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4부 - 고고학이 증명하는 신약 성경
신약 성경의 사본들
신약 성경 문서는 고대의 어느 책보다 더 많은 사본 증거를 가지고 있고, 그 저작과 사본 사이의 가장 가까운 시간 간격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이른 시기에 다른 언어로 번역되었다. 문서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일은 고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많은 다른 언어로 번역된 사실은 신약 성경의 영향력과 영감성을 입증하기에 이로운 점이다. 번역판의 수는 18,000 ~ 25,000개(추정)에 이른다. 이것들은 신약의 본문을 확증하도록 돕는 많은 증거가 된다.
신약의 본문을 그 저작으로부터 250년 이내에 재생시킬 수가 있었던 이유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저술에 의해 그렇게 할 수 있었는데, 주석서와 서신 등에서 교부들과 저술가들은 성경의 본문을 인용했기 때문이다. (Quadratus, Aristides, Justin Martyr, Tatian, Tertullian, Origen, Cyprian 등의 저술가들에 의하여) 죤 버곤(John Burgon)은 초대 교회 교부들의 저술에서 86,000개가 넘는 신약의 인용문을 분류해 냈다. 이들 교부는 모두 A.D. 325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고대 세계의 다른 모든 저술에 비해 신약 성경 본문의 신빙성의 증거는 비교할 수 없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예수의 부활에 관한 사실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과, 돌아가신 후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제자들에게 예언해 주셨다. 이러한 선언은 4복음서 전체를 통하여 나타나고 있다. 부활에 관한 역사적인 사실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다. 초대 교회는 사실을 기초로 한 믿음을 갖고 있었기에 강한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예수께서도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 자신을 제자들에게 나타내심으로 그들에게 실제적인 부활에 대한 증거를 주셨다. 누가는 tekmerion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제시할 수 있는 증거 라는 의미가 있다.
1. 큰 돌
마태복음 27장 60절에 마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예수의 몸이 장사된 무덤 입구를 큰 돌을 굴려 막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가는 마가복음 16장 1~4절에 이 돌이 아주 큰 것이었다고 기록하였다. 영국 케임브리지 도서실에 소장된 Bezae 비문에 적힌 마가복음 16장 4절에 관한 삽입구에는 예수가 무덤에 누여지니, 요셉이 무덤의 문을 20명의 남자도 굴릴 수 없는 큰 돌로 막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미국 조지아 공업 대학교수들이 이스라엘에 가서 직접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예수님 당시 쓰였던 무덤의 문의 크기는 4-1/2에서 5피트 정도이고 이 정도의 입구를 막으려면 적어도 1-1/2이나 2톤 무게의 바위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큰 돌을 어떻게 요셉 혼자서 옮겨서 막았을까? 그 당시 무덤을 막을 돌은 무덤 입구를 바라보는 조금 경사진 곳에 쐐기를 써서 고정해 놓았기 때문에, 단지 쐐기를 빼면 저절로 무덤 입구로 굴러 내려가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무덤의 돌은 막으려고 굴리기는 쉽지만, 다시 열기는 매우 어려웠는데, 그렇게 하려면 수십 명의 남자 장정들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몇 명의 제자들이 밤에 예수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없는 주장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2. 로마 군인들의 경계
유대 지도자들은 수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는 것을 보고 공포에 빠지게 되었다. 정치적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유대 지도자들과 로마 행정자들 모두가 예수를 영원히 무덤에 있게 하고자 하였다.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하나이다 하니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에게 파수꾼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 하거늘 저희가 파수꾼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니라 (마태복음 27:63~65). 만약 이 파수꾼들이 성전 호위병들이었다면 이들은 모두 270명이었다. 성전 호위군은 10명으로 구성된 27개의 소대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앉아 있거나 기대어 있을 수도 없었고, 만약 근무 중 조는 경우에 발각되면 심하게 매 맞고 옷에 불을 지르는 형을 받을 정도로 성전 호위군의 규율은 엄격하였다.
헬라 학자 A.T. Robertson는, 너희에게 파수꾼이 있으면 이라고 빌라도가 한 말은 오직 로마 군병들을 가리키며 성전 호위병들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라틴어 형태를 보이는 koustodia는 Oxyrhynchus 파피루스에 기록된 대로 로마 군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로마 군병들은 우리가 보통 성경 이야기 책에서 볼 수 있는 그림에서처럼 무덤 옆에 한두 명의 군인들이 치마를 입고 서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로마 호위병들은 4~16명 단위의 소대를 이루고 있으며 한 명이 6피트 지역을 방어하도록 훈련받았다. 16명 소대원이 한쪽에 4명씩 사방을 지켜 총 36야드를 지키게 하였다.
3. 인봉
저희가 파수꾼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니라 (마태복음 27:66). 이 기록은 다니엘 6장 17절의 기록과 비슷하다. 이에 돌을 굴려다가 굴 아구를 막으매 왕이 어인과 귀인들의 인을 쳐서 봉하였으니 이는 다니엘 처치한 것을 변개함이 없게 하려 함이었더라 (다니엘 6:17).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였으며 인도 최고 위원회 회원인 Henry Sumner은 인봉하는 것은 실제로 법적 권위를 제정하는 것 이었다고 말한다. 인봉하는 작업이 가진 또 다른 중요성은, 이 인봉하는 일이 로마 정부가 그 안에 있는 시체를 확인했다는 증거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인봉은 아무나 함부로 뗄 수 없게 되어 있었다.
4. 빈 무덤
예수의 부활을 증명하는 한 사실은 바로 빈 무덤이다. 유대와 로마, 모두 빈 무덤에 관한 기록을 갖고 있다. 이 기록들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글에서와, 15세기 Toledoth Jeshu라고 불리는 유대 문학에서도 발견된다. Justin Martyr의 Dialogue With Trypho에는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지중해 연한의 곳곳에 사람들을 보내어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소문을 퍼뜨려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을 왜곡시키려 했었다고 적고 있다.
파수꾼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 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병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마태복음 28:11~15).
실제로 이 소문은 총독의 귀에 들어갔다. 로마 황제는 이 소문을 듣고 팔레스타인에 법령을 발표하였는데, 이 포고는 라틴어로 쓰인 후 헬라어로 번역되어 유대의 모든 도시들에 붙여졌다. 1878년에 나사렛에서 흰 대리석 판에 다음과 같이 쓰인 글귀가 발견되었다. 시저의 법령이라. 모든 무덤들과 묘지들은 & 어떠한 장애 없이 영원히 보존되어야 한다. 그런데 만약 어떤 자가 그것들을 무너뜨리거나 매장된 것을 빼내거나, 악의를 품고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또는 무덤의 문을 바꾸면, 우리의 신들과 제사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법정이 세워져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모든 방해는 절대적으로 금지되어야 하며, 만약 이 법을 범하면 중형에 처할 것이다.
이 비석은 1세기 초의 글씨 체제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학자들은 이것이 A.D. 50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보고 있다. 글라디우스가 A.D. 41년부터 54년까지 총독으로 있었으므로 그가 이 글을 쓴 것이 확실하다.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의 시체가 없어진 그날부터 많은 염려를 해 왔는데, 그리스도인의 증가를 염려하고 있던, 그리고 유대인 지도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글라디우스가 후에 위와 같이 작은 일에 전에 없는 중형을 부과하는 포고를 내리게 된 것이다.
5. 부활하심
어떤 사건의 기록을 역사적으로 증명하려면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것이 기록될 당시에 그 안에 기록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살아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처음 사람들에게 나타나심을 고린도전서 15장에 바울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고전 15:3~6). 바울의 기록을 보면 예수의 부활 후 그를 본 사람들의 대부분이 위의 글이 쓰일 당시에 살아 있었다고 하였으므로 이 기록은 역사적 사실성을 동시에 가진 것이다.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은 예수께서 여러 곳에서 여러 종류의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Wheaton 대학의 교수 Merrill C. Tenney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렇게 나타나심이 평범한 일이 아니다. 이들 중 어느 두 명도 비슷하지 않다.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이른 아침에 나타나셨고, 엠마오로 가는 여행자에게는 오후에, 제자들에게는 저녁에 나타나셨다. 마리아에게는 밖에서 나타나셨으나 그때 마리아는 혼자 있었으며,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는 제자들이 한곳에 모여 있었다. 또한, 바울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오백여 명의 사람들에게 나타나시기도 하였다. 그 반응도 각각 달랐다. 마리아는 감정에 휩싸였으며, 제자들은 놀라움에 두려웠고, 도마는 처음에 믿지 않았으나 직접 본 후에 그를 경배하였다. 모든 경우가 각각 다른 분위기를 갖고 있으며 예수의 부활에 대한 다른 성격의 반응을 나타내었다. 이러한 사실은 부활 후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사실이 단지 평범한 전설이 아님을 입증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예수께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적의를 품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도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어느 사람도 사울이 예수를 믿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에게 나타나심으로 그는 인생을 바꾸는 일이 일어났다. 바울은 그때 예수의 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의 부활에 관한 힘 있는 증인이 될 수 있었다.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의 처음 나타나심이 여인들에게라는 사실이다. 예수의 제자들이 아니고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한 여인에게 먼저 나타나신 것은 아마 예수의 제자들에게 질투심을 일으켰을 것이며, 또한 유대 법으로 여인들은 법정에서 증인도 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예수께서 여인들에게 먼저 나타나신 것은 이 나타나심이 부활을 꾸미려고 일부러 조작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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