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잠
벌레 한 마리가 내 몸에 붙었다
살금살금 조심스럽게 살을 타고 돌아다닌다
또 다른 벌레 한 마리가 달라 붙었다
굳은 듯 가만히 있는다
하나 둘씩 벌레들이 내 몸에 늘어난다
하나 둘씩 벌레들이 내 몸을 기어다닌다
난 떨쳐버릴 생각도 없이 그대로 있었다
내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내 손이, 내 두 다리가 떨려온다
누가 좀 이것들을 떼어줘
목소리가 나오질 않아
입가에 맴돌던 구원의 말들이 흐미해진다
순간 눈 앞이 하애졌다
차마 끄지 못한 전등에 눈이 부시다
둔탁한 무늬의 천장이 눈에 들어온다
전등빛에 눈가를 가리려 손을 들었다
손바닥에 개미 한 마리가 죽어있었다
【 창작동기 】 꿈속에서 벌레들이 몸에 기어다니는 꿈을 꾼 적이 있다. 벌레를 몸서리 칠 정도로 싫어하는 터라 그때 그 꿈은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술 잔
또르륵, 잔 속에 투명한 액체가 채워진다
깊은 시간 내 눈동자 속에 나이가 그윽히 든 남자의 모습이 들어온다
말이 없다, 서로 가득 채운 잔만 바라보고 있다
아무 소리도 내 귀 속에 들려오지 않는다
그저 이 장소, 이 공간에 나와 남자만이 존재할 뿐이다
남자가 먼저 잔 속의 액체를 목구멍 속으로 삼켜버렸다
그는 잠시 인상을 찡그릴 뿐 아무런 제스처도 없다
앞에 놓은 과일을 집어 크게 베어 물었다
과즙이 입가에 새어나와 옷깃으로 힘껏 문질렀다
침이 말라온다, 자리가 불편하다
방황했던 눈동자를 굴려 앞을 쳐다봤다
남자의 검버섯 낀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세월에 지친 주름이 뇌리에 박힌다
그의 갈색 눈동자는 나를 향해 있었다
정신이 몽롱해 졌다, 눈 앞이 흐려졌다
또르륵, 잔 속에 투명한 액체가 떨어진다
【창작동기】 이번에 집으로 갔었을 때 아빠와 술잔을 기울였다. 어색함에 제대로 된 말 한마디 주고 받지도 못하고 아빠는 그저 술을 드실 뿐이셨다. 그 때의 아빠의 모습은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