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의 미학
박원명화
창문을 여니 살랑바람이 반겨든다. 젊음을 과시하듯 번들대던 짙푸른 이파리들의 빛깔이 조금씩 사위어 가고 있다. 청명한 하늘은 언제 찜통더위가 있었나 싶게 드높다. 마치 내내 가을이었던 것처럼. 바람에 취하고 하늘에 취하고 단풍에 취할 것을 생각하니 벌써 가슴이 설렌다.
몇 년 만인가 새로 도배도 하고 장판도 깔았다. 가을 분위기에 알맞게 들뜬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막상 생각처럼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이사 가는 것만큼이나 살림을 홀딱 뒤집게 되어서다. 그동안 눅눅하게 갇혀 지낸 것들이 많았다. 써보지도 않은 살림살이들이 낯설기 이를 데 없다. 매일 쓸고 닦았건만 미처 손길이 닿지 못한 구석진 곳마다 먼지가 분노처럼 쌓여있다. 게으른 생활의 치부를 보는 같아 부끄러웠다.
싱크대 앞 깊숙한 곳에서 언제 놓아 둔지도 모를 그릇들이 쏟아져 나왔다. 시집올 때 어머니가 사준 스텐그릇과 유리그릇, 그리고 오래된 범랑냄비들이다. 그 속에 끼어 숨을 죽이고 있었던 듯 작고 투박한 유리그릇 하나가 언뜻 눈에 띄었다. 어머니가 그리울 때면 문득문득 생각나서 애타게 찾았던 그릇이 여기 숨어 있었다니….
어머니의 숨결이 짙게 밴 그릇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난생처음 번 돈으로 산 것이라며 특별히 내게 주신 것이다. 그땐 유리그릇이 귀하던 때라 정작 어머니는 한 번도 쓰지 못하고 모셔두고 있던 그릇이다. 종발보다는 약간 큰 것으로 육각 모양에 뚜겅이 있고 특별한 무늬나 모양새는 없었다. 질그릇처럼 두툼해서 그저 밑반찬들이나 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것은 내게 있어 어머니의 체취와 사랑이 담긴 상징물이었다. 그게 그렇게 깊숙이 숨어있었던 건 나에 대한 어머니의 어떤 믿음처럼 느껴졌다. 유리그릇의 속성이긴 하지만 그 그릇은 절대로 거짓말이 통하지 않았다. 담긴 반찬을 있는 그대로 보여어 때 맞춰 신선을 유지하게 했다. 어머니의 가르침이 바로 그런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우리는 지금 물질문명의 홍수 속에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 같다. 그릇하나를 사도 하나는 버려야 하는 세상이다. 사들이다보면 금방 찬장이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버리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간절하지만 날로 쏟아져 나오는 좋은 물건들을 마냥 외면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아까워 그냥 밀어 넣다보면 어떤 것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잊기 일쑤다. 막상 손님이라도 맞게 되면 쓸만한 그릇이 없어 또 사게 된다. 뿐만 아니라 백화점이나 쇼핑센터에서 예쁘고 색다른 것이 눈에 띄면 공연히 사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릇은 실용적인 물건이다. 별다른 욕심도 없다. 그런데도 찬장마다 빈틈이 없다. 언제 어디에 쓰려고 그렇게 쌓아 둔 것인지….‘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속담대로 나도 모르게 ‘보기 좋은 그릇에 보기 좋은 떡’이라도 담으려고 그랬던 것일까.
내 나이도 이제 가을로 접어들고 있다. 젊음이 사위어진다고 생각하니 뭐라 말할 수 없는 쓸쓸한 느낌이 가슴을 휘젓는다. 서정의 편린들이 하나씩 망각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는지, 감동적인 어떤 일도 금방 시들해진다. 그러면서도 물질에 대한 탐욕은 그대로인 듯싶다. 무엇이든 쌓아가며 살고 싶어 한다. 공해만큼이나 혼탁한 내 마음이 갑자기 답답하게 느껴진다.
정작 나 자신과 싸워야 할 일에 너무 방심하며 살았던 것 같다. 편안함에 길들여진 나태는 나를 한없이 나약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릇하나쯤 사는 일이야 무에 그리 대수로울 손가. 견물생심見物生心이 일으키는 유죄 탓에 모든 걸 쉽게 사고 쉽게 버린다.
바람은 결코 밖에서만 부는 게 아닌 듯하다. 마음속에서 불어대는 사치와 낭비의 바람은 도무지 대책이 없다. 잘못된 글씨를 지우개로 지우는 것과 같이 사람의 잘못된 생각도 지우개로 지울 수는 없는 것일까. 풍족함보다 모자란 듯 비워두고 살자고 하면서도 걸핏하면 흔들리고 있으니 말이다. 기억에도 없는 낯선 살림들을 보니 나 자신이 한심스러워진다.
필요 없는 그릇들을 버리고, 싱크대를 깨끗이 정리했다. 그리고 장롱에 옷가지며 책장까지, 집안 구석구석 덕지덕지 쌓인 먼지들을 쓸어내고 닦아내고 나니 온 집안이 소독한 듯 말끔하다. 더불어 그만큼 생활공간도 넉넉해졌다. 이렇게 넓은 평수에 살았으면서도 나는 왜 그동안 늘 좁다고 불평을 쏟아 내며 지냈을까.
시력이 점점 흐려져 안경의 도움 없이는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서 마음의 시력은 떨어지지 않고 살아온 탓이다. 버림으로 해서 느긋한 여유, 훤한 실내 분위기가 가을 하늘만큼이나 밝아진 느낌이다.
-한국산문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