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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일용할 양식 특강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말씀 / 출애굽기 16:1-36
요절 / 출애굽기 16:4 “그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오늘은 일용할 양식 특강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것만큼 중요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UBF 모임에는 선배들을 통해 내려오는 아름다운 전통과 유산인 ‘일용할 양식’이 있습니다. 일반교회에서 익숙한 용어로 QT, 경건의 시간이라고도 합니다. 우리 하윤이, 하늘이도 갈릴리 교회에서 ‘매일 성경’으로 QT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매 주마다 몇 번씩 QT를 했는지 주일학교 선생님이 체크를 하는데, 이런 훈련을 통해 조금씩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문제에 답을 적고, 자기 삶에 적용점이 무엇인지, 어떻게 말씀에 기초해 기도해야 하는지, 조금씩 조금씩 배워가고 있음에 감사합니다. 우리에게도 ‘일용할 양식’ 훈련이 있는데, 오늘 말씀을 통해 이 훈련이 성경의 어디로부터 기인하는 것인지, 또 그 의미와 유익이 무엇인지, 어떻게 일용할 양식 훈련을 감당해야 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온 이후, 40년간 광야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들 인구가 출애굽 당시 성인 남자만 60만이니 대략 이백만 명 정도라고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광야 생활을 하면서 40년간 어떻게 먹고 살았는지는 불가사의한 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답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먹을 양식을 비같이 내려 주셔서 그들을 먹이신 것입니다. 매일 풍성한 식탁을 차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단순히 이들에게 먹여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매일 먹을 일용할 양식을 주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훈련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 생활을 하면서 일용할 양식을 스스로 거두는 훈련과 안식일을 지키는 훈련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훈련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 백성의 근성을 버리고 이제는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면모를 갖추길 원하셨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신자들에게도 동일하게 필요한 훈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은 쉽게 형성되지 않습니다. 여전히 죄와 세상이 주는 쾌락을 즐기고 싶은 본성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단한 훈련을 통해 죄악된 본성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 훈련은 우리가 주님 다시 만날 때까지 부단히도 감당해야 할 훈련 제목입니다. 또 우리가 성화되어가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의 일용할 양식 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우리 삶에 적용하고 순종하므로, 세상적인 가치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을 점차 찾아가게 될 것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 광야라는 곳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출애굽하였습니다. 또 홍해 바다를 마른 땅같이 건넜습니다. 마라에서는 쓴 물이 변하여 단물을 마셨습니다. 출애굽 이후, 그들은 지금까지 오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참 많이도 경험했습니다. 그때는 순간순간 모든 것을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시점이 언제입니까? 출애굽한 지 한 달이 지난 때입니다. 또 여기 신 광야는 온통 주위가 높고 낮은 바위산으로 둘러싸인 황량하고 메마른 땅입니다. 중간중간에 듬성듬성 나무나 풀, 가시덤불들이 자라고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바위산 사이의 공터에서 생활 터전을 삼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출애굽한 지 한 달쯤 지나서인지, 애굽에서 가져온 음식이 바닥났습니다. 계속되는 광야 여행에 점점 지쳐갑니다. 배고프고 피곤해졌습니다.
그때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불과 한 달 전,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다면, 우리 생각에는 당연히 그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합심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합심해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1~12절 말씀에는 ‘원망’이라는 단어가 7번이나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는 온통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광야 생활 동안, 힘들 때마다 애굽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를 생각하고 동경합니다. 까마귀 고기를 먹었는지, 놀라우신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인도하심의 은혜를 싹 다 까먹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불신입니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능력으로 애굽 땅에 열 재앙을 내리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출애굽 후,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셨고, 메마른 광야에서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셔서 마실 물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하나님을 생각했고, 이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면, 그들은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힘든 현실 속에서 불평하고 원망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잘 먹고 잘살고 있었는데, 왜 모세와 아론이 설레발을 쳐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해 내서 굶어 죽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때 고기 몇 점 먹었던 것만 생각했지, 중노동을 감당하면서 채찍에 맞아 죽을 뻔했던 것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현재의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비참했던 옛 노예 생활을 미화하고, 그때 그 시절을 과장하면서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몸은 출애굽했지만, 그들의 내면은 온전히 출애굽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처럼 과거에 습관화되어 있던 노예근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노예근성에 찌들어 있는 사람은 순간 현실이 힘들면 과거가 더 좋아 보입니다. 그때는 그렇게 너무 힘들고 고달파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으면서도, 잠시 지금 현실이 힘들면 그때를 그리워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미래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해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대한 소망이 사라졌습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이 사라지게 되면 뒤돌아가게 됩니다. 미래에 대한 비전과 소망을 붙들지 못하면 지금 현실 속에서 먹고 잠자는 것에 큰 가치를 부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신 소망과 비전을 붙잡아야 합니다.
또 그들은 하나님 없이 살고 하나님의 손에 죽을지언정 배불리 먹던 그때가 좋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가치관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배불리 먹는 것보다, 좀 가난하게 살더라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사십 일을 굶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배가 고플지언정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말씀대로 살고자 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 하나님의 자녀들은 종의 부요함보다 자유인의 가난함을 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하는 가치관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아무리 삶의 형편이 어려워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잠언에서도 배웠듯이, 큰집에서 호의호식할지라도 다투면서 사는 것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움막에서 사는 것이 더 낫다고 했습니다(잠21:9). 하나님 없는 삶은 살았으나 생명력이 없는 삶입니다. 우리와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진정한 생명력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순간 어려움이 생겼다고 원망하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잠잠히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므로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원망하는 이스라엘을 어떻게 도우십니까? 4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보라!” 이는 감탄사로 “비같이 내리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쉽게 원망하고 불평하는 그들을 심판하셔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문제를 이해하시고 먹을 양식을 비같이 내려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비같이 내리신다는 것은 충분하게, 풍성하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인색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은혜를 베푸시되 넘치도록 풍성하게 베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에게 넘치도록 은혜 베풀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름도 알 수 없는 양식을 하늘로부터 비같이 내려주셨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양식을 얻기 위해 농사를 지었다면 얼마나 많은 땀과 수고가 필요했겠습니까? 쌀을 수입한다면 한 달에 20만 가마니는 족히 수입해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저녁에는 그들에게 메추라기를 주시므로 단백질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고기를 먹기 위해 그들의 양과 염소를 잡았다면 당장에 양이 없어졌을 것입니다. 또 메추라기를 잡기 위해 새총이라도 들고 나갔다면 만사를 제쳐 놓고 새를 따라다녀도 잡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메추라기를 다 불러 모아 이스라엘의 진영에 차곡차곡 쌓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또 지도자 모세와 아론이 자기들을 굶어 죽게 만든다며 불신하고 원망했지만, 하나님은 40년 동안 거르지 않고 그들에게 양식을 먹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하늘로부터 풍성하게 비같이 내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매일 같이 내려 주신 양식은 여러모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 풍요로운 애굽에서도 못 보던 생전 처음 보는 음식입니다. 14절에 보면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좁쌀만한 알갱이였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보고 서로 말합니다. “이게 뭐지?” 이때 모세가 말합니다. 15b절을 보십시오.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먹는 것이라고 하니 백성이 입에 넣고 오물오물해 보았습니다. 31절에 보면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습니다. 맛이 꿀맛이고 과자 같아서 어느 누구도 편하게 먹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이것을 ‘만나’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어로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말입니다. 즉 신기함과 놀라움의 표현입니다. 이런 맛 좋은 음식이 세상에 또 어디 있는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최상급 양식이 아닌가? 감사와 감탄의 이름, ‘만나’입니다.
여러분! 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을 들으시고도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의 인생을 신실하게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지 못했습니다. 현실을 보면, 영락없이 허허벌판 광야에서 굶어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니 자신들을 인도한 지도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큰 죄입니다. 하나님은 택하시고 부르신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먹이시고 입히십니다.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하물며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안주시겠냐는 것입니다(마6:26,30)? 우리를 위해 사랑하는 독생자도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 주신 하나님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선물로 주지 않으시겠느냐는 것입니다(롬8:32). 필히 주십니다. 우리는 먹고 마시는 가장 기본적인 현실 문제에서부터 하나님이 친히 해결해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가 되십니다.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우리는 신뢰해야 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그들을 친히 먹이시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심을 믿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인식하도록 하셨습니다. 각 사람에게 먹을 분량대로 거두게 하셨는데, 한 사람이 한 오멜, 약 2.3리터 정도 거두게 하셨습니다. 살펴보니, 많이 거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남는 것이 없었고, 적게 거둔 것처럼 보인 사람도 모자란 것이 없었습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거두게 하심으로 욕심부리지 않고 매일 매일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믿음으로 살도록 훈련하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는 탐욕에 대한 절제 훈련이기도 했습니다. 너무 ‘돈돈’거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쌓아 놓고자 하는 탐심은 한없이 커져 남의 것까지 부정한 방법으로 착취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해진 분량을 거두는 훈련을 통해 내일을 염려하거나 욕심부리기보다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점차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성장하고 더욱 견고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굴의 기도가 기억납니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잠30:8).” 우리가 염려하지도 말고 욕심부리지도 말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두게 하시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시험하셨다고 했습니다. ‘시험한다’는 것은 잘못하면 징계하겠다는 의미라기보다, 하나님의 깊은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말씀대로 살도록 돕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하루하루 말씀에 순종하여 살도록 하기 위해 양식을 거두는데 여러 규칙을 정하셨습니다. 양식을 거두되 아침 일찍 거두게 하셨고, 거둔 양식은 다음 날 아침까지 두지 말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섯째 날은 각 사람이 갑절의 양식을 거두게 하시므로 안식일을 준비하도록 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만나를 주시고 매일 같이 양식을 거두도록 훈련하신 것은 그들이 탐욕이나 염려 등, 육신의 감정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하심이었습니다. 사람은 짐승과 달리 밥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영혼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다움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고 했건만 일부 사람들은 아침까지 남겨두었습니다. 아침까지 놓아둔 양식에는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 먹을 수 없었습니다(20). 그뿐만 아니라 모세가 일곱째 날은 안식일인즉 거두러 나가지 말라고 했지만, 백성 중 일부는 거두러 나갔습니다(26,27). 이들의 문제는 탐심이거나 게으름입니다. 안식일에도 더 거두려고 하거나, 게을러서 전날 갑절을 준비하지 못해 혹시 있으려나 하면서 거두러 나갔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책망하셨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애굽의 노예 생활하면서 내면이 노예근성으로 찌들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불신과 불순종, 탐욕과 게으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섬길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감정과 근성을 따라 나름대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배고프면 울고 보채는 어린아이와도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소망을 두시고 신실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에게 크신 소망과 비전을 두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쓰실 만한 백성, 하나님의 자녀다운 백성, 즉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야 40년 생활 동안, 매일 해야 하는 일용할 양식 거두는 훈련을 통해 그들을 하나님이 쓰실만한 백성, 하나님의 자녀다운 백성으로 연단하셨습니다. 그들의 탐욕과 염려, 게으름, 불신과 원망 등의 요소를 훈련하시고 점차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인도해 가셨습니다.
여러분!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를 훈련하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이런 삶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쓰실만한 사람으로 빚어지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으로 변화되고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 쉽지, 매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는 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어렵습니다. 우리는 감정을 따라, 안일과 적당하게 하고자 하는 마음, 때로는 세상 욕심을 따라 살고자 하는 죄의 근성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일용할 양식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매일 일용할 양식 말씀을 매일 매일 묵상하고 그 말씀을 하룻내 기억하면서 순종하고자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루의 주어진 말씀이 하루의 내 삶을 지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용할 양식을 거두는 훈련을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므로 하나님이 쓰실만한 백성, 하나님의 자녀다운 백성으로 성장해 가듯이, 우리 또한 일용할 양식 말씀을 매일 매일 묵상하고 소감을 쓰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그 한 말씀을 붙들 때, 우리는 매일 매일을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유혹 가운데 있을 때 일용할 양식 말씀을 통해 회개하고 돌이키게 됩니다. 절망 가운데 있을 때 일용할 양식 말씀을 통해 위로를 받게 됩니다. 소망 없이 막연한 삶을 살고 있을 때 일용할 양식 말씀을 통해 소망과 비전을 품게 됩니다. 매일 매일의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들이 나를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으로 이끌어줍니다. 한술 밥에 배부르지 않듯 한 번의 일용할 양식 써먹는 것으로 단번에 성장할 수는 없습니다. 1년 동안 100% 일용할 양식을 다 써먹었다고 해서 본부에서 수여하는 일용할 양식상과 상품은 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단번에 변화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또 각 사람마다 느끼는 은혜의 분량이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날마다 매일 같이 꾸준히 일용할 양식을 써먹고 한 말씀을 의지하고 순종할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여지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으로 한층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번 주 다니엘서 양식 말씀이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6:10).” 다니엘은 왕의 조서를 두려워하기보다 왕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 넣어졌을 때도 자기의 하나님을 믿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단6:23). 제가 안일함과 익숙해진 현실의 삶에서 일어나,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도하며, 세상 그 무엇보다 크고 엄위하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임을 인식하고, 그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매일 매일 일용할 양식의 말씀이 세상 탐욕으로 향하고, 현실 염려로 향할 때마다 저의 눈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도록 하는 방향의 말씀이 됩니다. 제가 일용할 양식 말씀을 묵상하고 소감을 쓰고, 순종하는 훈련을 통해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얼마나 바라보고 있을까요? 하루의 삶 속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의식하면서 살아갈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믿고 순종하는 데서 힘과 지혜와 능력이 발휘됩니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 말씀을 매일 매일 써먹고 삶에 적용하면서 순종하기까지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매일의 한 말씀이 내 안에 살아 역사하여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승리가 드러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세상 탐욕과 세상 염려로 휘둘리기 쉬운 우리의 감정이 아니라,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 삼고 가치관 삼으므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으로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