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참 빠르고 무정하다. 계묘년(癸卯年) 신년을 맞은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새해 갑진년(甲辰年)을 맞이한다.
세월이 빠르고 덧없다는 말을 실감한다. 세월이 유수와 같다, 쏜살같다는 말을 체험하며 또 한 해를 맞이하는 것이다.
내 나이 90이다. 우리 나이로 90이 됐다가 작년, 만 나이 도입으로 한 살 빼더니 올 8월이면 만 나이 90이 된다.
‘짐승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라는 속담이 있다만 나는 아무것도 남길 것이 없다.
남길 것 없지만 자중자애(自重自愛)하고 싶다.
요즘 100세 시대라고 한다. 100세 시대라 하지만, 90이면 적지 아니 산 것이다. 앞으로 얼마의 시간이 남았는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이다. 예전에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 했다. 그때보다는 많이 산 편이 아닌가.
내 생각이다. 세상 사는 거 별거 아니더라. 잠깐 왔다 가는 것이다. 시끌벅적 큰 재상(宰相)이나 할 것처럼 야단법석을 치며
살았다. 자고로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 했다. 누구나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것 아닌가.
세상 살면서 이것저것 인연이 생기게 마련이다. 가족관계는 물론 사회관계에서 필연이든 우연이든 인연을 갖게 된다.
불가(佛家)에선 옷깃만 스쳐도 삼생(三生) 인연이라 했다. 우리가 한평생 살면서 생각보다 그리 많은 인연을 갖지 못한다.
지상(地上) 수십억 인구 가운데 알고 지내는 지인(知人)이 얼마나 되겠는가. 조족지혈(鳥足之血)이며 묘창해지일속(渺滄海之一粟)과 같다 아니 할 수 없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의 인연이 귀중하고 관계가 소중하며 자랑스러운 것 아닌가.
인연에 대하여 만해(萬海) 한용운의 ‘어우렁 더우렁’을 본다. ‘와서는 가고 입고는 벗고 잡으면 놓아야 할 윤회의 소풍 길에
우린 어이타 인연 되었을꼬 봄날의 영화 꿈인 듯 접고 너도 가고 나도 가야 할 그 뻔한 길 왜 왔나 싶어도, 그래도 아니 왔다면
후회 했겠지 노다지처럼 널린 사랑 때문에 웃고 가시처럼 주렁한 미움 때문에 울어도 그래도 그 소풍 아니면 우리 어이 인연
맺어졌으랴, 한 세상 살다 갈 소풍 길 원 없이 울고 웃다가 말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단 말 빈말 안 되게 어우렁 더우렁
그렇게 살다 가보자.’
한편 살면서 서로 정을 주고받았다.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대차관계(貸借關係)가 생긴다. 나도 정을 많이 받고 신세를 많이 졌다. 이제 신세 진 것을 갚아야 하는데 시간이 촉박하다. 갚을 수가 없는 듯하다. 다만. 감사하다는 말로 빚을 갚고 가는 수밖에 없다.
본 카페 전임 회장 백문현씨는 ‘인연을 셈하며’에서 ‘돌아보니 소중한 인연입니다. 인생 한마당에서 서로 정을 사고팔았는데
장이 파하여 수지를 셈해 봅니다. 나 말고 모두 밑진 장사가 아니었나 염려됩니다. 그동안 진 빚을 갚고 가야 하는데 밑져서도
남겨서도 안 되는데 이젠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감사하다는, 즐거웠다는 말로 빚을 대신 갚고 갑니다’ 이렇게 적었다.
나도 감사하다는 말로 빚을 갚고 가는 수밖에 없다.
어느 사이 이렇게 나이를 먹었는지... 어머니 치마자락 매달려 떼쓰며 치근거리던 일이 어제 일 같다. 아버지 손 잡고 총총
걸음으로 초등학교 입학하러 가던 일이 엊그제 일 같다. 내가 벌써 90 나이가 되다니... 겁 없이 달려온 세월이다.
화살같이 스치어 간 세월이다. 어느 장사인들 이 세월 이기겠는가.
인생 구십이면 무심(無心)해야 할 나이다. 아옹다옹할 것이 없다. 마음 편히 사는 것이 제일이다.
묵연스님의 ‘인생은 다 바람 같은 거야’을 새겨본다. ‘다 바람 같은 거야 뭘 그렇게 고민 하는 거니? 만남의 기쁨이건 이별의
슬픔이건 다 한순간이야, 사랑이 아무리 깊어도 산들바람이고 오해가 아무리 커도 비바람이야, 외로움이 아무리 지독해도
눈보라일 뿐이야, 폭풍이 아무리 세도 지난 뒤엔 고요하듯 아무리 지극한 사연도 지난 뒤엔 쓸쓸한 바람만 맴돌지.
다 바람이야 이 세상 온 것도 바람처럼 온 것이고 이 육신을 버리는 것도 바람처럼 사라지는 거야, 다 바람이야 바람처럼
살다가는 게 좋아’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죽을 때 빈손으로 가는 것이다.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것이다.
나는 가진 것도 없지만, 재산이 자꾸 줄어들 때 내게 여생(餘生)도 줄고 있다며 마음을 다잡는다. 돈이란 너무 없으면 불편하고
너무 집착하면 노예가 된다. 돈을 모으는 이유는 돈의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인데 많은 돈을 가지고 불행한 사람이 허다하다.
나는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남은 날을 보내고자 한다.
그런데 무병하고 건장하던 몸이 이곳저곳 아프기 시작한다. 적신호(赤信號)가 오는 것이다. 다만 죽을 때 너무 아프지 말고
고통 적게 그리고 식구들 고생시키지 말고 웰다잉(well dying) 되기를 희구(希求)한다. 나는 이 간절한 희망 사항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첫댓글 김윤권선생님! 이 글을 읽고 마음이 먹먹합니다. 저도 여든을 눈앞에 두고 있거든요,
선생님 글에 깊은 공감이 가네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있지요, 마음입니다.
그래 저는 올해 목표를 여행 산책 독서로 정하고 실천하려고 합니다. 그게 젊게 사는
비결인 것 같아요. 지난 해까지 등산이었는데 올해는 산책으로 바뀌고 말았어요.
세월을 이길 장사는 없으니까요.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
안규수선생님, 오랜만에 뵈오니 반갑습니다. 안녕하시지요.
세월 이길 장사 없지요. 세월은 왜 또 이렇게 빨리 갑니까.
선생님 등산에서 산책으로 바뀌었다는 말씀에 세월유수함을 새삼 느낍니다.
저도 등산을 좋아했습니다. 이젠 먼 산만 바라보고 있지요.
세월 탓하면 뭐 합니까. 선생님 건강 잘 챙기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