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7장은 일명 “산상설교”입니다. 산상설교 안에는 주기도문, 팔복, 집 짓는 자 비유 등 중요한 말씀들이 들어있습니다. 마태복음 4:17절을 보면 예수님은 막 사역을 시작하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왔다”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가 그의 사역 핵심임을 강조합니다. 마태복음 4:23절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 주요 사역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소개합니다. 즉, “가르치고, 전파하며, 치료한다”입니다. 마태복음 9:35절을 보면 개역개정 성경은 마태복음 4:23절과 약간 다른 것처럼 번역하였지만, 원어를 보면 세 개의 분사로 이루어진 세 개의 구절이 똑같습니다. 시작과 끝이 같은, 즉 인클루지오(inclusio) 구조로서 그 가운데 있는 내용이 무엇인가를 설명합니다. 결국 마태복음 5~9장의 전체 내용이, 총주제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나라 선포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먼저 마태복음 5~7장으로서 가르침, 즉 산상설교로 하나님 나라의 선포입니다. 둘째는 마태복음 8~9장으로서 고치심, 즉 10개의 기적 이야기 소개로서 하나님 나라 선포입니다. 가르침, 고치심도, 즉, 산상설교도, 열 개의 기적 이야기도 모두 다 하나님 나라 선포가 핵심 주제입니다.
사도행전 1:3절을 보면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40일 동안 계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삼 년 내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는데, 부활 이후 승천까지 40일 동안도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모든 사역의 중심이 하나님 나라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산상설교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는 제자(하나님의 백성)가 추구해야 하는 삶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려줍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원리를 소개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산상설교는 마태복음 5:3~7:27절까지이며, 마태복음 4:23~5:2절과 7:28~8:1절은 산상설교를 감싸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1~2절은 산상설교의 준비에 해당합니다.
팔복 중에 첫 번째 복에 해당하는 마태복음 5:3절을 원어대로 직역하면 “영으로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 하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입니다. 팔복 중에 여덟 번째 해당하는 마태복음 5:10절을 원어대로 직역하면 “의를 위해 핍박 받는 자는 행복하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입니다. 인클루지오 구조입니다. 팔복의 핵심(주제)이 하나님의 나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1절을 보면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라고 말씀합니다. 산상설교를 듣는 대상이 두 종류입니다. 1차 대상은 제자들, 2차 대상은 무리입니다. 왜 두 대상을 분리합니까? 제자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 복이 무리에게 전해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장소는, 사역의 센터는 가버나움입니다(마태복음 4:14절, 누가복음 4:31, 7:1). 가버나움은 별명이 “이방인의 갈릴리”입니다. 가버나움은 교통의 중심지로서 남에서 북으로, 동에서 서로 이어지는 곳입니다. 지중해에서 요단강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연결되는 지점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전 지역에서 헬라 말이 가장 많이 통용되었던 지역 중의 하나입니다(예: 요한복음 12:20~22절 빌립, 안드레 헬라어 구사).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의 중심이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가버나움에서 시작합니다. 그곳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전지역으로 확대됩니다. 마태복음 4:25절을 보면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사역 시작이 예루살렘이지만,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유대인 지역을 넘어 이방인 지역으로까지 확대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 나라의 복이 예루살렘뿐만 아닌 이방인 지역에까지 확대되어야 함을 알려줍니다.
마태복음 5:1~12절을 보면 가장 기억되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복이 있도다!”입니다. 즉, 원어로 보면 “마카리오이”입니다. 사실은 8 복이 아니라 9 복입니다. 핍박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진짜 하나님의 나라 복이 됩니다. 왜냐하면 마지막인 핍박 받는 복을 가장 길게, 세게 말씀합니다(마태복음 5:10~12절). 11~12절을 보면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할 때, 복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 복입니다. 그러므로 “복이 있도다”라는 말을 “하나님 나라의 복이 있도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즉, “신자들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을 받는다 ”입니다. 이미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무엇하면 복이 있다”가 아닙니다.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 복을 누리면서 더 큰 하나님의 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현재적인 복을 누리면서 더 큰 복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8 복의 핵심 단어는 마태복음 5:2절의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입니다. 가난하니까 울 일이 많습니다. 실컷 우니까 마음이 편안해지고 부드러워집니다. 이런 식으로 모든 내용이 하나하나 전개됩니다. 움직여갑니다. 그러나 이미 현재적인 복을 누리고 있는데도 가난합니다. 그래서 의에 주리고 목이 마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나라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복 받으니,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사람을 대합니다. 마음이 둘로 갈라지지 아니하고 오로지 하나님을 향합니다. 한눈 팔지만 이것이 길이 아니구나 하고 돌아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 손길이 되어 하나님의 화목을, 샬롬의 은혜를 누리고 나누고 실천하는 하나님의 아들, 딸로 서게 됩니다. 그리고 핍박에 굴하지 않고 절망과 좌절이 있더라도 끝까지 갑니다.
결국 이런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뇌리에 강하게 박히기를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 복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 복이 시작된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사역을 시작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 복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 복이 시작이니까, 시작된 복을 더 경험하고 더 경험하면, 후에는 하나님의 나라 복 받은 사람의 인품과 행위가 점점 더 나옵니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우리 안에 역사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들고, 그 하나님의 복을 더 갈망하게 하고, 추구하게 해서 끝까지 나아가게 합니다. 그러면서 산상설교의 8 복, 9 복을 두 단어로 요약하는데, 소금이란 단어와 빛이라는 단어입니다.
“소금이 되라”, “빛이 되라”가 아닙니다. “소금이다”, “빛이다”입니다.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복이, 무시할 수 있는 복이 아니고 미미한 복이 아니고, 우리의 존재와 활동을 바꾸어 놓는 방향으로 나갑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 운동을 하고,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나타내고,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말씀을 함으로써 이 모든 것이 실현됩니다.
“세상의 소금”(13절)에서 “세상”은 원어로 “게”로서 “땅”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땅의 소금”으로 번역해야 맞습니다. “세상의 빛”(14절)에서 “세상”은 “코스모스”로서 우주, 즉 우주 공간까지 포함하는 세계 전체를 의미합니다.
“땅의 소금”이라고 말씀할 때, 사람들은 그 역할이 무엇인지에 집중해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소금은 부패를 방지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부패 방지 역할에 초점이 맞추어 있지 않습니다. “소금의 맛”입니다. 즉, “짠맛”입니다. 해 하필이면 소금의 맛이라고 했을까요? 맛의 독특성 때문입니다. 짠맛은 소금만 낼 수 있습니다. 짠맛 내는 것은 이것 외의 물질은 없습니다. 자연 상태로는 없습니다. 인공으로는 가능할지 모릅니다. 너희는 세상 가운데 독특한 하나님 나라의 맛을 내는, 소금처럼 너희만 낼 수 있는 맛을 내라는 것입니다. 제자의 맛을 내라, 이것이 제자의 역할이라는 의미입니다.
“세상의 빛이다”에서 “빛”은 어두움 가운데 자신의 존재를 확연히 드러냅니다. 어두움과 빛은 너무나 확연히 구분됩니다.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은 사라집니다. 그러면 빛은 어디서 옵니까? 요한일서 1:5절을 보면 “하나님은 빛이고 어두움이 조금도 없다”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8:12절을 보면 “내가 곧 세상의 빛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빛입니다. 하나님, 예수님은 스스로 빛을 내지만,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받은 빛을 세상에 드러내는 역할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면 그 결과로 빛이 나는데, 마태복음 5:16절의 “착한 행실”이고, 결국 “착한 행실”이 하나님 통치의 결과입니다.
마태복음 5장의 하나님의 나라 복 선언으로 시작해서, 마태복음 6장의 실천, 즉 하나님 나라의 복을 실현하고 실천해 가는 복의 과정으로서 실천적 삶(착한 행실)을 소개합니다. 마태복음 7장에 가서 특별히 하나님의 나라 복과 인간과의 관계를 말씀합니다. 물론 마태복음 6장에서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나라 복을 어떻게 구현하는지 말씀합니다.
그리고 결론에 가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모래 위에 지은 집이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지은 집이라고 말씀합니다. 마지막 종말의 심판의 날의 때에 행하지 않는 자는 설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복은 우리의 삶에 엄청난 변화의 자극제가 됩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말씀한 내용이 마태복음 5:19~20절입니다. 마태복음 5:19~20절을 보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 복을 현재 누리는 사람은 예수님을 힘입어,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해석된 계명,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실천하는 삶을 삽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능가하는 의입니다.
마태복음 5:20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맞추어 가는 의를 말씀합니다. 산상설교를 보면 의를 말할 때 항상 그 의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는”(마태복음 5:10절), “나 때문에 핍박받는 자는”(마태복음 5:11절), 즉 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즉 그 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물로 주어지는 의가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행하고 실천해야 하는 의입니다. 우리가 노력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의에 주리고 목마르면 자동으로 목마름과 굶주림이 해소되는가요? 아니면 의에 주리고 목마르면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채워주십니까? 하나님 나라 복이 시작되면서 우리 내면을 바꾸고, 우리의 행동을 바꿉니다.
서기관, 바리새인의 의에는 내면의 변화는 없습니다. 행동만 바꾸는 것입니다. 행동으로 죄짓지 않으면 괜찮습니다. 눈으로 죄를 지어도 괜찮습니다. 마음으로 죄를 지어도 괜찮습니다.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눈으로 안 되고, 마음으로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 복을 예수님 때문에 자격 없는 나에게 주어졌으니, 이 능력이 내 성품을 변화시키고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습니다.
마태복음 7:20절을 보면 “나무는 그 열매로 알리라”라고 말씀합니다. 농부는 처음부터 압니다. 하나님이 열매로 안다는 것입니까? 너희가 열매를 보고 안다는 것입니까? 너희가 어떤 종자인지 확인하고 새 사람으로 살아가는지 옛사람으로 살아가는지, 하나님의 백성인지 사탄의 백성인지 확인하고 은혜를 구하고, 고쳐 달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복이니까 계속 가지고 싶다는 열망이 어디서 살아납니까? , 내 삶의 현장에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복 선언은 우리 의식 속에 너는 세상의 복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복을 받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나라 복이 시작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새기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너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 복 누리고 추구하는 사람으로 살라입니다.
구약의 두 인물로 얘기하면 에서가 아니라 야곱입니다. 에서는 세상의 나라 복 받은 자이고, 야곱은 하나님의 나라 복 받은 사람입니다. 야곱은 세상의 복도 받고 하나님의 나라 복도 받은 자가 아닙니다. 사실은 야곱이 죽어서야 왕과 같은 장례식을 아들 총리가 치러줍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복도, 세상의 나라 복도 가지겠다는 것은 욕심이고, 그렇게 안 됩니다. 예외적으로 극소수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현 세상 나라 복을 받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세상 나라, 즉 새 하늘과 새 땅의 복을 받는 자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저기 저 나라”가 아닙니다. 여기 이 나라에, 이 세상에, 이 땅에 이루어질 나라입니다. 찬송가 가사대로“거기서 거기서”가 아니라 “여기서 여기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복이 시작되고, 계속 진행되고 있고, 그리고 이루어져 가는데, 이것을 다른 말로 요약하면 하나님을 닮아가는 자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48절을 보면“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 즉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마태복음 7장의 산상설교의 결론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그래서 반석 위에 지은 집을 짓는 자가 될 수 있습니까? 마태복음 6장을 보면 기도의 교훈이 나옵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 복이 확산하여서 내 삶에 영향을 주고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도로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