐데라고 생각하며 대문 이곳저곳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찾기 힘든 대문 구석 안쪽에 초인종이 있었습니다. 그 벨을 누르니 집에서 즉각 응답이 왔고 용건을 말하니 바로 문이 열렸습니다. 어떤 분이 이 예화를 들어 “간절한 기도는 하늘 문을 여는 벨과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집을 찾아왔다고 알리는 초인종을 눌리는 순간이 바로 기도하는 순간이고 이 때 하늘에서는 초인종이 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왔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길 원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한다면 하나님을 찾는 기도의 벨을 눌러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가다라지방으로 건너가서 그 곳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시는 은혜를 베푸시는 장면입니다. 오늘 이 본문을 보면 예수님을 만나게 될 때 예수님에게 간구와 요청을 하는 여러 존재를 보게 됩니다. 이런 간구들, 요런 요청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 간구가 어떤 간구인지를 발견할 수 있고 우리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예수님에게 다가가고 있는 지를 보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말씀을 보면서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에게 어떤 심정으로 간절히 우리의 상태를 알려드리고 간구하고 있는 지 발견하고 제대로 된 심령으로 바른 간구를 하며 참 신앙인으로 은혜속에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다라에서 만난 여러 간구들, 첫째는 귀신 들린 자의 간구입니다.
마태복음 8장 28절입니다.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가다라 지방에 들렀을 때 귀신 들린 두 사람을 귀신에게서 벗어나게 만드신 기록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예수님께서는 분명 병든 사람들의 안타까운 외침을 들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귀신들린 사람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님을 만납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사납고 무서웠기에 그 동네의 다른 사람들은 그 길로 다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길로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몰라서 그 길로 갔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 귀신들린 자가 그 곳에 있음을 아시고 그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 곳에 도착했더니 이제 귀신들린 자의 소리가 들립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8장 29절을 다시 같이 읽으시겠습니다.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오늘 본문에서 여러 부류의 간구가 나오는데 이 치유 대상자의 구체적인 간구내용은 없지만 분명 아픔이 있는 영혼은 그 속에서 치유를 간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귀신에게 영혼이 붙잡혀 있는 영혼은 자유를 갈망하고 자유에 대한 처절한 싸움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고통의 순간을 맞을 때 절망하고 절망에서 건져달라고, 간절히 매달리며 살려달라고 간구하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귀신의 간구가 아닌 그 속에서 귀신들린 원래 영혼의 간구가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시편 107편 13절입니다.
“이에 그들이 그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시편 107편 19절입니다.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하나님께서는 질병, 가난, 억압, 영적 짓눌림등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에 대해 안타까워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참 자유, 세상에 참 건강, 세상에 참 행복이 넘치기를 소망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방해하는 영적 세력이 있고 이런 영적 세력에 휩쓸려 스스로 타락하고 멸망의 길을 걸어가는 인간이 있습니다. 이런 억압과 착취, 고통속에서 이제 구원얻도록 우리에게 구원자를 주셨습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되십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9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이렇게 우리에게 영적 억압, 귀신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하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을 사탄마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귀신이 먼저 예수님을 알아본 것입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것도 아니고 그 행하시는 일을 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불렀다는 것은 그들 나름의 영적 능력으로 예수님을 알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탄마귀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물론 심판주이심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았고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아는 지식이 있다고 해도 그들은 구원받은 존재가 아닙니다. 사탄마귀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았어도 그들은 오히려 더 큰 곤경에 놓일 것이고 결국 그들은 이제 예수님의 권세로 묶임을 당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탄마귀가 사람들을 짓누르고 억압했지만 이제 예수님의 권세로 사탄마귀가 짓누름을 당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바로 사탄마귀의 권세를 멸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요한일서 3장 8절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사탄마귀는 예수님 앞에서 무력한 존재며, 하나님 아들의 능력과 권세를 드러내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탄마귀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보고 영적 권위에 압도당해 두려워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영적 짓눌림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각종 안타까운 기도제목이 있습니까? 이 모든 것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께 우리의 사연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안타까운 일에 예수님께서 만져주셔서 해결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그것이 해결되기를 갈망하며 해결자 되시는 예수님을 찾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다라에서 만난 여러 간구들, 둘째로 귀신의 간구입니다.
마태복음 8장 31절입니다.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이르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 보내 주소서 하니”
오늘 예수님께서 방문한 가다라지방에서 예수님을 만난 귀신은 예수님께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으시려면 차라리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해달라는 간구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이것을 허락하셨고 귀신들은 돼지에게 들어가 돼지 떼가 비탈을 뛰어내려가 바다에 빠져 죽게 됩니다. 이 내용과 동일 내용을 기록한 마가복음 5장에서는 이 때 바다에 빠져 죽은 돼지가 2,000마리 정도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탄마귀를 결박하고 물리치고 지옥불로 그냥 던져버리시면 될텐데 왜 돼지까지 다 죽였을까요?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사탄마귀가 말한 것처럼 아직 때가 아니라고 하는 것에 힌트가 있습니다. 이 세상이 멸망하는 그 때, 하나님께서 세상을 멸하시는 마지막 때 사탄마귀는 완전히 무저갱으로 떨어지고 영원한 감옥에 갇힐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이 존재하는 그 순간에는 사탄마귀가 어디라도 기생하며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며 하나님의 일을 방해합니다. 사탄마귀는 마지막 날이 되기 전에는 세상에서 존재할 것을 알고 있고 그 순간까지는 사람들을 미혹할 것입니다. 이 세상은 아직 전쟁의 시간이기에 예수님께서도 사탄마귀가 돼지에게 들어가기를 원하는 요구를 어쩔 수 없이 들어주셨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 32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이 당시 가다라지방에는 특히 돼지가 많은 지역이었습니다. 가다라지방의 가장 주된 수입원은 돼지사육이었습니다. 돼지가 유대인 전체에게는 더러운 짐승이요 먹거리로 취급하지 않는 동물이지만 이스라엘 북쪽 지역 사마리아와 갈릴리근처에서는 돼지를 키우기도 좋고 또한 돈벌이도 되는 가축이었습니다. 사탄마귀는 가다라지방의 가장 큰 수입원인 돼지를 한 순간 몰살하게 함으로써 예수님에 대한 반감이 생기도록 이런 요구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모르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요구를 들어주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두 가지의 핵심이 있습니다. 먼저 귀신들린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귀신이 그 사람 몸에서 나와야하는 것은 가장 우선이었습니다. 또한 귀신들이 나와서 들어가기를 요구하는 돼지는 이 지역 사람들이 어쩌면 목숨만큼이나 소중히 생각하는 자신들의 돈벌이였기에 사람들에게 재물보다 사람의 생명이라는 것을 가르쳐줄 수 있는 좋은 교육방법이었습니다. 즉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과 재물에 매여있는 가다라 사람들에게는 재물보다 더 소중한 것이 사람목숨, 생명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두 가지 효과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한 번의 사역으로 두 가지 교훈을 주는 일거양득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요구를 허락하였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사탄은 오히려 사람이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보고도 하나님을 멀리할 수 있는 방법을 시도했습니다. 사탄의 요구에 담겨진 계획은 사람들이 신앙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먹고 사는 문제, 사람들이 신앙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재물축적의 문제를 통해서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며 인간을 공격하는 다른 방법으로 돈벌이를 공격했던 것입니다. 사탄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재산을 잃으면 하나님을 미워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욥기에서 사탄이 욥에 대해 평가하기를 하나님께서 욥에게 물질적인 복을 주셨기 때문에 욥의 믿음이 좋은 것이고 그가 재물을 다 잃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믿음을 저버릴 것이라고 하나님께 말하지 않습니까?
욥기 1장 10~12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오늘 마태복음 본문에서 사탄이 간구한 내용의 특징이 뭔지 아십니까? 결국 사탄의 속성은 남 잘되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탄의 간구는 어떻게든 타인이 멸망하도록, 어떻게든 다른 이들은 피해를 보도록, 어떻게든 남의 것을 뺏앗아 자기 것이 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 간구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고 괴롭혀 달라는 요구였습니다. 이런 것으로 보면 혹 우리가 종종 어떤 기도를 할 때 이런 간구를 하지 않습니까? 이 간구를 통해 우리 자신을 한 번 돌아보게 됩니다. 내가 기도할 때 어느 경우 어떤 대상이 몰락하기를, 나에게 좋지 못한 말과 행동을 한 사람이 폭삭 망하고 질병걸리고 심지어는 죽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하지는 않습니까? 이런 기도는 사탄마귀의 기도입니다. 믿음의 사람이 하는 기도는 축복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좋지 못한 말과 행동으로 나에게 피해를 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더 좋은 사람으로 변화되고 더 좋은 형편으로 바뀌어지도록, 선한 기회를 통해 하나님 만나 새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사탄마귀의 간구를 하지 않고 믿음의 사람의 간구를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에 대해 항상 축복하며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다라에서 만난 여러 간구들, 마지막 셋째로 세상 사람들의 간구입니다.
마태복음 8장 33,34절입니다.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예수님은 사람들이 무서워서 피해갔던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도록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지역을 힘들게 만들었던 귀신이 그들이 키우던 돼지에게 들어가 돼지가 모두 몰살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주었던 사람, 본인 스스로도 귀신들려 제대로 생활할 수 없던 사람이 이제 정상적인 삶이 가능하고 삶의 목적이 생기고 인생을 멋있게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은 그 지역 사람 모두가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다라지방 사람들이 예수님께 간구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데 “그 지방에서 떠나주십시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이들은 이렇게 요구한 것일까요?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 지역에서 그들과 함께 계시면 자신의 생업에 피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다라지방 사람들의 가치관은 정치든 종교든 학문이든 돈이 되어지고 부의 축적하는데 도움이 되어야 좋은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가치관이었습니다. 그들은 돈이면 다 되고 돈이 최고다라는 생각에서 살았던 사람들인 듯합니다. 물질이 주인인 물질만능사회였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예수님이 놀라운 권능을 행하고 뛰어난 가르침을 줘도 자신들에게 돈이 안되면 필요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가다라지방 사람들이 예수님께 간구한 내용은 내 재산과 명예, 내 삶에 도움 안 되면 예수님은 필요없으니 예수님은 빨리 나가라는 것입니다. 물질적 손해만 생각한 가다라지방 사람들, 그들은 정작 자신들이 먼저 붙잡아야 할 예수님, 그들의 인생에서 항상 붙들고 있어야 할 예수님, 그들의 모든 것이 되시면 영원한 삶의 모든 것을 해결주시는 예수님은 보지 못하고 눈앞에 있는 손해만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자 예수님, 능력의 주 예수님을 멀리하려고 합니다.
사도행전에도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서 전도할 때 보십시오. 귀신들려 귀신의 능력으로 사람들을 미혹하여 점쳐서 돈벌이하던 무당에게서 귀신을 내어쫓으니 그 무당을 이용해 돈벌던 재력가들이 바울과 실라를 고발하여서 감옥에 집어넣지 않았습니까? 빌립보에서 돈벌이하던 사람들도 귀신을 이용해서 돈만 벌면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 우리 주변의 사람들 중에도 예수님의 존재와 가치, 능력에 대해서는 좋게 생각하지만 ‘예수믿는 것이 돈이 되지 않으면 나는 관심없다’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잠언 23장 5절입니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유명한 일본 신학자 우치무라 간조가 돈에 대하여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돈이 있으면 침대는 살 수 있지만 잠은 살 수 없습니다. 돈이 있으면 책은 살 수 있지만 두뇌는 살 수 없습니다. 돈이 있으면 음식은 살 수 있지만 입맛은 살 수 없습니다. 돈이 있으면 장식품은 살 수 있지만 아름다움은 살 수 없습니다. 돈이 있으면 약은 살 수 있지만 건강은 살 수 없습니다. 돈이 있으면 사치스러운 생활은 살 수 있지만 교양은 살 수 없습니다. 돈이 있으면 유흥은 살 수 있지만 행복은 살 수 없습니다. 돈이 있으면 십자가는 살 수 있지만 구세주는 불가능합니다. 돈이 있으면 종교 사원은 지을 수 있지만 하늘나라는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돈을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삼으면 안 됩니다. 돈이 우리의 인생 목적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될 것입니다. 돈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돈이지 돈이 우리의 살아가는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9장 22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며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그 계명들은 다 지켰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계명을 다 지킬 수 있다면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겠냐고 다시 물으셨습니다. 하지만 그 부자 청년은 자신의 소유와 재산을 포기할 수 없어 예수님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구원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이 땅에서 가진 재산, 이 땅의 재물로 인해 천국생명, 영원한 삶은 놓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예수님을 따르고 무엇을 근거로 예수님을 모시고 있습니까? 가다라지방 사람들은 돈을 우선으로 생각하니 능력의 주님, 위대한 예수님의 행하시는 놀라운 사역을 보고도 그들을 떠나기를 요구하였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이 삶의 모든 것이 되고 예수님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신앙마저도 돈이 될 일인지, 선교와 전도마저도 돈이 될 수 있을 것인지, 교회사역을 할 때도 이익이 있을 것인지 따지고 돈을 좇아 살아간다면 우리의 가치판단은 어두워지고 죄악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을 몰라보고 예수님께서 떠나달라고 요청하는 가다라사람같은 인생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돈만 따져보다가 정말 생명의 주, 인생의 구원자를 떠나보낸 가다라사람같은 인생이 되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우리는 오늘 여러 부류의 간구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병든 자, 귀신들린 자, 가난한 자,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자같은 구원이 필요한 사람, 하나님 은혜가 필요한 사람이 외치는 영혼의 목소리, 참 생명을 간구하는 구도자의 간구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영혼을 놓기 싫어하는 악한 사탄마귀의 간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의 가치관에 매여 세상적 욕구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간구를 살펴보았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오늘 이 세 종류의 간구중 어떤 간구를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진정 예수님을 찾고 구원을 기대하며 완전한 자유를 찾는 간구를 하십니까? 아니면 사탄마귀와 같이 세상을 더럽히고 이웃을 괴롭히고 세상 전체를 파멸로 몰아가는 간구를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 사람들처럼 그냥 돈이면 다고 세상에서 살아갈 때 필요한 것만 있으면 예수님은 필요없다고 생각하며 예수님을 거부하는 요구를 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는 정말 우리의 모든 세상적 가치관을 다 내려놓고 나의 진정한 자유, 나의 진정한 행복, 나의 진정한 인생승리는 ‘세상의 족쇄를 다 풀고 사탄마귀의 지배를 다 떨쳐버리고 세상의 가치관을 다 물리치며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라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문제를 간구하고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시는 은혜속에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