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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이렇게 된 것이었습니다. 전 세계의 반제국주의 운동을 지원해 사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식민지 피억압 민족들을 사회주의로 끌어들이고 마르크스가 말한 민족해방을 실천한다는 방침을 내세운 인터내셔널 총비서 부하린은 중국으로 [헨크 ‘마링’ 스니블릿] 특사를 파견하였고, 마링과 접견한 쑨원이 소비에트 러시아에 자신의 오른팔 [왕징웨이]를 특사로 보낸 것이었습니다.
국민당의 사상적, 조직적인 개조와 물자의 지원, 외교적인 지지 등을 부탁한 왕징웨이는 1919년 11월 카튜셰프, 요페, 카라한, 트로츠키파 공산당 원로인 [안드레이 부브노프]와 카튜셰프와 마찬가지의 사상가인 [미하일 보로딘]은 중국 국민당이 머무르고 있는 광저우로 향했습니다.
레닌이 극동의 문제는 러시아의 생존이 걸린 문제라고 발언하는 가운데, 러시아와 인터내셔널 대표단은 중국의 상황을 자세히 조사했습니다. 혁명적 열정에 가득 찬 소녀 같은 쑨원은 카튜셰프에게 간과 쓸개를 빼줄 것 같이 협조하였고, 카튜셰프와 보로딘은 약간의 냉소와 비하가 섞인 인물 평가서를 작성해 러시아로 보냈습니다.
반공 우익 인사이지만 중국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중시하여 필요하다면 러시아와도 손을 잡을 것이라 주장하는 [후한민], 군사적 식견이 뛰어나나 속을 알 수 없는 [장제스], 쑨원이 신뢰하는 오른팔이지만 이상주의에 빠져 현실감각이 없는 왕징웨이, 광둥성의 실질적 지배자이고 연방주의를 주장하며 쑨원과 임시 동맹 중인 [천중밍], 혁명적 부르주아로 러시아에 몹시 우호적인 [랴오중카이] 등으로 국민당과 그 협력자들을 평가한 문서는 인민위원회에 특송되었죠.
또한, 중국 내에서 공산주의 정당을 창당하고 싶어 하는 [천두슈]와 같은 이들도 러시아 대표단과 개별적으로 접촉했습니다. 러시아와는 달리 조금의 자본주의적 기반도 없는 중국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논하는 건 우스갯소리였지만, 천두슈와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은 나름대로 신념이 있는 인사들이었습니다.
물론 인터내셔널은 냉정했습니다. 특히 자본주의의 발전이 사회주의를 불러온다는 기계론에 천착하는 부하린에게 중국 내 공산주의자들의 존재는 ‘거슬린 무언가’에 불과하였죠. 인터내셔널은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에게 국민당에 입당하여 국민당원으로서 활동하고 국민혁명의 완수에 힘쓸 것이라는, 전향만 안 했을 뿐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상당히 충격적인 지시를 내렸습니다.
레닌은 쑨원을 ‘흉내 낼 수 없을 정도의 순진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평했습니다. 문제는 중국의 공산주의자들도 이에 해당하는 인사들이 많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인터내셔널의 지시를 따르고 국민당에 입당해 평화롭게 국민당원으로서 활동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많은 공산주의자들은 사실상 ‘당내의 또 다른 당’으로써 활동하며 자신들이 국민당에 복속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려 했습니다. 후일 소비에트 러시아 측에서 이들에 대한 ‘특별한 조치’를 취해야만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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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소비에트 러시아는 해묵은 숙제를 해결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바로 니콜라이 2세에 대한 재판이었죠. 제1장갑차연대를 확대 개편한 ‘7월 혁명 차량화보병사단’이 페트로그라드를 삼엄히 경비하는 가운데, ‘특별재판’의 판사를 맡은 멘셰비키 [안드레이 비신스키]는 재판부 회의를 진행 중이었습니다. 한때 레닌의 체포 명령에 서명했던 비신스키는 소비에트 러시아에 가담해 검사로써 활동 중인 인물이었죠. 이들은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에 대한 재판을 준비 중이었습니다.
검사가 판사 역할을 맡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말이 재판부 회의이지 이는 일종의 ‘예행연습’이었습니다. 변호사인 [니콜라이 크릴렌코]는 비신스키의 경쟁자인 변호사로서 이러한 예행연습을 통한 재판에 반대하고 인민재판을 주장했지만, 레닌은 비신스키의 방안에 동의했으며 스탈린은 비신스키를 천재라며 칭송했습니다. 트로츠키는 인민재판을 지지했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며 검사 역할을 자처하였죠.
트로츠키는 최대한 재판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데에는 적극적으로 동참하였습니다. 1월 21일에 사형을 집행한다는 결과까지 모조리 만들어진 포장은 상식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았지만, ‘실제 재판’이 아닌 이상 큰 의미는 없었죠. 이 1월 21일이라는 날짜와 니콜라이 2세에게 적용될 33개 혐의는 프랑스 혁명 당시 루이 16세의 처형을 그대로 본뜬 것이었습니다.
루이 16세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던 날짜로부터 정확히 127년 뒤인 1792년 12월 3일, 페트로그라드 겨울궁전에 마련된 특별재판소에서는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재판부는 심지어 외신기자들까지 초청함으로써 상당한 충격을 불러왔습니다.
재판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니콜라이 2세는 자신에게 씌워진 모든 혐의를 인정했습니다. 신체적인 폭력은 물론이고 잠을 재우지 않게 하거나 시간 감각을 잊게 만드는 다채로운 고문과 황족의 영국 망명과 관련된 회유가 뒤섞인 결과였죠. 알렉산드라 황후는 혐의를 부정했지만, 큰 의미는 없었습니다. 애초에 니콜라이 2세에 대한 사형은 상징적인 의미가 강했으니까요.
후일 ‘전시재판’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 재판은 큰 여파를 끼쳤습니다. 재판의 참관인으로 참석한 작가 [예브게니 쟈마틴]은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마침내 볼셰비키는 인간을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었다. 자유라는 개념을 말살하고 인간을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하나의 지엽적 존재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사소해진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가 아직 존재한다고 믿게 만들었다.
우리는 분명 인간이 모든 억압과 결핍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려 했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 죽음과 자유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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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기자단에 섞여 영국의 특사가 온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영국은 차르와 황후를 제외한 다른 황족들의 망명을 추진 중이었고, 필요하다면 ‘이송비’를 명목으로 영국 왕실의 내탕금을 지급할 용의까지 비쳤죠. 옛 황족들을 인신매매하듯 넘기는 모습에 인민위원회 위원들이 자지러지는 사이, 이미 미국까지 망명했던 키릴 대공은 자신이 새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본래 다른 황족 대부분이 러시아에서 갇혔거나 죽어 자신이 제위 요구자가 되길 기대했던 키릴 대공은 니콜라이 2세의 동생인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의 영국 망명이 추진되고 있다는 소식에 분노했습니다. 그는 친소비에트-친로마노프 여론 조성을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미국은 그런 여론을 받아들일 처지가 아니었으니까요.
100만이 넘는 철강 노동자와 광부들이 미국 전역에서 파업하는 가운데, 이탈리아 출신의 아나키스트 [루이지 갈레아니]를 추종하는 테러주의자들은 맨해튼 증권가와 대기업 임원을 상대로 한 폭탄 공격과 총격을 계속했습니다. 이에 대항해 미국 정부와 연방수사국, 즉 FBI는 무자비한 진압으로 대응했죠. 아나키스트 [옘마 골드만]은 러시아로 추방되었고, 해외에 머물러 있던 미국 국적 사회주의자들은 별다른 이유 없이 재입국이 불허되었습니다.
롱아일랜드에서 부유한 생활을 이어가던 키릴 대공과 합류한 콘스탄틴 공작은 키릴 대공의 이 ‘여론 조성’ 시도에 대단히 당황했습니다. 그가 몇 해 전 공산당 간부인 우스트랼로프와 맺었던 밀약의 존재를 키릴 대공은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러시아어도 아니고 프랑스어를 쓰며 시종을 부리고 값비싼 포도주를 마시는 옛 제정 상류층의 모습에 콘스탄틴 공작은 진절머리가 났지만, 키릴 대공이 도대체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알아내야만 했습니다.
마침내 조심스러운 탐문 끝에 콘스탄틴 공작은 키릴 대공이 소비에트 러시아의 또 다른 지도자인 지노비예프로부터 온 편지에 따라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는 그 편지가 사실 우스트랼로프의 위조라는 것은 알지 못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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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러시아 정계를 뒤흔들 나비의 날갯짓이 조용히 시작되는 동안,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에 대한 전시재판은 계획대로 진행되었습니다. 12월 26일에 재차 진행된 재판은 니콜라이 2세의 ‘자기 고백’이었고, 1월 14일에 내려진 판결은 당연하게도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에 대한 사형이었습니다.
1월 17일,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가 미리 준비된 각본대로 접수된 사면 요청을 검토하여 알렉산드라 황후의 형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한 뒤, 외신기자들은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니콜라이 2세의 혐의 인정, 루이 16세의 사형과 모든 것이 일치하는 재판 날짜와 사면 검토 등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외신기자들이 보기에 이러한 절차는 ‘너무’ 민주적이었습니다.
이들이 단순히 반공주의적 맹신에 빠져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민주주의와 공화제를 내세우면서 독재를 저지르는 국가는 세계 곳곳에 넘쳤고, 언론인이라고 자부하는 이들이라면 그들의 거짓말 정도는 간파할 수 있었죠. 하지만 그런 기자들조차도 ‘사법부와 정치권, 언론이 하나가 되어’ 거대한 연극을 연출하는 것은 상상을 못 했을 뿐이었습니다.
1920년 1월 21일, 알렉산드라 황후가 오지 중의 오지인 솔로베츠키 수도원으로 유배되는 동안, 니콜라이 2세는 그가 가폰 신부가 이끌던 시위대를 학살한 겨울궁전 앞에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표도로프 자동소총을 든 군인들은 ‘법적으로는’ 러시아 최후의 사형이 될 판결을 집행하였습니다. 차르에게 증오심이 많았던 군인들에게 총을 쥐여줬던 탓에, 니콜라이 2세의 시신은 온전하게 남지도 못했습니다.
표트로프가 가진 보수주의적 소극성과 순진함을 빼야 한다는 명목으로 트로츠키는 표트로프가 니콜라이 2세의 시신을 치우게 했습니다. 표트로프는 니콜라이 2세의 시신을 정리하며 ‘나는 틀리지 않았다’라는 말을 짧게 중얼거렸을 뿐이었습니다. 이윽고, 니콜라이 2세의 유해는 화장되어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 유해가 뿌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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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2세가 처형된 이후, 러시아의 정치단체들은 1920년 4월 8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회동했습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회의였습니다. 1917년 7월 혁명 직후 ‘전환적 사회주의 경제’란 이름으로 스톨리핀의 경제부흥계획을 수정한 경제계획안이 통과된 뒤 2년 8개월 만에 새로운 경제정책이 논의되는 자리였으니까요.
이전에도 언급되었듯이, 이 회의에서는 엄청난 논쟁이 발생했습니다. 인민경제최고회의 부주석 [알렉세이 리코프]와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중앙집행위원 [미하일 톰스키] 등 노장 볼셰비키들과 손잡은 인터내셔널 총비서 부하린은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하되 협동조합을 중시하고 임금에 대한 성과보수와 절세와 대출 혜택, 무역 제한 완화에 주식 시장의 제한 도입 등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의 발전’을 중시하는 자신의 방안을 밀어붙였습니다.
부하린의 의견은 많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레닌도 어느 정도 부하린의 의견에 동조했습니다. 이전 부하린이 주장해 도입되었던 전환적 사회주의 경제는 비록 공업 생산품의 가격이 치솟고 농업 생산품의 가격이 하락하는 ‘가위 위기’의 전초단계를 불러오긴 했지만, 식량난이 해결된 것 자체는 사실이었으니까요. 이들은 멀리 가지 않고 사회주의 독일의 경제가 정상화될 때까지만이라도 이 개량된 전환적 사회주의 경제 방안을 도입하자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제는 ‘사회민주노동당’이라는 옛 이름을 회복하고 공산당의 우당으로 분리해 나온 멘셰비키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중 정치권에 복귀한 개량주의 정당인 트루도비키 잔당인 노동인민사회당은 부하린의 계획을 지지했습니다. 특히 자본주의의 발전이 사회주의 실현의 전초단계라는 기계론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멘셰비키의 지지가 절대적이었죠.
심지어, 레닌과의 협상을 통해 ‘붉은 자본가’로서 소비에트 러시아 내에서 사업을 지속 중이던 기업가 [알렉세이 메셰르스키]와 경공업의 발전을 원하는 소상공인들도 부하린의 방안에 지지를 표명했습니다.
한때 사유재산을 말소하자던 좌파공산주의자들도 현실감각을 되찾고, 자신들의 지도자인 보그다노프와 함께 보그다노프의 제자 부하린을 지지했습니다. 좌파공산주의자들은 ‘사회와 문화’에서 부르주아 문화의 잔재를 말소하고 새롭고 건전한 노동자 문화가 탄생해, 경제정책에서 후퇴하더라도 노동계급이 ‘주도권’을 놓치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이는 이탈리아 출신의 사회주의자인 [안토니오 그람시]의 영향이 큰 주장이었습니다.
이렇게 부하린 방안을 지지하는 이들은 통틀어 ‘전환파’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뒤에는 심지어 독일 공산당이라는 막강한 아군이 존재하였죠. 독일 공산당의 대표들은 몇달 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2차 대회에 참가하고자 러시아에 방문했다가 경제문제의 향방을 알아내기 위해 머무르게 된 인사들이었습니다. 아래에서부터 위로의 의견수렴이 러시아 공산당보다 활발한 독일 공산당은 자신들과 성향이 비슷한 전환파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예정이었죠. 즉, 러시아의 경제정책의 향방은 향후의 독러관계를 결정할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반대로 트로츠키와 라데크, 프레오브라젠스키 등이 주장하는 방안은 좀 더 강경했습니다. 이들은 인민최고경제회의의 권한을 크게 확장하고, 특정 기간 동안의 생산 할당량을 권역별로 지정하는 경제계획안을 지역별로 도입하는 ‘제한적 분권형 계획경제’를 주장했습니다.
이들의 이 계획경제 방안은 최종 결정을 소비에트 러시아의 중앙정부가 내리긴 하지만 지방 소비에트에서 경제계획을 직접 입안할 수 있게 한다는 ‘진짜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냄새가 물씬 나는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지역별 방안에는 노동조합이 참가할 수 있게 하였기 때문에, 온건파 공산당원으로 분류되는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스테판 샤우먄, 노동조합의 권한 확대를 지지하는 [알렉산드르 쉴랴프니코프] 등이 트로츠키 계획을 지지하였죠.
부하린의 계획에 마음이 기울어있던 레닌이었지만, 좌파공산주의자들에게 항상 비판적이었던 레닌은 일부 문제에서는 트로츠키의 편을 들었습니다. 특히, 레닌의 ‘노동자 국가’의 구상은 상당히 관대했습니다. 보그다노프는 부르주아 문화가 개인주의, 절대성, 권위주의라는 3원칙을 가졌다며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레닌은 부르주아 문화가 아니라 ‘부르주아 국가’가 제거되면 충분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문화적인 주도권보다는 실제로 노동계급이 주도권을 잡는 것이 중요하였고, 각 지역의 소비에트와 노동조합에 직접적인 권한이 더 많이 돌아가는 트로츠키의 계획안은 분명 이점이 존재하였죠.
당연하게도, 소비자 협동조합과 생산자 협동조합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를 원하는 사회혁명당과 정말로 ‘모든 권력이 소비에트로’ 이전되기를 바라는 아나키스트들은 트로츠키 계획을 지지했습니다. 중공업의 발전을 원하는 노농적군 인사들도 자신들의 수장인 트로츠키를 자연스레 지지하였죠. 이렇게 트로츠키 계획을 지지하는 이들은 통틀어 ‘노동자파’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한편, 트로츠키와 부하린 사이에서 협상의 여지를 찾으려는 인사도 존재했습니다. 부하린의 경제정책에 동의하지만, 정치적으로는 트로츠키와 입장이 유사하였던 우스트랼로프도 그중 한 명이었죠. 하필 레닌도 절충안이 성과를 내기를 바랐던 탓에, 우스트랼로프는 인민최고경제회의 부주석으로 선임된 뒤였습니다.
그리고 얄궂게도 민족위원 스탈린 또한 절충론을 지지하는 인사였습니다. 평소에 친분이 거의 없던 우스트랼로프와 스탈린은 스탈린의 개인 비서관인 [알렉산드레 체슬라브]의 주선으로 독대했고, 우스트랼로프와 친하던 표트로프가 깜짝 놀랄 정도로 둘은 빠르게 가까워졌습니다. 이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우스트랼로프-스탈린 연합의 탄생의 시발점이었죠.
첫댓글 부제가 안좋은 상황내지 전망일거라는 암시를 주는듯 하는군요.
봄이 와도 봄같지 않다...
5개년 걔획을 4년만에... 대약진?
놀랍게도 실제로 달성하긴 했습니다. 중국이 함부로 따라하려다 망한거고요.
@렌지파일 불곰국의 기상이란...
@돈이 곧 진리 우리도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 초과 달성하는등 단기간에 한해 독재정권이 성과를 낼수는 있는데.
문제는 그후 관리가 어찌되냐인.
그걸 생각하면 중국이 걍 미친짓해서 자폭한거...
@렌지파일 인민 갈아넣은건 똑같은데 결과 차이가...?
@931117 산업 기반이 있었던 곳과 없었던 곳의 차이 아닐까요.
@돈이 곧 진리 러시아도 딱히 나은편은 아니지 않았나 해서요
@931117 주춧돌이라도 있었던 곳과 터부터 아예 다시 다져야 하는 곳의 차이 아닐지?
@돈이 곧 진리 근데 그리보기엔 러시아도 전쟁에 혁명에 내전등으로 피해 왕창 봤잖아요?
게다가 중공은 대약진 이전에도 어찌 성장중이었던걸로 아는데.
그게 맞음 러시아보다 상태가 안좋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돈이 곧 진리 의외이지만 이 5개년 계획은 나름대로 경제학자들을 초빙해 짠 계획이었습니다. 중국은 천쉐썬만 봐도...
@렌지파일 천윈 같은 걸출한 경제인들을 냅두고 경알못인 전학삼을 투입한...
@렌지파일 전문가의 유무와 수용의 차이군요
@돈이 곧 진리 걸출까진 모르겠는데 아예 문외한들을 앉힌
@931117 1949년에 60만%였던 초인플레이션을 잡은게 천윈입니다.
@돈이 곧 진리 근데 그사람 보수파 같던데.
아무튼 중요한건 마오는 걍 지말 들을것 같거나 듣는 사람들만 앉혔고 비전문가들을 투입했으니.
그 결과가...항우나 여포가 천하를 쥐었다면 저꼴났을까 하기도
우파와 스탈린의 연합 ㄷㄷㄷ
스탈린은 실제로도 1920년대에는 부하린 편을 들었습니다..
@렌지파일 그리고 트로츠키 숙청 뒤 다가오는 PO급진공업화WER(..)
이번 세계선에서는 어떤 모습일지 기대되네요 ㅋㅋ
초기 소련의 정치를 보고있자면 마치 갑작스레 권력을 쥐게 된 정치동아리 부원들의 성장 일대기(...)같은 느낌이 드네요. 실제로도 그렇겠지만... ㅋㅋㅋㅋㅋㅋ
+ 콜옵에도 나오던 솔로베츠키 수도원... ㄷㄷㄷ
페르세우스...
초기 인민위원평의회가 설립되었을때 대부분은 해당분야 경력자가 아니라서 레닌의 골머리를 썩혔다고 합나다. 회의 참가도 제대로 안했고요
@렌지파일 아니 근데 춘래불사춘 부제 보고 굉장히 기시감이 들었는데 소확행 원본 부제도 그거였네요. 어쩐지… ㅋㅋㅋㅋㅋ
@E.E.샤츠슈나이더 ㅋㅋㅋㅋㅋㅋㅋㅋ 드디어 눈치채셨네욬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