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다녀도 영에 속한 사람이 있고 육에 속한 사람이 있다. 예수님을 만나 믿음이 심어진 사람은 잠깐 넘어져도 돌아온다. 육에 속한 사람은 겉으로는 교회를 다니고 믿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을 만난 적도, 사랑했던 적도, 생명을 만난 적도 없어 결정적인 순간에 신앙을 버린다.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자유케 한다(롬8:1,2). 자유하고 비슷한 말이 힘이다. 풀려나는 힘.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십자가에 해당하는 것이 침례다. 죽어야 주님과 하나 되고, 부활의 성령이 임하시면 자유와 힘을 주신다. 성령의 사람들이 힘 있고 자유로운 사람들이 되어 묶였던 자들을 다 풀어 버린다. 우리는 환경과 조건이 필요한 게 아니라 영에 속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교회란 말씀을 증거하고 영에 속한 자가 되게 하는 곳이다.
길이 막혔을 때가 있고 열렸을 때가 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고 비두니아로 가려 하니까 예수의 영이 막으신다. 하나님의 뜻인 것 같은데 막힐 때가 있다.
그때 예수님께 떼를 쓰는 사람이 있고 뜻을 묻는 사람이 있다. 누구든지 그의 뜻대로 구하면 들으신다. 먼저 주님의 뜻을 물어야 한다. 결혼도, 사업도, 직장도, 사명의 문제도 막힐 수 있다. 막혔을 때는 내 뜻일 때가 있다. 그때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한다.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니까 환상을 통해서 알려 주시는 것이다.
돈이 좋은 이유는 내 뜻대로 되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하라면 하고 가라면 가고 내 뜻대로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돈의 힘이 선악과 같은 역할을 한다. 모든 것을 내가 다 판단하다가 교만으로 망한다. 내 뜻대로 되는 재미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살다 보면 내 뜻대로 안 될 때가 많다. 그때마다 멈춰 서서 내 뜻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의 뜻을 물어야 한다. 영에 속한 사람은 결정하는 게 쉽다. 주님의 뜻을 묻고 머무르면 보여 주시는데 보여 주시는 그 길을 가면 된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9). '청하여'는 ‘파라칼레오’로 옆에서 부르다, 옆에서 도와 달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파생된 말이 '파라클레토스' 보혜사다. 성령은 돕는 영이시다(에젤). 성령은 우리를 도와주시는 영이다. 성령을 받은 우리는 또 돕는 사람이 돼야 한다.
도움을 받고 도와줄 때 성령이 충만해지고 성령 충만함이 유지된다. 받은 것을 흘려보내는 일이 우리의 사명이다. 성령을 힘입어 사는 우리는 세상을 향해서 성령 같은 존재로 살아야 한다.
두 가지 사조 중 헬레니즘의 특징은 이성이고 헤브라이즘의 특징은 믿음이다. 헬레니즘은 생각하는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토론하고 논쟁하고 싸우다 결론이 나오면 실행할 때 남은 힘이 별로 없다. 헤브라이즘은 하나님의 뜻이다. 내 뜻이 없다. 우린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하는 쉐마적 존재다.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가지고 오로지 순종하는 데 써야 한다. 교회의 뜻은 딱 하나, 주님의 뜻밖에 없다.
교회가 바른 교회가 되려면 주님의 뜻을 선포해야 하고 우리는 순종하면 된다. 그때 열매가 있다. 마귀는 자꾸 분열케 만들기 위해서 사람의 견해로 이끌어 가게 만든다. 교회는 사람의 견해로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으로 가는 것이다.
반대로 길이 열릴 때다. 아시아에서 사역이 잘 되었다. 거기서 디모데라고 하는 좋은 청년을 얻는다. 여기서 이방인인 디모데를 데려다가 할례를 베푼다. 길이 열렸을 때 바울은 오히려 자기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배려하는 유연성이 있었다. 성령은 부드러운 영이시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 유연함을 주신다.
갈라디아서나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보면 바울이 할례 문제를 가지고 타협 없이 싸운다. 그런 그가 할례를 안 받아도 되는지 디모데에게 할례를 베푼 것은 배려하는 마음 때문이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는 할례가 필요 없지만,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디모데가 제한받지 않도록 할례를 행한 것이다. 바울이 본질이나 핵심에는 생명을 걸고 최선을 다하지만, 그 외에는 유연한 마음을 가진 것이다.
또 우리에겐 효율적이어야 한다는 신념이 있다(4,5). 사역이 잘되면 우리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성령께서 황무지 같은 마게도니아로 몰아가신다. 그 선택과 집중은 내 뜻일 수 있다. 성령께서 어떤 때는 우리를 비효율적인 장소로 이끌어 가실 때가 있다. 성령께서 사역을 잘하는 빌립을 광야로 보내신다. 그곳에서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나 복음을 전하고 그에게 침례를 주어 에티오피아에 복음이 증거되게 한다.
일이 잘될 때가 함정일 수 있다. 고집불통이 될 수 있고 그것이 신화가 돼서 선택과 집중이라며 성령의 역사를 거절할 수 있다. 잘될 때 유연함을 가지고 자기 뜻을 꺾여야 한다. 성령께서 비효율적인 곳으로 이끄셔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을 믿어야 한다. 우리 인생이 그렇게 정확한 정답같이 풀리는 것이 아니다.
막혔을 때는 떼쓰지 말고 주의 뜻을 묻고, 잘 될 때는 자아가 원수이거나 자기만의 성공 신화를 가질 수 있기에 자기를 배제하고 기도해야 한다. 그때 성령께서 우리를 유연하게 이끄실 수도 있고, 비효율적으로 이끌어 가실 때도 있다. 이에 잘될 때도 순종할 줄 알아야 한다. 성령의 계획과 인도는 듣고 아는 것이 아니라, 순종해 가며 깨닫는 것이다. 안전한 곳만 다니지 말고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이 보여 주시는 길로 가는 주님의 종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