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833
7월26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연중 제17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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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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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Sn7Cve6d6_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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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모님이란 교회의 둘도 없는 보배이자 빛나는 별을 낳아주신 요아킴과 안나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최근 반복되어 강조된 복음 말씀의 주제가 좋은 땅, 좋은 열매였습니다. 땅 주인이 신경 하나도 쓰지 않은 불모지에서는 절대로 좋은 나무가 자라고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퇴비를 넉넉히 뿌리고, 갈아엎고 또 갈아엎은 비옥한 땅에서 좋은 결실을 맺는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면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탁월한 신앙인, 가장 모범적인 신앙인이셨던 성모님 역시 영적으로 가장 잘 준비된 가정을 배경으로 탄생하셨고 성장하셨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초 세기부터 성모님의 부모님이신 요아킴과 안나, 이 두 성인을 각별히 공경해왔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경에는 요아킴과 안나에 대한 언급이 일체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전승을 통해서 두 분의 생애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성모님의 부모님은 성모님 못지않게 겸손한 분들이셨고, 언제나 기도와 침묵 속에 하느님의 뜻을 찾아나갔던 모범적인 신앙인이셨다는 반증이 두 성인에 대한 부족한 자료라고 확신합니다.
아버지 요아킴은 나자렛 출신으로 존경받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어머니 안나는 베들레헴 출신의 신심 깊은 여인이었습니다. 두 분은 열심한 신앙인이었지만 연세가 들도록 자녀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요아킴은 자녀를 청하기 위해 광야로 들어갔고, 40일간 단식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안나 역시 집에 남아서 탄식하며 기도를 바쳤습니다. 두 분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던지 마침내 주님께서 응답을 들어주셨습니다.
천사가 안나에게 나타나 온 세상에 이름을 떨칠 아기를 낳을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안나는 아기가 태어나면 하느님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광야에서 기도하던 요아킴 역시 안나와 비슷한 환시를 받고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요아킴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안나는 성문 앞까지 마중을 나갔습니다. 두 분은 서로 부둥켜 않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드디어 출산 날이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이를 출산하고 보니, 결과는? 기대했던 아들이 아니라 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많이 실망했지만, 마음을 바꿔먹었습니다. 하느님께 깊이 감사드리면서, 아기에게 마리아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또 하느님께 봉헌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마리아가 세살이 되었을 때, 예루살렘 성전에 데려가서 그곳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맡겼습니다.
신심이 깊고 출중했던 요아킴과 안나는 지극정성으로 마리아를 양육했고 교육시켰을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큰 선물을 잘 받아들이고, 끝까지 그 선물을 잘 안고 갈수 있도록 철저한 준비를 시켰을 것입니다.
성모님의 고향인 나자렛은 낙후된 지역 갈릴래아에서도 아주 후미진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전체 인구를 다 합해봐야 4백명 정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로마 제국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도 일제 강점기를 체험해봤기에, 당시 유다인들이 얼마나 힘겹게 살았는지, 나자렛의 마리아 역시 얼마나 팍팍한 삶을 살았었는지에 대해서는 즉시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 보잘 것 없는 산골 소녀 마리아를 총애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내려오실 당신의 통로이자 사다리로서 나자렛의 마리아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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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3vzCKNTHQw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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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비유로 소통해야 하는 삼위일체 구조로 되어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며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겨자씨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은 그 사람 안에서 나무처럼 자라나 휴식 같은 친구가 되게 합니다. 또 성령은 밀가루 서 말 속에 넣어진 누룩과 같아서 그 사람을 온통 부풀어 오르게 합니다.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를 맺어 누구나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부드러운 빵이 된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중요한 것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며 “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라고 하신 시편 구절을 인용합니다. 직역하면 “나는 비유로 내 입을 열리라.”입니다. 정말 비유를 통하지 않고서는 말씀하지 않으시는 본성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느님은 왜 비유로만 말씀하실까요? 우리는 먼저 하느님 삼위일체의 신비스러운 구조를 이해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으시는 ‘아버지’, 그 아버지를 계시하시는 ‘성자’, 그 계시를 완성하시는 ‘성령’이 계십니다. 인간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하느님 모습을 따라, 영-혼-육으로 되어있는데, 보이지 않는 ‘생각’(혼), 그 생각을 표현하는 ‘말’(육), 그리고 그 말이 생각과 일치하게 만드는 ‘마음’(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만약 인간이 동물이나 나무와 소통한다면 굳이 말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들은 언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온전한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온전한 소통을 위해서는 같은 구조를 가져야 합니다. 하느님과 인간이 소통할 수 있는 이유는 이렇게 ‘생각’과 같은 ‘아버지’, ‘말’과 같은 ‘성자’, ‘마음’과 같은 ‘성령’의 같은 구조로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담긴 말은 생각과 일치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담기지 않은 말은 생각과 다릅니다. 거짓말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담긴 표현을 생각해봅시다. 어떤 할머니가 신부님 쓰시라고 돈 만 원을 비닐봉지에 싸서 몸 깊숙한 곳에 감추어 두었다가 몰래 손에 쥐어 준다면 그것은 단순히 돈 만 원을 주시는 행위일까요? 돈 만 원 안에는 할머니가 사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상대에게 주는 선물이나, 행위, 혹은 말에 마음이 담겨야 비로소 완전한 소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담긴 선물은 분명 보이지 않는 생각을 계시하는 비유가 됩니다. 하지만 개에게 그렇게 준다면 그 비유는 무너져 아무 쓸모 없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 안에 마음이 담겨있다는 뜻이고 우리가 그 비유를 이해할 수 있어서 당신 생각의 계시를 이해할 수 있는 당신을 닮은 구조를 지녔다는 뜻입니다.
얼마 전에 한 자매님이 “요즘 성인들이 저와 함께 해 주신다는 것을 느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그 자매님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것만 들어서는 좀처럼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제가 며칠 전에 친구와 새벽 5시까지 통화하다 잠든 날이 있었거든요. 그날은 베네딕도와 스콜라스티카의 축일이었습니다. 그 전날 딸에게 ‘내일은 베네딕도와 스콜라스티카 축일이니 천둥이 칠 수 있으니까 잘 들어봐!’라고 했었어요. 그냥 그분들이 이야기할 때 스콜라스티카 성녀가 오빠를 보내기 싫어 기도했더니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가 치며 비가 내려 베네딕도 성인이 수도원으로 돌아갈 수 없었잖아요.
그런데 정말 아침에 딸이 저를 흔들어 깨우면서 ‘엄마 정말 천둥이 치고 비가 왔어!’라고 하는 거예요. 저도 참 신기하다 여겼죠. 그런데 손목을 보니 제가 ‘스콜라스티카’ 성녀의 그림이 있는 묵주 팔지를 차고 있는 거예요. 제가 그 팔지를 차지는 않거든요. 전 세례명이 마리아인데요. 그래서 친구에게 신기해서 전화했죠. 신기하게도 내가 성녀의 팔지를 차고 있는데 정말 그분들이 표징을 보여주셨다고요. 근데 그 친구가 더 놀라는 거예요. 그 친구는 베데딕도 팔찌를 차고 있었던 거예요. 정말 신기하죠, 그쵸? 요즘 성인들 축일을 미리 기억하고 기도하였는데, 정말 그분들이 함께 계심을 느꼈다니까요?”
이렇게까지 말해주니 정말 성인들이 그 자매님과 함께 해 주신다는 것이 믿어졌습니다. 처음에 말만 들었을 때는 머리로만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담기니 그것이 비유가 되는 것이고 그 비유 말씀을 들으면 머리만 건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건들기 때문에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 인격적인 소통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는 비유를 통하지 않으면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인격적 소통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타인과 소통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에게 “힘내, 파이팅!”한다고 해서 힘이 날까요? 머리로만 전달하는 정보에 불과합니다. 마음을 건들려면 내 마음을 그 생각과 합하여 비유로 전달해야 합니다. “게도 탈피하는데 그때는 죽은 것처럼 보여. 하지만 더 강한 존재로 새로 태어나잖아. 우리도 보이지는 않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는 거 같아. 조금만 더 힘내자!” 이렇게 말해준다면 그 사람은 힘든 상황에서 ‘아, 내가 혼자가 아니구나!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구나. 그래 힘내자!’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제가 굳이 복음 묵상을 할 때 억지로라도 비유를 끼워 넣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비유를 찾으면서 저의 마음을 담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삼위일체 하느님으로 따지자면 성령이십니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온전한 계시가 되지 못하십니다.
만약 우리도 하느님 삼위일체 모습대로 살아간다면 모든 행동과 말에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하나의 비유가 됨을 잊지 맙시다. 이태석 신부님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 안에 보이지 않는 계시 대상인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자라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마음으로 혼과 육이 하나가 된 사람은 반드시 하느님 나라의 계시가 됩니다. 그리고 그 비유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에게 그 사람은 완전한 소통과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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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7월26일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복음: 마태 13,31-35 :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모든 씨앗 중에서 가장 작지만 매우 매운 맛을 가진 겨자씨에 비유하신다. 이 씨앗은 밭에 뿌려지면, 즉 비옥한 땅에 떨어지면 자라서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고 한다. 복음이라고 하는 씨앗은 다른 씨들에 비해 무척 작다. 그러나 이 씨앗이 믿는 사람이건, 세상이건 뿌려지면, 평범한 식물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것은 나무로 자라나 믿는 이들을 상징하는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일 것이라고 한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32절) 예수님의 제자들은 누구보다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 안에 있던 위대한 능력, 즉 그리스도의 권능, 성령에 힘입어 복음의 씨앗이 자라났고, 세상의 모든 곳으로 퍼져 나갔다. 사도들은 세상에 그늘을 드리우는 가지이다. 이 가지에 다른 민족들이 생명을 희망하며 그 가지에 깃들이는 것이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 작다고 한다. 제자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루카 17,5)라고 말씀드렸을 때,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리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갈 것이다.”(마태 17,20)라고 하신다. 이에 더하여 사도 바오로는 더 놀라운 일에 비유한다.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1코린 13,2)라고.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33절). 누룩은 반죽 속으로 없어지는 것 같지만 죽지 않고, 반죽 전체를 자기와 같은 성질로 변화시킨다. 밀가루 서 말에 골고루 섞인 이 누룩은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든다. 누룩이 많은 양의 반죽을 발효시켜 부풀게 하듯이 우리들의 삶도 누룩의 역할을 하여 온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다. 사도들은 군중과 섞였을 때, 달아나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누룩은 반죽 속에 넣어지면 자기는 반죽 속에 녹아들어가 반죽 전체를 변화시킨다. 그 누룩이 많은 양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적은 양이라도 반죽을 부풀게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 그들과 하나가 될 때, 그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시킬 것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이겨낼 것이다. 밀가루 서 말이란 서로 갈라진 인간들을 의미하며,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가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는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다.”(갈라 3,28)는 것이다.
겨자씨와 누룩의 기능이란 비록 지금은 잘 보이지 않을 만큼 하찮은 것으로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더욱더 작용하여 결국 커다란 위력을 드러내리라는 것이다. 우리의 역할이 눈에 띄지 않고 아주 작은 것으로 보일지라도 우리가 하느님 앞에 올바로 서 있기만 하면, 우리 주위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세상에 살지만, 우리를 통해서 세상이 변화될 수 있음을 알고 항상 깨어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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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많은 분들이 저에게 ‘성소’에 대해서 물어보십니다. 어떻게 신부가 되었는지, 어떤 계기로 사제 성소를 택하였는지 ……. 그럴 때 저는 늘 대답합니다. 그저 그 물에서 노는 것이 좋았다고 말입니다. 성당에서 노는 것, 그곳의 친구들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신학교에 들어갔고, 그곳에서도 여전히 어렵고 힘든 일이 있었지만 동료들과 함께 노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렇게 놀다 보니 어느새 개울물은 강물이 되고, 강물은 바다가 되어 있었습니다. 물살에 몸을 맡기고 놀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감당할 수 없는 바다에까지 와 있었습니다. 이것이 저의 성소 이야기입니다.
창대한 꿈을 꾸며 많은 것을 이루고자 어떤 일을 시작할 때도 있습니다. 큰 기대를 가지지 않고, 즐겁고 좋아하는 일이라서 시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많은 기대를 걸었던 일은 실망하기 일쑤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거나 즐거운 일을 할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그 일을 하고 있음에 만족하고 즐거워합니다. 씨를 뿌리고 물을 주어 새싹을 틔워 내고 꽃을 피우는 그 일을 즐기면 됩니다. 밀가루 반죽을 만들고 누룩을 넣어 빵을 구워 내는 과정이 행복하면 됩니다. 많은 열매를 맺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맛있는 빵을 만들어 부자가 되겠다는 꿈을 꾸면 실망하거나 좌절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일을 하고 많은 수고와 노력을 기울이지만, 어떤 마음으로 다가가느냐에 따라 천당과 지옥을 오갑니다. 당신이 지금 서 있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그 자리에서 즐겁게 살다 보면 하느님께서 열매를 맺어 주실 것입니다.
바다에서는 마음 편히 놀지 못합니다. 해야 할 의무가 있고 책임져야 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마냥 놀기에는 바다라는 곳이 너무도 두렵습니다. 그렇지만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더 멋진 곳으로 저를 이끌어 주실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여기에서 놀아 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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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마태 13,31-32)
‘겨자씨의 비유’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한다.”라는 가르침입니다. 인간의 생각을 초월한다는 말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 21,42) 인간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고, 사도들은 바로 그분이 메시아라고 선포했습니다.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 2,36) 십자가에 못 박혀 사형당한 예수님이 온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주님이시며 메시아이신 분이라고 선포된 일은, 작은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된 일보다 더 놀라운 일입니다.
<마리아라는 처녀를 선택하셔서 구세주의 어머니로 삼으신 일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지만, 마리아를 훌륭한 신앙인으로 키운 것은 요아킴 성인과 안나 성녀가 한 일입니다. 그들이 마리아를 낳고 키운 일은, 장차 큰 나무로 자라게 될 작은 겨자씨를 심고, 가꾸고, 돌본 일과 같습니다. 물론 요아킴 성인과 안나 성녀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딸 마리아가 구세주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떻든 모든 부모들이 자녀들을 낳고 키우는 일은, 하나의 씨를 심고 가꾸고 돌보는 일과 같습니다. 그 씨가 어떤 나무가 될지는 알 수 없어도, 부모들은 자신들의 자녀가 위대하고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다고 믿고, 또 그렇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만일에 그 믿음과 희망이 없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하는 일에 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도대체 아폴로가 무엇입니까? 바오로가 무엇입니까? 아폴로와 나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정해 주신 대로, 여러분을 믿음으로 이끈 일꾼일 따름입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여,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1코린 3,5-9) (원래 이 말은, 신자들이 바오로파와 아폴로파로 갈라져서 다투는 것을 꾸짖는 말입니다.) 여기서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하다.”라는 말이 옳은 말이긴 한데,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협력자로 바오로와 아폴로를 특별히 뽑으셨고, 그들에게 일을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실제로 그렇다는 뜻이 아니라, 겸손하게 자기를 낮춘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는 겨자씨를 ‘심는 일’을 맡기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물을 주는 일’을 맡기십니다. 하느님께서 맡기신 일이라면, 모든 일이 똑같이 중요하고 귀한 일입니다.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도와드리는 일이라면, 모든 일이 똑같이 중요하고 귀한 일이다.” 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더 크다고 잘난 체 하면 안 되고, 반대로 자기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작다고 열등감에 빠져도 안 됩니다. 신앙인으로서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면, 하나의 일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1코린 12,27) “모두 사도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예언자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교사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기적을 일으킬 수야 없지 않습니까?"(1코린 12,29) 필요에 따라서 여러 가지 직책과 직무를 나누어 놓았지만, 다양한 직책과 직무들은 하느님 나라 건설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방법일 뿐입니다. (공동체가 한 마음으로 하나의 겨자씨를 함께 심어서, 하나의 나무로 함께 키워낸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씨와 나무가 나의 것보다 더 큰 것으로 보이거나, 반대로 더 작은 것으로 보이는 일이 생길 수 있는데, 그것은 공동체를 분열시키려는 사탄의 유혹입니다.
“하늘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마태 13,33)
‘누룩의 비유’의 뜻도 앞의 ‘겨자씨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한다.”입니다. 뜻은 같지만, ‘겨자씨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건설 과정과 ‘외적 성장’에 초점을 맞춘 비유이고, ‘누룩의 비유’는 ‘인간 세상의 내적 변화’에 초점을 맞춘 비유입니다. ‘적은 양’의 누룩이 ‘많은 양’의 밀가루를 부풀어 오르게 하는 것처럼, 한 사람의, 또는 몇 사람의 신앙인이 많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 변화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나아가는 변화입니다.) 신앙인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자기가 있는 곳에서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누룩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중요한 점은, 신앙인 자신이 먼저 변화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누룩의 비유’는 산상설교에 있는 ‘소금에 관한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13) 이 말씀은, “신앙인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소금이 되어야 한다.” 라는 명령입니다. ‘소금에 관한 말씀’의 ‘소금’을 ‘누룩’으로 바꿔서, “너희는 세상의 누룩이다. 그러나 누룩이 밀가루를 부풀어 오르게 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인이 ‘말씀으로’ 변화되어 있는 상태는 바로 ‘거룩함’입니다. (거룩하게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신앙인들은 세상 안에서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은 사람들이고,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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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친할머니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제가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친할아버지는 기억하지만 추억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는 추억이 많습니다. 제가 사제서품을 받은 후에도 살아 계셨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 외가에 놀러 가면 할머니는 맛있는 것을 주셨습니다. 어머니가 밥장사를 할 때였습니다. 외할머니는 어머니가 안쓰러워서인지 자주 오셔서 반찬도 만들어 주셨고, 설거지도 함께해 주셨습니다. 외할아버지는 말씀은 별로 없으셨지만 긴 수염을 쓰다듬으셨고, 농사지으신 것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두 분은 아직 세례는 받지 않으셨지만 제가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 신학교에 오셔서 축하해 주셨습니다. 외할머니가 마리아로 세례를 받으셨고, 나중에 외할아버지는 요셉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두 분 모두 고운 모습으로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고, 제가 장례미사를 하였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성품을 많이 닮았습니다. 그러니 어머니를 낳아주신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성품도 닮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은 성모님의 부모님이신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의 기념일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에게서 신앙인의 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마음에 담는 인내를 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품에 안으신 성모님을 봅니다. 그러나 모든 슬픔을 이겨내고,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함께 기도하는 성모님을 봅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모든 것을 맡기며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했던 순명의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도 어린 시절에 외가에 다녀왔을 것입니다.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도 어린 예수님을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셨을 것입니다. 신학은 철학적인 사유와 이성적인 판단을 요구합니다. 교회의 조직이 커지면서 교리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문화와 언어가 다른 곳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가치가 있어야 합니다. 신학, 철학, 교리, 교회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오늘 교회가 성모님의 부모님을 기억하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어 오셨고, 우리와 같은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2,000년 전에 나자렛에서 우리처럼 웃고, 울면서 사셨기 때문입니다.
지난봄에 심었던 모종에서 가지가 열렸습니다. 고추도 열렸습니다. 호박도 열렸습니다. 오이도 열렸습니다. 그렇게 여리고 작은 모종이었는데 직원들과 함께 먹고도 남을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습니다. 작은 텃밭이지만 농사의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누룩과 같다고 하십니다. 작은 겨자씨 안에 하느님 나라가 있다고 하십니다. 작은 누룩 한에 하느님 나라가 있다고 하십니다. 농사를 해본 사람은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는 비유입니다. 겨자씨는 스스로 큰 나무가 되지 않습니다. 누룩은 스스로 부풀지 않습니다. 텃밭은 매일 물을 주어야 하고, 여린 가지가 기댈 수 있는 쫄대를 세워주어야 하고, 잡초를 뽑아 주어야 합니다.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 희망,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정결, 순명, 청빈이 있어야 합니다. 근심, 걱정, 불안을 떨구어 내야 합니다. 욕망, 시기, 질투를 뽑아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심어진 신앙의 씨앗이 풍성하게 열매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한 주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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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겨자씨와 누룩 같은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의 믿음>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는 결혼 생활을 한지 20년이 지나도록 자녀가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요아킴과 안나는 구세주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복음에서처럼 두 분이 겨자씨와 누룩과 같은 믿음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낳은 아들 예수님은 누룩 넣은 밀가루처럼 부풀어 올라 우리 모두를 구원으로 인도해 주었고 숨겨진 하늘의 비밀을 풀어 주었습니다. 우리 역시 불가능을 가능하게 해 주시는 주님의 섭리에 모든 것을 의탁하며 겨자씨와 같은 믿음 마저도 갖지 못한 우리의 옹졸한 마음에 주님의 자비를 청하도록 합시다.
찬미 예수님!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는 성모 마리아의 부모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이십니다. 우리는 요기까지는 잘 알고 있지만 다른 이야기는 잘 모르는 분이 많은 것 같아요. 요아킴과 안나 부부의 이야기는 정경 복음서에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두 분의 이야기는 외경인 야고보 복음서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야고보의 원복음서에 따르면 요아킴은 다윗 가문의 사람으로 대단한 부자였다고 합니다. 이 두 사람은 주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아가던 사람이었고, 주님의 계명을 잘 지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재산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한 부분은 성전에 바치고, 다른 한 부분은 순례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몫으로 바쳤습니다. 또 나머지 한 부분을 자신들의 생활을 위하여 간직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부부에게도 걸림돌이 있었으니 결혼하여 20년이 지났으나 자녀가 없었습니다. 요아킴과 안나는 겨자씨와 같은 믿음으로 만일 하느님께서 은혜를 내리시어 자녀를 주시면 꼭 하느님께 봉헌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해마다 큰 축제일에 세 차례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가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요아킴이 예루살렘 성전 봉헌축일에 성전에 들어가서 제단 앞에 서서 준비해온 제물을 봉헌하려 하자, 대사제가 크게 화를 내면서 요아킴을 야단쳤습니다. 요아킴이 자녀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그 대사제는 자격이 없는 사람이 감히 주님의 제단 앞에 나왔다고 모질게 꾸짖고 나가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대사제의 꾸짖음을 당한 요아킴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자녀가 없는 것이 마음대로 되는 일도 아닌데 말입니다.
오늘날에 비유하자면, 본당 신부님이 말도 안되는 일을 가지고 꾸중을 하며 성당에서 나가라고 명령한다면 그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억울하고 분하고 화가 나서 "다시는 성당에 오나 봐라"하며 뛰쳐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하면 좋은데, 명상의 집에 오셔서 저에게 본당 신부님께로부터 받은 억울함을 온통 호소하십니다. 제가 무슨 죄가 이리 많은지...
그러나 우리와는 달리 동료들 앞에서 부끄럽고 슬픈 체험을 한 요아킴은 물러나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명상의 집에 오지도 않고) 다시는 아내인 안나를 보지 않기로 작정하고 광야로 들어가 천막을 친 뒤에 40일간 밤낮으로 단식하였습니다. 이제는 의지할 곳이 하느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안나 또한 자신이 아이를 못 낳는 신세를 한탄하며 근심 걱정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우리라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자식 없는 것도 서러운데, 남편은 수치심에 휩싸여 집에 돌아오지도 않고 단식한다고 광야에 나가 있으니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런 남편이 있다면 아마 그분도 명상의 집에 달려 오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명상의 집에 달려 오는 것은 결국 예수님께 달려 오는 것이니 참 좋은 것입니다.
암튼 이렇게 근심 걱정에 휩싸인 안나에게 천사가 나타나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요아킴과 너의 겸손과 신앙과 자비심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옥좌에 다다랐다.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너에게 많은 복을 주시어, 네가 성부의 독생성자를 잉태하여 낳을 여인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다. 너는 딸을 낳을 터이니 그녀를 주님께서 주신 이름인 마리아라고 하여라, 그녀는 여인 중에 복되며 성령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다. 그녀는 사람을 새로이 하기 위하여 천국의 이슬을 뿌려줄 구름이 될 것이다.”
부부는 일심동체일까요? 광야에서 기도하던 중 이와 비슷한 환시를 본 성 요아킴 역시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는 딸을 낳았고, 안나는 아기에게 마리아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아이가 3세가 되었을 때,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는 하느님께 약속한 대로 마리아를 예루살렘 성전으로 데려가 그곳에서 양육받도록 맡겼다고 합니다.
전설같은 옛날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는 요아킴과 안나의 이 이야기에서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굳은 믿음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위기 앞에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께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자매 형제 여러분,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가 자식을 얻지 못하는 설움을 간직한 채 20년을 살았듯이 우리 역시 가정 안에서 크든 작든 다양한 어려움들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이가 없어도 걱정, 아이가 있어도 걱정인게 우리 삶의 모습입니다. 그뿐인가요? 자녀들과의 불화, 부부 사이의 어려움, 그리고 고부 사이의 갈등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시련들이 예상치도 못한 때에 찾아 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처럼 묵묵히 주님의 말씀을 따르며 경건하게 살아 가도록 합시다. 그리고 위기 앞에 겨자씨와 같은 작은 믿음이라도 잃지 말고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할 때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의 은총으로 누룩 넣은 빵과 같이 부풀어 올라 우리 삶을 충만하게 할 것입니다. 아울러 성모님의 부모님을 기억하는 오늘 우리를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신 우리의 부모님께 감사드리고 기도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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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제1독서를 보면 모세는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이 담긴 돌판을 받아들고 산에서 내려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수송아지를 만들어 우상 숭배를 하는 것입니다. 화가 난 모세는 돌판을 던져 깨 버립니다. 그 심정은 어떠하였겠습니까?
그렇지만 모세는 다시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이제 그들의 죄를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려거든, 당신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제발 저를 지워 주십시오.”
이런 모세의 기도를 어찌 안 들어주시겠습니까? 우리도 늘 기도를 하고 있지만, 나를 위한 기도보다 다른 이들, 특히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위한 기도가 더 중요함을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십니다. 그 작은 겨자씨가 크게 자라나 새들마저 깃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듯이 우리의 조그만 선행과 사랑이 이웃에게 퍼지고, 더욱 확산하여 큰 사랑의 공동체가 형성되어 나갈 것입니다.
따라서 눈앞에 보이는 작은 일부터, 사랑을 실천해 나갈 것을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 각자는 조그만 변화, 겨자씨와도 같은 ‘나의 작은 변화’를 발견해 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늘 잘못과 실패를 되풀이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도 조금씩 변화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늘 되풀이하는 실수와 잘못에도 희망을 품을 수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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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비유로만 군중에게 말씀하셨을까요? 두 가지 생각이 듭니다.
하늘 나라는 비유가 아니면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알고 있지 못하고 상상하기 힘든 하늘 나라의 신비는 비유를 통해서만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유를 통한 말씀은 듣는 이에 따라 다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신비는 비유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밝히 빛나고 빛이 되지만, 그것을 흘려듣는 이들에게는 여전히 감추어진 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남게 됩니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습니다. 여느 씨앗보다 작지만 어떤 풀보다도 크게 자랍니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처럼 눈에 띄지 않지만, 하늘 나라를 통하여 얻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결과입니다.
하늘 나라는 이렇게 우리 안에 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잘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결실을 맺을 때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겨자씨의 비유는 ‘이미’ 와 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늘 나라의 특징을 잘 드러냅니다. 감추어진 하늘 나라의 힘이자 능력입니다.
또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습니다. 하늘 나라는 밀가루를 부풀게 하는 누룩처럼 우리 안에서 믿기 힘든 결과를 가져옵니다. 겨자씨의 비유와 비슷하지만 이 비유는 우리를 통하여 하느님의 업적이 드러나는, 우리 안에 작용하는 하늘 나라를 말합니다.
하늘 나라는 겉으로 거창하게 보이지 않지만 신앙인들 안에서 힘이 되고, 그들을 통하여 하늘 나라가 이 세상에 와 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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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겨자씨와 누룩의 소명>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의 비유설교 집성문에 실려있는 7개 비유 중에서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를 들려준다.
이는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 이어 제자들과 군중이 함께 예수님으로부터 듣게 되는 세 번째와 네 번째 비유이다.
예수께서 계시하시려는 하느님 나라는 신비 그 자체이다. 신비는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것이기에 예수께서는 이를 설명하시고자 비유를 학습도구로 삼으신다.
오늘 비유의 소재는 겨자씨와 누룩이다. 이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것으로 여기는 것들이다. 어떻게 보면 하찮아 보일 수도 있다. 겨자씨는 씨들 중에 가장 작은 씨이지만, 밭에 뿌려져 성장하면 그 어떤 푸성귀(나물종류)보다 크게 자란다.(최고 3m)
마태오는 여기서 "나무"가 된다고 했으나 이는 좀 과장된 표현이다. 그러나 하늘의 새들이 와서 둥지를 틀려면 푸성귀가 나무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종국(終局)에 세상의 모든 백성이 하느님 나라에 쇄도하게 될 것을 암시하는 표현일 수 있다. 누룩도 마찬가지이다. 누룩은 술을 만드는 효소를 가진 곰팡이를 곡류에 번식시킨 것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누룩이지만 밀가루 속에 들어가면 밀가루 반죽 전체를 부풀리게 만든다.
이렇게 겨자씨와 누룩은 너무 작아 잘 보이지도 않는 하찮은 것들 같지만 그 안에 숨겨져 있는 능력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 능력은 필히 자신의 목적을 달성해 낸다.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예수께서는 당신이 선포하시는 하느님의 나라를 작디작은 겨자씨와 누룩에 비유하신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건설된다면 참으로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이 벌어져야 할 것이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장엄하게 하늘나라를 선포하셨고, 하느님 임재의 표징으로 마귀를 쫓아내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예수님의 이 모든 말씀과 행적들은 참으로 위대한 것이고 또 놀라운 일들이었다. 그분은 제자들을 부르시어 사도로 삼아 교회를 세우심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한 초석을 마련하셨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하느님 나라의 성장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예수님 당대에도 그랬지만 사도들의 복음선포가 기대만큼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고(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제자단의 배반은 물론 선인과 죄인이 함께 살아야 하는 것(밀과 가라지의 비유)이 교회의 현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의 나라가 스스로 성장하기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마치 겨자씨와 누룩과도 같이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성장하기 때문이다.
뿌려진 씨 가운데는 열매를 가져오기도 하고, 때가 되면 추수의 기쁨도 있다. 이렇게 하느님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으나 이미 시작되었다.
예수님의 말씀과 업적들 안에는 하느님의 숨은 힘이 현존한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새긴 것을 행동으로 증언한다면 그는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위한 일꾼이다.
그는 곧 큰 푸성귀(나무)가 되기 위해 밭에 뿌려진 겨자씨요, 빵이 되기 위해 반죽 속에서 열심히 일하는 누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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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우리는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인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가라지의 비유”에 이어,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태 13, 31)
‘겨자씨’는 유다 문학에서 ‘작은 것’의 전형적인 상징으로 사용되어 왔다고 합니다. ‘겨자씨’는 비록 작은 씨앗이지만,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밭’에 심었을 때를 말합니다. 그러면 하늘의 새들이 깃들이게 됩니다. 마치 십자나무가 모든 인류를 품고 있듯이 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거창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고 가르치십니다. 아니, 오히려 가장 작은 모습으로 오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당신께서도 아주 작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라는 말에서, “깃들다”(κατασκηνω)는 단어의 뜻은 “밑에 거주하다” 곧 “장막에 들어가다”, “장막을 치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곧 새들이 단순히 가지 위에 잠시 내렸다가 다시 날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안전하고 영속적인 거처를 마련하고 지속해서 거주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교회’라는 혹은 ‘올리베따노회 수도 가정’이라는 생명의 말씀나무에 한 둥지를 틀고 사는 새 떼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미 한 그루의 생명나무입니다. 당신께서 뿌려진 생명의 씨앗이 자라나 사랑으로 피어난 나무입니다.
한편, ‘겨자씨의 비유’가 하늘나라의 외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면, ‘누룩의 비유’는 내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곧 누룩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위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랑으로 반죽되는 것이 ‘누룩의 비유’입니다. 누룩은 밀가루에 들어가 자기의 능력을 전체에 돌려줍니다. 그러나 먼저 반죽되어야 하고, 섞여야 됩니다. 누룩은 밀가루에 묻혀 보이지 않지만, 결코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밀가루 속으로 들어가 섞일 뿐입니다. 그리고 변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룩을 밀가루 “속에” 집어넣었다고 하십니다. 우리도 이 누룩을 우리 ‘속에’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적은 양의 누룩이 자루 서 말을 모조리 부풀리듯이, 갈라진 우리의 내부를 통합할 것입니다. 그렇게 성장시키고 변화시킬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누룩이 되어 세상 속으로, 형제들 속으로 들어가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통하여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시작된 것처럼 보이는 하늘나라의 복음은 세상을 해방하는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적은 양의 누룩이 가루 서 말을 모조리 부풀리듯이 말입니다. 또한 “집어넣다”(εγκρυπτω)는 동사는 “숨기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밀가루 서 말 속에 숨긴 누룩이 온통 부풀어 오르듯이, 하늘나라도 현재 숨겨 있는데 미래에 엄청나게 확장되리라는 전망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누룩”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위력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겨자씨가 이미 ‘우리’라는 밭에 뿌려졌고, 누룩이 이미 ‘우리 공동체’라는 밀가루 안에 넣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맘껏 자라나고, 맘껏 부풀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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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태 13,31)
주님!
제 안에 넣은 누룩이 제 속을 파고들게 하소서!
섞여들지 못한 까닭에 부풀어 오르지 못하지 않게 하소서!
제 안에 뿌려진 씨를 묻어두고만 있지 않게 하소서!
죽지 못한 까닭에 싹을 피우지 못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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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마태13,31.33)
오늘은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하신 형제자매님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 복음은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이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입니다. 그리고 밀가루 속에 누룩을 넣으면 온통 부풀어 오릅니다.
이 비유가 이런 의미로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 이미와 아직인 하느님의 나라는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나의 작은 희생과 작은 기도와 작은 나눔에서부터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고 완성된다.'
'예수님 마음 안에서 나오는 나의 작은 생각과 말과 행위는 결코 작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나라 건설이라는 기적을 만들어 낸다.'
어제 복음에서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갖고 있는 아이를 두고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안드레아의 말은 지극히 현실적인 말입니다.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는데, 어느 누구도 그의 말이 틀렸다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소용없어 보이는 것에 예수님께서 개입하십니다. 그리고 그 소용없어 보이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십니다.
예수님께서 함께하시니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가능으로 바뀌는 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과 성모님 손 꼭 잡고 기적을 만들어 봅시다! 작은 것에 관심을 갖고 작은 것에 충실 합시다!
그래서 이미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 안에 함께 들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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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마태오 13,31-35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언자를 통하여 “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나>
어느새
나는
내가 되었습니다
어제는
생각지 못한
오늘의 내가
여전히 굽어있고
여전히 모자라고
여전히 흠이 많지만
지금
이 정도면
괜찮습니다
그래도 꼿꼿해지고
그래도 채워지고
그래도 깨끗해지니까
오늘은
생각지 못한
내일의 내가
어느새
나는
내가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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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학창 시절, 저는 승리 욕구가 너무 컸습니다. 지는 것이 싫었고 수단과 방법을 모두 동원해서 이기려고 했습니다. 아마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이 마음은 신부가 되어서도 이어졌습니다. 2001년부터 인터넷에 묵상 글을 올리면서, 한동안 제 글에 대한 댓글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혹시라도 제 글을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 있으면 온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지요. 묵상 글이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쓸데없는 욕망의 포로가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 이 욕망의 포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새벽에 묵상 글을 올린 뒤에 전혀 확인하지 않으면서부터였습니다. 제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에 다시 보지 않습니다. 고칠 내용이 있을 때도 있겠지만, 구독자들이 알아서 고쳐 보시겠지 라는 마음으로 넘어갑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순수한 마음으로 묵상 글을 쓸 수 있었고, 이렇게 20년 넘게 묵상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몇 달 전에 SNS의 라이브 방송 중 위험하게도 25층 높이의 아파트 난간에서 춤추다 추락사를 했다는 뉴스를 보게 되었습니다. 보여주기 위한 방송 촬영이 끔찍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은 그렇게 행복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아닌 주님께 보여주기 위한 삶을 산다면 어떨까요? 굳이 나를 드러낼 필요도 없고, 그저 사랑 자체에만 집중하면서 살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가장 작은 씨라 할 수 있는 겨자씨가 새들이 깃들이는 큰 나무가 되는 것처럼, 또 누룩이 밀가루에 들어가서 크게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하늘 나라는 우리의 작은 마음에서 시작해서 성장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 마음은 세상의 마음이 아닙니다. 즉, 세상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하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으로 채우는 욕망의 포로가 되는 마음이 아닙니다. 대신 주님께서 늘 강조하셨던 사랑의 삶이었습니다.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경쟁적으로 바라보는 마음이 아닌, 모두를 포용하고 함께하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에서 시작해서 하늘 나라는 완성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이런 마음이 주님의 시선을 끌 수 있습니다. 이웃을 향한 자그마한 배려, 오늘 만나는 사람에게 행하는 따뜻한 말 한마디, 지금 어렵고 힘든 사람을 위해 바치는
나의 기도 등등…. 우리의 작은 마음이며 작은 행동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눈여겨보며 주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작은 마음을 통해서 커다란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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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을 충실히 사는 용기>
정호승 시인의 ‘새벽편지’라는 시를 소개합니다.
죽음보다 괴로운 것은 그리움이었다
사랑도 운명이라고 용기도 운명이라고
홀로 남아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오늘도 내 가엾은 발자국 소리는 네 창가에 머물다 돌아가고
별들도 강물 위에 몸을 던졌다
갑곶성지에서 봉안당을 운영하다 보니 죽음을 많이 보게 됩니다. 특히 안치 예식을 하면서 유가족들의 슬픔과 안타까움을 봅니다. 이 슬픔과 안타까움은 시간이 흘러도 극복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외로움 때문입니다. 더 이상 함께 하지 못하는 외로움에 힘든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이때 시인의 말처럼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즉, 홀로 남아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슬픔과 안타까움으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먼 훗날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만남을 희망하며 지금을 충실하게 사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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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순리가 지배하는 곳>
‘용두사미’라는 말이 있습니다. 용 대가리와 뱀 꼬리라는 말로, 시작은 요란하고 그럴듯하지만, 끝에 가서는 일이 흐지부지 흐려지는 것을 빗대어 말합니다. 반면에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과감한 사람은 시작은 잘하지만, 끝을 맺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거나 소심한 사람은 아예 시작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서 나온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하는 일은 거창하게 시작하여 흐지부지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자연은 눈으로 볼 수 없게 시작하여 점점 거창해지고 아름다워집니다. 눈으로 볼 수 없게 시작하여 거창해지는 일이 자연의 순리입니다. 겨자씨가 자라나 큰 나무가 되고, 누룩이 밀가루 속에서 부풀어 오릅니다. 자연스럽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의 법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가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내면에서 시작하여 겉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말씀의 씨앗이 내 마음 안에서 자라나 기쁨으로 말씀을 실천하게 될 때 하느님의 나라는 성취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순리를 따라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작고 큰 것이 따로 없습니다. 모두가 큰일입니다. 내 마음대로 하면 인간의 일일 뿐이고, 순명으로 하면 주님의 일이 됩니다. 따라서 일상 안에서 주님의 일을 행함으로써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잘난 척하면 헐뜯는 사람이 생기고, 아는 척하면 무시하려는 사람이 생깁니다. 그리고 힘센척하면 해치려는 사람이 생기고, 있는 척하면 뺏으려는 사람이 생깁니다.
세상은 인간의 인위적인 법이 지배합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이들은 하느님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물이 흐르면 물이 흐르는 대로,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모두를 품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지금은 힘이 들지만 머지않아 큰 나무가 되고, 부풀어 오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작은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도 반드시 큰일을 위한 준비가 되니만큼 작은 일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겨자씨 안에는 큰 나무를 감추고 있고, 조그마한 누룩 덩어리는 위대한 능력을 이미 지녔습니다. 그래서 서두르지 않아도 때가 되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누룩은 때가 되면 안에서 밖으로 부풀어 오릅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을 지니고 있으면 성장합니다. 그렇지만 그 열매를 얻기까지는 햇빛과 비, 그리고 거름도 필요합니다. 주변의 잡풀을 뽑아주어야 하고
땀과 정성이 담겨야 합니다. 그래야 영양을 제대로 취할 수 있고 튼실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늘의 새들이 와서 나뭇가지에 깃들이듯 우리도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 되어서 다른 이의 휴식과 안식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반드시 옵니다. 그러나 수고와 땀에 따라서 각 사람에게 다르게 다가옵니다. 하느님께서는 똑같은 열매를 주고 싶어 하지만 관리하지 않는 사람은 튼실한 열매를 수확할 수 없는 법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누룩처럼 부풀어 오를 수 있는 하느님의 에너지가 있고 겨자 나무가 될 생명의 씨앗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하느님의 나라를 열매 맺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 주간 하느님께서 주신 각자의 탈랜트를 찾고 가꾸는 기쁨을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혹 나에게 주어진 몫이 미약하게 보일지라도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니 결코, 작지 않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나 때가 되면 주님의 능력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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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늘 나라의 삶>
-신망애信望愛의 겨자씨, 신망애信望愛의 누룩-
믿음이 없다면 거기가 지옥일 것입니다.
희망이 없다면 거기가 지옥일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거기가 지옥일 것입니다.
지옥이나 천국은 장소보다는 관계에 달려 있습니다. 지옥같은 현실에서도 신망애의 관계라면 천국이지만 천국같은 현실에서도 신망애가 심히 결핍된 약육강식, 각자도생의 환경이라면 거기가 지옥입니다.
“모든 이들이 힘든 삶을 사는데 날씨까지 무더워 삶속에서 희망을 잃고 사는 것 같아요! 믿음이 있는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주님의 축복이고 은총입니다!”
어제 받은 메시지가 생각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희망을 잃고 하루하루 고달프고 힘들게 살아갑니다. 하루하루가 영적전쟁입니다. 저 역시 수도원이지만 ‘하루하루’ 하느님만 바라보면서 살아갑니다. 33년 동안 정주의 비결은 우보천리, ‘하루하루’의 삶에 있음을 봅니다. 믿는 이들 삶의 본질은 어디서나 누구나 똑같습니다. 하루하루 하느님께 궁극의 믿음을, 궁극의 희망을, 궁극의 사랑을 두고 힘껏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하루하루가 영적전쟁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성녀들은 이렇게 살았습니다. 진인사대천명이요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하늘 나라는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렇게 살아갈 때 오늘 지금 여기서 은총처럼 실현되는 하늘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늘 나라의 실현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이들이 바로 하늘 나라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영원한 꿈이자 비전, 희망은 하늘 나라인 파스카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숨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를 살아야 함은 우리의 고귀한 의무이자 책임입니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바로 예수님이 하늘 나라 겨자씨입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하늘나라 겨자씨입니다. 여기 수도원도 하늘 나라 겨자씨입니다. 성장과 성숙이 멈춘 겨자씨가 아니라 끊임없이 성장, 성숙하는 신망애의 겨자씨입니다.
“여기 수도원을 보면 그대로 겨자씨의 비유가 생각나요. 수많은 새들이 깃든 겨자씨 나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큰 숲을 이룬 하늘 나라 수도원을 찾고 있어요.”
어느 수도자의 말도 생각납니다. 참 작고 보잘 것 없는 겨자씨가 상징하는 바 참으로 숨겨진 겸손한 신망애의 삶입니다. 이런 이들을 통해 묵묵히 소리없이 일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수도원 정주 생활의 놀라움은 수도원이 온통 숲으로 변했다는 사실입니다. 메타세콰이어 가로수들은 2009년 심을 때는 어린 나무들이었는데 12년이 지난 지금은 거목들로 성장했습니다.
나무의 성장과 성숙이 상징하는 바 우리의 내적, 영적 성장과 성숙이요 그대로 우리 자신을 성찰하게 합니다. 외적, 육체적 성장과 성숙은 멈추고 쇠락衰落해 가더라도 내적 영적 성장과 성숙은 살아 있는 그날까지 계속될 때 그대로 하늘 나라 삶의 실현입니다. 과연 끊임없이 내적으로, 영적으로 성장 성숙하는 신망애의 겨자씨가 되어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를 살고 있는지요. 죽어서 가는 하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내야 하는 하늘 나라입니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 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우리 하나하나가, 우리 공동체가 세상의 누룩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누룩, 희망의 누룩, 사랑의 누룩, 기쁨의 누룩, 평화의 누룩, 겸손의 누룩, 감사의 누룩, 행복의 누룩 끝이 없습니다. 이런 누룩들이 서로를, 공동체를 믿음으로, 희망으로, 사랑으로, 기쁨으로, 평화로, 겸손으로, 감사로, 행복으로 부풀리니 그대로 하늘 나라의 실현입니다. 행복기도 다음 대목이 생각납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살 줄 몰라 지옥이요 살 줄 알면 천국임을
깨닫나이다.“
하늘 나라를 살아야 할 자리 그 어디도 아닌 오늘 지금 여기 내 자리입니다. 영적전쟁중의 평화입니다. 모든 성인들은 끊임없는 고통중에 휴식없는 삶이었지만 영원한 안식처인 주님 안에 머물렀기에 지상에서 기쁨과 평화 가득한 천국을 살았습니다. 지옥같은 환경중에도 끊임없는 노고와 분투의 영적전투중에도 주님 안에 정주하며 천국의 삶을 살았습니다.
바로 그 빛나는 모범이 오늘 탈출기의 하느님의 전사이자 하느님의 벗인 모세입니다. 하느님과 백성 사이, 진퇴양난의 곤경 속에서도 참으로 대담하게 중재자의 책임을 다합니다. 그대로 거목으로 성장한 신망애 겨자씨와 같고, 신망애의 누룩, 화해의 누룩과 같습니다.
오늘 탈출기의 다음 대목이 모세의 영적성장과 성숙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곤궁중에 살아가는 모든 신자들에게 모세가 주는 위로와 격려가, 감동이 참으로 큽니다. 참 거목으로 자란 신망애 겨자씨같은 모세요, 모세의 지극 정성의 사랑의 누룩에 하느님도 백성들도 감동으로 부풀었을 것입니다.
“아, 이 백성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자신들을 위하여 금으로 신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려거든, 당신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제발 저를 지워주십시오.”
참으로 하느님을, 백성을 지극 정성 사랑했던 모세이기에 이런 배수진을 친 진퇴양난의 사랑입니다. 이런 모세 같은 하느님의 전사들이, 종교 지도자들이, 정치 지도자들이 참으로 그리운, 절실한 세상입니다. 너무 영적으로 왜소한 난쟁이들 세상 같습니다. 문득 모세로 수도명을 했을 걸 하는 생각도 듭니다.
참으로 모세같은 성인이, 영적 거인의 성인들이 절박한 시대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모님의 부모님인 성 요아캄과 성녀 안나도 우리에게 감동을 선사합니다. 두분 역시 신망애의 겨자씨로, 신망애의 누룩으로 하늘 나라의 꿈을 실현했던 분들입니다. 참으로 혼돈의 어둔 시대 성인성녀들은 우리 삶의 어둠을 비추는 하느님의 빛입니다. 우리 모두 각자 고유의 성인이 되어 세상의 빛으로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모세에게 감격한 하느님의 반응도 감동이요 참 멋집니다.
“나는 나에게 죄지은 자만 내 책에서 지운다. 이제 너는 가서 내가 너에게 일러 준 곳으로 백성을 이끌어라. 보아라. 내 천사가 네 앞에 서서 나아갈 것이다.”
얼마나 하느님을 사랑한 모세요, 얼마나 모세를 신뢰한 하느님인지 깨닫습니다. 모세가 하느님의 사랑이자 자랑이듯, 하느님 역시 모세의 사랑이자 자랑이였음을 봅니다. 참으로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신망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주님의 천사가 우리와 늘 동행할 수 있도록,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자비를 청합니다. 주님 말씀의 겨자씨가 성체의 누룩이 우리 모두 영적성장과 성숙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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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늘 나라가 어떻게 시작해 완성되는지 보여 주십니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마태 13,32)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십니다. 그 시작이 너무 작고 미약해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일에 골몰하고 자기만을 위해 사는 이들의 눈에는 감추인 듯 드러나지 않지요.
그런 씨앗이 흙과 물과 양분을 만나면 어떤 풀보다 크게 자랄 싹을 틔웁니다. 새들도 깃들일 수 있을 정도의 나무로 자라서 그 잎은 채소가 되고 열매는 향신료가 되지요. 눈에 띄지도 않을 크기의 씨앗만으로는 상상할 수 없었던 미래입니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마태 13,33)
또한 예수님은 하늘 나라를 누룩에 비유하십니다. 누룩은 음식에 섞는 첨가물로 일종의 발효제입니다. 곡식과 섞여 물과 온도의 조건이 갖춰지면 빵도 부풀리고 술도 만들지요. 누룩은 그 자체로 남지 않고 녹아 버리지만 타자와 섞여 그 가치를 배가시켜 줍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늘 나라를 선사하신 대목입니다.
"그 무렵 모세는 두 증언판을 손에 들고 돌아서서 산을 내려왔다. 그 판들은 양면에, 곧 앞뒤로 글이 쓰여 있었다. 그 판은 하느님께서 손수 만드시 것이며, 그 글씨는 하느님께서 손수 그 판에 새기신 것이었다."(탈출 32,15-16)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사십 일을 지낸 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리신 계약의 증언판을 들고 내려옵니다. 하느님께서 "손수" 판을 마련하셔서 그 위에 "손수" 새기셨다고 하지요. 당신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애정이 얼마나 지극한지, 그리고 이 계약을 그분이 얼마나 설레이며 열망하셨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두 존재 사이에 관계가 형성되면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일련의 관계성이 정립되어야 합니다. 아직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계명은 하느님과 관계 맺는 방식을 알려 줍니다. 하느님께서 일상의 삶과 신앙 생활에서 지키라고 손수 백성에게 내리신 선물이라 할 수 있지요.
모세가 받아 온 십계명 안에는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이어가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것, 그리고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금지들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계명은 백성을 옭죄고 규제하는 올가미가 아니라 '하늘 나라'라는 완성태를 품고 있는 선물입니다.
"아, 이 백성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자신들을 위하여 금으로 신을 만들었습니다."(탈출 32,31)
그런데 모세가 백성을 떠나 하느님 앞에서 지낸 사십 일의 부재 기간이 이스라엘에게 너무 길었던 걸까요? 그들은 이 선물이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마음이 조급해져 다른 신을 만들고 그 앞에서 날뛰고 맙니다.
"자신들을 위하여"
이것이 우상의 특징입니다. 불변하시는 하느님께 자신을 맞추어 그분을 닮아가다가 종래에 그분과 일치하는 길이 신앙의 영적 여정이라면, 우상은 자기의 욕구와 욕망에 따라 재단한 맞춤형 신입니다. 그래서 우상을 신의 자리에 놓기는 해도 실은 자신들을 위한 장치에 불과하지요.
우상은 하늘 나라를 이룰 수 없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상 자리를 꿰어찬 재물과 권력, 정보와 지식, 외모와 장수는 신앙의 눈에 그저 허망한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걸 우리는 모르지 않지요.
반면 십계명이라는 선물은 하느님 나라의 시민권을 보장합니다. 하느님 자녀로서, 온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다 보면, 겨자씨처럼 또 누룩처럼 그 안에 감추어져 있던 하늘 나라의 실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며 이 세상 한가운데서 완성되어 가는 겁니다.
하늘 나라와 우상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지는 우리의 몫입니다. 하늘 나라는 잇속만 따지는 눈에는 보이지 않을 만큼 작고 미약한데다 느리기까지 해서 특히 현세적 삶에 능한 이들에게는 매력이 떨어집니다. 게다가 제 맘대로 살고 싶은 이들에게 따분하고 성가시기까지 하니 세상을 아우를 비전과 가치를 알아보는 눈이 없으면 딱 찬밥 신세일 뿐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십계명을 선물로 받은 우리는 비록 나약한 죄인이어도 하늘 나라를 품고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오늘은 여기 걸려 넘어지고 또 내일은 저기 걸려 주저앉으면서, 번갈아 삐걱대고 절룩거리면서도 미숙하나마 마음 속에 간직한 사랑 덕분에 하늘 나라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지요.
현재의 미소하고 불완전한 모습에 실망하거나 지치지 않고 나아가는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이룰 하늘 나라의 모습이 지금 우리 눈에는 희미해보여도 하느님은 그걸 선명히 보시면서 우리를 이끌고 계시답니다. 우리에 대한 그분의 기대가 곧 완성이고 또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니, 함께 힘 내어 나아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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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fqWMMtNHceQ&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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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태 13, 31)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시작입니다.
겨자씨로 자라나
드디어 자기 몸을 바치는
겨자나무가 됩니다.
하늘 나라의 생명은
이와같이 생명의 길을
기쁘게 걸어가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 작은
자기 자신을 묵묵히
받아들입니다.
하늘 나라의 시작은
작디 작은 겨자씨같은
자기자신을 받아들일 때
더욱 풍요로워지는
하늘 나라에 이르게 됩니다.
하느님을 향할 때
자라게 되는
신비입니다.
우리 또한 있어야 할
자리에서 하느님을
기쁘게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하늘 나라는
조금씩 조금씩
만들어가는
나라입니다.
본디부터 겨자씨와
겨자나무는
하나였습니다.
하느님이
전부인 나라입니다.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기에
겨자씨는 겨자나무로
하느님의 사람으로
하느님 안에서 오늘도
자라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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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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