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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전청솔산악회 원문보기 글쓴이: 킬리만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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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봉화군 물야면 오전약수
선달산(先達山·1236m)은 소백산과 태백산을 백두대간으로 연결시키며
가운데 솟아있어 대간을 조망하기에 더 없는 전망대다.
선달산 정상에 서면 왼쪽 날개는 갈곶산(966m), 마구령, 고치령을 지나
소백산(1439.5m)에서 크게 날갯짓하고, 오른쪽 날개는 박달령, 옥돌봉
(1242m), 도래기재, 구룡산(1345.7m)을 지나 태백산(1560.6m)에서
어깻짓한다.
어제의 구인사 산행에 이어 연이은 장거리 여행이 피곤함을 가져온다.
원래 오늘 산행예정은 박달령에서 시작해서 서쪽으로 선달산, 갈곶산,
봉황산을 거쳐 부석사로 내려오는 코스.
오늘은 산행보다 부석사를 좀더 꼼꼼히 보기로 작정한다.
다른 산객들은 오전약수에 내려 박달령으로 산행을 시작한다.
나 이외에 여성회원 2명은 오전약수 물맛만 보고 다시 버스에 올라탄다.
▲주말인데도 부석사 주차장은 한가하다.
원추리님과 점심을 같이한다.
원추리님은 매일 혼자 먹는 점심이었는데, 모처럼 겸상할 사람이 있어
좋은 기분인것 같다.
나도 소주 한병과 맥주 한병을 섞어 마신다.
약간의 취기속에 슬슬 부석사 구경에 나선다.
아! 그런데 어쩔쓰까....
부처님을 뵈러 가야하는데 점심때 肉食을 하고 말았으니...
▲ 일주문 직전의 호밀밭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소백산,봉황산 기슭에 자리한 부석사(浮石寺)는 문화재가 많이 있는
우리나라 5대 명찰이다.
사시사철 여행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사찰 중의 하나다.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해동 화엄종을 개종한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창건한, 화엄종의 발원지이다.
구체적으로 자료를 찾아보면 백제, 고구려와 싸워서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화엄종을 널리 펴서 통일 후의 민심을 다독거리려 한다.
의상대사에게 명하여 동해쪽에는 양양에 낙산사를 세우고 지리산 구례
옛 백제 땅에는 화엄사를 중건하게 하는데, 고구려의 국경지였던 태백산과
소백산이 이어지는 바로 이곳에 부석사 창건을 명했다는 것이다.
부석사는 소개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아름다움과 무한한
깊이를 품고 있다.
부석사를 대표하는 것은 한국 건축의 고전 (古典)으로 꼽히는 대웅전격인
무량수전과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전경 등을 손꼽는다.
주차장에서 500m 정도를 걸으면 매표소와 일주문을 지나면서 은행나무길이
펼쳐 진다.
우리나라에는 곳곳에 큰 은행나무와 은행나무길이 많이 있지만, 부석사
은행나무길 처럼 작지만 운치있는 길은 찾기 힘들다.
▲ 부석사 입구의 은행나무길에서 산나물을 파는 촌노
길의 폭이 은행나무와 잘 어울리는 넓이이다.
적당히 경사진 흙길이다.
그리고 뒤에 무량수전이 기다리고 있다는 기대감 등이 어우러져,
이 길이 마치 극락의 진입로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사실 부석사의 은행나무들은 그렇게 큰 편이 아니다.
중간중간 다른 나무도 섞여 있어 울창한 은행나무길을 기대한 초행자는 실망을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 부석사의 보이지 않는
매력이다.
▲ 부석사 입구의 은행나무길
은행나무 뒤로는 작은 사과 과수원들이 있어 가을이면 사과가 주렁주렁
열린 모습도 볼 수 있다고 한다.
부석사는 경사진 터에 자리잡은 사찰이라, 매표소를 지나면 계속 오르막길과
계단을 올라야 한다. 그리 경사도가 심하지는 않다.
부석사에 오를 때는 가능한 한 아주 천천히 걸을 것을 권하고 싶다.
주변을 모두 둘러보며 마음을 편안히 하여 보면 부석사의 정취를 가슴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보수 공사중인 부석사 일주문소백산 부석사가 아니라 “태백산 부석사”란 편액이 걸린 일주문.
봉황산은 소백산보다는 태백산 자락이라고 볼수 있다.
모든 사찰의 일주문엔 왜 문이 없을까?
도둑을 막기 위한 문이 아니라, 번잡한 세상과 불법의 세계를 나누는
상징적인 문이기 때문이다.
‘일주(一柱)’ 문이지만 기둥 수는 대개 2개.
부산 범어사 일주문은 기둥이 4개다.
옆에서 볼 때 기둥이 한줄로 보인다고 해서 ‘일주(一柱)’문이다.
비록 불자는 아니지만, 사찰의 일주문을 들 때면 세속의 번뇌를 씻고
일심으로 부처님의 세계를 접해보려고 한다.
그러나 언제나 마음은 속세를 헤어나지 못하고 번뇌 또한 벗어 던지지
못하는 것은 진정한 신자가 아니기 때문인가.
▲ 부석사 입구의 중수 기념탑과 당간지주
은행나무길을 따라 오르다 천왕문 못미쳐 왼쪽으로 부석사 중수기념탑과
당간지주가 있는데, 당간지주는 보물 제255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개의 당간지주들이 그렇듯이 꾸밈을 두지 않은 소박한 모습을 한
두 개의 돌기둥이 서로 마주보고 하늘을 향해 높다랗게 뻗어있다.
크기를 미루어 그 옛날 이 기둥 사이에 서 있었을 당간의 규모가
어떠했는지를 능히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부석사의 사세에 걸 맞는 수십 미터 높이의 당간에는 붉은 비단에
금빛으로 수놓아진 부처님 말씀이나 절의 여러 행사를 알리는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중생들은 멀리서 이 깃발을 보고 기도일에 맞춰 절을 찾고
길을 가는 나그네는 그 깃발을 보고 저곳에 절이 있음에 경배하고
마음의 안식을 얻었으리라.
부석사에서 이 돌만큼 온전히 천년의 나이를 먹은 유물이 어디 있을까?
어느 이름모를 석공의 손에 깨어지고 다듬어진 처음 모습 그대로 천년의
세월을 묵묵히 품어 안으며 변함없이 한자리에 서 있었겠지.
처음부터 그 흔한 장식하나 걸치지 않고 태어났기에 닳아 없어져
아파할 것 없고 애초부터 둘이 하나로 태어났기에 외롭지도 않았겠지.
그리고 바람에 휘청거릴 쇠장대를 숙명처럼 꼭 붙잡고 서 있었겠지.
▲은행나무길의 끝에 천왕문이 있다
일주문 지나서 천왕문
9 단 축대와 9 품 만다라,
백팔번뇌를 씻기 위해 108 계단을 오른다.
수미산 환희를 맛 보기위하여...
당간 지주를 지나고 은행나무 길이 끝나는 즈음에 가파른 돌 계단위에
서 있는 천왕문을 만난다.
천왕문의 무서운 천왕들은 누구일까?
천왕은 동·서·남·북 천지사방의 수호신.
악한 것을 막고 불법을 보호한다. 손에 든 것으로 방위를 구분한다.
칼을 든 지국천왕은 동쪽, 용과 여의주를 든 증장천왕은 남쪽,
탑과 삼지창을 든 광목천왕은 서쪽, 비파를 든 다문천왕은 북쪽을
지킨다. 천왕문을 지나 금강문이 있는 절도 있다.
절을 지키는 금강역사(力士) 2명이 있는데, 오른쪽은 입을 벌리고,
왼쪽은 입을 다물고 있다.
사천왕문을 나서자 석단과 계단이 줄을 서있다.
비로서 구품왕생(九品往生)의 첫번째 길로 접어든다.
한 발 한 발 부석사의 극락, 무량수전으로 오르는 첫 돌 계단인 셈이다
여기서부터 시작 된 108개의 계단이 다하는 곳에 무량수전이 있을 것이다.
부석은 석단과 계단의 절이다.
세월이 차곡 차곡 쌓여있는 것은 비단 무량수전, 안양루, 범종루, 조사당등의
건축물이나 석탑, 석등같은 유적뿐만이 아니다.
어쩌면 시간의 무게를 고스란이 받고서도 오늘까지 꿋꿋하게 변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석단과 계단이 아닐까 싶다.
이 석단과 계단이 숨겨놓은 비밀을 찾아보는 것이 부석사의 탐방의 색다른
즐거움이다.
세상사람들은 석단을 놓고 논쟁을 한다.
모두 아홉단이다, 아니다 열단이다.
갯수로만 세어보면 12단까지 셀수 있다고 한다.
누구는 정토신앙(淨土信仰)의 체계에 따라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삼고,
삼배구품(三輩九品)의 교리에 근거하여 전체 영역을 9개의 단으로 구성
했다고 주장하고,
누구는 화엄경 입법계품의 십지론을 근거로 10개의 단으로 구성했다고
주장을 한다.
바람처럼 들렸다 가는 사람에겐 그게 무슨 중요한 일일까?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보낸다 하면서도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선
석축의 숫자를 자꾸 세어본다.
어디까지가 상품상생, 중품중생, 하품하생인지...
극락정토로 가는 길은 하품하생, 중품중생, 상품상생의 아홉단계 성품과
행실로 나누고 수행을 통해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 오르면 극락정토에
다다를 수 있다 한다.
천왕문 에서부터 하품하생이 시작되어, 범종루는 중품중생, 안양루가
상품상생이고 무량수전이 바로 극락정토의 세상이란다.
그러니 누구라도 계단을 오르는 것 만으로 극락정토에 세상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9품 만다라의 비밀을 깨치고 아홉의 단을 오르는 것만으로 그리 될 턱은
없지만 이순간 만큼은 세상과 부딪히며 생긴 응어리를 털어내고,
스스로 찾아 짊어진 짐을 내려놓고 사천왕문에서 안양루까지 아홉의 석단을
오른다. 혹 누가 알까 오르는 것만으로 모난 마음이 조금은 둥그러 질지..
▲부석사의 전경이 보인다.
천왕문을 나서 한 계단을 더 오르니 비로소 한 눈에 들어온다.
양쪽에 선 단아한 3층 석탑이 천 년의 미소로 반긴다.
낮은 산등성이를 따라 아기자기 하게 자리한 전각들, 그리고 저 멀리
언덕배기 안양루 너머로 무량수전이 보인다.
계단을 밟아 석단에 오르고 다시 계단을 따라 또 다른 석단에 이른다.
어떤 이는 이 석단들이 9품 만다라를 상징하여 아홉 단으로 조성됐다고도
하고, 또 누구는 화엄경의 십지론을 근거로 10개의 단으로 구성되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것은 아름다운 부석사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해 신비를 보태고자
하는 인간의 욕심인 것을.
계단에도 숨겨진 비밀이 있다.
사천문에서 안양루 까지 모두 108개의 계단.
계단을 자세히 살펴 보면 계단의 시작 부분의 가로 길이와 끝나는 부분의
가로 길이가 다르게 보인다. 계단의 끝나는 부분이 서서히 좁아지는 구조다.
자연스럽게 투시효과를 강조하는 기법이다.
이런 기법은 사람을 끌어 들이는 힘이 생긴다 한다.
뿐만 아니라 내려 갈 때는 훨씬 더 안정적이다.
▲
천왕문을 지나면 범종각이 보인다.부석사 경내의 다른 건물들처럼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고, 있어야 할 제자리에
단아하게 자리한 범종각이다.
범종각의 나무기둥 사이를 통과하여 한 층을 더 올라 떨어지는 약수에 목을
축이며 바라 본 부석사 건물들에는 유달리 더 옛날 냄새가 난다.
양쪽으로 앉아 있는 취현암, 의향각 그리고 작은 전각들이 그렇고 무량수전
으로 인도하는 범종각과 안양루가 더욱 그렇다. 왜일까?
그 알 수 없는 느낌은 어쩌면 아주 오랜 서원에 온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옛날 번성한 어느 가문의 집성촌에 온 것도 같다.
▲범종각으로 곧장 지나기 전에 양쪽의 석탑이 있다.
범종각 앞 뜰에 두개의 석탑이 의젓하다.
그리 빼어나지도 크지도 않고 단아한 모습이다.
동서의 두개의 탑은 서로 비슷한 모습을 지녔다.
쌍둥이 탑이라 해도 될 법한데, 크기나 모양이 조금은 다르다.
▲ 범종각 오른쪽의 유물전시관 . 숨을 돌리기에 적당한 곳이다.
▲ 범종각 밑을 지나면 안양루(安養樓)가 나온다.
부석사는 산속에 처음 건물을 배치할 때 부터 4 단계의 구조를 가지고
앉혔다고 한다.
이를 어떤이들은 기승전결의 구도로 풀이한다.
부석사를 여행하고 나면 그 의미를 금방 이해하게 되는데,
우선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의 공간을 기 (起) 라고 하면
대 석단 위 범종각까지는 승 (承), 범종각과 안양문까지의 마당이
전 (轉) 의 공간이 되고, 안양루와 무량수전은 가람의 끝점,
즉 결 (結) 이라 할 수 있다는 해석이다.
▲안양문 1층... 안양루 2층이다.
이 건물에는 위쪽과 아래쪽에 달린 편액이 서로 다르다.
난간 아랫부분에 걸린 편액은 '안양문'이라 되어 있고 위층 마당 쪽에는
'안양루'라고 씌어 있다.
하나의 건물에 누각과 문이라는 2중의 기능을 부여한 것이다.
'안양'은 극락이므로 안양문은 극락 세계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한다.
따라서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지나면 바로 극락인 무량수전이 위치한
구조로 되어있는 것이다.
다시 계단을 오르고 곧이어 피안으로 드는 입구인 안양문을 통과한다.
또 한 계단을 오른다.
먼저 극락세계를 구경하고 내려오는 이와 부딪힐까 비껴선다.
누각 마루에 닿을까 머리 조아리며 마지막 계단을 오르니 거기 무량수전이
있다.
안양루 밑의 좁은 돌계단을 올라야 비로서 무량수전에 닿게 되는데,
대가람의 무량수전에 닿는 마지막 길을 이렇듯 좁은 누대 밑을 통하게
했다는 것이 더없이 절묘하다.
▲안양루 편액에 김삿갓 시가 적혀 있다고 하는데 들어가 볼수 없다.
먼 발치에서 김삿갓이 평생의 방랑을 통해 깨달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또 어찌하여 그의 詩가 이곳 부석사 안양루에 걸리게 되었을까 생각해본다.
무량수전을 바라본다.
천하의 역마꾼 김삿갓의 발목을 붙들어매고도 남을 만한 이유를 이곳 부석사와
주변의 풍광에서 발견한다.
▲안양루를 지나면 국보 제18호인 무량수전(無量壽殿)이다.
결코 현란하지 않으면서도 보는 이의 마음을 압도하는 그 무게에 감동
받는다. 뒤돌아서니 덩치 큰 소백산과 그 자락에 펼쳐진 영주와
봉화의 풍경이 숨통을 트이게 한다.
사람마다 이 위대한 건축물을 바라보고 느끼는 감동도 제각각 이겠지만
내게 무량수전은 맨 먼저 노란색으로 다가왔다.
단을 한 단 한 단 오르면서 올려다 본 그곳엔 반쯤 감추어진 모습의
무량수전이 검은 기와지붕 밑으로 노란색 벽체만을 드러낸 채 높직이
서 있었다.
안양문의 마지막 계단 위로 잡힐 듯 다가오는 것도 노랗게 채색된 흙벽의
단 편이었다.
그리고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을 때 맨 먼저 처마 밑 공포를 따라 띠를
두른 듯 단청 되어진 노란 흙벽의 강열하고 신비로운 색감은
내가 기억하는 무량수전의 첫 느낌이 되었다.
▲고려공민왕이 피난와서 쓴 무량수전 현판
불가의 건물들은 워낙 소실과 중창을 거듭해 건물의 연령을
어떤 기준으로 산정하는지를 정확히 몰라 두 건물이 얼마나 건립연도의
차이가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봉정사의 극락전은 규모나 형태면에서는
무량수전을 따르지 못한다.
이 무량수전은 우리나라 팔작지붕의 시원(始原)으로 알려져 있고,
주심포 기둥이 절묘한 배흘림기둥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 무량수전은 얼마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알려졌는데, 안동 봉정사의 극락전이 더 오래된 목조건물임이 밝혀져
두 번째로 오래된 목조건물이 되었다.
무량수전은 정말 아름답다.
배흘림기둥의 높이와 굵기의 비례를 말하지 않아도 주심포니 팔작지붕이니
전문 건축용어를 동원하지 않아도 무량수전은 눈이 시리도록 감동적이다.
그래서 무량수전 앞에서는 차라리 침묵해야 할 것이다.
그 아름다움을 애써 표현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어떤 수식어도, 어떤 미사여구도 한낱 언어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감동으로 들뜬 마음 추스르며 옷깃 여미고 아미타 부처님이 계신다는 무량수전
안으로 들어갔다.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의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이 보존해 온 목조 건축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 된 건물임이 틀림없다.
(중략. 최순우,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78 쪽 .학고재)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주불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있는데, 찰흙으로
빚은 소조상이다.
앉아 있는 좌상이라 흔히 소조여래좌상이라 불린다.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으므로 무량수불로도
불리는데 무량수라는 말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문을 열고 보면 옆으로 돌아 앉아있다.
어느 사찰을 가 봐도 문을 열면 정면으로 보이는 것이 관례인데 이 곳은
부처님의 옆모습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불상은 왜 법당 정면이 아니라 왼쪽 벽에 앉아 있을까?
무량수전이 서쪽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불의 법당이기 때문이다
법당 안은 저마다 소망 한가지 씩 안고 와 지성으로 기도하는 여행객과
참배객들로 몇몇이 앉아있다.
정좌하고 앉아 염주를 돌리며 독경하는 사람, 절을 하는 사람, 향불 피워
올리며 두 손을 모으는 사람...
그리고 경을 외는 스님들...
나는 제일 뒤 구석에 앉아 천천히 불당안을 살펴본다.
▲이 부석사 소조여래좌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되고 규모가 큰 소조
불상으로서 높이가 2.78미터, 머리가 0.91미터, 어깨 폭이 2.06미터이며,
현재 국보 제45호로 지정되어 있다.
아미타여래는 홀로 동쪽으로 앉아 왼손은 가부좌한 발 위에 놓고 오른 손은
땅의 기를 누르고 있는 항마촉지인이다.
▲무량수전 (국보제18호)보다 국보 등록에 한번호 빠른 석등(국보제17호)
무량수전 앞에 석등이 하나 있는데, 이 석등도 국보 제17호로 지정된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석등이다. 석등은 바닥의 용석 끝에 자리잡고 있다.
석등의 틈으로 무량수전 현판 글씨를 볼 수 있다.
▲무량수전 오른쪽에서 바라본 안양루
그 옛날 의상을 사랑했던 선묘의 넋이 바위를 들어올려 부석사라 했다지만
떠 있는 건 선묘의 돌만이 아니더라.
안양루!
어느 목수는 나무를 깎아 기둥을 세워 문을 만들고 누각을 들어 올려
허공중에 띄어 놓았더라.
그 안양루 너머로 저 멀리 태백산맥의 크고 작은 연봉들이 겹쳐지기를
수백 겹, 너울대기를 수백 번 멀어지기를 수 백리...
어쩌면 고요한 듯, 어쩌면 장엄한 듯...
그랬구나, 그래서 구부러지고 휘어진 아름드리 소나무들도 없고,
절을 휘감아 장쾌하게 흐르는 계곡도 없는 봉황산 기슭 구릉지에
터를 잡아 돌을 놓아 축을 쌓고 단과 단을 만들어 계단을 이어가며
이곳까지 올라와 안양루 하늘에 띄어 세우고
무량수전을 앉혀 무변 광대한 저 태백과 소백의 준령들을 품어 안으며
관조하고 있구나.
그래서 정녕 이곳이 아미타 부처님의 처소 일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이 석탑도 보물 제249호이다.
석탑이 무량수전 앞에 있지 않고 무량수전 건물 옆에 위치해 있다.
부처님의 시선 방향에 맞추어져 석탑의 위치를 결정하는가 보다.
그 깊은 사연이야 잘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던지간에 문외한의 눈에는
그것도 재미있게 보인다
그러나 그런 내용보다도 무량수전 오른쪽의 삼층석탑 옆에서 무량수전을
바라보면 그저 '잘 생겼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건물이다.
▲ 무량수전을 뒤로 하고 삼층석탑 옆으로 난 길을 따라 5분쯤
오르면 조사당이 나온다.
▲고려 시대의 건물로 국보 제19호이며, 조사당 안을 보면 삼면으로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이 벽화 역시 국보 제46호이다.
그러나 진짜 그림은 떼어내 범종각 아래에 있는 유물전시관에 전시되어 있고,
조사당에 있는 그림은 모사라고 한다.
나무가 '선비화'라 불리는 나무이다.
속설에 의하면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가 지팡이를 꽂아놓은 것이 나무가
되었다 한다.
이 선비화의 잎을 달여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고 한다.
이런 속설 탓에 사람들이 마구 잎을 따가 유리와 철망으로 막아 놓았는데,
너무 철저히 막아 잘 보이지 않는다.
정식 학명은 선비화가 아니고 골담초라 하는데, 크기는 그리 크지 않다.
지팡이가 자랐다는 전설을 안은 선비화가 철책 안에서 보호되고 있었다.
역사는 가끔 이러한 비과학적인 신비함을 앞에다 내세운다.
▲부석사의 이름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부석(浮石)이란 이름은 우리말로 '뜬 돌'이란 뜻이다.
돌이 떠 있다라는 말인데, 실제로 무량수전의 왼쪽 뒤로 부석이 있다.
돌이 실제로 떠 있을 수는 없고 아래 돌과 틈이 벌어져 있다.
이 부석에 대해 말하려면 우선 선묘라는 여인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선묘는 중국 여인으로 의상대사가 중국에 있을 때 의상대사를 몹시
사모했다 한다. 그러다 의상대사가 고국인 신라로 돌아오자 바다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그 뒤 의상대사가 부석사 자리에 절을 지을 때, 이 자리를 도적들이
차지하고 있어 애를 태웠는데, 죽은 선묘 아가씨가 돌을 띄우는 영험을
보여 도둑들이 도망가다 이 자리에 부석사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해서 절의 이름도 부석사가 되었고, 아직도 무량수전
오른쪽 뒤편에 선묘각이 있고, 선묘각 안에 선묘의 초상화가 있으며,
조사당 내에도 선묘의 초상화가 있다.
부석사를 창건한 신라의 고승 의상과 그를 사랑한 중국여인 선묘와의
이야기는 무량수전에 이은 또 다른 한편의 문화이다.
▲의상과 선묘의 초상 그림과 무량수전 뒷편 선묘각
1400 여년을 기다린 선묘의 사랑 아이콘이다.
몇년전 KBS 역사스페셜에서 이이야기를 취재하며 적외선 단층 촬영한
결과 설화로만 내려오던 것들이 사실로 밝혀짐으로써 한층 더 우리를
애틋하게 만든 사랑의 이야기가 되었다.
▲ 부석사의 해우소
이제 천천히 산을 내려 올 준비를 한다.
몇시간 더 있으면 굽이굽이 넘실대는 저 봉우리 너머로 해가 지고 노을이
온 천지를 물들이겠지만 오늘은 여기서 작별을 하기로 하자.
저녁 예불을 알리는 목어소리, 법고소리 이 고즈넉한 산사에 울려 퍼져
가슴속으로 내리겠지만 그 장엄한 풍경들은 훗날을 위해 남겨 두기로 하자.
가녀린 석등 창살에 어둠이 내리고 안양루 추녀끝에 걸린 붉은 해 보고파
다시 무량수전을 오를 테니까.
가슴을 파고드는 북소리 듣고파 다시 부석사를 찾을 테니까.
누각 머리에 이고 안양문을 나와 범종각을 지나니 여윈 기둥 그림자
길게 누워 속세로 돌아가는 나그네 발걸음을 붙잡는다.
아름다운 부석사여 다시 볼 날 기약한다..
해우소(解優所)에 갔더니 벽에 걸린 문구가 절묘하다.
오늘 얻은 한가지 화두이다.
아직 털어버리지 못한 세간의 응어리와 돌덩이 같이 굳어진 탐진치의
욕심을 내려 놓으라는 뜻일 것이다.
"버리고 또 버리니 이 또한 기쁨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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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에게 / 황청원
한 밤내 눈 떠있던 내 육신
불을 끄고 한벌 옷도 없는
내 사랑 적시려는가
안개 같은 그대 흐르는 꿈을 닫고
휘파람으로 이내 마음 적시려는가
사랑하며 산다는 일이
지상에 마지막 지는 꽃일 수 없으니.....
< 노랫말: 황청원, 연주; 슬기둥 / 봄비에게 >
국악그룹 슬기둥의 대금과 가야금... 연주가 그리운 날 밤입니다.
"사랑하며 산다는 일이 지상에 마지막 지는 꽃일 수 없으니"
어차피 사는 일 빈몸되어 가는 거니 슬퍼할 일 아니라 웃을 일이라고,,,
사람 사는게 다 혼자이듯 외로운 것이니 울 일이 아니고 웃을 일이라며
# 에필로그
부석사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집이다.
그러나 아름답다는 형용사로는 부석사의 장쾌함을 담아내지 못하며,
장쾌하다는 표현으로는 정연한 자태를 나타내지 못한다.
부석사는, 오직 한마디, 위대한 건축이라고 부를 때만 그 온당한 가치를
받아낼 수 있다. (중략)
한낱 여행객, 답사객의 눈이라도 풍요로운 자연의 서정과 빈틈없는 인공의
질서를 실수 없이 읽어내고,
무량수전 안양루에 올라 멀어져가는 태백산맥을 바라보면 소스라치는
기쁨과 놀라운 감동을 온몸으로 느끼게 될 것이니 부석사는 정녕 위대한
건축이요, 지루한 장마 끝에 활짝 갠 맑은 하늘과 밝은 햇살 같을 뿐이다.
(중략.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2 75-76 쪽. 창작과비평사)
유홍준 교수는 이 부석사를 서산 개심사, 강진 무위사, 부안 내소사,
청도 운문사와 더불어 남한의 5 대 명찰로 규정하였다.
부석사는 글로 설명하기에 벅찬 사찰이다.
꼭 시간을 내서 가보기를. 절대 후회하지는 않는다.
사시사철 모두 좋지만 그래도 가을 부석사가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노란 은행잎과 단풍, 그리고 사과가 주렁주렁 열린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부석사의 입장료는 어른 1200원, 중고생 800원, 어린이는 550원이며,
주차료가 소형 3000원, 대형 6000원이다.
부석사(浮石寺)는?
부석사는 안동과 가까운 영주에 위치하고 있다.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 해동 화엄종의 종조이신 의상국사께서 창건한 화엄종의 수사찰
이다. 1916년 해체 보수시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고려 초기에 무량수전 등을 중창하였
으나. 공민왕 7년 적의 병화를 당하여 우왕 2년 무량수전이 재건되고, 우왕 3년 조사당이
재건되었다.
특히 무량수전은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 중 하나이며 경내에는 신라시대 유물인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제17호),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20호), 삼층석탑(보물 제249호),
당간지주(보물 제225호) 등이 있고 고려시대 유물인 무량수전(국보 제18호), 조사당
(국보 제19호),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 조사당 벽화(국보 제46후), 고려 각판
(보물 제735호), 원융국사비 및 2기의 삼층석탑 등이 있다.
당간지주
당간은 절에서 불교 의식이 있을 때 佛 · 菩薩의 공덕을 기리거나 마귀를 물리칠 목적으로
달았던 ‘당’이라는 깃발의 깃대를 말하며, 이 깃대를 고정 시켜 주기 위해 세우는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기동은 통일신라시대 당간지주로 부석사 입구에 위치해 있으며 높이는 428m이다.
양 기둥 꼭대기에는 내면 상단에서 외면으로 내려오면서 호선을 그리며 외부로 깎여졌는데
1단의 굴곡을 두었다. 이 굴곡부에서 앞뒷면의 중앙에 종선문이 내려오고 정상부에서
2단의 아름다운 원호가 경사진 형태로 조각되었고, 측면은 3조의 종선문이 있다.
당간지주 사이에는 연꽃잎을 장식한 원형의 간대석이 놓여져 있다.
당간지주 사이에는 연꽃잎을 장식한 원형의 간대석이 놓여져 있다.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아름다우며, 간걸하고 단아한 수법으로 보아 부석사 창건과 함께
7세기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은 깃발 없이 한 쌍의 돌기둥만이 남아있지만 남아있는 돌기둥의 크기로 보아
추측할 수 있었다.
3층 석탑
이 탑은 통일신라 후기 3층 석탑으로 쌍탑이다. 높이는 동탑이 360cm, 서탑은 377cm
으로 두 탑의 크기와 양식이 거의 같다.
이중기단 위에 3층의 몸돌을 올린 것으로 무량수전의 동쪽에 있는 석탑과 같은 형식이다.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있고 정제된 모습으로 신라석탑 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기단과 탑신부의 몸돌에는 기둥을 본 떠 새겼는데, 기단은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조각을 두었고, 몸돌은 모서리에만 두었다.
몸돌을 덮고 있는 각 층의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윗부분은 없어졌는데, 지금 놓여져 있는 것은 뒤에 보충한 것이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호국의 기원으로 서라벌을 향한 것이라는 설이 재미있다.
부석사에 한 번쯤 다녀온 사람들은 누구나 석축과 돌계단을 특별히 기억한다.
이 석축은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 비탈을 깎고 평지를 고르면서 만든 것이다.
물론 석축의 목적은 사찰을 짓기 위한 땅다짐에 있지만 석축 돌계단 그 자체에도 상징 하는
바가 있다. 즉, 극락에 이를 수 있는 16가지 방법 중 마지막 세 방법인 3품 3배관의
9품 만다라를 형상화한 것이다.
천왕문에서 요사체로 오르는 세 계단이 하품단이며, 여기서 다시 세 계단 오른 범종루까지
가 중품단, 범종루에서 세 계단을 올라 안양루 밑을 지나 무량수전 앞마당에 다다르는데,
마지막 계단으로 상품단이다.
이렇게 부석사를 찾는 이는 상징화된 돌계단과 석축을 지나면서 극락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반듯하게 다듬은 규격화된 돌들로 석축을 쌓지 않고,
돌의 자연 생김새를 그대로 이용해 잘 짜맞추어 쌓았다는 것이다.
둥글든 모났든 크든 작든 돌들의 본래 모양새와 개성을 버리지 않고도 조화롭고 짜임새
있으며 견고한 석축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현대의 우리들에게 커다란 가르침을 준다.
석등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 일반형 석등으로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작품이다. 팔각을 기본형
으로 삼고 네모난 지대석 측면에는 안상을 2개씩 배치되고 그 위의 아래받침돌은 큼직한
연꽃 조각을 넞고 가운데 기둥을 받치고 있다.
팔각의 가운데 기둥은 알맞은 높이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
사면에 도드라지게 새긴 보살상이나 연꽃무늬 등은 우수한 조각으로 손꼽히고 있다.
연꽃 하대석에 조각된 8엽 복판 연꽃은 첨단부에 귀꽃의 장식문이 부착되어 있다.
제작 연대는 9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무량수전
이 건물은 부석사의 본전으로 보처(補處)없이 화엄도량에 서방극락세계의 주불인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신라 형식으로 보이는 돌기단 위에 초석을 다듬어 놓고 그 위에 배흘림기둥을 세웠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주심포 양식의 대표적 건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우리나라
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 중 하나로 유명하다.
고려 현종 7년(1016) 원융국사(圓融國師, 964~1053)가 중창하였다.
1916년 실시된 해체 공사 때 발견된 서북쪽 귀공포의 묵서명(墨書銘)에는 공민왕 7년
왜구에 의하여 건물이 불타서 우왕 2년(1376) 다시 지었다고 되어 있다.
조선 광해군 3년(1611)에 서까래를 갈고 단청을 하였으며, 1969년에도 보수하였다.
건물 천장부의 아름다움과 장엄함은 외관의 세련된 풍모와 아울러 한국건축의 가장 빼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부석사 3층석탑
이중기단 위에 3층 몸돌을 쌓은 전형적인 석탑이다. 높이는 526cm로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되었다. 하층 기단의 너비가 지나치게 넓고 초층(初層) 몸돌의 높이에 비해 그 너비가 넓어 장중해 보인다.
1960년 해체 수리 당시 3층 몸돌 중앙에 얕은 방형 사리공이 발견되었었으나, 사리구는
없어졌고, 기단부에서 철제탑, 불상파편, 구슬 등이 발견 되었다. 이 때 일부 파손된 부분은
새로운 부재로 보충하였다. 탑은 원래 법당 앞에 건립되는 것이 통례인데, 이 석탑은
법당 동쪽에 세워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선묘각
선묘각은 무량수전 북서쪽 모서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의상 조사의 창건 설화와 관련된
인물인 선묘를 모신 건물이다. 규모도 작고 기단도 없이 초라하여 마치 작은 사찰의
산신각 같은 느낌을 준다.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 규모의 맞배집인데 가구 방식이나
부재를 다듬은 수법으로 보아 최근세의 건물인 듯하다.
내부에는 1975년에 그린 선묘의 영정이 걸려있다.
삼성각
칠성, 독성, 산신 세 분을 한 곳에 모신 전각으로 무량수전 서쪽 석축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삼성각은 우리나라 재래의 수(壽), 복(福), 재(財)의 삼신 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현재의 삼성각은 원래 축화전(祝花殿)이라 불렀는데 영조 때 대비의 원당으로 지은
건물이라 한다. 1979년의 부수 때까지는 원각전(圓角殿)이라 하였고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을 모셨었다.
선비화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나무는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조사가 중생을 위하여 짚고 다니시던
지팡이를 이곳 조사당 처마밑에 꽂았더니 가지가 돋아나고 잎이 피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하며, 비와 이슬을 맞지 않고도 항상 푸르게 자라고 있다.
일찍이 퇴계 이황 선생이 부석사를 찾아와 이 선비화에 대한 시를 짓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선비화의 학명은 골담초라고 부른다.
이 건물은 무량수전 우측 위측에 위치한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이다.
1916년 수리 중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고려 우왕 3년(1377)이 건립 연대로 되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조선 성종 21년(1490) 중수하였고, 동왕 24년(1493) 단청을 하였다. 조사당 건물 내부
입구 좌우에 제석천, 범천, 사천왕상의 벽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1916년 수리하면서
떼어내어 지금은 보장각에 보관하고 있다.
부석사 제2의 목조 건물로 고려시대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단하각
최근세에 지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남도리 맞배집으로 응진전 뒤쪽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건물 내부에는 손에 쥐를 들고 있는 작은 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정면에 걸린 현판의 '단하'가 무엇을 뜻하는 지는 확실하지 않다. 사리를 얻기 위하여
목불을 쪼개 땟다는 단하소불의 고사로 유명한 중국 육조시대의 단하 천연 선사를 모신 것
이라면 선종과 연관이 있는 전각이다.
그러기에 도량에서 다소 떨어져 있는 선방 근처에 지었는지도 모른다.
안양루
안양루는 무량수전 앞마당 끝에 놓인 누각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무량수전과 함께 이 영역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건물에는 위쪽과 아래쪽에
달린 편액이 서로 다르다. 난간 아랫부분에 걸린 편액은 '안양문'이라 되어 있고 위층 마당
쪽에는 '안양루'라고 씌어 있다.
하나의 건물에 누각과 문이라는 2중의 기능을 부여한 것이다.
'안양'은 극락이므로 안양문은 극락 세계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한다.
따라서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지나면 바로 극락인 무량수전이 위치한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다.
안양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엎드려 모여 있는 경내 여러 건물들의 지붕과 멀리 펼쳐진
소백의 연봉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스라이 보이는 소백산맥의 산과 들이 마치 정원이라도
되듯 외부 공간은 확장되어 다가온다. 부석사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경관이다.
그래서 예부터 많은 문인들이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소백의 장관을 시문으로 남겼고 그 현판
들이 누각 내부에 걸려 있다.
♥의상과 선묘/ 용이되어 1400년을 기다린 선묘의 사랑 스토리
신라 문무왕 16 년(서기 676년)에 왕명을 받아 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학을 전교한
의상조사는 서기 625 년 당시 귀족의 가정에 태어나 호화롭게 성장하였다.
그 뒤 그는 서울 황복사에서 삭발하고 승려로 입문하여 입산수도를 했다.
입산한지 8 년만에 큰 뜻을 품고 원효대사와 함께 당나라로 향했다.
당나라를 거쳐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까지 가려는 것이었다.
압록강을 건너 요동에 이르러 노숙을 하는 어느날 밤 원효대사는 아주 심한 갈증을 느꼈다.
어두운 곳을 수없이 더듬거리다가 끝내는 바가지 같은 것에 물이 고인 것을 잡아
꿀꺽꿀꺽 들여 마셨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잠을 깬 원효대사는 깜짝 놀랐다.
물을 마신 그 그릇이 바가지가 아니라 사람의 해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보니 보지 않고 마실 때 그토록 맛있던 물이 알고 보니 토하고 싶도록
비위에 거슬린다는 데 깨달은 바 있어 인도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 귀국한 후
계속 불교연구에 힘썼던 것이다. 그러나 의상조사는 홀로 당나라를 향해 길을 떠났다.
도중에 조사는 고구려 첩자에게 잡혀 고생을 하다가 귀국하여 650 년에 다시 당나라의
사신의 배를 타고 당나라로 들어갔다. 양주에 이르러서 신병을 얻게 되어 양주성의
수위장인 유지인의 집에 유숙하며 병을 치료하던 중 그의 딸 선묘라는 처녀가 있어
몇 달이 지나자 어느덧 의상조사에게 연정을 갖게 되었다.
이에 조사는 선묘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 들이지 않고 법도로 대하여 제자로 삼게 되었다.
이때 선묘가 조사에게 청하기를 "귀국하실 때 이곳을 지나시면 꼭 소녀의 집에 다시한번
들려 주시고 가십시오" 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대사는 이러한 부탁을 쾌히 승낙하고 길을 떠났다.
얼마 후 조사는 당나라 서울 장안 남쪽에 있는 종남산 지상사에 가서 지엄대사의 제자가
되어 수학하던 중 당이 30 만 대군으로 신라를 침범하려는 형세임을 알고
오직 구국일념으로 문무왕 11 년에 급히 귀국하게 되었다.
조사는 귀로에 양주 선묘의 집에 이르니 마침 출타 중이라 만나지 못하고 가는 것을
전해 달라고 그녀의 부모에게 부탁한 후 다시 길을 재촉하였다.
한편, 선묘는 조사의 귀국 선물로 법의를 정성껏 마련하여 손꼽아 기다리던 중,
잠시 집을 떠난 사이에 조사가 여정이 급하여 머물지 못하고 다녀갔다는 이야기를
부모로부터 듣고, 만들어 두었던 선물을 가지고 조사를 뒷쫓아 산동성 해안에 다다르니
조사가 탄 배는 바다 위에 흰 돛만 보일 뿐이었다.
그녀는 멀어져 가는 돛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섰다가 들고 있던 선물을 바닷물에 던지며
축원 하기를 "진심으로 조사님을 공양하오니 원컨데 이 옷이 조사님게 이르도록 해
주옵소서." 하였더니 때마침 해풍이 크게 일어나면서 던진 선물이 조사가 탄 배 안으로
날아갔다.
이를 보고 있던 선묘가 다시 축원하기를 "이 몸이 용이 되어 조사를 받들어 무사히
귀국하도록 해 주옵소서" 하며 바닷물에 몸을 던지니, 기이하게도 선묘는 바랐던 대로
용이되어 조사의 멀고 험한 귀국의 길을 줄곧 호위하였는지라, 조사는 무사히 귀국하여
나라에 당의 침략 흉계를 고하고 난을 면하게 하였다.
그 후 조사는 왕으로부터 사찰 건립의 명을 받들어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에 이르러 지세를 살펴본 즉
화엄종지(華嚴宗旨)를 크게 선양할 수 있는 명산이나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교(異敎)의 무리들 5 백여명이 점령하고 있으므로 수차 이들에게 자리를 양보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들이 막무가내로 듣지 아니하여 고심을 하고 있을 때,
용으로 화신한 선묘가 공중에서 바라보니 순리로는 조사의 뜻이 이루어지기 어려움을
짐작하고 법력을 써 지금의 무량수전 서편에 있는 큰 바위를 공중으로 올렸다 내렸다
3 차례나 하였더니 무리들이 겁을 집어 먹고 굴복하였다.
이 자리에 사찰을 건립한 것이 부석사이며 이교도들을 놀라게 하기 위하여 공중에서
세 번이나 떴다는 큰 바위를 부석(浮石)이라 불러 무량수전 서편 암벽 밑에 거대한
모습으로 묵중히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선묘룡은 석룡으로 화하여 무량수전의 자리에 안좌되어 부석사의 수호신이 되려하매
조사를 크게 감격케 하였다.
지면에서 2 척 깊이에 묻혀있는 48 척의 석룡은 그 머리를 무량수전 주불 밑에 두고
꼬리는 무량수전 앞 석등까지 펼쳐있다.
이 석룡은 67 년 5 월에 신라 5 악 학술조사단이 무량수전 앞 뜰에서 발굴하여
5 m 가량의 석룡 하반부를 발견하는데 성공하였다.
비늘 모습까지 아련히 나타나 있는 모습이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용과 너무나 흡사하여
천연석으로 볼 수 없는 천연스러운 용이라고 하였다. [출처/ http://pusoksa.buddhism.org]
신범종각
만세루 위쪽 석축단의 좌우에 있는 건물들로 1980년의 보수 정화공사 이후에 신축한
것이다. 신범종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익공계 맞배집으로 기둥만 세워 개방하였는데
기둥 사이는 홍살로 막았다. 막돌로 만든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모서리는 원형 주좌를
가진 방형 초석을 사용하여 특이하다.
참고자료
부석사 공식 홈페이지 http://www.pusoksa.org/
첫댓글 너무나 세세한 부석사의 해설에 부석사 갈일 읍쓸것 같습니다.
저는 초,중학교 소풍을 거기로 다녔습니다.산찾사님 한번 가봐유~~~~~~~
절의 위치도 답답함이 없고,계단형으로 자리하고 있음에도 안정감을 잃지 않은듯 느껴졌습니다.그립네요...
지금 내 책꼬지에 있는 "최순우의 한국미 산책/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한 페지를 보면 이 대자연 속에 이렇게 아늑하고도 눈맛이 시원한 시야를 터줄 줄 아는 한국인, 높지도 얕지도 않은 이 자리를 점지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층 그윽하게 빛내주고...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잉~! 저도 그책 읽은 적이 있는데~~~! ㅎㅎ
국립 중앙박물관장을 지낸 고 최순우님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란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가보고 싶은 부석사를 자세하게 소개 해주셔서 도움이 됬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한편의 답사후기 아니...새로운 역사스페셜을 보는 듯 합니다. 역사를 전공한 저로서도 고개가 숙여지는 해박한 지식에 제 자신이 많이 부끄럽습니다. 많은 자극을 받고 갑니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노란 흙벽...우리나라의 3대 고대건축물중의 하나인 수덕사에서도 그 느낌은 살아있구요. 봉정사의 극락전은 最古의 목조건축이긴 하지만 말씀하신대로 아쉬움이 많이 있죠. 그래도 역사성은 부인할 수 없기에....귀한글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