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교가 없는 나라는 없다. 물길 닿는 곳에는 화교들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전 세계에 화교들이 퍼져있다.
중국 이민자들인 화교들은 산다바오(三把刀)라는
칼을 들고 집을 나선다는 말이 있다.
산바다오란 채도(菜刀, 식칼), 전도(剪刀, 가위), 체도(剃刀, 면도칼)의
세 종류 칼과 가위로 요리, 재봉, 이발 기술에 사용하는 도구이다.
한국 화교들은 계절적 자유노동자로 왔다가 돈을 모으면
이 업종에서 더 안정적이고 수입이 좋은 일자리를 찾았고,
무역 일을 하다가 일본 상인에게 밀려도
산다바오로 재기의 발판을 삼았다.
인천에 사는 화교들 중 상당수의 직업은 중국요리사다.
화교들은 산다바오 중 채도와 춘장만으로도
중국요리집을 차릴 수 있었다.
특히 예전에는 화교들은 취업이 제한되어
대부분 중국집 주방장의 길을 걸었다.
인천의 중화요리계를 장악했던 화교 주방장 1세대들은
사망하거나, 대만이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아직 몇 집만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손맛을 아들,
손자가 잇기 위해 뜨거운 불과 씨름하고 있다.
숭의동 삼일반점 ‘눈물젖은 철가방’에서 중화요리 주방장까지
용현동, 숭의동 일대에는 화교들이 많이 살았다,
화교들은 주안, 용현동, 숭의동, 석바위 일대에서 주로 채소
농사를 지었다.
한국인들이 잘 재배하지 않던 부추, 가지, 호박, 토마토, 오이,
옥수수, 고추, 배추를 키워 도원동 깡시장에 내다 팔았다.
三一飯店을 운영하는 맹경당(孟慶堂, 83)어르신은 주안에서
태어났다. 주안초등학교 바로 앞이 어르신의 살던 집이었다.
맹 어르신의 부모님은 산둥에서 건너와 주안에서 농사를 지었다.
아버지, 어머니, 장남이었던 맹 어르신까지
가족이 힘을 합쳐 채소 농사를 지었다.
수확한 채소들은 마차에 실고 도원동 깡시장에 내다 팔았다.
7남매와 아버지, 어머니까지 아홉식구가 채소 농사로 먹고살았다.
3천평 밭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맹 어르신의 부모님은 노후에 대만으로 들어가
여동생의 집에서 살다 돌아가셨다.
맹 어르신은 선린동에 위치한 인천화교학교를 졸업했고
19세부터 중화요리에 뛰어들어 짜장면 배달을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배달통은 나무였다.
나무는 무거울 뿐 만 아니라 비가 오면 습기를 먹어 무게가 더
나가 힘에 부쳤지만 최고 요리사가 되겠다는 각오로 열심히 했다.
나무 배달통이 너무 무거워 쉬었다 가기도 했고, 짜장면을 주문한
집을 못 찾아 헤매다 면이 불어터져 버리는 일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화교 사장에게 혼쭐이 나기도 했다.
그는 화교 주방장에게 수타면 만드는 것을 배웠다.
중국집에서 일할 때는 한 달에 한번 쉬었다.
모처럼 쉬는 날에도 그는 주안에서 농사짓는
부모님을 도우러 인천에 왔다가곤 했다.
중국집에서 숙식하며 받은 월급은 아주 적었다.
맹 어르신은 서울의 중국집에서 중화요리를 착실히 배운 뒤
서울역 뒤에서 중국빵, 과자, 짜장면 장사를 했지만 잘 안됐다.
그런 이유로 40대에 인천으로 내려와 숭의동에 있던
중국집 주방장으로 들어갔다.
당시 월급이 2만5천원이었고 나중에 4만원으로 올려 받았다.
슴슴하고 단백한 맛에 단골들 많아 숭의교회 근처에서
삼일반점을 운영하다 용현동으로 옮겨 32년째 중국요리를
만들고 있다.
삼일반점은 맹 어르신의 손맛 불맛이 손님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면서 IMF전 까지만 해도 장사가 잘됐다.
가정집, 남구청, 시장상인들이 주 고객이었다.
삼일반점이 내세우는 요리는 팔보채, 탕수육, 짜장면이다.
짜장면 맛은 단연 압권이다.
탕수육도 다른 집과 달리 고구마 전분을 넣어 맛의 퀄리티를
높였고, 소스도 달지 않아 옛날 탕수육 맛을 느낄 수 있다.
삼일반점의 중화요리 맛은 자극적이지 않다.
음식의 간이 슴슴하고 단백해 먹으면 먹을수록 생각나는 맛이다.
인천의 관광지에서 먹던 중화요리와는 또 다른 풍미를
느낄 수 있다.
맹 어르신은 68세 때 주방 칼을 놓았다.
그 뒤로는 아들들이 일하는 것을 돕고 있다.
그의 큰아들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주방에서 칼과 웍을 잡았고
막내아들은 홀 일을 맡으며 가업을 잇고 있다.
그는 아들 넷에 딸 하나를 두었다.
맹 어르신은 아들에게 손맛을 넘겨준 뒤 바다낚시를 하거나
대만에 있는 자식들 집을 오가며 여유 있는 노년을 즐기고 있다.
젊은 날엔 온종일 주방에서 불과 씨름하며 살았다.
자식들 공부시키느라 저축은 엄두도 못 냈다.
맹 어르신이 가지고 있는 중화요리 비법은 이제 계속 전수되고
이어져야할 귀중한 화교 유산이다.
-글 이용남 i-View 편집위원, 사진 서은미 자유사진가-
첫댓글 몽고 반점이 아니고 삼일반점에 가서 맛있는 중국요리를 먹고 싶은데 동행할 친구 없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