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의 내세관(來世觀) >
불교에서 내세(來世)는 삼세(三世)의 하나로서 윤회설(輪回說)과
더불어 불교의 내세관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윤회는 불교의 생사관이면서 내세관이기도 한 것이다.
부처님이 코살라국(Kosala, 사위국) 기원정사(祇園精舍)에 계실 적에
마라구마라(Māluṅkyaputta, 摩羅鳩摩羅) 존자는 홀로 번뇌에 빠졌다.
이 세계는 영원한지, 영혼은 몸과 같은지,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이러한 의문에 대해 부처님에게 묻자, 부처님께서는 유명한
‘독화살에 박힌 사람’ 비유[전유경(箭喩經)]로 답하셨다.
※마라구마라(Māluṅkyaputta, 摩羅鳩摩羅)---유명한 불설전유경(佛說箭喩經)에
나오는 인물로서 십사무기(十四無記)의 질문을 한 사람이다.
흔히 만동자(鬘童子 또는 摩羅迦舅, 말룽꺄뿟따 Malunkyaputta)라고도 한다.
“마라구마라여, 나는 말해야 할 것을 말하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을 말하지 않는다. 네가 제기한 문제는
인간의 의식 범위를 넘어선 것이다. 그러기에 어떤 방식으로도
논증할 수 없으므로 참된 의미를 갖지 못한 것이며,
또 수행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라고 하셨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내세관이나 윤회설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피하셨다.
그런데 부처님이 내세관이나 윤회설을 가끔 언급하셨다.
그러나 여기서 확실히 해야 할 것은,
부처님이 내세관이나 윤회설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당시 인도사회의 통념으로 말씀하신 것이지
불교교의로서 말씀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 통념의 권선징악(勸善懲惡) 차원에서 언급하신 것이지
불교 교의로서는 내세관이나 윤회설을 언급하시기를 피하셨다.
이것이 원칙적으로 부처님의 윤회 및 내세관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훗날 불교에는 나름의 내세관과 윤회설이 생겼다.
그것은 불멸 이후 100여 년경부터 시작된 부파불교시대의 소위 아비달마불교에서 싹텄고,
특히 불교가 중국을 거치면서
더욱 확장되고 첨가돼 화려한 내세관과 윤회설이 정립된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불교에서 영혼을 내세로 옮겨가는 주체로서 <구사론(俱舍論)>에서는 중유(中有)라 했다.
<구사론>에서 말하는 중유란 이승과 저승의 중간
위치에 있는 존재란 뜻이다. <구사론>에서는 인간 일회의 삶을
생유(生有), 본유(本有), 사유(死有), 중유(中有)라고 하는 4유(四有)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 것이다.
곧 모태에 의탁해 태어나는 순간을 생유(生有)라 하고,
출생 후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생전의 존재를 본유(本有)라 하며,
죽는 순간을 사유(死有), 죽어서 다시 태어날 때까지의 존재를
중유(中有)라는 것이다. 따라서 죽은 즉시 다음 생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승도 저승도 아닌 곳에서 얼마 동안 중유의 존재로 머문 뒤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게 된다고 했다.
그런데 중유(中有)의 기간에 대해서는 다소 이설이 있었다.
즉, 칠칠일(七七日)이라는 설과 칠일(七日)이라는 설이 있었으며,
특별히 정해지지 않았다고도 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는 사십구일을
기해 49재(천도재)를 행하는 칠칠일설이 일반화돼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중유기(中有期)에 다음 생의 모습이 결정된다고 본다.
따라서 중유의 단계는 생전의 업을 심판받는 기간인 동시에 타력으로
망자의 구제를 도모할 수 있는 시간으로 수용됐던 것이다.
이에 따라 유족이 망자를 위해 행하는 지극한 공덕으로
부처님의 가피를 받아 망자의 내세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여기게 됐다.
49일간의 중유기간 동안 망자를 보다 좋은 곳으로 보낼 수 있도록
기원하는 49재[천도재]가 불교 상례(喪禮)의 의미로 자리한 것은
이러한 관념적 기반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남방 상좌부불교에서는 이러한 사유(四有)를 말하지 않고,
사몰심(死沒心)과 결생심(結生心-재생연결식)을 말한다.
즉, 사람이 죽으면 죽는 마지막 마음을 사몰심이라 하고,
이것은 곧바로 다음 생의 마음[결생심]으로 이어진다.
그런 단계가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죽자마자 순간적으로 빠르게
다음 생으로 건너 가버린다. 너무나 빨리 변하기 때문에
눈치 챌 수 없을 정도다.
49일 식이나 어물어물 할 사이가 없이 눈 깜짝할 사이보다 더 빠르게,
전광석화처럼 사몰심이 다음 생인 결생심으로 가버린다는 말이다.
그러니 남방 상좌부불교에서는 중유 따위는 없다.
물론 중유든 사몰심, 결생심이든 어느 것이나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은 아니다.
신라 경덕왕 때 승려 월명사(月明師)는 향가 <제망매가(祭亡妹歌)>를 지어
죽은 누이의 명복을 빌었다. 불교에서는 생시에 불도를 열심히 닦고
선업을 많이 쌓은 이는 죽어서 서방정토 즉 극락(極樂)세계에 가고,
불도를 수행하지도 않고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은 짐승으로 윤회전생하거나 지옥에 떨어진다고 봤다.
그래서 시를 지어 망자를 위로하며 극락왕생하기를 기원했다.
그러한 염원 때문에 신라 문무왕 때 <원왕생가(願往生歌)>라는 왕생설화(往生說話)에는
광덕(廣德)라는 이의 높은 덕과 신앙심을 통해
친구인 엄장(嚴莊)까지 감화시켜 서방정토인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리고 유식학(唯識學)에서는 영혼을 내세로 옮겨가는 주체를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했다.
불교심리학에선 인간심리를 세밀히
분석을 했는데, 그 중 아뢰야식이란 인간 심성의 밑바닥 깊숙이 있는
무의식, 즉 잠재의식을 말하는데, 이 아뢰야식이 인간의 본성으로서
윤회의 주체라고 했다.
이러한 불교의 내세관은 업(業)사상과 윤회설(輪廻說)에 기초해 성립했다.
윤회의 주체는 업(業) 또는 아뢰야식(阿賴耶識) 안에 함장 돼 있는 선ㆍ악의 종자이지만,
그 윤회하는 객관적인 세계는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의 삼계(三界)이다.
그리고 그 윤회하는 세계는 천상(天上), 인간(人間), 아수라(阿修羅), 축생(畜生), 아귀(餓鬼),
지옥(地獄) 등 육도(六道)로 구성돼있는데, 이를 일컬어 삼계육도의 윤회전생이라고 한다.
그리고 천상으로 가느냐 지옥으로 가느냐 하는 것은
중생들이 지은 업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했다.
그러므로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라는 말이 나오고,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받는다는 자작자수(自作自受)란 말이 나오는데,
이를 되새겨서 좋은 곳으로 윤회하기 위해서는 신(身)⋅구(口)⋅의(意) 삼업(三業) 등
각종 죄업을 짓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세의 삶은 모두 전생에서 지은 업보 때문에 생긴 것이고,
현세의 삶은 또한 다음에 다시 태어날 생의 모습을 결정한다.
현세의 업이 어떤 것인가에 따라 6가지 윤회의 삶이 되풀이된다.
인간은 현세에서 계속적으로 업을 짓는 한 고통스런 윤회의
수레바퀴를 벗어나지 못하며, 오직 해탈(解脫)을 통해서만이
이러한 고통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불교의 내세관이나 삼계(三界) 속에 나오는
천상(天上)과 같은 환상적 세계나 극락과 같은 초월적 세계를
부정하는 의견도 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빠알리 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은
“초기경전에 나오는 초월적인 현상이나 윤회, 그런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같은 의견을 가진 저명한 일본인 불교학자 미즈노 고겐(水野弘元)의
<삼계(三界)와 출세간(出世間)>이라는 글을 소개하고 있다.
「불교의 통속설에 의하면, 세계에 관한 설명으로
삼계(三界)와 출세간(出世間) 이야기가 있다.
삼계는 선악업에 의한 생사윤회의 세계이고,
출세간은 윤회를 초탈한 열반계라고 돼 있다.…
그리고 이 삼계와 출세간에 관한 설명은 일단 붓다 자신에 의해
말해진 것이라 하더라도, 부파불교에서와 같이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의 삼계를 생물이 생존하는
구체적 세계로 상세하게 서술한 것은 붓다 자신도 알지 못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초기불교를 공부한다는 사람 중에는, 아직도 불교의 세계관이
이 우주를 설명하는 유일한 잣대인 것으로 잘못 알거나,
그런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세계는 이 우주에 실재(實在)하지 않는다.…
요컨대, 이것은 초기불교에서 관념적으로, 기껏해야 비유적⋅신화적으로
선정(禪定)에 의해 도달되는 세계를 설명한 것을 부파불교가
사실적⋅구체적으로 설명했기 때문에 불합리하기 그지없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 내세의 문제는 붓다의 가르침은 아니다.
부처님은 이런 내세 문제에 대해 언급하기를 피하셨다.
인간 의식의 범위를 넘어선 문제란 것이다.
따라서 과학적으로 실증할 수도 없는 허황된 이론에 매달려
영업적으로 천도재(薦度齋)를 지내는 사찰의 잘못된 행태에 말려들지
말아야 하겠다.
칸트(Kant, 1724~1804)도 말했다.
“죽고 난 후에 어떻게 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죽고 난 후 천당과 지옥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그렇게 믿을 자유가 있으나,
그것이 옳다고 증명할 길은 없다.”고 했다.
그리고 미국의 롭 벨(Rob Bell, 1970~ )이라는 젊은 목사는
자기가 쓴 “사랑이 이긴다(Love Wins)”라는 책을 통해 천국에 대해서 말했다.
“간디나 부처 같은 착한 사람들이 예수 안 믿었다고 지옥에 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사랑의 하나님이 자기가 지은 인간을 지옥에 보낸다고
볼 수 없다. 사랑의 하나님이 모두를 다 천당으로 구원해 주실 것이다.
사랑이 이긴다.”고 하며, 지옥은 없다고 했다.
그리하여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1)은,
“인류가 천당과 지옥과 같은 개념에 의존하지 않고
선과 악을 설명하는 체계를 계발하지 않고서는 인류문명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했다.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하고, 오늘날 내세란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허황된 이론을 펼치고 있다는 것은 넌센스다.
불교의 가장 강력한 특징이 부처님의 “와서 보라!”는 말씀처럼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교의인데, 부파불교시대, 그리고 후기 대승불교와
밀교에 비과학적인 허황된 이론들이 편입돼 우습게 만들어 놓았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을 교의들은 과감하게 폐기해야 한다.
그래야 당당하게 다른 종교에 앞서 갈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거듭 확실히 해야 할 것은, 부처님은 내세관이나 윤회설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았다.
다만 후세 사람들이 관념적으로 시설한 내용일 따름이다.
그리고 이런 환상의 이론들이 난무하면 자칫 미신으로 타락할 우려마저 있다.
더군다나 이런 허황된 이론으로 신도들을 향해 영리행위를 하는
승려들이 있다는 것은 전혀 비불교적인 행위이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