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민중항쟁(釜馬民衆抗爭)
1979년 10월 16일부터 10월 20일까지 부산광역시, 마산(지금의 창원시 서부) 등의 지역에서 일어난 민주항쟁. 박정희의 제4공화국 유신 독재 체제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사건으로 유신정권을 무너뜨린 결정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배경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박정희 정권은 한계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유신 헌법 제정 이후로 학생 운동, 시민 운동 등에 대한 찬성론이 커졌으며 이를 누르기 위해 무리수를 두면서 인권 탄압 논란이 불거졌다. 또한 당시 부가가치세 도입으로 인한 증세와 물가 폭등, 그리고 이에 따라가지 못하는 임금 상승으로 인해 대중들의 불만도 팽배했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시민들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대중들의 박정희 체제에 대한 불신도 점차 커지고 있었다. 중화학 공업 육성이 정부의 조정 실패로 중복, 과잉 투자되면서 시중 자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었고, 이때문에 기존의 경공업이 중심이 된 부산 마산지역의 중소업체들은 대출이 급속히 줄어들어 자금난마저 시달리게 됐다. 이렇듯 당시 경기 불황과 부가가치세 신설로 인해 경남지역 민심은 크게 악화되고 있었고 이런 경제난은 시민들이 학생들에게 호응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제 2차 석유 파동이 터지면서 박정희 정부가 한창 육성하던 중화학 공업 또한 휘청거렸다. 게다가 당시 미국은지미 카터가 대통령직을 수행하던 시절이었고 덕분에 한미관계도 역대 최악이었다.
결국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이 득표율에 앞서는 등 크게 약진했으며 이때문에 박정희 정권의 불안감은 커져갔다. 때문에 국회에서는 유신정우회의 백두진을 국회의장에 앉히면서 국회를 통제하려 하였다.
1979년 5월 김영삼은 신민당 총재 경선에서 온건파였던 이철승을 누르고 총재에 선출된다. 그리고 과감하게 민주주의에 관한 사항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이때 신민당 당사에서 YH 사건이 일어나 이를 공권력을 투입해 진압하는 과정(야당 당사에 직접 경찰이 들어갔다)에서 벌어진 탄압으로 사상자가 발생하자 김영삼은 박정희 정권을 강한 논조로 비난했고 이에 국회에서는 국가 체제에 대한 모독을 이유로 10월 4일 날치기로 김영삼을 강제로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한다.
발단
1979년 10월 15일 부산대학교 학생 이진걸은 민주선언문을 인쇄, 학생들에게 나눠주면서 그 날 학교에서 시위를 벌이기로 선전하고 있었다. 그가 경찰에게 쫓기자 이번에는 신재식이 민주투쟁선언문을 배포했다. 그래서 10월 15일 도서관 앞에 사람들이 모였지만 정작 나서는 사람이 없어서 그 날 시위는 무산되었다. 사람들이 무력감에 좌절하는 상황에서도 법정대 그룹, 언더 써클 그룹, 아카데미를 비롯한 민주 동아리 계열, 상대 경제사학회 등에서 다시금 시위 준비를 했고 그 결과 10월 16일 오전 도서관에서 드디어 시위가 벌이지기 시작했다.
부산에서의 전개
억눌린 우리 역사 터져나온 분노 매운 연기 칼바람에도 함성소리 드높았던 동트는 새벽벌 시월이 오면 핏발 선 가슴마다 살아오는 십 일육 동지여 전진하자 깨치고 나가자 뜨거운 가슴으로 빛나는 내일로 - 부산대학교 제2도서관 10.16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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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 안하기로 유명해 유신대학교라는 오명이 붙던 부산대학교에서 시위가 벌어지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시위 인원이 늘어 5000명 가량의 학생들이 일제히 부산 중심가인 남포동과 부산시청 앞, 광복동에 집결해 '유신 철폐' 와 '독재 타도' 를 부르짖었다.
늦은 오후부터는 동아대학교 학생들의 합류로 더욱 시위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시위 대열은 부산 국제시장 일대를 무대로 게릴라식 전개되었다. 여타 시위와 달리 시민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참여로 단순한 학생 시위를 넘어 민중항쟁으로 전개되었다. 시민들은 박수를 치고 경찰의 진압 작전을 방해하며 쫓기는 학생을 숨겨주는가 하면 빵이나 김밥, 청량음료, 캔맥주 같은 먹을거리와물수건 등을 던져주며 열렬히 호응하고 시위대를 격려했다.
저녁 7시 5~7만여 명의 인파가 부영극장 앞 간선도로를 꽉 메운 채 시위의 물결을 이루었다. 시위의 주도역인 대학생들 무리에 퇴근길의 회사원과 재수생, 교복 입은 고등학생, 심지어 상인과 노동자, 접객업소 종업원들까지 가세하였다. 이 시점부터 시위는 단순한 학생을 넘어 도시 하층민까지 포괄하는 범 시민 항쟁으로 전개되었다.
부마항쟁 당시 부산에 진주한 계엄군.
밤이 되어 시민들이 더욱 합세하자 시위는 점차 폭력적인 양상으로 바뀌어갔다. 파출소, 어용 신문사와 방송사, 경찰차에 돌을 던지고 불을 지르는 등 이튿날 새벽 2시까지 격렬한 시위를 전개되었다.
10월 17일부로 부산대는 긴급 휴교에 들어갔지만 시위는 계속 전개되었다. 중구, 서구, 동구 지역의 거의 모든 파출소와 경찰서, 공공기관이 공격당했다. 이틀 간의 격렬한 시위로 경찰 차량 6대가 전소되고 12대가 파손되었으며 21개소의 파출소가 불타거나 파괴되었다. KBS, MBC, 부산일보사, 경남도청, 그리고 TBC-TV 취재 차량이 투석당하고 피해를 입었다.
당시 부산시에서 집계한 자료에는 부상자는 16일 하루 동안에만 학생 5명, 일반 시민 10명, 경찰 95명 등 도합 110명으로서 그 가운데 중상자는 18명이었다. 그러나 시민들로선 자진 신고를 기피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을 감안할 때 실제 피해는 그보다 훨씬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고문 피해자들도 양산되었던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부산에서의 시위를 막기 위해 박정희 정권은 18일 새벽 0시를 기해 이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마산에서의 전개
부산에 육군 공수여단 5000명의 병력이 투입되었지만 시위는 오히려 부산을 넘어 마산으로까지 번졌다. 10월 18일 경남대학교 학생 1,000여 명이 기동 경찰 300여 명과 대치하다 투석전을 벌였고 3·15 의거탑에서 1,000여 명이 스크럼을 짜서 유신 철폐와 독재 타도 및 언론 자유를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하는 등 시내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 날 저녁부터는 학생들과 시민 수천 명이 시내 중심가를 메우고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는 대규모 군중 시위를 전개하였다.
마산에서의 시위는 한층 더 격화되면서 공화당사, 파출소, 방송국이 불타고 파괴되었다. 이에 인근의 창원, 진해, 함안 등지에서 경찰 병력이 넘어오고 2개 중대의 군인까지 투입되어 시위대를 진압하였다. 경남대학교는 18일부터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으나 19일 학생들과 시민들의 경찰 차량 방화, 파출소·언론기관·관공서가 불타는 등 공권력에 대한 저항이 계속되었다. 이 시위는 대학생과 일부 고교생은 물론, 노동자, 폭력배, 구두닦이, 접객업소 종업원 등 도시 하층민들이 대거 가세하여 경찰, 군인과 충돌하면서 시위 강도는 한츰 격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산의 항쟁이 수출 자유 지역 노동자와 고교생까지 합세, 더욱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정부는 10월 20일 0시를 기해 마산과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하였다.
계엄군의 진압
1979년 박정희 유신독재 아래에서 일어난 부마민주항쟁.
당시 부산 마산에는 육군 특전사 예하 1공수여단과 3공수여단, 해군 제1해병사단[4] 제7연대(연대장 보병대령 박구일)가 계엄군으로 들어왔다. 증언에 의하면 당시 계엄군의 진압은 매우 폭력적이고 혹독했다고 한다. 아래는 진실화해위원회의 "부마항쟁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침해 사건" 보고서에 기록된 사례들이다.
가내수공업자 김○○(24세)은 퇴근 후 버스를 타기 위해 육교를 건너려고 하다가 계엄군이 육교통행을 제지하자 항의를 했고, 그 대가로 계엄군에게 진압봉으로 머리와 어깨를 두 세 차례 폭행당한 뒤 군화발로 복부를 두 세 차례 걷어차였고 주먹으로 얼굴을 구타당해 충격으로 실신까지 하였다. 깨어나고 나서도 다른 시민 7~8명과 원산폭격을 당했고, 그 와중에 폭행당한 복부의 통증으로 계속 휘청거리자 군인이 엄살을 부린다면서 욕설과 함께 군화발과 진압봉으로 구타하였다. 그러다가 낙하산 마크를 단 군인 선임자의 명령으로 광복동 파출소로 인계되었고, 파출소에서 집으로 귀가했다가 급성 복막염으로 실신하여 가족들의 의해 응급실로 이송되었다.
당시 김○○을 수술한 부산 복음병원 외과 과장 장○○는 몸 내부적인 원인이 아닌 외상으로 인한 복막염, 그것도 군인에 의해 맞아 발생한 복막염 환자라는 점 때문에 충격적인 일로 기억하고 있다고 했으며, 수술 전날에도 군인들이 부녀자를 총 개머리판으로 치는 등 폭행을 가하는 장면을 봤다고 증언했다. 김○○ 이외에 군인에게 폭행당한 다른 환자들이 한두 명 입원했던 적도 있다고 했다.
금은방 직원 전○○(29세)은 시위에 참여하던 도중 시위대가 계엄군을 향해 투석을 하자 계엄군들이 시위대에게 달려들어 총 개머리판으로 무자비하게 구타를 했으며, 그 때 군용차량 뒤편으로 피신하다가 6~7명의 계엄군에게 포위당한 후 총 개머리판에 머리, 얼굴, 팔, 다리 등 전신을 구타당하여 실신하였다. 그 뒤 두개골 함몰분쇄골절로 인해 한독병원 응급실로 후송되었으나 한독병원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하여 인근에 있는 한○○ 신경외과 의원으로 재차 후송되어 대수술을 받았다. 골절된 뼈를 제거하는 수술을 한 지 한달 뒤에도 인공뼈를 심는 두개골 성형술 역시 시행하였다.
부산 소재 동광섬유 직원 신○○(37세)도 1979. 10. 18. 부산시 남포동에서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시청 부근에서 진압군에게 곤봉과 총 개머리판으로 머리 등을 구타당하여 뇌 손상, 뇌경막 손상의 상해를 입었다.
한국방송공사에서 제작한 "KBS영상실록" 2005. 9. 25. 방송분에는 “베레모를 쓰고 집총을 한 군인이 군용차량으로 이동하는 영상, 한 군인이 총 개머리판으로 적색 상의를 입은 청년을 구타하고 옆에 있던 군인들도 함께 발로 차는 모습이 촬영되어 있고 이는 외신기자가 기록한 18일 부산의 모습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마산경찰서 전투경찰(일경) 서○○는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나는 시위대를 구타한 사실은 없지만 낙하산 마크가 부착된 군인과 일반 군인들이 마산 시내에서 돌아다니면서 시민들에게 불심검문을 요구하고 이에 불응하여 도망가는 시민들을 잡아서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장면을 본 기억은 있다. 당시 그 장면을 보고 무서워서 불안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고 진술하였다.
국제신문 취재기자 조갑제의 취재내용에 따르면 “‘데모 군중에게 곤봉을 쓸 때는 어깨 밑을 때리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 있지만 군인들은 데모 군중도 아니고 아무런 위협도 주지 않은 양민들의 머리를 주로 때렸다.’고 한다. 넥타이를 매지 않고 장발을 했거나 젊어 보이는 남자들 중에 까닭 없이 붙들려가 견딜 수 없는 수모를 당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되어 있다.
항쟁 그 후
나흘간의 시위 결과로 부산에서 1058명, 마산에서 505명 등 총 1563명이 연행되었다. 군법회의에 회부된 87명(학생 37명, 일반인 50명) 중 단순가담자 67명은 소가 취하되었고 20명(학생 7명, 일반인 13명)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일반 검찰에 송치된 31명(학생 26명, 일반인 5)은 전원이 소가 취하되었고 651명(이 중 208명은 부산 봉기 학생)은 즉결심판에 회부되었다. 군 부대의 주둔으로 인해 시위는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 (조갑제는 시위가 꺾였다고 평가했지만 시위가 언제든 다시 불을 뿜을 수 있던 상황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 팽팽한 긴장이 갑자기 끊어진 것이 위수령 발동 후 6일 뒤에 일어난 10.26 사건이다.
기소된 사람들은 10.26 이후 석방되거나 재판을 거쳐 1982년 전두환 집권 후 사면을 통해 풀려났다.
항쟁 과정에서 대규모 유혈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조갑제는 시위가 다시 불을 뿜을 가능성을 낮게 보았지만 시위가 다시 불을 뿜었다면 아래에도 나오지만 박정희는 곽영주를 운운하며 총기사용을 허가했고 차지철은 한술더떠 캄보디아를 언급하며 학살을 예고했다. 그리고 실제로 만일 시위가 다시 불을 뿜었다면 무력을 통한 유혈 진압이 일어났을 것이며 부마항쟁의 계기가 된 김영삼의 체포도 임박한 상태였다(김영삼의 체포는 10월 30일에 실행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구상했던 무력 진압은 결국 7개월 뒤 광주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김영삼의 체포와 구속, 선제적인 무차별 무력 진압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이는 광주에서 김대중의 체포와 구속, 선제적인 무차별 무력 진압으로 그대로 재현된다(김정남 저, "진실, 광장에 서다" 중).
그리고 전두환-노태우 정권 내내 묻혀 있던 부마항쟁은 민주화 정부가 수립된 후 비로소 부마항쟁 관련자를 대상으로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가 이루어졌고 일부 관련자들이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6] 또한 부산민주공원에서 열린 부마항쟁 기념식에 대통령의 축사#가 전해지기도 했다. 한편으로 2005년에 통과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 기본법에 의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약칭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하였으며 진실화해위원회가 2006년 11월에 부마항쟁진실규명신청을 접수했다. 그 뒤 2009년 12월에 진상조사가 시작되어 진실화해위원회의 부마항쟁에 대한 간략한 조사 결과가 2010년 7월 발표되었다.
그러나 99년에 이루어진 입법청원 추진과, 2010년에 추진된 대규모 진상조사와 피해보상에 필요한 특별법이 모두 통과되지 않아 부마항쟁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명이 유예되었다. 결국 2013년이 되어서야 부마민주항쟁 명예회복 보상법이 국회 통과되어 부마항쟁의 위상을 재정립하고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보상을 위한 길이 드디어 열리게 되었다.
10월 유신 정권의 종말을 고한 사건.
그리고 5.18 민주화운동, 아니 킬링필드의 참극이 부산·마산에서 벌어질 뻔한 사건이다.
이 사건이 벌어졌을때, 박정희는 4.19 혁명과 곽영주 운운하며 총기사용을 허가했다. 그리고 차지철은 여기에 덧붙여서 캄보디아를 언급하며, 부산·마산 시민 100~200만명 쯤 희생시켜도 괜찮지 않겠느냐?는 망언을 했기 때문이다.
10월 유신 체제의 정당성의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 사건으로 부마항쟁은 서슬퍼런 긴급조치 시대의 숨막히는 억압 구조를 뚫고 4.19 혁명 이후 처음으로 본격적 민중항쟁의 지평을 다시 열었던 사건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 점에서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반유신 운동의 귀결점이자 총결산이었다.
부마항쟁은 학생 운동이나 소수 명망가들에게 국한되어 있던 70년대의 그 어떤 반독재 민주화운동보다 정권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단순히 소수 명망가와 지식인적인 학생들의 참여를 넘어 대중들이 광범위하게 개입하는 거대 사건이었다. 이는 부마항쟁의 주 참여층이 하층 도시민, 이를테면 중국집 배달원, 술집 종업원, 노동자, 구두닦이였고 수출지대의 노동자들의 참여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가진다.
이로써 답보 상태에 처해있던 70년대 학생 및 재야 중심 민주화운동의 한계를 단숨에 뛰어넘어 노동자와 시민 참여라는 커다란 의의를 가진 운동이다. 이는 4.19 혁명에 이어 민주주의 성취를 위한 대규모 반독재 항쟁이었으며, 이러한 항쟁의 역사는 후에 5.18 민주화운동과 6월 항쟁으로 이어진다.
부마항쟁은 단순히 70년대 반유신운동의 귀결점으로만 머물지 않고 박정희의 유신 정권을 붕괴시킨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부마항쟁은 정권 내 권력 암투를 보다 급속히 자극하여 10.26 사건과 박정희 정권 몰락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부마항쟁과 10.26
제가 내려가기 전까지는 남민전이나 학생이 주축이 된 데모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현지에서 보니까 그게 아닙니다. 160명을 연행했는데 16명이 학생이고 나머지는 다 일반 시민입니다. 그리고 데모 양상을 보니까 데모하는 사람들도 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에게 주먹밥을 주고 또 사이다나 콜라를 갖다주고 경찰에 밀리면 자기 집에 숨겨주고 하는 것이 데모하는 사람과 시민들이 완전히 의기투합한 사태입니다. 주로 그 사람들의 구호를 보니까 체제에 대한 반대, 조세에 대한 저항, 정부에 대한 불신 이런 것이 작용해서 경찰서 11개를 불질러버리고 경찰 차량을 10여 대 파괴하고 불지르고 이런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김재규가 10.26 재판에서 증언한 것처럼 그는 이 지역을 직접 방문해 이 사건이 단순한 학생시위가 아닌 민중봉기이며, 더이상 유신체제 존속이 어렵다는 점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을 전혀 못느끼는 차지철과 대립, 결국 박정희 살해로 이어졌다는 설은 바로 이것. 이 설에 대해서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던 안동일 변호사의 증언을 들어보는게 좋다.
왜 대중적인 인지도가 낮은가?
부마민주항쟁은 4.19 이후 다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이자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6월 항쟁으로 연결된 민주화 대장정의 분수령임에도 불구 의외로 4.19혁명, 5.18 광주 민주화 운동, 6월 항쟁과 달리 대중적인 인지도가 낮다. 실제로 위 세 항쟁에 대해서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기념식도 가지지만 부마항쟁에 대해서는 국가적 차원의 기념은 드문 편이고, 다른 민주화 운동에 비하여 정부의 관심은 낮은 편이다. 흔히 부산 지역에서의 민주주의 운동 정도로 알려져 있거나 아예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흔히 부마민주항쟁은 부마사태로 많이 알려져 있는 것도 이의 방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의 원인에 대해서는 몇가지 해석이 있다.
부마민주항쟁 직후에 박정희가 김재규에 의해 사살되고 곧바로 다시금 전두환에 의한 군사독재의 철권 통치가 이어지는 동란의 과정 속에 항쟁을 주목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고, 부마항쟁이 일어난지 불과 7달 뒤에 광주에서 학살이 일어나 민주화를 추구하던 세력은 믿기 어려웠던 학살에 더 많은 관심과 부채감(서울역 회군)을 가진 것이라는 시각.
이는 박정희는 죽었으되, 군사독재가 종결되지 않은 시기적 사건전개에서 역사적 관심편중의 원인을 찾는 해석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4.19 혁명은 이승만을 물리치는데 성공했고, 5.18은 충격적인 학살이 일어났으며, 6월 항쟁은 전두환을 물리쳐 낸 것에 비해 부마민주항쟁은 10.26의 계기가 되어 유신정권 철폐의 철퇴를 가한 의의가 있었음에도, 12.12 군사반란으로 인한 신군부 정권이 창궐한 것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외에, 서강대 손호철 교수를 중심으로 펼쳐진 정치적 딜레마설이 있다. 부산-경남 지역이 1990년 3당 합당 이후 보수화의 길을 걸으면서 상대적으로 부마민주항쟁은 정치권에서 논의되지 않은 채로 잊혀졌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3당 합당 이후 자연스럽게 박정희를 계승한 정당을 지지하게 되면서 그에 대항하는 운동을 전면 부정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대놓고 이를 옹호할 수도 없기 때문에 자연히 무관심 속에 방치하는, 혹은 묻어버리는 방향으로 갔다는 지적이다.
박정희에 대한 우호적인 평가가 존재하고, 이를 추종하는 정치 세력이 부산-경남 지역의 주류 집권 세력이 되면서 그를 전면부정하는 이 항쟁에 대해서 높게 평가할 수 없다는 해석으로 이런 정치적 딜레마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시각이다. 이 해석에 의하면 부마민주항쟁이 받는 무관심은 그것이 위에서 언급한 정치적 딜레마에 희생된 결과이다.
유신체제는 1972년에 선포됐다. 이 체제는 박정희의 종신집권, 권위주의적 억압책 강화, 중화학공업화 정책과 이를 위한 사회적 동원이 결합한 것이다. 박정희는 이를 통해 사회를 준전시(準戰時) 상황처럼 통제했다.
박정희는 주로 “안보 위기”를 근거로 들어 권위주의적 억압을 정당화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에서 패배를 인정해야만 했고, 그에 뒤따른 패권의 공백을 ‘공산 중국’과 타협하는 방식으로 메우려 했다.
부마항쟁 당시 부산 시내에서 행진을 하고 있는 대학생들 민중항쟁은 김재규의 손을 빌어 유신체제를 끝장냈다.
미국의 한국사 연구자 브루스 커밍스는 박정희가 “안보 위기” 운운한 것을 “순전히 아전인수적인 것으로 일축해서는 안 된다”며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미국의 대외정책상의 극적인 변화로 말미암아 남한은 깊은 충격을 받았으며 아시아의 마지막 도미노처럼 보였다. 1971년 7월 헨리 키신저의 은밀한 뻬이징 방문(은) … 타이완의 중화민국에 대한 미국 지원의 사실상 종결로 이어졌다. 닉슨 독트린은 … 베트남전으로부터 승리 없이 철수하겠다는 신호를 분명히 보냈고, 그럼으로써 남한 정권과 유사한 처지의 사이공 정권을 위태롭게 했다.”
국내 상황도 박정희에게 불리했다. 극단적 저임금 노동에 기반을 둔 급속한 수출주도 경제성장 전략의 모순이 터지기 시작했다. 1970년 전태일의 분신은 많은 지식인, 종교인, 학생들의 양심을 자극했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은 겨우 94만여 표 차이로 박정희에게 패했는데, 박정희의 대규모 부정 선거 운동을 감안하면 사실상 박정희가 진 것이었다. 당시 박정희는 국가 예산의 10퍼센트를 선거 운동에 썼다. 거기에 미국 정유자본(걸프, 칼텍스)이 제공한 자금(7백만 달러)을 더해야 한다.
유신체제는 광범한 민심 이반을 막지 못했다. 유신체제는 1974년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며 더욱 극단화하지만, 이런 극단적 억압 조처는 결국 박정희의 무덤을 파는 것이었다. 1970년대 후반 들어 지식인 · 학생 들의 민주화 투쟁은 점점 강경해졌다. 이와 함께 노동자들을 지원하는 운동도 활발해졌다. 1979년 YH 여성노동자들의 처절한 투쟁과 그 과정에서 벌어진 여성노동자 김경숙의 죽음은 부마항쟁의 한 배경이 됐다. 부마항쟁 당시 부산대 학생들의 요구안에는 “YH사건에서와 같은 반윤리적 기업주의 엄단”이 들어 있었다.
커피 한 잔 값
어떤 점에서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에서 벌어진 항쟁은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여 준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정권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근거는 반공과 더불어 경제성장이었다. 부산의 사상공단, 마산의 수출자유구역은 박정희의 ‘성공적인 수출지향적 경제발전 전략’의 상징이었다. 브루스 커밍스의 지적대로 박정희의 특혜를 입은 이 지역, 다시 말해 박정희가 자신에게 우호적인 지역이라고 여겼을 이 지역이 박정희의 무덤이 된 것이다.
여기에는 박정희 ‘개발독재’의 모순 그 자체가 큰 몫을 했다. 많은 농민들이 박정희식 경제성장 정책을 가난에서 벗어날 유일한 기회로 여기기도 했지만, 막상 그들을 기다린 것은 비인간적인 노동규율과 저임금 장시간 노동이었다. 그나마 “선성장 후분배”를 내세운 박정희 정권 시절에 경제성장의 과실도 균등하게 배분되지 않았다. 경제성장률은 높았지만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을 강요당했다.
우파들의 과장과 달리, 특히 제조업 노동자의 실질임금 상승은 매우 느렸다. 1970년 전태일이 분신했을 때 평화시장 여공들의 시급은 커피 한 잔 값에 지나지 않았는데, 거기서 9년이 지난 1979년 YH 농성 여공의 시급 수준도 그와 같았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재벌과 부자 들은 급속히 부를 늘렸다. 우파와 보수적인 학자들은 박정희 정권이 비교적 평등한 분배를 이뤘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빈부 격차는 박정희 정권 내내 심해졌다. 1978년 원풍모방 노동자 장남수는 이렇게 말했다. “100억불 수출을 달성했다고 거리는 들떠 있는데 저희들은 왜 이렇게 외로워야만 합니까. 다들 잘 살게 되었다는데, 모두들 경제가 성장했다고들 하는데 저희들은 왜 이렇게 배가 고픕니까 … 알 수가 없습니다 … 저희들은 누구를 위해 일해 왔으며 또 일해야 합니까?”
당시 경제 위기도 박정희 정권의 기반을 흔들었다. 경제는 1976년 14.1퍼센트 성장했지만, 성장률이 1978년에 9.7퍼센트로 떨어지더니 ‘오일 쇼크’가 강타한 1979년에는 6.5퍼센트, 급기야 1980년에는 마이너스 5.2퍼센트로 폭락했다.
위기의 대가는 서민들이 치렀다. 1979년 박정희는 전기요금을 35퍼센트나 올려버렸다. 물가가 22퍼센트 올랐고 해고와 실업도 늘었다.
박정희의 중공업 주도 성장 정책이 ‘역사의 복수’를 초래한 측면도 있다. 당시 부총리 자문역을 했던 김기환은 “중화학 공업에 치중하다보니 1975~77년 섬유산업에 대한 은행대출이 전체의 40퍼센트에서 절반으로 줄고 말았는데, 그 결과 노동집약적인 중소기업들이 몰려 있던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반정부 시위가 터졌다”고 분석했다. 부산지역 부도율은 전국의 2.4배에 달했고, 수출증가율 역시 전국증가율인 18.4퍼센트에 훨씬 못미치는 10.2퍼센트로 둔화했다.
민심이 돌아섰다는 사실은 1978년 12월 총선에서도 드러났다. 야당인 신민당이 32.8퍼센트를 득표했다. 신민당보다 더 선명한 야당을 표방한 통일당도 7퍼센트를 얻었다. 반면 박정희의 공화당은 31.7퍼센트를 얻어 사실상 패배했다.
부산과 마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지역의 의석 수 10석 중 공화당은 4석, 신민당은 5석을 차지했다. 서중석 교수는 “그나마 당선한 공화당 4명도 1위가 한 명도 없었고 다 차점자에 지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에서 공화당의 열세가 두드러졌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는 야당 탄압을 더 강화해 신민당 당수인 김영삼을 국회에서 제명했는데, 이는 들끓는 부산 민심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됐다.
‘유신대학’
한국 역사에서 자주 그랬듯이 부마항쟁에서도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가 방아쇠 구실을 했다. 유신에 항거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켜 ‘유신대학’이라는 오명을 들어온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누구도 항쟁이 폭발적으로 벌어질 거라 예상하지 못했다. 당시 한 부산대학교 활동가는 항쟁 하루 전에도 “역시 부산대는 안 돼” 하며 술을 퍼마셨다고 회고했다.
10월 16일 부산대학교 학생 4천여 명이 “유신철폐”와 “독재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진출했다. 이어 동아대학교 학생들이 합류하자 시위대 규모는 점점 늘었다. 저녁이 되자 퇴근하는 노동자들이 합류해 시위대는 5만~7만여 명에 달했다. 상인, 접객업소 종업원, 재수생, 교복 입은 고등학생까지 가세했다. 시위의 성격은 도시 하층민들이 대거 참가하면서 점점 격렬해졌다. 경찰서, 어용 언론사, 도청 등이 불에 타거나 파손됐다.
△위수령이 발동되고 투입된 공수특전단 이들의 야만적인 진압은 다음해 광주에서 더 극적으로 나타난다.
부마항쟁 당시 현장을 시찰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항쟁의 성격을 이렇게 규정했다. “부마사태는 그 진상이 일반 국민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본인이 확인한 바로는 불순세력이나 정치세력의 배후 조종이나 사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일반 시민에 의한 민중봉기로서 시민이 데모대원에게 음료수와 맥주를 날라주고 피신처를 제공하는 등 데모하는 사람과 시민이 완전히 의기투합하여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고 … 체제저항과 정책 불신 및 물가고에 대한 반발에 조세저항까지 겹친 민란이[었습니다.]”
항쟁의 규모와 격렬함에 놀란 정부는 신속하게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그러나 시위는 마산으로 번졌다. 마산에서도 학생들이 시위를 촉발했다. 부산대학교와 마찬가지로 ‘유신대학’이던 경남대학교 학생 1천여 명이 거리로 나섰다. “지금 부산에서는 우리 학우들이 유신독재에 항거해 피를 뿌리고 있다. 나가자!”
마산에서 항쟁은 더 격렬했다. 부산과 마찬가지로 도시하층민이 항쟁의 주력이 됐다. 10월 20일 정부는 마산의 항쟁이 수출자유지역 노동자들로 확산하려 하자 마산과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했다.
진압부대로 투입된 공수부대와 해병대는 대검을 꽂은 채 잔인한 진압 작전을 폈다. 보안사령부가 작성한 보고서 <부마지역 학생소요사태 교훈>은 이렇게 말한다. “과감하고 무자비할 정도로 타격[해] 데모 대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함으로써 군대만 보면 겁이 나서 데모의 의지를 상실토록 위력을 보여야 한다.” 이는 다음해 광주를 피로 물들인 공수부대의 야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부마항쟁은 군대의 폭력으로 잦아들었지만, 항쟁이 지배자들에게 준 충격은 매우 컸다. 권력자들이 분열했다. 박정희는 강압적 지배를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재규가 총을 쏘기 직전 박정희는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고 했고, ‘2인자’인 경호실장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는 3백만 명을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 2백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 하고 거들었다.
‘온건파’를 대변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강압적 지배방식 사용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10.26 박정희 사살 사건은 이런 분열의 결과다.
김재규는 박정희를 죽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4.19와 같은 사태가 오면 국민과 정부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질 것은 분명하고 그렇게 되면 얼마나 많은 국민이 희생될 것인지 상상하기에 어렵지 아니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4.19와 같은 사태는 눈앞에 다가왔고 아니 부산에서 이미 4.19와 같은 사태는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부마항쟁은 김재규의 손을 빌어 박정희 유신체제를 끝장낸 셈이다.
사람들은 부마항쟁과 박정희의 죽음을 계기로 민주주의가 꽃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곧 신군부의 쿠데타와 광주학살로 짧은 해빙기는 끝났다. 그러나 부마항쟁은 광주항쟁과 6월 항쟁에 이르는 민중항쟁의 전통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게다가 부마항쟁은 박정희의 지역 차별적인 지배방식의 모순과 한계를 보여 줬다. 무엇보다 박정희식 개발독재의 모순을 밝히 드러내면서 군사독재 아래서도 저항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기념 운동
첫댓글 민중들을탄압하였던 잔재들이 또다시 발호허고맀습니다.그들이 정권을탈취하여 일본과 뇌화부동 하여 한일군사보호협정를체결하여 제2의 한반도침략음모를계획하공있습니다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