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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이스라엘 건국
← ‘이스라엘 건국’ 소식을 접한 한 유태인 여자아이가 자국 국기를 흔들며 기뻐하고 있다.
1948년 5월 14일 오후 4시, 팔레스타인 지역 곳곳에 흩어져 있던 65만명의 유태인들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한 지도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이스라엘 건국’을 알리던 목소리의 주인공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태인들의 시오니즘 운동을 이끌었으며 신생 이스라엘의 초대 수상으로 선출된 벤 구리온이었다.
서기 135년 로마제국에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실패한 후 유태민족은 가혹한 보복을 받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후 유태인들은 가는 곳마다 경제, 문화적으로 빼어난 성취를 이루었지만 민족종교를 중심으로 강한 정체성을 유지하는 바람에 그 지역의 다른 민족과 융합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여러 차례 박해의 대상이 됐고 결국은 잃어버린 옛 땅에 유태인 국가를 세우자는 시오니즘운동이 19세기말부터 시작됐다. 1882년 팔레스타인에 최초의 시온주의자 정착촌이 건설됐고 1918년 중동을 점령한 영국은 밸포어 선언을 통해 시오니즘을 지지했다. 그러나 유태인과 아랍민족의 지지가 동시에 필요했던 영국이 이후 애매한 입장을 보임으로써 유태인 국가 건설은 차질을 빚기 시작했다.
유태인들의 시오니즘 운동에 결정적인 불을 댕긴 것은 역설적이게도 히틀러의 유태인 탄압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전세계로부터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최대 강국으로 떠오르던 미국 대통령 트루먼의 친시오니즘에 힘입어 팔레스타인 문제는 유엔으로 넘어갔고 1947년 11월 유엔총회는 팔레스타인을 아랍국가와 유태국가의 두 부분으로 분할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스라엘의 탄생은 유태민족에게는 비원의 성취였지만 팔레스타인 아랍인에게는 고난의 시작이었다. 유태인 테러단체의 폭력을 피해 원주민의 70%에 해당하는 72만명이 돌아올 기약도 없이 서둘러 살던 곳을 떠났다. 그리고 이들은 1964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결성,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마치 유태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1610년] 프랑스 부르봉왕조 창건한 앙리4세 피살
← 신구교간의 내전을 정리하고 절대왕정을 수립한 앙리 4세
‘낭트 칙령’을 공포, 신교파인 위그노에게 조건부 신앙의 자유를 허용함으로써 30년간 계속된 프랑스의 종교전쟁(일명 위그노 전쟁)을 종식시킨 장본인인 앙리 4세가 1610년 5월 14일 구교도 광신자의 칼에 찔려 숨을 거뒀다.
1533년 스페인 북부의 돈독한 칼뱅파 개신교인 여왕인 어머니와 카페의 혈통인 방돔 공작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프로테스탄트의 엄격한 원칙에 따라 키워졌다. 그후 1572년 신ㆍ구 양 교도의 화의를 다지기 위해 프랑스 왕 샤를 9세의 여동생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결혼했다.
앙리 4세가 즉위할 당시 프랑스는 신ㆍ구 양파의 종교적 대립으로 극도의 혼란으로 치닫고 있었다. 게다가 구교도가 그의 왕위를 인정하지 않자 에스파냐의 침입을 받기도 했다. 왕은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자신이 직접 신교에서 구교로 개종하면서 신교도(위그노)에게도 어느 정도의 자유를 인정하는 ‘낭트 칙령’을 공포했다. 내전을 정리하고 명실상부한 프랑스의 왕이 된 앙리 4세는 베르뱅조약을 맺어 에스파냐와의 국경문제를 정리하고 내전으로 피폐해진 국가를 재건하는 데 힘썼다.
30년간 계속된 내전을 종식시키고 강력한 왕권을 확립한 후 여러 가지 사회제도를 개선해 국민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데 힘쓴 공로로 그는 오늘날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사랑받는 왕’으로 기록되고 있다./조선
[1796년] 제너, 종두법 개발 성공
제너, J. Northcote가 1803년에 그린 유화(부분)
1796년 5월 14일 영국의 외과의사 에드워드 제너가 종두법 개발에 성공했다. 18세기에 유행했던 천연두는 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갔다. 종두법 개발 이전에 이용되던 인두접종법은 천연두를 약하게 앓은 환자에게서 뽑은 물질로 건강한 사람을 일부러 감염시켜 면역성을 갖게 하는 치료법으로, 위험률이 높았다. 제너는 우두에 걸렸던 사람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것으로 천연두를 막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1796년 손가락에 우두를 앓은 젊은 여자의 상처에서 뽑은 백신을 제임스 핍스라는 소년에게 접종하자, 천연두의 병변이 약간 나타났고 천연두 물질을 접종해도 아무 병이 생기지 않았다. 이후 그의 천연두 예방접종은 빠르게 전파되어 세계 각지로 퍼졌고, 천연두에 의한 사망률도 급격히 감소했다./브리태니커
[1906년] 독립운동가 이종건(李鍾乾) 출생
1906. 5. 14 충남 천안~1960. 6. 19.
일명 세장(世章). 호는 동초(東初)·난건(蘭乾). 1928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곧 중국으로 망명하여 중국 산둥[山東]의 군벌인 옌시 산[閻錫山]의 태원군관학교(太原軍官學校)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1931년 베이징[北京]에서 한족동맹회(韓族同盟會)에 가입하여 일제 밀정 신모(申某)를 처단하고 상하이[上海]로 갔다. 상하이에서 한국인독립운동청년동맹·한인청년당(韓人靑年黨)·의열단(義烈團) 등의 조직에 참가하여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같은 해 10월 31일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 의경대원(義警隊員)으로 임명되어, 출입국자의 신상파악, 독립운동가들의 신변경호, 친일여부 조사, 일제밀정 제거 등의 감찰사업에 주력했다. 12월에는 임시의정원 충청남도 대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33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난징[南京] 지부 요원으로 활약했다. 1935년 4월 중국 중앙군관학교 뤄양 분교[洛陽分校]를 졸업한 후 난징에 머물면서 김구구락부회(金九俱樂部會)를 개최하는 등 독립운동가들의 유대 강화를 도모했다. 같은 해 7월 5일 난징에서 김원봉(金元鳳)·김두봉(金斗奉)·윤기섭(尹琦燮) 등이 조직한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에 참여했으며, 1936년에는 조선민족혁명당의 훈련단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중국군에 입대하여, 1938년 우창[武昌]·한커우[漢口] 등지에서 대일전투에 참가했다. 1942년 광복군 제1지대에 편입되었으며, 1944년 조선민족혁명당 감찰위원에 선임되었고 8·15해방 후 귀국했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브리태니커
[1900년] 독립운동가 유석현(劉錫鉉) 출생
1900. 5. 14 충북 충주~1987. 8. 28.
1919년 3·1운동에 참가해 활약하던 중 일본경찰의 추적을 받자 그해 11월 만주로 건너갔다. 1920년 톈진[天津]에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해 1922년 2월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입국해 12월 김지섭(金祉燮) 등과 함께 무교동 백윤화(白允和) 판사를 협박해 군자금을 모금하려다 실패하고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1923년 5월을 기하여 전국 각지에서 대폭동을 일으키고 요인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받은 뒤 김시현(金始顯)·황옥(黃鈺)·김지섭 등 동지를 규합해 무기반입을 모의, 베이징[北京]에서 폭탄 36개, 권총 5정, 독립선언서 3,000매 등을 소지하고 입국해 거사를 계획하던 중 밀고를 당해 1923년 3월 15일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그해 8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했다. 만기출옥한 뒤 1941년 다시 만주로 건너갔다. 8·15해방 후 광복회 고문, 민주정의당 총재 상임고문 등을 역임했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브리태니커
[1896년] 한국 독립운동가 오광선(吳光鮮) 출생
1896. 5. 14~1967. 5. 3.
1918년 남만주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하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제1대대 중대장,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거쳐 서로군정서의 별동대장·경비대장 등을 지냈다. 1920년 홍범도(洪範圖)·지청천(池靑天)·김좌진(金佐鎭) 등이 밀산에서 만주 독립군을 통일하여 조직한 대한독립군단의 중대장에 임명되었다. 1930년 일제의 만주 침략에 대비해 한국독립군이 편성되자 의용군 중대장으로 활약했으며, 1931년 12월에는 한중연합군을 구성할 목적으로 중국 호로군사령관 정초(丁超)를 방문한 사령관 지청천을 수행했다. 1933년 김구(金九)가 중국 측과 교섭해 뤄양 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국독립군을 위한 특별반을 설치할 수 있게 되자 조경한(趙擎韓)·윤경천(尹敬天) 등과 함께 교관으로 초청되어 독립군 간부를 양성했다. 1940년 1월 베이징[北京]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한 뒤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45년 8·15해방 후 귀국해 광복군 국내지대장을 지냈고, 대령으로 임관되었다가 준장으로 예편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다./브리태니커
[1727년] 18세기 영국의 초상화가·풍경화가 게인즈버러 Thomas Gainsborough 출생
← 게인즈버러가 그린 캔버스 유화 <아침산책>(1785)
"우리는 모두 하늘로 가고 있다. 반 데이크도 함께 있다. "
- 토머스 게인즈버러, 임종 때 남긴 말
1727년 5월 14일 태어남 / 1788년 8월 2일 죽음
게인즈버러는 풍경화와 초상화 모두에 뛰어난 솜씨를 보인 영국의 화가이다. 서퍽 주 서드베리에서 태어나, 13세 때 런던으로 건너가 프랑스의 화가이자 판화가인 위베르 그라블로의 조수로 일하면서 그림을 공부했다. 그는 반 데이크의 영향으로 모델의 성격을 정서적으로 파악해, 유연한 광선 밑에 생겨나는 명암조와 우아한 색조를 강조한 초상화를 그렸다. 그는 벨벳과 베일 등 의상의 재현에 남달랐으며, <아침산책 The Morning Walk>(1785)처럼 풍경을 배경으로 한 전신 초상화를 즐겨 그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풍경화에서는 어떤 특정한 장소보다는 분위기와 날씨를 강조한 그림을 그렸다. 18세기 영국의 화가들 가운데 가장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화가로 평가받는다./브리태니커
[1755년] 아일랜드의 모험가. 배링턴(George Barrington) 출생
← George Barrington robs Prince Orlov
1755. 5. 14 아일랜드 킬데어 메이누스~1804. 12. 27 오스트레일리아 뉴사우스웨일스 패레매타.
1770~80년대 영국에서 소매치기로 악명이 높았던 아일랜드의 모험가.
오스트레일리아에 관한 역사서도 몇 권 저술했다는 설이 있다. 배링턴의 아버지는 헨리 월드런이라는 은세공사였다. 1771년에 아들 월드런은 연극단의 일원이 되어 조지 배링턴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는 연극단에서 소매치기 기술을 배웠으며 1773년 재치와 교양을 지닌 신사로서 런던 사교계에 진출하여 경마, 연극 공연, 국가적인 행사 때마다 부자들의 주머니를 털었다. 1790년 8번째 유죄판결을 받은 뒤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는 감옥으로 이송되었으나 참회하고 사면을 받았으며 나중에는 죄수들의 감독관이 되었다. 1800년 은퇴한 뒤 잠시 동안 정신병에 걸리기도 했다.
출판업자들이 〈뉴사우스웨일스 여행 A Voyage to New South Wales〉(1803)·〈뉴사우스웨일스의 역사 The History of New South Wales〉(1802) 등의 역사책을 광고하기 위해 조지 배링턴의 이름을 사용했지만 배링턴 자신이 이 책들을 저술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는 추방된 죄수들을 위한 유명한 2행연구(二行聯句)를 창작했다고 전해진다. "모두들 진정한 애국자들이며, 이해하기만 한다면 / 우리는 우리의 조국을 위해 조국을 떠나왔나니." 이 시구는 실제로는 1801년 헨리 카터라는 영국인이 쓴 것이지만 배링턴의 작품으로 간주되었다.
[1316년] 신성 로마 황제 카를 4세(Karl Ⅳ) 출생
← 카를 4세, Petr Parle가 제작한 흉상(14세기), 프라하에 있는 St. Vitus'Cathedral 소장
(영)Charles Ⅳ. 본명은 Wenzel(Wenceslas/Václav). 별칭은 Karl von Luxemburg(Charles of Luxembourg/Karel Lucembursky).
1316. 5. 14 프라하~1378. 11. 29 프라하.
독일 왕 및 보헤미아 왕(1346~78 재위)이며, 신성 로마 황제(1355~78 재위).
당대의 가장 교양 있고 외교술에 뛰어난 군주였다. 그는 무력사용보다는 외교로 원하는 바를 확보했으며 영지나 관직 매입, 결혼, 상속으로 세력을 더욱더 넓혔다. 그의 재위 때 프라하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중심지(결국은 수도)가 되었다. 사실상 그의 치세 이후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독일 제국의 제위는 보헤미아 왕에게 귀속하는 것이 거의 관례가 되었다.
초기생애
카를은 보헤미아 왕인 룩셈부르크의 얀과 보헤미아의 마지막 토착 군주의 누이 엘리자베트 사이에 태어난 맏아들이었다. 1323년에 그는 프랑스 궁정으로 가 프랑스 왕 필리프 6세의 누이 블랑슈와 결혼했으며 파리에서 미래의 교황 클레멘스 6세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에게 교육을 받았다. 1330년 아버지에 의해 룩셈부르크로 불려갔고 1331년에는 아버지가 일시적으로 북부 이탈리아에 획득한 영토의 행정을 도맡았으며 2년 뒤 아버지에게서 모라비아의 변경백과 보헤미아의 총사령관에 임명받았다. 자서전에서 카를은 저당잡힌 왕실의 성, 도시, 저택을 도로 찾고 군대를 양성하며 아버지가 자리를 비운 새 세력을 키워놓은 귀족들의 영향력을 억제하는 데 애를 먹었던 점을 회상했다. 그러나 행정치리능력이 뛰어나 아버지의 의심을 사 1335년에 해임당했다. 아버지와 화해한 뒤에는 보헤미아 국외에서 임무를 맡았으나 그의 정치적·외교적인 능력은 얀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1341년 눈이 멀게 된 얀은 카를을 후계자로 삼아 성직자, 귀족, 젠트리, 왕실 도시 대표자들, 브레슬라우의 사절들의 회의에 참석시켰고, 1343년에는 국가의 행정을 맡겼다. 1년 뒤 카를의 노력으로 교황 클레멘스 6세는 프라하 주교구를 대주교구로 승격시킴으로써 보헤미아에 종교적 자율권을 주었다. 동시에 카를의 직접 지시에 따라 장크트비투스 성당의 머릿돌이 보헤미아의 수도에 있는 흐라차니 구릉에 놓여졌다. 한편 교황에 의해 파문당한(1324) 독일 왕 루트비히 4세 대신 카를을 독일 왕으로 선출하려는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카를은 교황이 요구하는 모든 선서를 다 하고 1346년 7명의 선제후 중 5명의 표를 얻은 뒤에야 왕위를 차지했다. 중세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인 오컴의 윌리엄은 카를을 '성직자의 왕'(rex clericorum)으로 불렀다. 그러나 루트비히 4세는 카를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계속 자신에게 왕권이 있음을 주장했다.
보헤미아 왕
처음에는 독일 왕이 2명 있다는 것이 별로 나쁜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카를은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의 백년전쟁(여기서 벌어진 크레시 전투[1346]에서 그의 아버지 얀이 죽음)에 참가하고 난 뒤 보헤미아 왕위에 올라 루트비히를 공격할 준비를 했다. 이듬해 루트비히가 죽자 그의 추종자들은 대립 왕을 선출했으나 카를은 그들을 평화적으로 진정시켰다. 남부 독일의 여러 도시에 특권을 주어 그들의 지지를 얻었으며 외교적 수완을 발휘해 북독일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므로 얼마 안 가 그는 독일의 유일한 왕으로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주요한 관심사는 그의 룩셈부르크 가문의 영지인 보헤미아 영토였다. 이 영토는 그에게 가장 큰 세력 기반이었다.
1347년 카를은 프라하의 신임 대주교에 의해 보헤미아 왕관을 받았다. 몇 개월 안에 그는 새로운 대관식 법률과 국내에서 왕의 지위를 규정하는 헌법을 공표했다. 이리하여 보헤미아는 장자상속을 원칙으로 하는 세습 군주국이 되었으며 카를의 후손들은 왕위계승의 확실한 권리와 의무를 갖게 되었다. 남자 계승 혈통이 끊어질 경우에는 여자들에게 계승권이 넘어가는 규정도 있었다. 카를이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 및 헝가리의 아르파드 왕조와 맺은 왕위계승조약들(1364)은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주국의 형성 기반이 되었다. 1348년 카를은 파리대학이나 볼로냐대학과 맞먹는 권리 및 자유를 가지는 대학을 중부 유럽에서는 최초로 설립했다. 그와 때를 같이해 프라하 근처에는 카를슈테인 성의 머릿돌이 놓여졌다. 이 성에는 신성 로마 황제관을 장식하는 보석류와 보헤미아 왕실의 휘장을 보관해두었다. 1354년 카를은 룩셈부르크 왕가의 권위를 세우고 아버지로부터 보헤미아 영토의 일부로 물려받은 땅을 확보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원정을 갔다. 1355년초 그는 밀라노에서 롬바르디아의 철왕관을 받아 썼으며 그해 부활절에는 로마에서 황제관을 받았다. 당시 피렌체의 역사가는 카를이 보통 몸집에 검은 머리와 넓은 얼굴, 선천적인 새우등을 한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황제관을 얻음으로써 그는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여겼는지 이탈리아가 계속 내분에 휘말려 있었는데도 이를 무시한 채 프라하로 돌아왔다. 당시 페트라르카는 카를에게 심한 환멸을 느꼈다.
프라하로 돌아온 카를은 제국 법령의 일종인 금인칙서를 공표했다. 이는 특권을 지닌 7선제후('진정한 군주'라는 뜻의 domini terrae로 불리게 됨)가 독일 왕을 선출하도록 한다는 점을 규정했고 무엇보다도 보헤미아 왕의 지위를 확고하게 만들었다. 카를의 마지막 소원은 맏아들 벤첼에게 왕위를 안전하게 물려주는 것이었고 길고 어려운 협상 끝에 벤첼은 독일 왕으로 뽑혔다. 카를은 1378년에 죽어 장크트비투스 성당에 묻혔다. 카를 4세는 에술과 과학의 관대한 후원자로서 특히 프라하의 예술을 후원했다. 또한 교회 건립과 자선단체 설립을 열렬히 지지했다. 그는 초기 인문주의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는 특히 그의 정부에 영향을 끼쳤고 독일의 문어(文語)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H. Preidel 글)/브리태니커
[1939년] 리나 메디나가 5살의 나이에 사내아이를 분만하여 세계에서 가장 나이 어린 어머니가 됨.
리나 메디나(Lina Medina, 1933년 9월 27일 ~ )는 5살 7개월 21일의 나이에 아이를 출산한 여자이다. 이것은 의학적으로 공식 인정받은 가장 어린 나이에 출산한 기록이다.
리나 메디나는 페루 파우랑게(Paurange)에서 태어났다. 5살의 나이에 배가 불룩해져서 부모는 큰 종양이 생긴 줄 알고 병원에 데려갔는데 아이를 임신한 것으로 밝혀져 한달 뒤인 1939년 5월 14일에 제왕절개로 사내아이를 분만했다. 당시 수술은 헤라르도 로사다(Gerardo Lozada), 부사예우(Busalleu), 콜레타(Colretta) 등 세 명이 집도했다. 수술을 하기 전, 로사다 박사는 리나를 페루의 수도 리마로 데려가서 다른 전문가들에게 리나를 진찰하게 했고, 이들은 리나가 실제로 임신중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것은 에드문도 에스코멜(Edmundo Escomel)이 《La Presse Medicale》에 상세히 기록으로 남겼다.
수술했던 의사의 이름을 따서 아들의 이름은 헤라르도(Gerardo)라고 지었다. 출생당시 몸무게는 5.9파운드(2.7 kg)였다. 태아는 건강한 상태였으며 산모와 아기는 며칠 후 퇴원했다고 한다. 당시 이 사실은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기 때문에 로사다 박사는 이후에도 리나를 정밀 진단했다. 리나는 8개월 때 첫 월경을 했으며 4세때 이미 유방과 음모가 발달했다고 한다. 출산후에는 다른 산모들처럼 뼈가 단단해지는 현상도 관찰되었다고 한다.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으며, 리나가 어떻게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헤라르도는 10살이 될 때까지 리나가 누나인줄 알고 있었으나, 자신을 놀리는 학교 친구에 의해 리나가 사실은 자신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헤라르도는 40세였던 1979년에 골수에 병이 생겨 사망했다. 헤라르도가 병에 걸린 것이 산모의 나이가 매우 어렸다는 것과 어떤 연관이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리나는 1972년에 라울 후라도(Raúl Jurado)와 결혼했으며 헤라르도를 낳은 지 33년만에 둘째 아이를 낳았다. 둘째 아이는 멕시코에 살고 있다고 한다. 메디나의 남편은 현재 리마의 치카고 치코(Chicago Chico, ‘작은 시카고’)에 살고 있으며, 2002년 로이터 통신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2002년] 수지 김 사건 윤태식 씨 무기징역 선고
2002년 5월 14일 법원은 '아내를 살해한 뒤 주검을 숨기고, 납북될 뻔했다가 탈출한 것처럼 거짓 기자회견을 여는 등 죄질이 나쁘다'며 '안기부(현 국가정보원)와 더불어 유족들에게 15년동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고도 전혀 반성하는 기미가 없어 중형을 선고받아 마땅하다'고 밝히고 윤태식에게 살인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그러나 수지김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은폐 및 조작을 주도했던 장세동씨등 안기부 관계자들에 대해, 2002년 6월 검찰은 직권남용죄 (공소시효 3년)와 직무유기죄(공소시효 1년)의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렸다. 이에 대해 유족 10명은 같은 해 국가와 윤태식을 상대로 108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고, 법원은 2003년 8월 14일 42억원의 배상 판결을 내렸다. 이 비용은 당시 유사소송과 비교했을 때 최고의 배상 금액이었다. 국가가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공무원에게 구상권을 청구한 것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관련된 박처원 전 치안감 이후 두 번째였다. 국가정보원은 2003년 8월 21일 고인의 명복을 빌며 사건조작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법무부는 수지김 사건의 항소를 포기함으로써 사건을 종결시켰고, 국가는 장세동씨 등 당시 안기부 책임자에게 구상권을 청구해 배상액을 물리기로 결정했다. 장세동씨는 구상권에 의한 배상액 지불을 피하기 위해 8억원대의 빌라를 처분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국가에 의한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서 공소시효가 과연 필요한 것인지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2003.5.30 징역 15년6월 원심 확정
대법원 2부(주심 조무제 대법관)는 30일 부인 수지김(한국명 김옥분)씨를 홍콩에서 살해한 뒤 납북 미수사건으로 위장한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된 윤태식씨에 대한 상고심에서 징역 15년6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2008.3.31 배상판결 확정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이 처인 김옥분씨를 살해했다는 요지의 살인죄 범죄사실 등이 유죄로 증명됐다고 본 원심의 판단은 정당하며, 이 사건에서 드러난 피고인의 전력, 범행동기 등 여러사정에 비춰볼 때 원심 형량이 부당하다고 인정할 사유를 찾아볼 수 없다"고 밝혔다.
대법원1부(주심 고현철 대법관)는 국가가 김씨 유족에게 45억7천만원의 배상금을 지급한 뒤 사건을 조작한 장세동 전 안기부장과 전직 안기부 간부들, 김씨 살해범이자 전 남편 윤태식씨를 상대로 낸 구상금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장씨는 9억여원, 윤씨는 4억5천여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31일 밝혔다.
[2007년] 전직 국가정상 59명, 아웅산 수지 여사의 가택연금 해제 촉구
지미 카터, 조지 H.W.부시,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존 메이저, 매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리오넬 조스팽 전 프랑스 총리 등 59명의 전직 국가 정상들은 14일 미얀마 군사정권에게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아웅산 수지 여사의 가택연금을 해제할 것을 촉구했다.
59명의 전직 정상들은 이날 미얀마 군사정권에 보낸 서한에서 오는 27일 수지 여사에 대한 가택연금이 종료되면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전직 정상들은 서한에서 "수지여사는 미얀마에서 혁명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군부와 민주주의 국민연대간 평화적, 비폭력적 대화를 요구하고 있다"면서 이같이 주장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수지 여사의 석방을 촉구해왔다.
‘미얀마 민주화운동의 기수’인 수지 여사는 1990년 이후 가택연금과 석방을 반복해왔으며 지난 1998년 집권한 군사정권은 총선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민주화 운동세력을 탄압해왔다.
수지 여사는 지난 1991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2004년] 헌법재판소,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기각 판결
2004년 3월 9일, 국회의원 157명의 명의로 대통령 노무현 탄핵 소추안이 발의되었으며 12일 오전 11시 51분, 찬성 193명, 반대 2명으로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일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우리사회는 탄핵 반대와 탄핵 찬성 시위로 상징되는 국론의 분열과 사회 갈등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주심 주선회 재판관)는 2004년 5월 14일 오전 10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 청구를 기각했다. 이로써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 시기가 끝나고 노무현 대통령이 60여일 만에 직무에 복귀하게 되었다.
[1991년] 유로터널 굴착 공사 완공
1991년 5월 14일 영국과 프랑스 양국에서 영국 해협의 가장 좁은 부분인 도버 해협의 해저 터널을 굴착방식으로 뚫어 서로 만나는 데 성공했다. 1865년에 이미 영국의 철도·운하 토목 기술자인 존 호크쇼가 해저 터널의 굴착이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1882년에 해저에 굴착갱을 시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국의회의 반대로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1966년에 이르러 양국은 터널 굴착 공사의 재개에 합의했다. 1994년 5월 6일 해저 터널을 통과하는 유로터널의 개통식이 프랑스의 칼레에서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과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열차는 최고 160㎞/h의 속도로 운행되며 터널을 통과하는 데 약 35분이 걸린다./브리태니커
[1973년] 미국 스카이랩 1호 발사
스카이랩계획(Skylab Program)은 아폴로계획 다음으로 추진된 미국의 유인 우주정거장 계획으로 아폴로응용계획이라고도 한다. 스카이랩은 'sky laboratory(실험실)'의 약어이다. 1973년 5월 14일 새턴 5형 로켓 3단을 거주할 수 있게 개조한 우주정거장(스카이랩)이 발사되었고, 같은 달 25일 3인승 개량형 아폴로우주선이 발사되어 스카이랩과 도킹해 탑승원은 스카이랩으로 옮겨 타고 28일간 생활한 다음 돌아왔다. 7윌 28일 제2차 팀이 발사되어 59.5일간 머물렀고, 제3차 팀은 11월 16일 발사되어 84일 동안 그곳에서 생활했다.
우주 체제 중에 의학·생리학적 측정, 천체물리·지구자원 등의 관측이나 실험, 무중량 상태에서의 야금(冶金)이나 생물학적 실험에 성공하고 많은 연구 데이터를 얻었다. 발사되었던 스카이랩은 예상보다 빨리 궤도의 고도를 낮추어 1979년 7월 12일 남대서양 상공에서 대기권으로 돌입하여 타버렸고 남은 파편이 오스트레일리아의 남서부에 추락하였다.
[1963년] 남대문(숭례문) 해체 중건
숭례문 (崇禮門, 국보 제1호)은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 중층(重層)의 우진각지붕 다포(多包)집이다. 서울 도성의 남쪽 정문이라서 통칭 남대문(南大門)이라고 불린다. 1394년(태조 4) 창건되었으나 지금의 건물은 1447년(세종 29)에 개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61∼1963년에 있었던 해체, 수리에 의한 조사에서 1479년(성종 10)에도 비교적 대규모의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1955년] 바르샤바조약기구 창설
← 나토 외무장관들과 전 바르샤바조약국 대표들이 1995년 12월 6일 벨기에 브뤼셀의 나토본부에서 정기모임을 하고 있다.
1955년 5월 14일 동구권 국가들을 하나로 묶는 바르샤바조약기구(WTO)가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체결됐다. 이 조약기구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대항하기 위해 체결된 `동구 우호 상호원조 조약`이라는 군사동맹 조직으로 조약체결국은 소련·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루마니아·불가리아·알바니아·동독 등 8개국이다. 이 조약은 소련의 위성국들에 대한 지배 강화 및 사회주의국가들의 동맹 강화를 목적으로 체결됐다. 조약의 내용은 무력 공격의 위협에 대처하는 협의 및 무력 공격에 대한 공동 방위가 근간을 이룬다. 이날 서명국들은 국제문제 해결에 있어 무력사용의 자제에 동의하고 군비철폐와 평화를 위해 협조할 것을 다짐했다.
[1913년] 록펠러재단 설립
록펠러재단(Rockefeller Foundation)은 미국의 실업가인 존 록펠러(Rockefeller, John D., 1839~1937)가 1909년부터 준비, 5천만 달러 상당의 주식을 위탁하는 서류에 서명까지 했지만 록펠러가 기대한 연방 정부의 인가증이 나오지 않고 시일을 끄는 바람에 1913년 뉴욕주의 법인으로 재단을 설립했다.
인류복지 증진을 목적으로 하는 이 재단은 카네기재단·포드재단과 더불어 미국 최대 규모로 손꼽힌다. 설립 이후 무려 20억 달러 상당의 자금을 전세계 수천 명의 수혜자에게 제공하였으며, 1만 3천 명에 가까운 록펠러재단 특별연구원에게 보조금을 지급했다. 이들 연구원은 그들의 활동을 통해 록펠러 재단을 빛냈다.
재단이 내걸고 있는 주요한 과제는 기아 근절, 인구문제, 대학의 발전, 미국 국내의 기회균등 및 문화적 발전이다. 최근에는 아시아·아프리카 등 신흥국에 대한 원조를 확대하고 있다.
[1885년] 독일의 지휘자 클렘페러(Klemperer, Otto,) 출생
← Otto Klemperer
1885. 5. 14 ~ 1973. 7. 6.
1885년 5월 14일 폴란드 브로츠와프에서 출생하였다. 프랑크푸르트음악원을 졸업한 후 베를린에서 H.E.프피츠너에게 사사하고 1903년부터 독일 각지의 오페라극장에서 지휘자로 활동하였다. 1927년 베를린국립오페라극장의 지휘자가 되었으나 나치스가 집권하자 미국으로 건너가 1933∼1939년 로스앤젤레스필하모니관현악단의 상임지휘자로 활약하고 1947∼1950년에는 부다페스트 오페라극장에서 지휘자로 활약하다가 그 후 취리히에 거처를 정하고 구미 각지에서 객원지휘자로 활약하였다.
이후 런던으로 옮겨 뉴필하모니아관현악단의 명예회장으로 있으면서 상임지휘자로 활약하고 1972년 은퇴하였다. 20대 전반기에 그를 추천하고 이끌어 준 G.말러의 곡을 비롯하여 후기 낭만파음악의 지휘에 정평이 나 있었다. 만년에는 고령과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많은 명지휘를 통하여 19세기의 전통을 악단(樂壇)에 전하였다.
[1811년] 파라과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파라과이는 1525년 에스파냐의 A.가르시아가 과라니족의 거주지이었던 파라과이에 맨 처음 발을 들여놓은 이후 1536∼1556년 무렵에는 에스파냐의 식민지화 작업이 본격화되었다. 원주민 과라니족은 마테차(茶) 재배를 비롯한 농장이나 목장에서 혹사당하였다. 예수회는 이곳에 대신정국가(大神政國家)를 건설하고 20여 만의 과라니족을 1776년까지 착취하였다. 이와 같은 예수회의 특권은 식민지 출생 에스파냐인들의 불만을 불러일으켜 1719∼1735년에는 ‘코무네로스의 혁명’으로 이어졌고 1811년 5월 P.J.카발레로와 F.예그로스가 이끄는 민병대가 에스파냐 총독을 축출함으로써 독립을 획득하였다.
독립 후 1813∼1840년에는 프란시아를 중심으로 강력한 독재체제를 유지하면서 부에노스아이레스로부터의 경제적 의존에서 탈피하기 위하여 쇄국정책을 실시하는 한편, 경제의 재편성을 꾀하였다. 이에 따라 농지개혁을 단행,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공립학교를 창설하여 문맹퇴치에 노력하였다.
[1981년] 경상북도 경산 열차 추돌 참사. 사망 52명, 부상 233명
← 열차추돌사고 현장
1981년 5월 14일 오후 4시 경상북도 경산군 고사면 경부선 매호건널목 상행선에서 부산발 대구행 보통급 열차가 앞서가던 서울행 특급열차를 추돌, 승객 52명이 사망하고 2백33명이 부상했다.
철도사상 최대의 이 참사는 급행열차가 건널목에 버려진 오토바이를 들이받고서 현장수습을 위해 후진하던 중 안전신호를 무시하고 과속으로 뒤따라오던 보통급행에 들이받쳐 일어났다. 열차까지 동원한 현장검증이 실시됐고 황해중 철도청장이 물러났다./조선
[1998년] 한글판 조선왕조실록 발견
← 조선왕조실록
한글로 된 조선왕조실록이 있었다. 제작연도는 구한말 때인 1908년 경, 대한제국 황실이 ‘왕조 정사’를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한국 정신문화연구원 국어학자료팀 이광호 박사는 1998년 5월 14일 조선조 시대 최고의 사료인 ‘조선왕조실록’(국보 151호)중 현종(18대)에서 철종(25대)에 이르는 기사를 발췌해 한글로 번역한 ‘실록초본’을 서고에서 발굴,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된 조선왕조 실록은 가로 23.4cm 세로 34.4cm, 총 1백37장 규모에 다섯개의 구멍을 뚫어 명주실로 제책한 ‘실록초본’이 1908년 국왕을 위해 편찬된 왕실역사서 `국조보감`과 짝을 이뤄 왕실내 여성과 아동을 위해 만든 한글판 ‘국조보감’ 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글씨는 남성의 필체로 짐작되는 단정한 해서체다. 내용은 인명만 한자이고 나머지는 순한글이며 왕의 등극 사망 왕세자책봉 종묘사직제사 정치사건 등 국왕의 재위 당시 주요 사건들을 편년체로 서술하는 형식으로 돼있다.
남한에서 ‘조선왕조실록’은 1968년부터 1993년까지 26년에 걸쳐 민간단체인 민족문화추진회와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의해 국역완간됐으며, 북한에서는 1972년부터 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실 주도로 시작돼 1991년 완간됐다. 남한판 실록은 주석과 색인이 충실한 반면 번역이 연구용이라는 지적을 받은 데 비해 북한판 실록은 순한글로 번역해 대중들도 쉽게 읽을 수 있게 번역했지만 학술적 이용에는 문제가 많다는 평을 듣고 있다./조선
[1928년] 조명하 의사, 일본 육군 대장에게 독검을 찔러
← 이국 땅에서 일본 천황의 장인에게 독검을 찌른 조명하 의사.
1928년 5월14일 오전 9시55분경, 무개차 한 대가 대만 타이중(臺中)시 다이쇼초(大正町) 도서관 앞을 지나고 있었다. 차가 커브길을 도는 순간 군중 속에서 한 청년이 차로 뛰어올랐다.
차 안에는 대만 주둔 일본군을 검열하기 위해 대만을 방문한 일본 천황 히로히토(裕仁)의 장인이자 육군 대장인 구니노미야 구니히코(久邇宮邦彦)가 타고 있었다. 청년이 독이 묻은 단검으로 구니노미야를 찔렀으나 독검은 그의 왼쪽 어깨를 스치기만 하고 운전사 손에 꽂히고 말았다. 다시 군인을 향해 독검을 던졌다. 역시 빗나갔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현장에서 체포된 청년은 스물 세살의 조명하(趙明河)였다.
조명하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한 것은 6ㆍ10만세운동을 겪고 나서였다. 대만은 조명하가 일본에서 상하이로 가던 중 일시 체류하고 있던 곳이었다. 조명하는 ‘항일을 위해서는 우선 일본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현해탄을 건너 낮에는 공장ㆍ상점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를 다니며 기회를 노렸으나 좀처럼 기회가 오지않자 상하이에서 뜻을 펼칠 생각이었다.
구니노미야는 이때 입은 상처로 이듬해 1월 사망했고, 조명하는 황족위해죄로 그해 10월10일 이국땅에서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는 유언을 남기고 처형됐다.
[2000년] 오부치 게이조 전 일본총리 뇌경색으로 사망
← ‘친한파’ 일본 정치인이었던 오부치 게이조 전 일본총리
뇌경색으로 2000년 4월 2일 쓰러졌던 오부치 게이조 전 일본총리가 쓰러진지 43일 만인 5월 14일 오후 4시7분 입원중이던 도쿄 준텐도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오부치 전총리는 인공호흡기에 의존하기는 했지만 한동안 용태가 비교적 안정돼 왔으나 12일부터 혈압이 크게 떨어지는 등 상태가 급격히 악화, 13일부터 노나카 히로무 자민당 간사장 등 정부주요인사들이 병원에서 대기했다.
오부치 전총리는 와세다대를 졸업한 뒤 1963년 중의원에 처음 당선,12선을 기록했다. 관방장관과 부총리,외상 등 당정의 요직을 두루 거친 뒤 1998년 7월 제84대 일본 총리에 취임,1년8개월동안 일본 정부를 이끌어 왔다. 오부치 전 총리는 일본 정계의 대표적인 ‘친한파’ 정치인이었다. 또 ‘하루를 일생처럼’이라는 삶을 지향했던 근면한 정치인이기도 했다. 총리 취임 당시만 해도 ‘식은 피자’같다는 비난을 들어야 했던 오부치지만 지지율을 경제회생노력 등으로 한때 50%까지 끌어올리면서, 특유의 기다림과 끈기로 꾸준히 인기를 쌓아 통산 열네번 째 장수 재임기간(615일) 총리 기록을 세웠다./조선
그밖에
2005년 고교생들의 두발제한 폐지 집회
2003년 카를로스 메넴 전 아르헨티나 대통령 사퇴, 차기 대통령에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취임
1991년 한국-터키 투자보장협정 체결
1991년 중국 강청 자살
1991년 부시, 로버트 게이츠를 CIA국장으로 지명
1990년 고르비,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의 독립선언을 불법화
1989년 교원노조 건설을 위한 전국 교직원 노동조합 발기인대회 및 준비위원회 결성대회
1989년 카를로스 메넴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당선
1983년 한국형 경비함 진수
1979년 미국 중국 무역협정 가조인
1978년 한국-요르단, 항공협정 체결
1973년 워싱턴-동경간 하틀라인(비상전화선) 개통
1972년 동양화가 이상범 사망
1969년 중앙정보부 김규남의원 등 60여명의 간첩단 사건 발표
1965년 각료직에 오른 최초의 여성 정치가 퍼킨스 사망
1963년 민정당 창당 (대표최고위원 김병로)
1957년 미국, 유고 원조재개를 발표
1954년 미국-일본 선박대여협정 조인
1952년 정부 제4차 개헌안(대통령 직선, 양원제)공고
1952년 이승만, 대통령직선제 및 국회양원제 개헌안 제출
1948년 미국 종교가 플래나간 사망
1948년 북한, 대남송전 중단
1943년 벨기에의 국제변호사 라퐁텐 사망 - 국제평화국 국장(1907~1943)으로서 191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
1940년 네덜란드 독일군에 항복
1907년 파키스탄 근대화에 기여한 대통령(1958-1969) 아유브 칸 출생
1905년 제1회 관-사립소학교 연합운동회 개최
1904년 제3회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개막
1863년 독일 작곡가 페르디난트 바이어 사망
1787년 미국 필라델피아서 헌법개혁 위해 대륙회의 개최
1771년 사상가 오엔 출생
1686년 독일 물리학자 가브리엘 파렌하이트 출생
1452년 이조 5대 왕 문종 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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