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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0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절 후 제25주/추수감사주일)
감사: 충만한 삶에 이르는 길
욜2:21~27; 골3:12~17; 마6:25~34
보물찾기 게임이 있었습니다. 요즘도 야외로 놀러가서 이 게임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교회나 어떤 단체에서 야외로 소풍을 가면 언제나 마지막 시간은 보물찾기로 대미를 장식했습니다. 선생님들이나 주최 측에서 미리 보물을 숲 속에 숨겨둡니다. 물론 보물을 직접 숨긴 건 아니고, 숫자나 기호가 적힌 작은 종이쪽지를 숨기는 거지요. 돌 틈이나 두꺼운 나무껍질 사이, 그 외에 어느 평범한 장소에 보물을 숨기면, 아이들은 귀신 같이 찾아내서 나중에 그것으로 이런저런 상품을 돌려 받곤 했지요. 저는 한 번도 이 게임에서 제대로 보물쪽지를 찾아본 적이 없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두 세 개씩 보물을 찾는 동안 전 늘 허탕을 쳤는데, 몇 개씩 찾은 얘들이 선심으로 나누어준 보물쪽지로 선물을 한두 번 받은 경험은 있습니다.
보물찾기의 핵심은 정말 평범한 곳에 보물이 숨겨있다는 것이지요. 돌 틈, 나무껍질 사이, 나무에 파진 홈, 혹은 낙엽 사이, 그냥 늘 거기에 있던 평범한 것들 사이에 보물이 숨어 있습니다. 저는 이런 보물찾기 게임이 우리 삶 가운데 숨겨져 있는 보물찾기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 삶 가운데 숨겨져 있는 “선물” 혹은 “보물”을 잊고 살기가 쉽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늘 주어져 있는 것이라서 그냥 지나치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는 자신의 삶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 그래서 거기에 온통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있는 선물이나 보물을 발견할 여유가 없기도 합니다. 평범한 일상사들에 묻혀, 그럭저럭, 하루하루를 살다보면, 내 삶은 감사할 것들로 충만히 채워지기보다, 많은 결핍과 허기로 탈진을 맞는 경우가 더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올해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올 한 해를 보내며, 우리 삶에 깃든 은혜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올 한 해 여러분의 손 안에 거두어들인 수확들은 무엇이 있나요? 그 수확들은 풍성한지요? 아니면 올 해도 자신이 무슨 수확을 했는지 손에 잡히는 것은 없고, 오히려 빈손인 것 같아 허탈한 심정인가요?
오늘 <테오리아>에 올린 다비드 슈타인들라스트 수사의 글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하면 행복해집니다. 기쁨을 느끼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기 때문에 늘 기뻐합니다. 소중한 것을 대가 없이 받았을 때 우리 마음속에서는 감사와 기쁨이 샘솟습니다. 순간순간이 선물로 주어졌음을 깨닫고 감사함으로써 우리는 충만한 삶에 이르게 됩니다.”
여러분, 마음에 와 닿습니까? 이 말을 한 다비드 슈타인들라스트 수사는, 몇 주 전에 우리가 본 대로, 토마스 머튼과 함께 서구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머튼의 마지막 말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던 베네딕도회 수사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어떤 순간에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선물인 숨겨져 있는 일치를 돌파할 수 있습니다. 종국에, 찬미가 찬미합니다. 감사가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십니다. 열림이 전부입니다.” 이 머튼의 말을 전해준 다비드 수사는, 그 후에 개인과 사회를 변혁하기 위해 “감사”에 헌신하는 조직인 “감사하는 삶을 위한 네트워크”라는 단체를 만들고 현재까지 현대인들에게 영적 멘토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의 삶과 영성의 큰 주제는 “감사”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세상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원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행복해지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해서 감사하다고 생각하는데, 실은 정말 행복한 사람들은 행복해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감사를 함으로써 행복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기쁨을 느끼기 때문에 감사한 것이 아니라, 감사하기 때문에 기쁘다고 말합니다. 이게 “감사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라는 겁니다.
“행복해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감사함으로써 행복해진다, 기쁨을 느끼기 때문에 감사한 것이 아니라, 감사하기 때문에 기쁜 것이다”, 여러분, 이 말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우리가 많이 들어왔고 좀 식상한 말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지금 당장 가난한 사람들이나 고통 속에 살고 있는, 도저히 감사할 것을 찾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해당될 수는 없는 말이라고 소위 일반적인 “논평”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이미 알고 있다고 치부하지 말고, 또 논평자의 입장에 서지 말고, 이 말을 진지하게 받아본다면, 이 말 속에는 우리가 매번 놓치는 아주 중요한 뭔가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올 한 해 감사거리를 찾으면서 몇 가지 감사거리를 찾을 수 있고, 또 감사보다는 여전히 빈손이구나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여전히 빈손이라고 생각하면 감사는커녕 우울하고 쓰라린 마음이 앞설 것입니다. 아니면 손 안에 든 몇 가지의 감사거리를 보면서도 오롯이 감사가 나오지 않는 것은, 여전히 다른 곳에서 결핍과 허기를 느끼고 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한 해 동안 땀 흘려 거둔 열매들이 다른 이들의 것보다 그리 실하거나 아름답지 않아 보여 허탈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에서 샘솟는 감사와 기쁨으로, 내 삶이 충만히 채워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껏 찾은 감사거리들이 진정 “선물”이나 “보물”이 아니라, 그냥 받을만 한 것을 받은, 그냥 내가 힘써 수고한 댓가라고 생각이 된다면, 사실 그것이 우리를 마냥 행복하고 기쁘게 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 삶에는 뭔가 뿌연 안개 같은 것이 끼여 있습니다. 빈손이라는 허무감, 감사거리들이 있지만, 진정한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해지지 못하는, 보물찾기에서 찾은 보물들이 오롯이 보물로 생각되지 않는, “찬 듯하면서도 다 차지 못한” 무언가가 있습니다. 우리 삶에 있는 이 뿌연 안개 같은 것의 정체를 예수님은 오늘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오늘 마태복음 산상수훈에서 “걱정하지 말라”<메 메림나테>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에 낀 뭔가 뿌연 안개 같은 것의 정체는 바로 “걱정”입니다. 걱정은 우리의 감사거리를 온전히 감사로 받아들일 수 없게 합니다. 걱정은 우리의 기쁨을 온전한 기쁨으로 누릴 수 없게 합니다. 걱정은 우리의 삶을 온전히 충만한 삶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합니다. 이런저런 걱정과 염려는 우리의 삶을 뭔가 모자란 것, 뭔가 비어있는 것, 뭔가 불충분한 것으로 느끼게끔 합니다. 우리가 오늘 우리의 감사거리를 손에 들고도 우리 삶을 충만한 삶으로 채우지 못하는 것은, 한 날 한 시도 우리를 떠나지 않는 “걱정”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감싸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우리말 성경에는 걱정하지 말아라 라는 말이 문장 끝에 나오지만 헬라어 문장에서는 문장 맨 앞에 나옵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몸을 감싸기 위해 무엇을 입을까 하고)
우리 삶을 가리는 뿌연 안개 같은 것이 “걱정”이라는 것에 우리가 동의하더라도, “걱정하지 말아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요즘 우리의 삶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걱정하지 말라니요? 하루하루, 걱정만이 아니라, 두려움과 불안 속에 사는 우리에게 걱정하지 말라니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정말 맞는 말씀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도 정말 걱정하기 싫습니다!), 자동적으로 그냥 올라오는 걱정을 하지 말라니요? 어떻게요?
맞습니다. 걱정은 우리가 하고 싶어 하고 하고 싶지 않아서 안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됩니다. 마치 우리의 심장이나 내장이 우리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뛰고 움직이는 것처럼, 우리는 자동적으로 걱정하고 염려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호흡처럼 우리에게 친숙하고 당연합니다.
예수님도 당연히 이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아라,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지 보아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차근차근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새를 보아라, 할 때 본다는 말은 헬라어로 <엠블레포>입니다. 이 말은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자세히 보다, 시선을 고정하다”라는 뜻입니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지 살펴보아라, 말씀하실 때 “살펴보다”는 말은 <카타만싸노>인데, 이 말은 “아주 주의 깊게 관찰하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주신 처방은, “자세히 보고”, “아주 주의 깊게 관찰하라”는 것입니다. 아주 자세히 보고 주의 깊게 관찰하면, 우리가 걱정하고 있는 것들이 우리의 소관이 아님을, 지금 이미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지요.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을 해서, 자기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 “내일 아궁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슈타인들라스트는 우리가 감사를 하려면 3가지를 하면 된다고 합니다. Stop, Look, Go! 우선 멈추고, 그리고 보는 것이지요, 그런 다음 행하는 겁니다.
어느 시인은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라고 노래했지요. 자세히 보려면, 그래서 공중의 새를 보고, 들의 백합화를 보려면, 가만히 멈추어 서야 합니다. 멈추어 서는 것은 분명 현재 우리의 삶과는 상반되는 것이어서 우리의 삶을 거스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더 분명한 것은 이것이 걱정을 이해하고 우리 삶을 이해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멈추어 서는 것은 나의 자동적으로 돌아가는 패턴에 쐐기를 박는 일이고, 나의 자동적으로 올라오는 생각과 반응에 쐐기를 박는 일입니다. 수없이 돌아가는 나의 생각(사실 이 생각이 바로 걱정입니다!)이 있고, 수없이 올라오는 걱정과 근심이 있는데, 이것들이 “나”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이 생각과 걱정이 내가 아니라는, 그래서 그 톱니바퀴에 함께 물려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과 걱정을 “자세히 보고 주의 깊게 관찰하는 일”은 놀라운 삶의 기술에 속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은 지금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는지 잘 알 것입니다. 무엇을 하라는지도 잘 알 것입니다. 그리고 또 똑같은 소리 한다고 그냥 넘겨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서고금에서, 어떤 종교에서도, 이 해답 이상의 답은 내린 적이 없습니다. 현대의 가장 최신의 해답도 결국 이것입니다. 물론 다비드 슈타인들라스트의 결론도 이것입니다. 우리말로 번역된 그의 책 <감사>의 원 제목은 <감사, 기도의 중심: 충만한 삶에 이르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필요를 무시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셨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질적인 자기중심성과 과도한 욕구도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의 대부분의 걱정이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것임도 알고 계셨습니다. 자족을 게으름으로 착각하고, 끊임없이 경쟁하는 우리의 습성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손에 들고 있는 것으로 영원히 만족할 줄 모른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대상들로 우리가 진정한 감사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손에 들고 있는 선물들로 진정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우리가 찾은 감사거리가 영원히 우리의 보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이 말씀의 의미는, 네 손에 든 그것이 감사할 것들이기 전에 그것을 들고 있을 수 있는 네 손이 감사다, 네가 가진 것들이 감사할 것이기 전에 네 존재가 감사다, 그리고 니 존재는 니가 가진 소유로, 어떤 대상으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니가 가진 소유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만, 바탕 안에서만 진정으로 존재한단다, 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창과 방패라는 무기를 내려놓고, 심지어 우리가 가진 온갖 귀중한 보물조차 내려놓더라도,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으며, 하나님 안에서 안전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있고, 하나님의 다스리심 안에서 온전하다는 믿음을 갖는 것은 우리가 우리 삶을 충만하게 사는 길입니다.
우리 존재에 대한 고마움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우리에게 주어지는 순간순간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지금 바로 이 순간도 우리는 삶이라는 선물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순간순간을 온전히 선물로 받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기회로 받을 때, 우리는 우리 삶을 아무렇게나 살지 않을 것입니다. 순간순간을 경험하고, 순간순간을 사랑하며, 순간순간을 알아차리는 기회로 받을 때, 우리의 삶은 비로소 충만한 삶에 이르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이 찾은 감사거리들을 다시 보십시오. 남과 비교하지 말고, 크던 작던 여러분에게 주어진 순간순간의 기회들을 통해 여러분이 경험하고 깨닫게 된 선물로 한번 다시 보십시오. “자세히 보고 주의 깊게 관찰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손에 들려진 선물들이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걱정 대신 감사함으로 그 모든 삶의 선물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