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외 2편) / 박지우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얘기한다 영화를 보다가 비에 대해 얘기하고 모네 그림을 보다가 초경을 한 아이에 대해 얘기하다가 커피 속에서 문득 튀어나온 노랫말을 흥얼거리다가 한 계절을 넘기고 숙녀가 된 아이의 바다도 넘긴다 잉크 묻은 눈빛이 길어진다 거울 속에서 노는 강아지가 있어요 환각일까요 여전히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아무렇게나 얘기한다 시간은 점일까 선일까 강물을 시간이라 할 수 있을까 인터넷 검색 순위를 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오늘을 넘긴다 빤히, 들여다보이는 비밀을 묻기도 한다 아무도 없는 거실 구피가 새끼를 낳았다 또 제 새끼를 먹어 치울까 어제는 누구에게 어제일까 밤은 어제일까 내일일까 누군가의 기억 위를 걷는다 나무에서 쏟아지는 새의 울음소리, 그늘이 흔들흔들 뾰족해진다 언어 속에서 사실은 죽는다 우산들 비는 모든 존재의 키를 키운다지 어쩌면 인간의 내면으로 파고들기 위해 내리는지도 몰라 꽃을 탐하는 비의 건널목으로 산란하는 우산 하나, 둘 그리고 우산 셋 물비린내 날리는 여자가 위태롭게 걸어간다 화려하게 치장한 나비처럼 알록달록 동그랗고 투명한 얼굴들 목줄 풀린 개가 미끄러지듯 달려간다 울퉁불퉁 휘청거리는 비, 당신을 잃어버리겠어요 나, 비, 나비를 꿈꾸는 노랗고 빨간 지느러미 비의 몸뚱이들 후드득 후드득 앞 다투어 뛰어내리는 오독의 문자들 백색소음에 출근길이 저만치 달아난다 시츄의 집 쪽으로 빈집에는 어떤 서사도 없다 해의 누르께한 손가락이 거실을 만진다 으스러지는 소리를 내는 정육면체 숫자 반을 돌리는 시곗바늘이 그, 그 그, 못에 비끄러맨 고요 속으로 산算가지들이 주렁주렁 사물들의 심쿵 소리 주방 한쪽에서는 감자 썩는 소리 무지 털렸어 목이 쉬고 누런 이빨의 햇빛에 직육면체의 빈 어항 속 물고기가 섀도복싱을 할 때 화분은 초록의 목소리를 쏘아 올린다. 레쓰비 한 잔, 그리고 말보로 레드 게르를 흉내 낸 시츄의 집 쪽으로 언뜻 비치는 롱테이크 햇빛 모과가 느리게 아주 느린 걸음으로 노랑에서 검정 쪽으로 기울어지는 선이 가는 도형
집을 채울 수 있는 삶은 없다
—시집 『우산들』 2023. 2 ---------------------- 박지우 / 충북 옥천 출생. 유성에서 성장. 현재 부천에서 삶. 2014년 《시사사》로 등단. 시집 『롤리팝』 『우산들』이 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