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향안은 1986년 월간《문학사상》지에서, 그녀가 변동림이었을 때 불과 4개월을 같이 산첫 남편 李箱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가장 천재적인 황홀한 일생을 마쳤다. 그가 살다간 27년은 천재가 완성되어 소멸되어 가는 충분한 시간이다.(...) 천재는 또 미완성이다."
또 그녀가 김향안으로서 30년을 함께 한 김환기의 아내였을 때에는, "지치지 않는 창작열을 가진 예술가의 동반자로 살 수 있었음은 행운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이상·김환기의 아내, 김향안
“우스운 얘기지만 나도 미술사에 남을 화가인 것 같아. …내 파리에 나가서 한번 해볼 테야.”
“진지하게 내 그림을 보아주는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기쁘고 용기가 나요.”
1960년을 전후로 뉴욕, 파리에서 작품활동을 하던 화가 김환기(1913∼74)가 떨어져 있던 아내에게 보낸 편지들이다. ‘키가 크고 특히 목이 길었던’ 다정다감한 김 화백이 그리움과 더불어 예술에 대한 속내를 털어놓았던 아내가 수필가 김향안이다.
그녀는 남편(김환기)이 죽은 지 꼭 30년만인2004년 2월 29일 남편과 함께 11년간 살던 뉴욕에서 88세로 눈을 감았다. 김 화백 사후에도 뉴욕 집에 거주해온 그녀는 서울을 오가며 김환기 미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기리는 사업을 적극 펼쳤던, 모범적인 예술가의 아내였다.
뉴욕 근교의 김환기 화백 묘소 옆에 영면한 김향안은 널리 알려진 대로 김 화백 이전에 시인 이상(1910∼37)의 아내였다.
경기여고, 이화여전 영문과 출신의 김향안은 스무 살 나던 1936년 6월, 화가 구본웅(1906∼53)과 절친했던 6년 연상의 이상과 결혼했다. 천재시인과 문학소녀와의 결혼생활은 불과 4개월여에 끝나버렸다. 그해 10월 17일 이상은 동경으로 떠났다.
어린 시절부터 국어보다 그림을 좋아했고, 보성고보 시절 교내 미전 1등상 수상 등 미술에도 두각을 나타냈던 천재예술가 이상은 일본에서 27세의 짧은 생을 마쳤기 때문이다.
첫 남편 이상과 1937년 사별한 변동림은 1944년에 이미 세딸을 두었던 김환기와 결혼한다. 28세의 김향안은 한 일본 시인의 소개로 “시골뜨기에 멀쩡하게 키가 컸던” 김 화백과 결혼 후 서울에서 10년여 살다가 55년 홀로 파리유학을 떠난다. 김 화백이 미대 교수자리를 마다하고 아내를 뒤따라 파리로 건너간 것은 다음해인 1956년. 이후 두 사람은 파리를 거쳐(1955~1959년) 귀국했다가(1959~1964년) 다시모국을 떠난다. 64년 이후 뉴욕에 정착하고 세계적 예술의 도시인 파리와 뉴욕에서 한국 현대미술의 개척자로 평가되는 김환기 예술을 일구어간다.
두 천재예술가를 가까이에서 지켰던 그녀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일찌감치 눈을 감은 두 배우자의 예술혼을 기리고 작품세계를 정리하고 기리는 일을 신념처럼 펼쳤다.
보성고 교정에 1990년 5월 이상의 기념비와 문학비가 세워지기까지 교우회가 발벗고 나서기도 했지만 김향안 여사의 의지와 지원이 큰 힘이 됐다.
국내 미술가에서 김환기 화백과 관련해 김 여사는 김환기의 미술세계를 이끌고 완결시킨 인물로 평가된다. 화가 생전에는 작품활동에 감흥을 불러일으킨 예술의 반려였으며, 화가 사후엔 유작과 유품을 정리해 결국 환기미술관을 건립했던 것이다.*
김향안(金鄕岸 1916~2004), 본명은 변동림(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