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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장 16~17절/또 다른 보혜사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다락방에서 가진 마지막 시간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주제가 오늘 본문에 나온 보혜사 성령님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이 다락방 말씀에서 모두 5번에 걸쳐서 보혜사 성령님에 대하여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그 첫 번째 본문입니다.1. 또 다른 보혜사(another Paraclete)예수님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제일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은 보혜사가 무슨 의미인가 하는 것입니다.A. 보혜사(保惠師, paraclete): Helper, Comforter, Advocate, Counselor..본래, 개역성경의 보혜사란 단어의 한자 의미를 풀어보면, 지키고 편안하게 하고 돕는다는 의미의 ‘보호할 보(保)’와 은혜를 베푼다는 뜻의 ‘은혜 혜(惠)’ 그리고 선생님을 가리키는 ‘스승 사(師)’입니다. 그러니까 지키고 편안하게 해주고 도와줄 뿐 아니라,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선생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보혜사라는 단어는 어느 한 단어로는 그 의미가 충분하게 드러나지 않는 뜻이 풍성한 단어입니다. 영어성경들이 여러 단어로 다양하게 번역을 한 것을 볼 때 그 뜻이 얼마나 풍성한 단어인지를 실감하게 됩니다. Helper(ESV, NASB), Comforter(KJV), Advocate(NRSV), Counselor(NIV, NLT, RSV)..등 다양합니다. 변호자, 중재자, 위로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단어인 Paraclete 라고 번역을 한 영어 성경도 있는데 이것은 헬라어 parakletos 를 그대로 음역한 것입니다. 우리말로 해도, 기운을 복 돋아 주는 위로자, 상담자, 도움을 주는 분, 후원자, 조언자, 변호인, 동지, 노련한 친구 등 매우 다양합니다.당시 헬라세계에서 ‘파라클레토스’라는 헬라어는 법정에서 누군가를 돕기 위해서 대변하고 변호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가리켰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문적인 변호사를 가리키는 용어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증인으로서 말할 수도 있고 다양한 방식으로 변호를 해주는 사람입니다. 나중에 이 단어가 라틴어 성경으로 번역될 때 전문적 변호사를 가리키는 용어인 advocatus로 번역이 되었고 여기서 영어 advocate 이 파생된 것입니다. 이 단어가 17세기에 KJV의 영어로 번역될 때 위로자를 의미하는 Comforter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런데 원래 이 단어는 17세기에 오늘날의 의미로 위로자가 아니라, 함께 있어서 힘을 강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이란 뜻이었습니다. 물론 위로를 잘하면 그렇게 되겠지만, 정서적 차원보다 실제로 힘을 북돋아주는 면이 강조된 아주 실제적인 뜻을 전달했습니다. 상담자, Counselor 도 그저 치유를 위한 상담자 정도를 의미하기 보다는 법정적 상황에서 사람을 도와서 이런 저런 지시와 가르침을 주는 상담자를 가리키는 면이 더 많습니다. 조력자를 의미하는 Helper는 때로는 더 낮은 위치에서 도움을 주는 자 정도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그런 차원이 아니라, 도움을 베풀어주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변호사로서 피고에 대해서 적대적인 법정에서 피고를 철저하게 보호하고 변호하는 존재를 가리키는 advocate 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의미들이 이 ‘보혜사’라는 단어에 함축되어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런 점에서 보혜사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 대해서 적대적인 세상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호하고 변호하고 도와주시는 역할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보혜사라는 단어의 의미를 생각했습니다.B. ‘또 다른’(another): 보혜사 예수님과 보혜사 성령님이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또 다른 보혜사(another Paraclete)”라고 하실 때, ‘또 다른(another)’이란 말이 무슨 뜻인가 하는 것입니다. 헬라어에 ‘다른’을 의미하는 두 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allos 와 heteros 입니다. ‘allos’ 는 똑같은 종류, 성질을 가진 것 중에서 다른 하나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heteros’는 완전히 다른 종류, 다른 성질, 다른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또 다른 보혜사”라고 하실 때 allos parakletos 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예수님과 똑 같은 성질을 가지신 분인 성령님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또 다른 이름이 보혜사라고 알고 있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 보혜사는 두 분입니다. 원래의 보혜사는 예수님이시고, 또 다른 보혜사가 성령님입니다. 두 분이 다 보혜사십니다. 특별히 예수님이 보혜사다 하는 말은 요한일서에서 분명하게 가르쳐줍니다. 요한일서 2장 1절에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여기 대언자라는 단어가 바로 보혜사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의 보혜사가 되셔서, 성부 하나님께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를 위하여 대언해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원래의 보혜사이십니다. 성령님은 또 다른 보혜사, 예수님과 동일한, 똑같은 분이신 보혜사이십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제자들을 떠나셔야 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비록 제자들을 떠나시지만, 제자들을 영원히 떠나지 않으실 또 다른 보혜사, 예수님과 똑같은 일을 하시고 똑같이 제자들을 인도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가르쳐 주실 성령님을 보내어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염려하거나 불안해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제자들에게는 더욱 잘된 일이기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 예수님은 몸에 제한을 받으셨으나 성령님은 그런 제한이 없이 제자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가르쳐주시고,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신다고 하시는 것과는 달리, 성령님은 영원히 제자들과 함께 계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요16;7)말씀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떠나가셔야만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이 오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2.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아버지께 구하여 주시는 이유: 하나님 사랑을 부어주심(롬 5:5)그러면, 이제 우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전 제자들과 보내는 마지막 시간에 아버지께 성령님을 구하여 아버지께서 성령님을 보내주시게 하겠다고 말씀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화목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고 승천하시자 제일 먼저 하신 일이 예수님을 통하여 교회에 성령을 부어주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구속사역이 마치기 전에는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에게 주실 것이라고는 하나님의 진노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마치고 돌아가시자, 예수님을 인하여 그를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주고자 하시는 최고의 선물을 주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주심으로써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허락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로마서 5장 5절에서 바울 사도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롬 5:5).” 즉,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성령님을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신자들의 마음에 부어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성령님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들에게 어떻게 부어졌는지를 느끼고 깨닫게 되는 것이란 말씀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구하여 성령님을 제자들에게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첫 이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외에도 보혜사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많은 것들이 신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주어지고 있다는 점도 간과하지 않습니다.3. 진리의 영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보혜사를 제자들에게, 멀리는 신자와 교회에게 허락해주시는데 그분의 특성을 예수님은 17절에서 ‘진리의 영’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님의 주된 사역이 어떤 특징을 가지는지를 확연하게 보여줍니다. 믿는 자를 도우시고 위로하시고 힘을 더하시고 변호하시는데 어떻게 그렇게 하시는가 하면 곧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성령님께서는 기록된 말씀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그것을 수단으로 일하십니다. 성령님을 생각하면 무엇인가 기적이 일어나고 방언과 같은 은사들이 나타나는 식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큰 오해입니다.
예수님은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는 우리가 진리를 중심으로 일하시는 성령님의 역할을 간단하게 생각하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첫째는 성경을 쓸 때에 성경 기록자들에게 영감(inspiration)을 주어 하나님의 말씀을 오류 없이 쓰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둘째는 조명 (illumination)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지적인 조명을 주셔서 진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기름부음’이라고 표현했습니다(요일 2: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받은 결과로 진리를 알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을 가르칠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요일 2:27).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이 말은 목사나 교사가 필요 없다는 말씀이거나 거듭난 사람이 중생의 순간에 모든 영적 지식을 다 얻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아 어떤 인간 중재자가 없이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있게 적용하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라고 한 것은 오직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이 깨달아지고(조명)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성령님께서 그 말씀을 내게 적용하시고 사용하실 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뿐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마지막으로 진리를 밝히 드러냄으로써 결과적으로 거짓이 거짓으로 드러나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기에, 모든 거짓은 그 앞에서 드러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헌금을 속인 것을 사도 베드로는 그들이 “성령님을 속였다”고 말했습니다(행 5:3). 이런 사건 뿐 아니라, 성령님께서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역사하실 때, 모든 무분별과 무질서는 사라지고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과 원리가 세워지게 되는 법입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기록된 성경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4. 세상과 교회의 근본적 차이: 성령님이런 성령님을 아는가 모르는가는 결정적으로 세상과 교회, 세상 사람과 하나님의 사람을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차이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17절)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저를 아나니”라고 하십니다. 여기 사용된 세 개의 동사를 주목해 보십시오. ‘받다’, ‘보다’ 그리고 ‘알다’입니다. 이 단어들은 모두 사도 요한이 믿음을 설명하는데 사용하는 믿음에 관련된 단어들입니다. 세상은 믿음에 대해서는 조금의 관련도 맺을 수도 없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성령님을 압니다. 안다는 표현은 특히나 사도 요한에게 있어서 믿음과 동일한 의미를 전달하거나 혹은 믿음보다도 더 강한 의미를 전달하는 단어입니다. 신자들은 성령님을 압니다. 그들은 그분을 경험합니다. 어떻게 경험합니까?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대로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고, 그래서 그 말씀이 내 뼈와 관절을 찌르듯이 파고들며 그래서 회개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면, 그런 말씀의 체험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면 그는 성령님을 아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깨달음이 없고 말씀을 들어도 내 삶을 변화시키는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는 아무리 두드러진 은사가 나타나고 방언을 한다고 해도 성령님을 아는 자라고 하는 결정적인 증거를 가졌다고 할 수 없습니다. 결국 세상의 무능력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계시인 복음의 진리를 거부하는데 기인합니다.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못하는 한, 성령님도 인정하지 못합니다. 즉, 그리스도를 인정한다면 그는 성령님도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아니고서는 그가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교회의 차이, 비기독교인과 거듭난 기독교인의 차이는 그가 성경을 많이 아는가가 아닙니다. 그가 교회에서 봉사를 많이 하는가가 아닙니다. 그 결정적 차이는 그가 성령님을 아는가, 그 안에 성령님이 계시는 가 입니다.5. 성부와 성자께서 성령 안에서 신자 안에 오셔서 거하신다(23).우리가 오늘 성령님께 대한 이 짧은 본문에서 주목할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16절 하반절과 17절 하반절에.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이것을 보통 성령님의 내주(indwelling)라고 말합니다. 원래의 보혜사이신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을 떠나시지만,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님은 ‘영원토록’ 떠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령님의 내주하심은 조건적 내주하심이 아니라 영원한 내주하심입니다. 성령님의 내주하심은 신자의 거룩함의 유무나 정도에 의해서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신자 안에 내주하시는 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라는 탁월한 최고의 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졌고 하나님께서 그 제물을 기쁘게 받으셔서 완전히 만족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영원토록 신자들과 함께 계신다함은 모든 믿는 신자들의 궁극적 구원을 하나님께서 보장해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17절 하반절에,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했습니다. 먼저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라는 말은 교회 공동체 안에 임재하신다는 것을 가리키고, ‘너희 속에 계심’이라는 말은 개개인의 신자들 안에 내주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 ‘거하신다, 계신다’는 단어들은 단순히 장소나 거주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강한 인격적 관계를 반영하는 표현들입니다. 부부가 한 몸이 되었다고 할 때 그것은 영적, 정신적, 육체적 하나됨의 관계를 표현해주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신자 안에 내주하신다는 말씀은 단순히 성 삼위 하나님 가운데 제3위이신 성령님께서만 신자 안에 오셔서 내주하신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삼위일체의 신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대로 이제 제자들을 떠나가십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구하여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오시면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가 하면, 성자이신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께서 함께 성령님 안에서 우리 모든 신자들에게 오셔서 그 안에 거하신다는 엄청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2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여기서 ‘우리’가 누구입니까?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성부와 성자 하나님께서 성령 하나님 안에서 믿는 자에게 오셔서 그 안에 영원히 거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믿어지십니까? 여러분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분, 거듭난 모든 분들에게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그 안에 내주하시되, 영원히 떠나지 않으시고 내주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엄청나고도 영광스러운 사실을 아십니까?6. 능력인가, 인격인가?성령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프뉴마’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본래 중성 명사입니다. 우리말 성경으로는 그 차이를 구별할 수 없습니다마는, 예수님께서 성령님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헬라어 문법에 따르면 중성대명사 ‘그것’이라고 해야 하는데 의도적으로 남성대명사 ‘그분’ 혹은 ‘그’라고 말씀하십니다. 말하자면, 성령님은 그분이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한 번의 예외가 있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17절에서만 유일하게 중성 대명사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의도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처음에만 당연히 중성 명사를 중성 대명사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뒤부터는 일관되게 계속해서 남성 대명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임스 패커는 이것을 설명하기를, “요한이 헬라어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심오한 신학적 진리를 표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랬다”고 말합니다. 제가 왜 이것을 말하는가 하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을 인격이 아니라 하나의 신적 능력 정도로 이해하는 경향이 교회 안에도 농후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은 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성령님에 대해서 사람들이 아는 것은 오직 능력으로써만 입니다. 방언을 말하고, 기도를 능력있게 하는 것이며, 병을 고치거나 무엇인가 가시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들이 주로 성령님의 역사라고 이해를 하게 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그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성령님은 보혜사입니다. 하시는 일과 역할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역할을 동일하게 모든 신자들에게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우리가 차차 이 부분도 보다 상세하게 상고하겠지만,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도록 우리 옆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성령님 안에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오셔서 그 안에 거하십니다. 영원토록 떠나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말하자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마지막 날에 온 천하를 심판하실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께서 성령님 안에서, 성령님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는 제 안에 오셔서 거하신다는 말입니다.
성령님을 인격으로 아는가, 능력으로 아는가가 극명하게 만들어내는 차이가 무엇일까요? 매우 단순한 차이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성령님을 능력으로 아신다면, 여러분은 교만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런 현상이나 어떤 특별한 체험을 하면 할수록 여러분은 계속해서 점점 교만해져갈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성령님을 인격으로 아신다면, 여러분은 겸손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크고 거룩하신 성 삼위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와 같이 비천한 죄인에게 오셔서 내 안에 거처를 정하시고 영원히 떠나지 않으실 수가 있는지, 그 은혜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겸손해 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진짜 하나님을 만난 사람, 진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겸손해집니다. 그러나 가짜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교만해집니다. 진짜와 가짜의 차이는 이렇게 확연합니다. 그 차이는 다 영적인 모습으로 들어날지라도, 너무나 다른 길입니다. 하나는 생명의 길이고, 하나는 사망의 길입니다. 성령님을 성 삼위 하나님의 제3위이신 인격으로 아는 것은 이렇게 중요한 일입니다.7. 우리는 보혜사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15:5).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시면서 아버지께 구하여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어주시는 이유가 너무나 분명합니다. 우리는 보혜사의 은혜와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15장 15절에서 말씀합니다.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15:5b).” 보혜사 성령님이 아니면, 우리는 거듭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섬길 수도 없습니다.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이 아니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습니다. 또 다른 보혜사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떠나시면서 또 다른 보혜사를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이유입니다. 성령님이 없이, 제자들은 복음을 전할 수 없었을 것이고, 예수의 이름을 전하는 것을 금하고 위협하는 당국의 금령을 어길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성령님이 없이는 사도행전도 없고, 교회의 역사도 없고, 전도도 선교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약속하신 또 다른 보혜사를 필요로 합니다. 매일, 매 순간 우리는 성령님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가 말씀을 펼 때, 우리가 출근할 때, 우리가 잠을 잘 때, 우리가 일을 할 때, 우리의 모든 순간에 우리는 보혜사 성령님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 교회가 보혜사 성령님을 필요로 합니다. 보혜사의 도우심이 없이는 교회가 교회일 수 없습니다. 온갖 세상의 더러운 꼴들로 가득하고, 불필요하고 낙심하게 하고 교회를 허물어뜨리는 이야기들이 여러분의 모인 자리에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의 은혜, 도우심이 너무나 필요합니다. 이제 여러분이 그분을 구하는 것, 그분을 의뢰하는 것, 그분을 힘입어 살아가는 모든 삶의 태도가 요구됩니다. 여러분이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라면, 이제 여러분의 남은 생애에 그분을 모시고 그분과 함께 그분을 힘입어 살아가기를 원하시고 그분의 은혜를 더욱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만일 여러분의 영혼이 아직 거듭나지 않은 상태라면 이제 거듭나게 하시는 그분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십시오. 이 길 외에 다른 길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남은 인생 여정에 주께서 약속하신 또 다른 보혜사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그렇게 놀랍게 그 도우심을 받아 사시는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