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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일연스님 삼국유사 저술
-생애 : 1206-1289 83세 사망
-출생 :경북 경산
일연은 고려 희종(熙宗) 2년(1206)에 경주의 속현이었던 장산군(章山郡, 현재의 경산[慶山])에서 태어났다.
고려의 승려. 속명(속세 이름)은 전견명(全見明). 자(字)는 회연(晦然), 일연(一然)인데, 일연을 법명(승명)으로 사용했다. 호는 목암(睦庵). 삼국시대 역사서인 삼국유사(三國遺事)를 편찬했다.
고려 후기의 승려이자 최고 영웅적 역사서인 『삼국유사』를 저술한 역사가입니다. 1206년에 태어나 1289년에 입적했으며, 몽골 침략의 혼란 속에서 우리 민족의 뿌리와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 고조선부터의 역사를 자주적으로 기록했습니다.
일연스님은 생전에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군위 인각사에서 삼국유사를 집필하여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삼국유사는 고대 한국 신화, 설화, 향가를 집대성한 책으로 현대에서도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삼국사기와 더불어 귀중한 자료이다. 대표작인 삼국유사 이외에도 조파도 2권, 대장수지록 3권, 제승법수 7권, 조정사원 30권, 선문염송사원 30권, 어록 2권, 게송잡저 3권 등 많은 불교 저서를 남겼다.
⇨일연스님의 주요활동은
고려 고종(高宗, 재위 1213 ~ 1259) 1년(1214)에 해양(海陽)에 있던 무량사(無量寺)에서 학문을 익혔고, 1219년에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출가하여주2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여러 곳의 선문(禪門)주3을 방문하면서 수행하였다. 이때 구산문 사선(九山門四選)의 으뜸이 되었다. 고종 14년(1227), 승과의 선불장(選佛場)에 응시하여 장원에 급제하였다. 그 뒤 비슬산(琵瑟山)의 보당암(寶幢庵)에서 수년 동안 참선에 몰두하였고, 1236년 10월, 몽고가 침입하자, 문수(文殊)주4의 계시로 보당암의 북쪽 무주암으로 거처를 옮겨 깨달음을 얻었다. 이 해에 삼중대사(三重大師)의 승계(僧階)를 받았고, 1246년, 선사(禪師)의 법계(法階)를 받았다. 1249년, 남해의 정림사(定林寺)에 머물면서 남해의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 작업에 약 3년 동안 참여하였다. 1256년, 윤산(輪山)의 길상암(吉祥庵)에 머물면서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 2권을 지었고, 1259년에 대선사(大禪師)의 승계를 제수(除授)주5받았다. 원종(元宗, 재위 1260 ~ 1274) 2년(1261), 원종의 부름을 받고 강화도의 선월사(禪月寺)에 머물면서 설법하고 지눌(知訥)의 법을 계승하였다. 1264년, 경상북도 영일군 운제산(雲梯山)에 있던 오어사(吾魚寺)로 옮겨 갔으며, 비슬산 인홍사(仁弘寺)의 주지가 되어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1268년에는 조정에서 베푼 대장낙성회향법회(大藏落成廻向法會)를 주관하였다. 1274년, 그가 인홍사를 중수하자 원종은 ‘인흥(仁興)’으로 이름을 고치고 제액(題額)주6을 써서 하사하였으며, 비슬산 동쪽 기슭의 용천사(湧泉寺)를 중창(重創)하고주7 불일사(佛日寺)로 고친 뒤 「불일결사문(佛日結社文)」을 썼다. 충렬왕(忠烈王, 재위 1274 ~ 1308) 3년(1277)부터 1281년까지 청도 운문사(雲門寺)에서 살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다. 이때 『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281년, 경주에 행차한 충렬왕에게로 가서, 불교계의 타락상과 몽고의 병화로 불타 버린 황룡사의 모습을 목격하였다. 1282년, 충렬왕에게 선(禪)을 설하고주8 개경의 광명사(廣明寺)에 머물렀다. 다음 해, 국존(國尊)주9으로 책봉되어 원경충조(圓經冲照)라는 호를 받았으며, 왕의 거처인 대내(大內)에서 문무백관을 거느린 왕의 구의례(摳衣禮, 옷의 뒷자락을 걷어 올리고 절하는 예)를 받았다. 그 뒤,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1284년에 타계하자, 조정에서는 경상도 군위 화산(華山)의 인각사(麟角寺)를 수리하고 토지 100여 경(頃)을 주어 주재(駐在)하게주10 하였다. 인각사에서는 당시의 선문을 전체적으로 망라하는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두 번 개최하였다. 1289년에 손으로 금강인(金剛印)을 맺고 입적하였다.
⇨생애와 업적
삼별초(三別抄)가 여몽연합군에게 진압되면서 대몽 항쟁이 막을 내린 이후 고려의 자주성은 많은 손상을 입었다. 몽골은 국호를 원(元)으로 바꾼 뒤 일본 원정을 단행하면서 그에 필요한 물자와 군사를 고려에서 징발했다. 오랜 전란에 시달린 고려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었다. 또한 원은 고려를 부마국으로 삼아 왕실의 호칭과 격을 부마국에 걸맞게 낮추는 등 고려복속정책을 시행했다.
이렇듯 고려의 문화와 역사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일연 은 민족의 자주 의식을 일깨우고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새로운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삼국유사》를 집필했다.
《심국유사》는《삼국사기》와 더불어 우리나라 고대 역사와 문학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1281년(충렬왕 7)에 시작하여 1283년(충렬왕 9)에 완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책은《삼국사기》처럼 체계적이 지는 않지만,《삼국사기》에 실려 있지 않은 단군신화를 비롯한 고조선•부여•가야 등의 역사,민간설화,불교에 대한 내용들을 수록하여 우리의 역사 전통과 사회 문화 전반에 관한 소중하고 풍부한 자료를 전해준다. 특히 다른 책에서는 전하지 않는 신라의 향가가 11수나 실려 있어 국문학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이다.
일연은 승과에 합격한 승려이다. 1206년 경상도 장산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주를 지녔을 뿐 아니라 몸가짐이 단정했고 사물을 보는 눈빛이 남달랐다고 한다. 아흡 살 때부터 전남 해양의 무량사에서 공부를 시작했고,열네 살 때 설악산 진전사에 출가해 승려가 되었다.
1227년 승과에 응시하여 급제했으나 비슬산 보당암에 머물며 몇년 동안 참선과 수행에 몰두했다. 이후 무주암에 머물며‘생계불감불계부증’이라는 구절을 탐구하다가 큰깨달음을 얻어“오늘 곧 삼계(三界)가 꿈과 같음을 알았고 대지가 작은 털끝만큼의 거리낌도 없음을 보았다”는 말을 남겼다. 그의 나이 서른두 살의 일이다.
깨달음 뒤 선승으로 명성을 얻은 일연은 1237년‘삼중대사(三重大師)’의 승계를 받고 1246년에는‘선사(禪師)’의 승계를 받았다. 일연이 공부를 하고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의 시기는 몽골군의 침입이 있던 혼란기였으나 그는 절에서 참선에 몰두할 뿐 현실적인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던 듯하다. 승려로서 평탄한 길을 걸었을 뿐이다. 그러나 깨달음 뒤 점차 현실과 연을 맺기 시작한다.
1249년 당시 집권자였던 최우의 처남인 정안의 초청으로 남해의 정림사로 옮겼는데, 이곳에서 약 3년 동안 대장경 판각 작업에 참여했고,1259년에는 조정으로부터‘대선사(大禪師)’의 승계를 받으며 본격적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했다. 이후 몽골침입을 맞아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고려 조정을 따라 강화에 머물며 불법을 가르치기도 했고, 1268년에는 왕명을 받아 개경에 있는 해운사에서 선종과 교종의 고승 100명을 모아 대장낙성회향법회(大藏落成廻向法會) 를 주관하고 설법을 베풀어 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켰다.
무신정권이 무너지면서 40여 년 동안 계속되었던 대몽항쟁이 끝나고 고려 조정이 개경으로 환도할 무렵에는 인홍사에 머물며 참선과 강론을 했는데,이때《역대연표》를 간행했다. 이 책은《삼국유사》를 저술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뒤 1277년부터 1281년까지 경북 청도에 있는 운문사에 머물며《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시작한 듯하다. 일연이 청년 시절에 사료를 모아 70세 이후에 집필한 이 책은 그가 세상을 뜬 뒤 간행되었다.
1282년 일연은 왕의 간곡한 요청에、따라 입궐히여 대전에서 설법하고,광명사에 머물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1283년에는 국존(國尊)으로 책봉되고‘원경충조(圓經沖照) 라는 호를 받았다. 이름 없는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승려로서 최고의 지위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왕의 극진한 예우를 뿌리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지방에 머물렀다.
1289년 충렬왕에게 올리는 글을 남기고 다음 날 새벽 평소와 다름없이 제자들과 문답을 나눈 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입적했다.
현재 그의 탑과 비는 인각사에,행적비는 운문사에 있다.
⇨평 가
무신정권과 몽골 침입이라는 혼란기를 살면서 대 몽 항쟁이나 정치개혁에는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했지만《삼국유사》라는 작품을 남김으로써 일연은 역사적•문학적으로 거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사질《삼국유사》는 일연이 살았던 고려시대에는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동국여지승람》.《동사강목》등에서 언급되기는 하지만,이 책들은《삼국유사》의 기록은 허황하여 믿을 바가 못 된다고 낮춰보았다.
그러나 현재는 한국 고대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단군신화를 기록한 최초의 책이라는 점에서 많은 의의를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민속이나 성씨록,지명의 기원,신앙,그리고 그 안에 수록되어 있는 많은 설화와 향가 들은 한국 고대의 역사•지리•문학•종교•언어•민속•사상•미술 등 많은 부분의 열쇠를 제공한다.
일제시대 역사학자인 최남선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된다면,나는 서슴지 않고 후자를 택할 것”이라며 극찬을 하기도 했다.
⇨삼국유사의 내용
『삼국유사』는 고대사 중 정사(正史)에는 없는 고조선·삼국·가락·후삼국에 관한 유문(遺文)과 일사(逸事)를 바탕으로 찬술한 편년체 형식의 역사서이다.
고대 사회의 역사, 풍속, 종교, 문학, 예술, 언어 등의 기본서로서, 『삼국사기』에 없는 많은 사료를 수록하고 있다.
현재 삼국유사가 언제 처음 간행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현존하는판본들은 고려시대의 것은 없고 모두 후대인 조선시대에 판각된 것들이다.
삼국유사는 5권 2책 9편목으로 구성 되어 있다. 9편목은 왕력(王歷)·기이(紀異)·흥법(興法)·탑상(塔像)·의해(義解)·신주(神呪)·감통(感通)·피은(避隱)·효선(孝善) 으로 구성된다.
「왕력(王曆)」 제1에는 삼국(三國)과 가락(駕洛), 후삼국(後三國)의 왕대(王代)와 연표(年表)가 실려 있다. 여기에는 각 왕의 대수(代數), 즉위 연대, 존위년수(在位 年數), 릉(陵)의 명칭, 소재(所在), 화장기사(火莽記事), 왕모(王母)에 대한 기록, 왕비(王妃)에 관한 기술, 연호(年號)의 사용, 중국과의 교섭관계, 국호(國號)에 대한 설명, 사찰 건립, 수도(首都)의 옮김, 축성(築城), 제방(堤防), 시장(市場)에 대한 기록, 외침(外侵) 기사 등, 국가적인 중대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
『삼국유사』는 고려 일연(一然) 스님이 1281년(충렬왕 7년) 편찬한 책으로, 고조선부터 삼국시대의 역사‧문화에 관한 설화 등을 종합했다는 점에서 한국 고대사 연구의 보고(寶庫)로 알려져 있다.국보 『삼국유사』는 조선 초기 판본으로, 신라․고구려․백제․가야 및 통일신라․후고구려(고려 포함)․후백제의 간략 연표인 「왕력(王曆)」과 함께 고조선~후삼국의 역사․문화적인 사실을 기술한 「기이(紀異)」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비록 총 5권 중 권1~2권만 남아 있으나, 조선 초기본으로서 결장(缺張)이 없는 완전한 인출본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또한 1512년(중종 7)에 간행된『삼국유사』(壬申本) 중 판독하기 어려운 글자를 보완하고 현존하지 않는 인용문헌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삼국유사의 내용
저자 일연은 장산군(章山郡) 지역 향리(鄕吏) 가문 출신의 선종(禪宗) 승려로, 보각국사(普覺國師) 지위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가 저술된 정확한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략 충렬왕(忠烈王, 재위 1274~1308) 대 초반으로 여겨진다. ‘유사(遺事)’는 역사의 기록에서 빠졌거나 자세히 드러나지 않은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삼국유사』는 『삼국사기』 등 기존의 역사서에 자세히 기록되지 않은 내용을 중심으로 서술되었다.
『삼국유사』는 전체 5권 9편으로 구성되었다. 1권은 「왕력(王曆)」과 「기이(紀異)」 제1, 2권은 「기이(紀異)」 제2, 3권은 「흥법(興法)」과 「탑상(塔像)」 2편, 4권은 「의해(義解)」, 5권은 「신주(神呪)」, 「감통(感通)」, 「피은(避隱)」, 「효선(孝善)」 등의 4편으로 이루어졌다. 「왕력」 편은 신라 시조 혁거세 거서간(赫居世居西干, 재위 서기전 57∼서기 4)부터 고려 태조(太祖, 재위 918∼943)의 후삼국 통일에 이르기까지, 삼국과 가락국(駕洛國), 후삼국 등의 왕의 계통과 주요 사건을 연대순에 따라 도표화하여 표시한 내용이다. 「기이」 편은 고조선 이래 후백제까지 57개 항목으로 구성되었으며, 국가의 흥망에 신이한 힘이 작용하는 내용을 주로 다루고 있다. 「흥법」 편은 삼국 시기 불교의 전래에 대하여, 「탑상」 편은 불상과 불탑, 범종 등 불교 사원의 조형물에 얽힌 이야기를 불교 신앙과 연결해 설명하고 있다. 그 외에 「의해」 편은 불교 교리의 이해에 대한 내용 및 주요 고승들의 전기를 기술하고 있다. 「신주」 편은 밀교적인 신이함, 「감통」 편은 신앙의 영험, 「피은」 편은 은둔했던 고승들의 신앙, 「효선」 편은 불교적 효 윤리와 관련된 내용을 다루고 있다. 내용 구성에서 알 수 있듯이 『삼국유사』는 불교 중심의 역사관에 기초하여 서술되었으며, 불교의 호국적 성격을 부각시키고 있다. 일부 내용에서는 『삼국사기』의 서술과 다른 부분도 확인되고 있다.
이 책이 저술된 시기는 고려가 원(元)나라의 직접적인 간섭을 받기 시작하던 때였다. 일연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때 이 책을 저술하여, 원나라와는 다른 고려의 역사적⋅지역적 독자성과 문화적 우수성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특히 고조선을 고려 왕조의 기원으로 보고,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부터 삼한(三韓)과 삼국을 거쳐 고려에 이르는 역사 계승 관계를 설정한 것은 사학사적으로 『삼국유사』가 지니는 가장 중요한 의의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일연이 경주(慶州) 인근에서 주로 활동했던 만큼, 『삼국유사』는 삼국 중 신라에 관한 내용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삼국유사』는 체제나 구성에서 『삼국사기』에 비해 부족한 면이 많이 보이지만, 향찰(鄕札)로 기록된 향가 14편을 수록하고 있어 고전 시가의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인각사(麟角寺)
-위치 : 대구광역시 군위군 삼국유사면 삼국유사로 250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한 장소로,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화산에 있는 절.
인각사(麟角寺)는 원효 또는 의상이 창건했다고 한다. 1284년(고려 충렬왕 10)에 일연(一然)의 하산소(下山所)로 지정되면서 이곳에서 『삼국유사(三國遺事)』가 저술되었고,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중심 사찰로 발전했다. 조선 태종 때 조계종의 자복사찰(資福寺刹)로 지정된 지방 명찰(名刹)이었지만, 정유재란 때 거의 폐사 상태에 이르렀다. 조선후기에 중수하기도 했지만 해방 후에는 몇 채의 전각만이 남아 명맥을 유지했다. 1960년대에 보수하기 시작했고, 1992년부터 5차에 걸친 발굴 조사를 하였다. 2010년부터 복원 사업이 시작되어 진행 중에 있다. 인각사지(麟角寺址)가 1992년 사적 제374호로 지정되었다.
⇨창건
643년(신라 선덕여왕 12) 원효가 창건하였다는 설과 642년(신라 선덕여왕 11) 의상이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온다. 절이 전설상의 동물인 기린(麒麟)의 형상을 닮은 화산(華山)의 자락에 있고, 그 절터가 기린의 뿔끝에 있는 것과 같아 이름을 인각사(麟角寺)라 했다고 한다. 절터에서 발굴된 유물에 의하면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를 이어온 절이 분명하나 문헌상의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인각사가 문헌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284년(고려 충렬왕 10) 일연의 하산소로 지정되면서부터였다. 하산소는 승려가 왕사로 책봉되어 주석한 곳을 말하다. 일연이 1284년부터 1289년까지 이 절에 주석하면서 나라의 후원을 받아 대대적으로 중창을 하였고, 두 번에 걸쳐 구산문도회(九山門徒會)를 여는 등 구산선문의 중심 사찰이 되었다. 특히 일연이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저술한 곳으로 유명하다. 1362년(고려 공민왕 11) 서공(諝公)이 무무당(無無堂)을 건립하여 총림법회(叢林法會)를 여는 등 고려말에도 선종의 중심 사원이었다.
⇨ 조선전기
1407년(태종 7) 12월, 의흥(義興: 현 경상북도 군위) 인각사가 조계종의 자복사찰로 지정되었다(『태종실록』 7년 12월 2일). 당시 조선시대의 불교 종파는 이전 11개(혹은 12개)에서 조계종(曹溪宗),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자은종(慈恩宗), 중신종(中神宗), 총남종(摠南宗), 시흥종(始興宗) 등 7개 종파로 정리되었는데, 인각사는 조계종에 소속된 자복사찰이었다. 자복사찰은 나라의 안녕과 고을의 복을 빌기 위해 지정하거나 건립한 사찰로, 당시 인각사가 의흥 지역을 대표하는 명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후기
1597년 정유재란 때 대부분의 전각들이 불에 타고 보각국사비(普覺國師碑)도 크게 파손되는 등 거의 폐사 상태에 이르렀다. 효종 때 한 차례 중수하였고, 1699년(숙종 25) 의흥현감(義興縣監)박성한이 증축하였다. 1721년(경종 1)에 크게 중수하였다. 1890년 일연의 승탑지에 조상의 묘를 쓰려다 실패한 황보씨(黃甫氏)에 의해 일연의 비와 전각이 파괴되는 수난을 당했다.
⇨근현대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이후에는 강설루, 극락전, 명부전 등 몇 채의 전각만이 남아 있는 정도였다. 1963년 향토사학자 장제명의 주도로 강설루(講說樓)를 비롯해 보각국사 비각, 미륵당 등을 보수하였다. 1978년 정부의 보조를 받아 명부전, 극락전을 보수하였고, 1991년 요사채를 이건하였다. 1992년 인각사의 절터가 사적 제374호로 지정되었다. 1992년 이후 5차에 걸친 발굴 조사를 마쳤고, 이를 토대로 2010년부터 2017년까지 8년간 국비 등 총 113억 원을 투입하여 인각사 복원 사업을 추진 중이다. 대한불교조계종 동화사의 말사이다.
⇨문화재는
인각사 보각국사탑 및 비(麟角寺 普覺國師塔 및 碑, 보물 제428호)는 일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와 사리탑이다. 비는 1295년(고려 충렬왕 21) 일연의 제자 청분이 세웠다. 비문은 민지가 지었고, 글씨는 죽허가 왕희지(王羲之)의 유필을 모아 집자한 것으로 그 일부만 남아 있다. 비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심하게 훼손되어 역시 일부만 남아 있다. 사리탑은 팔각의 탑으로 탑의 중심부에는 ‘보각국사정조지탑(普覺國師靜照之塔)’이라는 탑명이 새겨져 있다. 원래 인각사 동쪽 2㎞ 떨어진 부도골에 있었지만 몇 차례 이동되었다가 1978년 인각사 경내로 옮겨졌다. 이밖에 인각사 석불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39호), 인각사 미륵당 석불좌상(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26호), 인각사 삼층석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27호) 등의 문화재와 만월당(滿月堂), 청진당(淸眞堂)의 석종형 승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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