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과묘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계기는 캐나다에 있는 우리집 고양이와 최근 감상한 시티오브조이의 배경이 되는 캘커타에 있는 빈민의 삶이 교차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권은 사람답게 살 수있는 권리로 지역, 민족, 국적, 나이 등과는 상관없는 보편적인 개념이다. 인권에 배해 묘권의 정의는 구체적이지 않지만 가장 유사한 동물권을 보면 인권에 비견되는 생명권과 고통을 피하고 학대당하지 않을 권리다. 무의미한 고통을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측면에서 안락사가 불법인 나라의 인권보다 좋은 권리이나 미성년이 보호자의 능력에 의해 환경이 좌우되는 것과 같이 동물도 유사하며 결코 그 종속성을 벗어난 수없다는 측면에서는 인간보다 좋다고 볼 수없다.
동물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생물학적 로봇이라고 보았던 데카르트에 비해 칸트는 감정은 느끼지만 도덕적 사유능력이 없어 인권과는 구분되는 동물권만이 가능해야 한다고 보았다. 현대의 급진적인 학자는 동물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하자는 주장도 한다. 시민권이라는 것은 의사소통이나 효과라는 측면에서 그다지 효과적이라고 보기 어렵지만, 인권이 정의와는 달리 지역에 따라 큰 차이가 있는 것 처럼, 동물권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를 테면 우리집 고양이는 비만으로 취미겸 쥐잡기 다이어트를 해야 하는데 캘커타의 인력거꾼은 생존을 위해 달려야 한다.
어제 개강을 해서 하루종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이사준비도 해야 하기에 마음도 바쁘다. 이번 학기는 전 학기보다 적은 과목을 수강하는 것이 그나마 조금 여유를 줄 것으로 기대하면서 당분간은 포스팅할 시간도 줄어들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