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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종사법어 제4 적공편 33장 대산 종사 말씀하시기를 「만물이 낮에 자라는 것 같으나 실은 밤에 자라는 것이요 봄에 자라는 것 같으나 실은 겨울에 자라나니, 맹자께서 말씀하신 존야기(存夜氣)는 밤기운을 길러 성품을 보존한다는 말로 이것이 바로 선(禪)이니라. 고요하되 비치지 못하면 참다운 선이 아니고 비치되 고요하지 못하면 그 것도 참다운 선이 아니므로[寂而照 照而寂], 대종사께서는 “정신은 항상 적적한 가운데 성성함을 가지며 성성한 가운데 적적함을 가지라.” 하셨나니 우리도 욕심에 끌려 소리를 내지 말고 모든 시비가 공한 자리에서 소리를 내고 그 자리를 기를 줄 알아야 하느니라. 대종사께서도 저녁이면 꼭 전등을 끄고 존야기를 하셨으므로, 나도 ‘저녁 시간은 내 시간이다.’ 하고 항상 존야기를 하느니라.」 |
A. 보산 김제원 교무님
밤과 아침이 다 같은 고요한 때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천지의 기운이 낮에는 동(動)하고 밤에는 정(靜)하죠. 그 정할 때 밤기운을 존야기라고 하는 것이고, 아침에도 고요한 기운이잖아요. 같은 맥락이에요. 큰 도인들은 육도를 임의로 하고 천업을 넘어설 정도로 마음에 힘이 있는 분들은 이 존야기를 하시는 분들이에요. 중생들은 밤에 뭐하죠? 뻘짓거리하죠. 그러나 수양을 하시는 도인들은 밤에 기운을 함축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우리 대산종사님은 밤 8시에 아예 방에 불을 꺼버리고 요가와 선을 하시죠. 중생들은 그 시간에 술 마시고 놀죠. 그 것이 세월이 축적되면서 두 사람의 차이가 생기게 되는 것이지요. 대산종사님은 새로운 눈이 떠져서 사람을 보면 전생에 어떤 일을 했는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내생에 무엇이 될 사람인지 보이는 거죠. 중생들은 아무것도 안 보이죠. 자신 앞길도 안 보이는데. 그런 차이가 있는 거지요. 존야기라고 밤기운, 쉽게 말해서 고요한 정 기운을 잘 함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 기운이 맑고 편안하죠. 저녁에 뻘짓하는 사람은 기운이 떠 있습니다. 기운이 붉거나 노랗거나 시커멓거나 하지만 이분들은 맑고 파랗고 고요하죠. 그래서 중생들은 육안으로 보이는 것밖에 못 보지만 이분들은 삼세를 관통하고 사람들 마음속도 다 보고, 전생길도 다 보고 하는 것입니다. 정산종사님이 영산에 계실 때 여러분 나이대의 사람들한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 수양 열심히 해라, 그러면 자물쇠도 마음의 힘으로 열어버릴 수 있다.” 자물쇠도 그냥 열어버릴 수 있다고 그러셨어요. 수양의 힘이란 그런 거여요. 수양의 힘이라는 것은 내 참 자기를 발견할 수 있는 지혜를 갖게 하고 본래 자기의 기운을 회복하게 하기 때문에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쩔 때 행복해 하죠? 퍼먹을 때, 놀 때, 잘 때 행복하죠. 그런데 존야기라고 자기의 밤기운, 자기의 참 자성자리에 적적성성해서 합일해 있으면 이 세상의 어떤 쾌락보다도 어떤 행복보다도 좋은 것입니다.
Q. 조현화 교우님
58장에 염불10송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저희 수행법회 때마다 하는 염불 10송이 뭔지 잘 몰랐는데, 염불10송이 적공편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적공편은 말 그대로 공을 쌓는 것인데 염불을 하는 것은 수양에 가까운 내용인데 적공과는 무엇과 연관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대산종사법어 제 4 적공편 58장 대산 종사, ‘염불 10송’을 내리시니 「① 이 염불의 인연으로 삼계 업장이 소멸하여지이다. 나무아미타불. ② 이 염불의 인연으로 시방세계가 청정하여지이다. 나무아미타불. ③ 이 염불의 인연으로 이매망량이 항복하여지이다. ④ 이 염불의 인연으로 육근이 항상 청정하여 대지혜 광명이 발하여지이다. 나무아미타불. ⑤ 이 염불의 인연으로 심량이 광대하여 제불 조사의 심인을 닮을 만한 대법기가 되어지이다. 나무아미타불. ⑥ 이 염불의 인연으로 생사의 자유를 얻어 육도를 임의로 왕래하게 하여지이다. 나무아미타불. ⑦ 이 염불의 인연으로 무량세계 무량겁에 무량 중생으로 하여금 불도를 이루게 하여지이다. 나무아미타불. ⑧ 이 염불의 인연으로 삼계 진루(三界 塵漏)가 다 사라지고 심월만 홀로 빛나게 하여지이다. 나무아미타불. ⑨ 이 염불의 인연으로 삼계의 유주 무주 고혼을 다 천도하게 하여지이다. 나무아미타불. ⑩ 이 염불의 인연으로 무량아승기겁에 흐를지라도 대서원, 대법류느 대불퇴전이 되어지이다. 나무아미타불.」 |
A. 보산 김제원 교무님
적공(積功)이라는 것은 쌓을 적, 공들일 공입니다. 공에다 힘을 쓰는 것입니다. 대개 기도에 정성을 들인다고 하는데 그게 적공입니다, 기도에 적공하는 것입니다. 염불에 정성을 들인다. 염불에 적공하는 것 이죠. 수양에 적공하는 것이고. 또 내가 어떤 봉사활동을 열심히 한다. 그러면 그것도 봉사활동을 적공하는 것이죠. ‘적’ 자가 ‘쌓을 적’자 이잖아요. 한 번에 하는 것을 쌓는다고 하지 않지요. 여러 번에 걸쳐서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정진(精進)이라는 말과 연결이 되면서 정진 적공이라고 많이 씁니다. 신분의성의 정진으로 삼학에 적공 사은보은에 적공 이렇게 많이 씁니다. 방금 사회자가 많이 멋진 말을 했는데 신수대사는 계정혜 삼학을 말했고 육조대사는 자성의 계정혜라고 해서 자성의 삼학을 말했습니다. 이것도 똑같습니다. 그냥 우리가 열심히 시험 공부하는 것도 적공입니다. 그런데 자성에 근간해서 하면 대(大)자를 쓰는 거여요. 목적지를 알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냥 열심히 하는 것은 적공입니다. 자성의 원리를 알아서 하는 사람은 대적공이라고 하는 거여요. 당장은 잘 이해가 가지 않더라도 그런가보다 하셔요.
여러분들이 유형의 것을 쌓을 때에는 눈에 보이니깐 그런가보다 그러는데 무형의 적공이라는 것은 눈에 얼른 안 보이지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잘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유형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형도 있고, 유형보다는 무형의 세계가 더 큰 세계입니다. 핸드폰의 작동원리도 무형이잖아요. 전자파가 눈에 보이시나요? 가스레인지의 가스도 무형, 무취, 무색이지요. 그래서 가스가 있는지 몰라서 마시고 죽거나 불이 나거나 하니깐 색이나 냄새를 집어넣은 것이지요. 휴대폰의 전파가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힘이 있잖아요? 그렇듯이 우리의 마음도 기운도 그런 것이죠. 없지만 분명히 있는 것이고 작용하는 것입니다.
Q. 윤은형 교우님
청년 3단 윤은형입니다. 38장에 보면 ‘특히 겨울은 음이 극할 때이요. 여름엔 양이 극할 때라, 이 때에 정과 중을 표준으로 삼아야 천지조화에 날뛰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고 되어 있는데 정, 중을 한자 자체의 뜻은 알겠는데 여기서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뜻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대산종사법어 제 4 적공편 38장 대산 종사 말씀하시기를 「음 가운데 양이 생기고 양 가운데 음이 생기는 것[陰中生陽 陽中生陰]이 진리의 조화라, 진리는 뺏으려면 반드시 주는 법이니 줄 때 조심해서 잘 받고 빼앗길 때 조심해서 잘 뺏겨야 잘 받을 수 있느니라. 특히 겨울은 음이 극할 때요 여름은 양이 극할 때라, 이 때에 정(靜)과 중(中)을 표준으로 삼아야 천지조화에 날뛰는 사람이 되지 않나니, 그러므로 돈과 명예와 권리에 빠지지 말고 정중(靜中)으로 살아야 하느니라.」 |
A. 보산 김제원 교무님
이 세상은 음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양이 치성할 때는 여름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음이 치성하는 겨울이지요. 양에서 음으로 변화할 때는 가을이겠지요? 그 반대는 봄이고. 극하면 변합니다. 겨울에 이렇게 춥지만 곧 입춘이 옵니다. 음 속에 양이 시생한다고 그럽니다. 여러분들이 다 남자라고 양이 많다고 난리를 피우지만 그 속엔 음도 다 있지요. 옛날에 하와이에서 두 동성이 결혼을 한다고 법당에 찾아왔어요. 그 교무한테서 전화 왔어요. “교무님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결혼 시켜 줘라.” 남자들 중에서도 어떤 사람은 그 안에 양이 더 있는 사람이 있고 음이 더 많은 사람이 있지요. 나이가 50이 넘어가면 그 양이 많던 사람이 음기가 많아지죠. 여러분들의 아버지들 보면 그렇게 울 것 같지 않던 아버지가 연속극 보면서도 울지요. 양이 치성하다가 음이 서서히 더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는 거지요. [陽 – 動, 陰 – 靜] 그 양이 치성할 때가 동이고 음이 치성할 때가 정입니다. 이것을 주야로 놓고 보면 음이 치성할 때가 언제겠어요? 밤이지. 양이 치성할 때가 낮이 되지요. 1년에서 여름과 겨울이 있듯 하루도 똑같아요. 사시로 봐서는 춘하추동이 되지만 하루로 놓고 보면 한낮, 한밤이 되는 것이지요. 음양은 결국 동정의 이치인 것이지요. 과거에는 음의 시대였기 때문에 정, 가만히 있는 사람이 중간이라도 갔다는 것이지요. 이제는 무슨 시대지요? 우주의 성주괴공에서 성이지요. 여기에서 성주괴공으로도 나누어집니다. 성은 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한 사람이 박수를 받는 것이지요. 가만히 있는 사람은 중간도 못가지요. 미국에 가서 회화할 때 가만히 있으면 바보 취급 받아요. 왜? 이제 동시대가 되어서 그렇습니다. 옛날에는 정중동(靜中動)이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시대가 동중정(動中靜)입니다. 이 이야기는 세 단어 중 앞 단어가 중심입니다. 옛날에는 정의 시대이기 때문에 정한 곳에 기초해서 동합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동이 더 중심이고 그 가운데에서 정이 받쳐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적극적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는 것은 이제 별 볼일 없습니다. 시대가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우주가 성주괴공으로 바뀌는 가운데 지금 우주가 성겁기이기 때문에 막 확장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깐 이제 평등시대가 되고 인구가 늘어가고 지혜가 밝아지고 식량이 많아지고 이렇게 변화한 것이 우주가 승급기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요. 양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막 뜨거워지고 있잖아요. 이런 이치인 것입니다. 이해가 되세요? 중은 무엇이냐, 이 음양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입니다. 중을 여의지 아니하고 정을 여의지 아니하고 사는 거죠. 못난이들은 하루를 살 때에도 어떻게 사느냐, 양이 극에 달했을 때에는 너무 좋아 죽겠어요, 음에 극에 달 했을 때에는 너무 괴로워 죽겠어요. 마치 시소처럼 극과 극만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중간에 중심이 잡혀있으면 내가 지금 조금 잘 풀리는 구나, 내가 지금 좀 잘 안 풀리는 구나합니다. 중에서 자리를 잡고 아는데 못난이들은 시소의 끝에 앉아있죠. 끝과 반대쪽 끝을 왔다 갔다 하지요. 좋아서 술 한 잔, 열 받아서 술 한 잔, 이래서 한 잔, 저래서 한 잔. 중생들은 그렇게 사는 것이지요. 그러나 방금 법문같이 사람이 날뛰는 사람이 아니라 딱 중심을 잡고 있으면 아 “동하구나, 정하구나.” “양이구나, 음이구나.” “이럴 때가 있지, 저럴 때가 있지.” 딱 중을 여의지 않고 제 삼자가 되어서 지켜보는 겁니다. 강에 오리를 보시면 물 아래에서 열심히 젓고 있거든요. 수영 잘하는 사람은 겉에서 보면 몸이 별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물 아래에서는 열심히 젓고 있습니다. 중심을 딱 잡아야지 수영을 못하는 사람은 막 온몸을 흔들면서 수영을 해요. 그러면 중심이 흔들리게 되지요. 그렇게 되면 속도가 나지 않는 것이지요. 중심을 잡아 놓은 상태로 팔만 젓지요. 팔도 물 밖에 있을 때에는 최대한 마찰을 적게 해서 젓는 것이지요. 똑같이 바쁜 와중이지만 중심은 딱 잡는 것이죠. 내 마음을 살아서 내가 체가 되고 중심이 되어서 경계를 제 삼자가 되어서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은 경계 속에 푹 빠져버리는 것이지요. “정신이 없네, 못 살겠다.” 이 놈, 저 놈 욕하는 거지요. 내가 그 속에 빠져버리는 것이지요. 내가 중심이 되어서 내가 그것을 손님으로 만든다거나 제 삼자로서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없으면 거기에 빠져버리니 정신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음공부를 한다는 건 진공의 체를 삼고 진공의 중심을 잡아서 내가 주인이 되어서 어떤 경계를 만나더라도 상황에 맞게 조절해 나가는 것이 우리 마음공부입니다. 경거망동하지 않고 마음의 중심을 딱 잡아서 체를 잡아서 나아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경계를 겪을수록 성장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한 사람은 경계를 겪을수록 상처만 남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참고 참다가 이제는 못 참겠다며 폭발하는 거죠. 경계에서 공부를 삼는 사람은 경계를 겪을 때마다 성장하죠. 그래서 경계 전에는 미리 준비하고 경계를 당하면 일심으로 하고 경계가 끝나면 피드백, 평가를 통해서 반드시 수정작업을 거쳐야합니다. 이걸 안 거친 사람은 끝났다고 덮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피드백이 없으니 쳇바퀴 돌듯이 똑같이 반복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이 뭣 같다는 소리를 하는 것이지요. 자기가 피드백을 통해서 개선 할 생각은 하지는 않고 나는 안 되는 가보다, 세상은 불공평하다. 이렇게 하는 것이지요. 말을 잘 타는 사람은 오히려 거친 말을 좋아합니다. 길만 잘 들이면 되거든요. 옷을 잘 만드는 사람은 천만 주면 잘 만듭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재료만 가져다주면 이런 그림도 그리고 저런 그림도 그립니다. 못하는 사람들이 연장 탓을 하죠. 내가 마음의 힘이 있으면 얼마든지 그것을 극복할 수 있지요. 요리 잘 하는 사람 봐요. 그런 사람들 바닷가에 놔두니 돌이나 조개나 주워가지고 요리하고 그러잖아요. 원리를 아는 사람은 어떤 경계에서도 그것을 응용해내지요. 그러나 원리를 모르고 외우고 쌓기만 한 사람은 상황만 바뀌면 어쩔 줄 모르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원리를 설명해드리고 있는 것이지요. 지금도 여러분들의 인생은 뭐에요. 계절로 보면 임도운 교우 같은 경우는 여름을 지나고 있지요. 이하은 교우 동생 같은 경우에는 아직 여름을 맞이하고 있을 것이고 저는 겨울에 보다 가깝겠지요. 이것을 대종사님께서 천업이라고 하셨습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왔으면 가는 겁니다. 봄을 오게 하는 양반이 누군가요.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이라 하고, 유가에서는 음양의 이치라하고 불교에서는 인과의 이치다,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이름을 그렇게 붙인 겁니다. 겨울 누가 오게 했나요? 곧 봄이 오는 것도 알죠? 조금만 있으면 봄이 오지요. 제가 잘 알고 여러분도 알죠. 누가 오게 하는 것인가요. 그 양반이 있는 겁니다. 그 양반 이름을 무엇으로 붙일 것이냐. 진리, 하느님, 음양.. 붙이는 대로 되는 것이죠.
Q. 신시중 교우님
신시중입니다. 61장에 보면 ‘누구나 공부할 때는 어느 한 방면에 능한 바를 다 쏟지 말고 감추어 둘 줄 알아야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요즘 세상에 빗대서 얘기해보면 요즘에는 어떤 특정한 분야에 전력을 다 쏟아야 그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는 환경이 되는데 그런데 대산종사님은 감춰둘 줄 알아야한다고 말씀하셔서 어떤 의미로 이런 말씀을 하신건지 궁금합니다.
대산종사법어 제 4 적공편 61장 대산 종사 말씀하시기를 「누구나 공부할 때는 어느 한 방면에 능한 바를 다 쏟지 말고 감추어 둘 줄 알아야 하느니라. 내가 원평에서 약을 캐며 기도할 때 신령스러운 문구가 솟아나 글을 써 보니 과거의 문장가보다 못할 바가 없고, 중앙총부에서 붓글씨를 서 보니 옛 명필보다 못할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 대 한 생각 돌려 글 문을 닫고 붓을 던져 쓰지 않았나니, 내가 잘하는 데 치우치지 아니하고 함축하였기에 뒷날 대종경을 정리할 수 있는 힘이 솟았느니라.」 |
A. 보산 김제원 교무님
오전에 단장중앙단회에서도 이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은데 이 61장이 질문이 나올 만한 법문인가 보네요. 지금 저 질문도 일리가 있지요? 하나를 열심히 해서 전문가가 되어야하는데 에너지를 분산시키면 어떻게 전문가가 되느냐는 질문이지요.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오늘 오전에도 홍석원 교우님이 질문을 하셨는데요. 석원 교우가 영문학과여서 영어에 관심이 많아요. 언제 내가 미국 유학을 가서 박사를 따고 영어로 된 작품을 하나 쓸까.. 관심사가 온통 영어에만 있는데요. 제가 그런 석원 교우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너는 천 년 후에도 영어만 할래?’ 이 질문을 들으니 조금 이해가 되려나요? [기능 => 전문가, 명인, 달인 / 마음공부 => 원만구족] 여러분, 전문가가 되고, 명인이 된다는 것은 참 좋죠. 저것도 되기 어려운데 명인이나 달인, 전문가가 되는 것에는 함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보세요. 본인의 성향이 있지요. 빠른 사람이 있고 느린 사람이 있고 게으른 사람이 있고, 또 기능적으로는 권도훈 교우 같이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사람 있고 춤추는 사람들은 춤에 대한 남다른 감각이 있지요. 한 생에 의해서만 대예술가가 되는 것은 사실 어렵습니다. 여러 생에 걸친 노력과 천부적인 것이 결합이 되어야 대문화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점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못난 놈은 기능적인 부분도 못하고 마음공부도 못 합니다. 어중간히 못난 놈은 기능적인 것만 하죠. 명인들 전문가는 엄청 카리스마 있고 자신감 있어 보이는 거 아시나요? 강혜지 교우가 춤출 때 보시면 카리스마가 장난이 아니지요? 왜냐면 춤을 거의 10년, 20년을 하니까 자신이 있지요 원리도 알고 그러니 하면 일심으로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잘 못하게 되면 무슨 문제가 되냐. 천 년 동안 춤만 출 것이냐. 이 기능을 뭐가 들어서 해요? 마음이 들어서 기능을 운전하는 것이지요. 마음이 들어서 천만학술을 운용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마음공부를 해놓으면 천만학술이나 기술에 응용이 되는 것입니다. 못난이들은 기능적인 것만, 그 중에서도 자신이 잘하는 것만 합니다. 자신이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내가 자신이 없는 것은 계속 피해버립니다. 사람 관계가 어려우면 피해버리고 그러는 것이지요. 제가 못난 일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초등학교 때 저도 공부를 잘했지요. 호남 예술제라고 꼭 잘하는 학생들에게 글을 쓰게 하던지 그림을 그리게 하던지 시키는 것이 있어요. 그래서 선생님한테, “제가 그림은 그릴 테니 글 쓰게 하는 건 시키지 마십쇼.”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랬더니 그게 벌을 받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 마음속에는 항상 나는 글 못 쓰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잠재되어 있었습니다. 계속 그런 생각을 가지고 10년, 20년 살다보니깐 계속 글 쓰는 것을 외면하게 되는 것이지요. 저는 미대 갈 생각도 있었거든요. 지금 제가 붓글씨도 하고 있잖아요. 한 3년 뒤에는 작품전도 할 거여요. 이쪽 분야에는 자신 있으니까 내가 이 분야만 하려고 하는 거죠. 그러면 다른 쪽은 어떻게 되는 것이지요? 닫아버리게 되는 거죠. 본래 우리의 원만구족한 마음이라는 것이 원만하지 않고 한쪽만 찌그러지는 것이지요. 일원상이 아닌 한쪽만 찌그러진 마음이 되는 것 이지요. 그래서 잘하는 부분을 할 때는 자신이 있는데 잘 못하는 부분에서는 자신이 없으니깐 계속 피해버리고 도망 가버리고 하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은 글 쓸 때 피해버리고 어떤 사람은 강연하자고 하면 도망 가버리고 단회하자면 도망 가버리고 시험 볼 때는 잘하는데 팀플하면 도망 가버리고 왜냐? 그 분야에 단련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사장이라면 직원을 쓸 때에는 별수 없죠 그 기능을 잘하는 사람을 써라. 그러나 내 마음공부에 있어서는 절장보단이다. [節長補短] 이 것이 무엇이냐면 장점은 조절하고, 단점을 보완하는 것입니다. 보통사람들은 장점만을 향해 치닫죠. 그래서 다음 생에서도 예술은 잘 하는데 사람관계가 못 한다던가. 복은 많은데 지혜는 없다던가. 지혜는 있는 데 찢어지게 가난할 정도로 복이 없다던가. 지은 대로 받게 되는데 한쪽만 취해서 가니까 그쪽만 강자가 되고 다른 쪽은 철저히 약자가 되어버리는 것이죠. 뛰어난 예술가도 예술만 해서는 예술가가 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의 힘을 갖추어야지 되는 것이고 진짜 뛰어나게 이룬 사람들을 보면 나중에 마음공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요. 이 법을 만나면 진작 알았으면 더 빨리, 더 큰 예술가가 될 수 있었겠다 하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해가 되셨나요?
이 법문이 거짓말이 아니에요. 대산종사님이 끝내주게 글씨를 잘 쓰셔요. 대산종사법문집에 뒤에 표지나, 반야심경의 글씨를 보시면 그렇게 글씨 잘 쓰시는 사람이 드물어요. 명필중의 명필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당신이 접으셨지요. 그래서 마지막에 대종경 정리할 때 대산종사님께서 쓰고 계시니 대종사님께서 “너는 쓰지 마라, 너는 마음속에만 담아두어라. 네가 열리고 나면 다 생각이 날 것이다.” 하셨어요. 아니나 다를까 그러셨지요. 그래서 지식의 세계에서는 최대한 저장하고 모아두고 하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지혜의 세계는 비울 때 솟아오르는 것이지요. 과학적 지식과 도학적 지혜가 서로 채우고 비우고 채우고 비우고하는 것입니다. 양과 음이 골라 맞아야지, 비우고 채우고 하는 것이 골라 맞아야 서로 사는 것입니다. 한가지 만 해버리면 하나는 능할지 몰라도 어느 한계에 부딪혀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뛰어난 예술가지만 이혼당하고 그런 일들이 생기는 것이지요. 뛰어난 예술가이지만 사람관계를 못하고 왜 그런 것이냐. 원리를 아는 사람은 미래 시대에서는 직업이 열 번도 바뀐다고 하는데 어디서든 누구하고나 어울릴 줄 알고 어디에서나 거기의 원리를 아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러분 장관은 누가해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무관에서부터 올라간 사람이 하는 게 아니에요. 장관은 무엇이 중요하냐. 실무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조금만 해도 대강의 원리를 알아요. 왜냐하면 정부에서 예산을 따오면서 밑에 사람들은 실무의 세계에서 갇혀서 그 것밖에 못 보지만 제 3자가 와서 보면 이 부처는 새로운 시대에 맞게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 딱 보이는 것이지요. 문제점을 제시 할 수 있지요. 그렇지만 밑에 실무를 하며 올라온 사람은 그 것이 안 보이는 것이지요. 자신이 아는 척을 해야지요. 그렇지만 안목이 실무의 세계를 넘어서서 툭 터져서 보기가 쉽지 않은 것이지요. 그래서 장관은 부처에서 올라온 사람을 잘 안 쓰는 것입니다. 제가 대통령이더라도 그 부처에서 올라온 사람은 장관 안 시킬 거예요, 벌써 안목이 부족해요. 위로 올라가면 그 기능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내가 야구를 잘했어, 축구, 농구를 잘했어. 그거를 계속 할 겁니까? 다 은퇴하잖아요. 은퇴해서 뭐해요? 지금 운동, 예술하다가 은퇴한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 자신의 기능을 못 살립니다. 기능을 살려서 제대로 직업을 가지는 사람은 10~20%밖에 되지 않습니다. 나머지 80~90%가 월 평균 소득이 120만 원 이하여요. 대개가 자기 전공도 못 살립니다. 운동만 해서 그래요. 운동하면서도 무엇을 했어야 해요? 다 ‘경영 관리자가 된다.’ 같은 ‘학’도 준비를 했어야지요. 라이센스도 준비를 했어야지요. 그래서 자기가 강의를 설 수도 있는 준비도 하고 학위도 준비하고 했어야지. 왜 그것밖에 안 보입니까. 자신이 현장에서만 계속 춤추고 노래하고, 현장에서 뛰어다닐 줄 알았나요. 음양의 이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나도 체력이 떨어질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나는 더 많은 시간을 현장에 할애하기 보다는 후배들을 경영관리하고 전체를 경영 관리하는 것을 준비해야지요. 저도 똑같아요. 저도 청소년교화를 하고 있지만 가족교화 노인교화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왜? 내가 나이 먹고 청소년 교화하면 애들이 싫어하니깐 내가 알아서 피해야지요. 그때는 내 또래 노인들과 함께 놀아야지요. 마음은 청춘이지만 애들이 싫어하는 걸 어떡하겠어요. 이것이 바로 음양의 이치를 아는 사람입니다. 전체를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못난이같이 하나만 보고 달리지 마라. 이것도 하기 어려운데 하는 사람은 국이 작은 사람입니다. 사람의 능력이라는 것은 이것도 하기 어려운 데가 아니라 이것도 하고 이것도 할 수 있는 능력이 본래 있습니다. 대종사님이 그것을 뭐라고 하셨어요? 무궁한 보물과 무궁한 묘리와 무궁한 조화가 우리 안에 본래 갖춰져 있다. 내가 나를 신뢰하지 못하고 내가 나의 그것을 쓰질 못하고 신분의성을 들이대지 못한 나의 잘못이지. 누구나 원리에 맞게 하기 만 하면 시기의 장단은 있을지는 모르나 반드시 이룰 수 있습니다. 저는 원불교 만나서 거의 뜻대로 다 되었습니다. 100% 다 되지는 않았지만 거의 다 되었어요. 왜? 원불교 공적인 것만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원리가 그런 것 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이것도 될까 하면 그것도 안 돼요. 그렇지만 이 것 충분히 하고 남겠다는 일은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러한 능력이 이미 있는 거여요. 그 것을 믿는 게 원불교의 제일 첫 째의 신이여요. 나라는 것은 본래 부처고 무궁한 능력이 있는 존재다. 전지전능한 능력이 원래 있다고 믿는 것이 원불교의 신앙의 첫째입니다. ‘그런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교무님.’ 하시는 분은 원불교 신앙 자체가 출발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지요.
Q. 권도훈 교우님
49장에 견성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하는데 초견성, 중견성, 상견성이 있다고 하는데 중견성은 대와 소가 변화는 것을 아는 것이고 상견성은 대소 유무자리를 아는 것인데 차이는 알겠는데 중견성에서 대가 소가 되고 소가 대가 되는 것을 알면 유가 무가 되고 무가 유가 되는 것을 자연히 될 것 같은데 그 둘의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대산종사법어 제 4 적공편 49장 대산 종사 말씀하시기를 「견성에는 3단계가 있나니, 첫째는 초견성(初見性)으로 불생불멸의 본체 자리와 일체중생의 본성 자리인 대의 자리를 아는 것이요, 둘째는 중견성(中見性)으로 대가 변하여 소가 되고 소가 변하여 대가 되는 대와 소의 자리를 아는 것이요, 셋째는 상견성(上見性)으로 대가 소가 되고 소가 대가 되며 유가 무로 되고 무가 유로 변하는 대소 유무의 자리를 아는 것이니라. 이 세 단계를 거쳐야 견성에 토를 뗀 사람이니라.」 |
A. 보산 김제원 교무님
초견성은 불생불멸의 본체자리, 일체중생의 본래 마음자리, 성품자리인 대 자리를 아는 것인데 초견성을 한 것은 목수가 먹줄과 잣대를 얻은 것과 같다. 마치 책을 읽으려는 사람이 가나다를 아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가나다를 안다고 해서 소설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죠. 아직 그 정도는 아니고 있고 안다. 아 이거구나 하고 아는 것입니다. 첫째 대자리를 아는 것이다. 나라는 것은 육신이 나가 아니라 이 육신을 운용하고 있는 그 것이구나 육신을 운영하고 있는 성품자리가 있구나, 이것을 탁 잡는 것입니다. 초견성만 해도 삶의 방향이 바뀝니다. 초견성하기 전에는 현상의 세계에 집착되고 현상의 세계의 부분이 난 줄 압니다. 예를 들어서 육신이 나다, 이름 지어진 내가 나다 변화하는 내가 나다 성과가 있는 내가 나다. 어디집 아들의 무슨 성씨의 누가 나다 보통 이런 것이죠. 아직 초견성을 하지 않은 것이죠. 초견성을 하고나면 그것이 내가 아니라 초견성 바로 전이 어디에 걸려있냐면 지금 제 목소리 듣고 아는 이것이 있습니다. 귀가 듣고 눈이 보고 만져서 아는 것이 있습니다. 귀, 눈은 장치죠. 이걸 이용해 듣고 아는 마음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머리에나 가슴에 실체가 있어서 아는 것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대자리를 아는 사람은 아 그냥 아네? 이 것이라는 게 있어서 아는 줄 알았는데 그냥 안다는 것을 아는 것을 대 자지를 아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나라고 할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진공이구나. 그러면서 작용만 소자리로 있어지는 구나 등은 전구가 있으니까 빛이라는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전구가 없으면 작용을 못하죠?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전구와 같은 실체가 없죠. 그렇지만 작용은 이렇게 있고 훤히 아는 것이죠. 이것이라는 게 있어서 있는 줄 아는 사람은 견성을 아직 못한 것입니다. 이것을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있는 나를 위해서 최대한 아등바등 사는 것입니다. 견성을 못한 중생은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자존심, 체면, 상대심에 유형의 것을 찾아서 행복에 대한 틀을 놓고 사는 것입니다. 행복은 좋은 여자를 만나고 좋은 직장을 가지고 좋은 집에서 비싼 차를 타고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내가 쓰고 싶은 데로 팍팍 쓰는 것이 행복이구나, 하며 인간낙만 아는 중생은 아직 견성을 못한 사람이여요. 그런데 견성을 한 사람은 이것은 유형이 변하는 것이지 참 나의 실체가 아니구나, 이게 실체라면 내가 생을 마감하면 나는 어디로 가는가? 그래서 대 자리를 아는 사람은 불생불멸의 본체라고 했죠. 이 마음이라는 것은 생긴 바도 없고 멸한 바도 없어. 그래서 분명 없으면서 있고 있으면서 없어. 이 대자리를 알면 삶의 방향과 가치가 달라집니다. 생사관, 진리관, 가치관, 인생관이 달라집니다. 이것만 해도 초견성입니다. 여러분들이 몸에 가지고 있는 것 애기들도 거의 다 가지고 있지요? 그렇지만 애기들은 힘이 없지요? 그와 같은 것이지요. 초 견성은 애기와 같이 있을 것은 다 있고 알 것은 다 아는데 그런데 힘이 없어서 경계가 오면 무너져버리는 것이지요. 중견성은 소 자리까지 아는 것이지요. 초견성은 전체 틀만 봤지만 소소하게 디테일하게 소자리로 가서 온 몸이 대자리지만 장기도 있고 온갖 것들이 다 있잖아요. 그 것들을 아는 것이 소 자리를 아는 것 과 같은 것이지요. 그런데 거기서 끝나냐. 그게 아니라 유무자리 유무를 한마디로 하면 인과입니다. 대소유무를 조물조물 해야 비로소 인과에 토가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인과를 믿는 수준이죠? 딱 불리하면 인과를 뒤로 제치고 자기합리화를 해버리죠. 욕심 경계가 오면 에잇 먹어버리자 취해버리자 건드려버리자. 그런데 상견성까지 가신 분들은 하라고 해도 못합니다. 인과를 확실히 알아서 응용해버립니다. 여러분들은 잘했을 때만 인과를 믿고 싶잖아요.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상 받을 때는 인과가 확실하다고 하지요. 불리하거나 억울할 때 이해가 안 될 때 꼬였을 때, 내 뜻대로 안 될 때는 인과를 믿지 않으려고 하지요. 그런 사람은 상견성에 못 간 것이지요. 대소유무를 조물조물해야 유무 인과에 대해서 이것이 어떤 뜻이 있고 곡절이 있구나 합니다.
여러분들은 생긴 대로 놀고 있지만 그 것도 그대로 인과입니다. 이것을 알면 수용을 하게 됩니다. 감수불고하게 되었습니다. 달게 받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부모에 대한 원망 나는 누구보다 머리가 안 좋나, 우리 집은 가진 게 없나, 왜 인물이 이렇게 생겼나, 온갖 불평불만이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너무너무 평등한, 누구에게나 평등한 진리에 따라서 지은대로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환경도, 빈부귀천도, 지혜도, IQ도, 인연도 다 지은대로 받은 것이지요. 상견성까지는 가야 기쁘게 감사생활이 가능한 것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공도자 준성, 현승 교우님!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ㅠ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