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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에 쓰는 편지 】
K 시인에게
변종환 (시인 · 한국바다문학회 회장)
K 시인님!
송수권 시인. 그의 호는 평전(平田)입니다. 그는 1940년 전라남도 고흥군 두원면 학림마을에서 아버지 송기담과 어머니 이수금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습니다. 고흥 두원초등학교와 고흥중학교를 거친 그는 1959년 순천사범학교와 1962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였으며 1975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산문에 기대어」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했습니다.
당시에 그는 그것도 35세의 늦깎이 나이로 시인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사실상 이어령 문학평론가에 의해서였습니다.
원고지가 없어 갱지에 써서 투고한 까닭에 시인 지망생이 원고지 쓸 줄도 모른다고 판단한 편집위원이 휴지통에 쳐 박아 넣어버렸습니다. 게다가 주소도 여관방이었으니 더욱 그러했겠지요.
《문학사상》 주간이었던 이어령 이화여대 문리대 교수가 우연히 휴지통 속 수북한 원고뭉치를 발견하고 송수권 시인이 투고했던 「산문에 기대어」 외 4편의 원고를 찾아냈습니다.
이런 당선자를 찾느라고 무려 1년이나 걸렸다고 합니다. 송수권 시인은 한때 충장로에서 만나는 거지에게 동전을 매번 던져준 적이 있었습니다. 자비심의 발로가 아니라, 자신이 구원 받았다고 느끼는 일종의 보상 심리에서였습니다.
그는 거지를 향해 외쳤습니다. '하루의 배고픔을 원망하지 말라. 너의 깔 자리가 낮다고 투정하지 말라. 이 세상에 살아있어 너는 빛을 만들고 있지 않느냐!'(<동아일보>, '91. 6. 17.) 거지로부터 받은 이 구원의식은 현재까지 시인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누구나 다 아는 일화로, 그는 이른바 '휴지통 속의 시인'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산문(山門)에 기대어
송수권
누이야
가을산 그리매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山茶花)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매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 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뛰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매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 옴을
- 월간『문학사상』 1975년 2월호 등단시
그의 등단 시이면서 대표 시이기도 한 「山門에 기대어」. 이 시는 불교적 내세관과 인연설에 기초하여 죽은 누이에 대한 그리움과 한(恨)을 새로운 만남에 대한 소망으로 승화시킨 작품입니다. 또한 이 시는 ‘현재’에서 ‘과거’로 되돌아보는 회상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회상의 매개는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입니다. 화자는 산사의 입구에서 가을 산의 단풍이 든 아름다운 풍경을 지켜보다 문득 죽은 누이를 떠올리고 누이의 삶과 한을 회상하며 그것이 현재까지 이어져 옴을 느끼는 것입니다.
1연에서 시인은 가을산 그림자에서 누이의 모습을 떠올리고, 누이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과 한의 정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눈썹’은 죽은 누이의 인상을 떠올리게 하는 소재로, 죽음이자 부활되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누이와 재회하게 될 것을 불교적 윤회의 관점에서 기대하게 되지요. 살아서 만날 수야 없겠지만, 내세에서 누이와의 만남을 기대하는 것이지요. 죽은 누이의 혼은 물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또는 물속에서 반짝여오던 돌의 모습으로 부활됨으로써 생명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자는 스스럼없이 누이에게 산다화를 건넬 수 있는 것입니다.
2연에서 시인은 강물에 비친 기러기 떼의 모습에서 누이를 떠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 두’는 제의(祭儀)를 통해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죽은 누이와 재회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3연에서 시인은 누이와의 만남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누이의 눈썹이 새로운 생성을 상징하는 ‘못물’에 비쳐 오는 것으로 형상화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연은 누이의 부활 내지 환생에 바치는 시인의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에서의 '산문'은 단순히 절문이 아니라,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경계의 문으로 윤회와 부활을 상징합니다.
첫째 연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목적어인 '가을 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의 의미는 죽음입니다. 시인의 전기적 사실을 참고한다면, 군에서 제대하고 돌아와 자살한 동생을 누이로 대치시켜 누이의 눈썹이 가을 산 그림자에 묻혀 떠돌고 있는 이미지로 부각시켜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시인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무주고혼(無主孤魂)으로 인간이 이승에서 못 다 풀다 간 한(恨)의 덩어리입니다. 그러나 그가 힘의 역학을 추구하면서 한의 덩어리가 승화되기를 누누이 강조한 점을 고려해 볼 때, '눈썹'이란 죽음이자 부활되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목적어는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이지요. 여기서 '즈믄 밤의 강'은 모든 것을 잠재우고 어둠 속에 묻어 버린 대상으로 결국은 죽음의 이미지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누이가 보는 것은 그런 강이 아니라, 그 강이 '일어서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재생'의 패턴 속에서 강은 살아나고 있는 것이지요. 시인의 자작시 해설에 따르면, 죽은 누이의 혼은 신선한 물방울로 나타나기도 하고,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로, 또는 물속에서 반짝여 오는 돌의 모습으로 부활하여 생명을 얻습니다.
이렇게 일관되게 추구된 부활 의지는 마침내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건네이던' 암시적 행위로 마무리됩니다. '누이야 ∼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의 마지막 목적어인 이 행위는 누이가 겪은 부활의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자, 불교에서 말하는 생명의 인과 법칙과 윤회를 암시해 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결국 '산문에 기대어'라는 이 시의 제목과도 일치되는 관조와 깨달음의 세계라고 볼 수 있지요. 그의 이런 삶의 태도 안에는 불교의 연기관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옷은 날아 해어져야만 다시 새 옷을 입게 되듯이 이별이 있은 뒤엔 또 다른 만남이 있고, 소멸 뒤엔 다시 생성의 논리를 시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智異山 뻐꾹새」라는 시도 그렇지만, 이 시에서도 거의 그와 같은 시세계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의 작품이 갖는 이러한 불교적인 색채는 관조의 힘으로 작용을 하기도 하는데 정작 그는 불교도가 아닙니다. 실로 아이러니하다 아니할 수 없지요.
시인의 순수하고 뛰어난 역량의 남도적 가락은 김영랑, 이미지는 정지용, 능청스러움은 미당 서정주, 순수성은 박재삼 시인에게서 작품을 통해 골고루 배웠습니다. 그의 <서정시>를 유종호 문학평론가는 '소리와 뜻 사이의 망설임'이라고 풀이했습니다. 그 '망설임'을 진하게 행동할 줄 아는 송수권 시인은 우리 시단의 귀한 시인입니다.
그의 참다운 민족적 흙내가 배지 않은 서정은 젊은이의 '카페서정' 탓이라고 질타합니다. 또 시인이 행동적 운동권에 속해야만 한다는 그들의 논리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시 「누가 죽어 다시 이 땅을 지키는가」에서 그는 쩌렁쩌렁하게 핏대 올립니다. '나는 위대한 광주라고 노래하지 않겠다/개뼈다귀 같은 광주라고 노래하지 않겠다/창녀 같은 광주라고 노래하겠다/단 한 번의 싸움으로 끝나버린 광주/5월 팔고 6월 팔고 시인이 된 광주/국회의원 총장이 된 광주/무등산 팔고 혁명 팔아 치부한 광주/당신이 위대한 광주라고 노래하는 동안/나는 더러운 광주라고 노래하겠다'고. 광주 예인들이 그렇게들 ‘애국 광주’ 하고 떠들었지만 실제로 시인 '지식인' 평론가는 단 한 사람도 죽지 않은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망월동이 부끄럽다. 참된 운동권이 아니라고 많은 예술인들을 매도하며 행동하는 양심을 부르짖던 저들에 대한 송수권 시인의 융단폭격입니다.
그러나 그는 개운치 않았습니다. 그저 오해의 여지가 있어 가슴 아플 뿐이었습니다. 광주의 5월 이전인 1984년, 광주시인 송수권이 서울시인에게 보내는 공개장 「우리 詩人들 그동안 무얼 했는지요」를 띄우기도 했습니다. 그는 질그릇인 「아도(啞陶)」에서 광주를 새로 읽었습니다. 이 시는 말하자면 시인의 광주시대의 시적 편력기라 할 만하지요.
아도란 무엇이냐
질그릇이다.
인사동 골짜기의 고물상 같은 데 가서 만나보면
입은 기다랗게 찢겨져 있고 두 귀는 둥글게
구멍이 패여 있는
입이 있어도 벙어리고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인
못생긴 우리네의 질그릇이다.
유언비어를 날조하거나
겁장이 지식인들의 입을 누르는
그것은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은밀히 건네는
유가풍의 禁書와 같은
질그릇이다.
그는 계속 이어나갑니다. '우리들의 입에 재갈 물리고 귀에 자물쇠 채우는/이 희한한 물건'에게 거듭 말합니다.
'나는 오늘 이 도시의 어디선가/목을 조르며 도둑고양이처럼 오는 최루탄 개스에/재채기 콧물 눈물범벅이 되면서/잎 핀 오월의 가로수 밑에 비틀거리면서/그 시대에서 한 발짝도 더 깨어나지 못한/또 하나의 아도가 되어가는 내 모습을 본다./아도 아도 아도 아도 아아아아 아도/이 땅의 시인이여 만세.'
자조 섞인 시적 화자의 속내를 캐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 같은 한과 토속 공간의 시로 「며느리밥풀꽃」이 있습니다.
며느리밥풀꽃
송수권
날씨 보리 뜰에 내려
그 햇빛 너무 좋아 생각나는
산부추, 개망초, 우슬꽃, 만병초, 둥근범꼬리,씬냉이, 돈나물꽃
이런 풀꽃들로만 꽉 채워진
소군산열도, 안마도 지나
물길 백 리 저 송이섬으로 갈까
그중에서도 우리 설움
뼛물까지 녹아흘러
밟으면 으스러지는 꽃
이 세상 끝이 와도 끝내는
주저앉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꽃
울 엄니 나를 잉태할 적 입덧 나고
씨엄니 눈 돌려 흰 쌀밥 한 숟갈 들통나
살강 밑에 떨어진 밥알 두알
혀끝에 감춘 밥알 두 알
몰래몰래 울음 훔쳐 먹고 그 울음도 지쳐
추스름 끝에 피는 꽃
며느리 밥풀꽃
햇빛 기진하면은 혀 빼물고
지금도 그 바위섬 그늘에 피었느니라
김주연 문학평론가는 '고전적 장엄함과 토속적 정서의 맛이 잘 어우러진' 작품이라고 상찬했습니다.
며느리가 밥이 잘 됐나 하고 한두 알 먹다가 시어미에게 들킨 것이 결국 죽음으로까지 치달음으로써 환생한 꽃이라던가요. 이 눈부신 언어 조탁을 보십시오.
고형진 문학평론가는 송수권의 시를 '토박이말에 대한 한없는 애정,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우리 겨레의 깊은 정서에 대한 표출, 소리 이미지에 대한 은밀한 감각'으로 축쇄 · 정리하고, 허혜정은 그의 시가 '애욕의 살 냄새와 탈속에의 갈망이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독특한 울림'을 준다면서 시 「쪽빛」의 쪽빛 바다를 '침묵과 소리의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책'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쪽빛
송수권
아무도 없다
내가 앉은 자리
때늦은 숨비기꽃 몇 송이 막 피어나고
신선한 아침햇빛 입을 대다
기절한다.
아무도 없다
내가 앉은 자리
무심히 조약돌을 던지면
팽팽한 수평선 입을 벌리고
바다는 서슬진 유리처럼 퍼어런
금이 선다
아무도 없다
저 물 밖 물쟁이로 떠돌다 온 세월
내 영혼 속에 잠든 바다
쪽빛 물발로 깨워서 당신의 이름
뜨겁게 부르리라.
아무튼 송수권 시인에 대한 평가는 다양합니다. 그가 우리나라 시 문단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매우 커다란 업적을 남긴 시인이란 점은 이구동성입니다. 故 이성선 시인은 "지금 바로 곁에서 들리는 듯한 고랑 깊은 소리가 처음 만난 그의 몸에서 들려왔다"며 송수권 시인에 대한 첫인상을 남겼습니다.
오세영 시인은 질박한 전라도 토속어와 민족정서를 아름답게 형상화해 온 송수권 시인의 시에 대해 "전라도의 질박한 토속적 어법을 독특하게 구사해 한국어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했습니다.
또한 오탁번 시인은 "이제 그는 「우리나라의 숲과 새들」처럼 가까운 이웃에게 사랑받는 가장 빼어난 서정시인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났다"고 말하면서 장중한 역사적 안목으로 시선을 확대했다가도 미세한 풀잎의 움직임을 살필 줄 아는 자유로운 의식의 소통을 "광활한 시적 상상력이 세밀한 정서와 조화를 이루면서 절정의 수준에 이르고 있다"는 말로 평가했습니다.
우리 나라의 숲과 새들
송수권
나는 사랑합니다 우리 나라의 숲을, 늪 속에 가라앉은 숲이 아니라
맑은 신운(神韻)이 도는 계곡의 숲을, 사계(四系)가 분명한 그 숲을
철새 가면 철새 오고 그보다 숲을 뭉개고 사는 그 텃새를 더 사랑합니다,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오신다든가
뱁새가
작아도 알만 잘 낳는다든가 하는 그 숲에서 생겨난 숲의
요정의 말까지를 사랑합니다
나는 사랑합니다, 소쩍새가 소탱소탱 울면 흉년이 온다든가
솔짝솔짝 울면 솥 작다든가 하는 그 흉년과 풍년 사이
온도계의 눈금 같은 말까지를,다 우리들의 타고난 운명을 극복하는
말로다 사랑합니다, 술이 깬 아침은 맑은 국물에 동동 떠오르는
동치미에서 싹독싹독 도마질하는 아내의 흰 손이 보입니다, 그 흰 손이
우리 나라 무덤을 이루고, 동치미 국물 속에선 바야흐로 쑥독쑥독
쑥독새*가 우는 아침입니다
나는 사랑합니다, 햇솜 같은 구름도 이 봄날 아침 숲길에서
생겨나고, 가을이면 갈꽃처럼 쓸립니다, 그 보다는 광릉 같은데,
먼 숲길쯤 나가 보면 하얗게 죽은 나무들을 목관악기처럼 두둘기는
딱따구리는 저 혼자 즐겁습니다
나는 사랑합니다, 텃새, 잡새, 들새, 산새 살아넘치는
우리 나라의 숲을, 스 숲을 베개 삼아 찌르륵 울다 만 찌르레기새도
우리 설움 밥투정하는 막내딸년 선잠 속 딸꾹질로 떠오르고
밤새도록 물레를 감는 삐거덕,삐거덕, 물레새 울음 구슬픈
우리 나라 숲길을 더욱 사랑합니다.
* 쑥독새 : 표준어는 쏙독새임.
K 시인님!
중국 당나라 시대의 시인 두보(杜甫)의 시를 감상하며 잠시 생각해봅시다.
曲江二首 (곡강에서 제2수)
朝回日日典春衣 (조회일일전춘의) 조정에서 돌아오는 날마다 봄옷 저당 잡히고
每日江頭盡醉歸 (매일강두진취귀) 매일 강가에 나가 흠뻑 취해 돌아온다.
酒債尋常行處有 (주채심상행처유) 술빚이야 늘 가는 곳마다 깔려 있는데
人生七十古來稀 (인생칠십고래희) 사람이 일흔 살까지 사는 건 예로부터 드문 법.
穿花蛺蝶深深見 (천화협접심심현) 꽃 사이 호랑나비 깊은 꽃그늘 속에 나타나고
點水蜻蜓款款飛 (점수청정관관비) 물 찍는 잠자리 느릿하게 날아간다.
傳語風光共流轉 (전어풍광공류전) 여보게 풍경이여, 나도 함께 흘러가세.
暫時相賞莫相違 (잠시상상막상위) 잠시 서로 감상해야지 거스르진 마세.
이 시는 두보(杜甫)의 「곡강에서(曲江二首)」 가운데 두 번째 작품입니다.
얼핏 보면 이것은 가난한 말단관리의 하릴없는 일상을 묘사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문학작품을 감상할 때에는 그것을 창작할 당시 작자의 상황을 고려해 보아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제 그 배경을 좀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756년 6월 장안(長安)은 안녹산과 사사명의 반란군에게 점령당했습니다. 당시 두보는 가족을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다가 숙봉(肅宗)이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있는 영무(靈武)를 향해 길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도중에 반군에게 붙들려 다시 장안으로 압송되는데, 어렵사리 그곳을 탈출하여 마침 그가 이른 봉상(鳳翔)으로 온 숙종을 알현하고, 좌습유(左拾遺)라는 벼슬을 받게 됩니다. 품계는 낮아도 황제에게 직접 간언을 하는 직책인 만큼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벼슬이었으나, 그는 황제에게 미움을 받고 있던 방관(房琯)이라는 대신을 옹호하다가 결국 내쫓기고 맙니다.
757년 9월, 당나라 군대가 장안을 수복했고, 두보도 장안으로 돌아와 다시 좌습유의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미운털이 박힌 처지라 황제는 그의 간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결국 이듬해 6월에 그는 화주(華州)의 사공참군(司功參軍)이라는 말단 지방관으로 좌천되고 맙니다. 이 시는 그런 상황 속에서 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시에서, 늦봄이긴 하지만 아직 입을 수 있는 봄옷을 저당 잡혔다는 것은 시인의 궁핍한 상황을 잘 말해줍니다. 당장 입을 수 있는 옷도 저당 잡히는 마당인데, 겨울옷은 벌써 예전에 전당포에 들어갔을 터이지요. 그렇게 생긴 돈으로 날마다 만취하도록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심정은 오죽했을까요? 백 년도 안 되는 인생 뭐 별거 있나 하는 푸념이 절로 나올 법합니다. 사실 여기엔 교묘한 한문의 수사법이 들어 있습니다. ‘늘’이라는 부사로 번역한 ‘심상(尋常)’이라는 단어는 수를 나타내는 글자이기도 하지만, 옛날에는 8자를 ‘심(尋)’이라 하고 그것의 2배를 ‘상(常)’이라고 했으니, 이 구절은 술빚이 8자인지 16자인지 모르게 많이 쌓여 있다는 뜻도 됩니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다음 구절의 일흔 살이라는 숫자와도 짝을 이룹니다.
어쨌든 그런 그의 눈에 꽃 사이를 즐겁게 노니는 나비와 수면을 찍어 알을 낳고 느릿느릿 나는 잠자리가 들어오니, 그 평화와 자유로운 풍경이 시인의 부러움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도 그 흐름에 동참할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하지요. 다만 그 호소는 자신의 언어와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숙종과 같은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자연을 향한 것일 겁니다.
냉정히 보자면 삶은 순간순간이 고통이고 번뇌의 연속입니다. 그러므로 현재를 즐기라는 말은 물질적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이상주의적 설교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시를 비롯한 문학이 존재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고통을 고통으로, 번뇌를 번뇌로 즐기는 마음의 자세에 익숙하면 고통과 번뇌의 순간순간에 오히려 깨달음처럼 찾아오는 정화(淨化)의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밤이 깊었습니다. 적막 속에서 무언가 빛나는 영감이 있을 것만 같습니다.
이 밤 행복한 시간 되시고 내일을 준비하는 정정한 마음이길 바랍니다.
건강하십시오.
牧 雲 올림.
■ 변종환 ■
* 現, (사)한국바다문학회 회장 · 한국문인협회 이사 ·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 (사)부산예총 감사 · 부산진구문화예술인협의회 회장
* 부산문인협회 회장 · 부산시인협회 회장 · 한국문예연구문학회 회장 역임
* 시집 『水平線 너머』(1967‧親學社) 『풀잎의 잠』(2010·두손컴) 『松川里에서 쓴 편지』(2015·두손컴) 등 5권 * 산문집 『餘滴』 등 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