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밤을 주우며
박 정 열
‘앗! 따가워’ 한 톨의 밤을 주우려면 어김없이 밤송이의 경고를 받아들여야 했다. 잘 벌어진 밤송이라도 선뜻 밤알을 내어준 적이 없다. 발로 밟고 나무막대기를 가지고 강제로 그 입을 벌려야만 했다. 그때서야 못 이긴 척 그 중 한 톨을 내어 준다. 그런가 하면 밤알을 쉽게 주울 수 있는 곳에는 쭉정이거나 쥐 밤처럼 보잘 것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 이유는 밤알이 충실치 못해 아무데서나 나뒹굴고 있는 것이다.
알이 충실한 밤송이거나 알이 굵은 밤은 멀리 구른다. 자기 몸무게와 나무에서 떨어지는 탄력에 의해 착지점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굴렀기 때문이다. 굴러가다가 나무 등걸에 걸리기도 하고 풀숲에 가서 멈춘다. 또 낙엽 속에 묻히기도 하였다. 이렇다보니 알이 충실한 밤을 주우려면 어쩔 수 없이 풀숲을 헤쳐야 한다. 가시덤불의 억센 방어망을 뚫어야 한다. 간 벌목 무더기를 뒤적거려야만 했다.
밤나무의 키가 큰 이유는 자기보호 본능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다 성장한 밤나무는 보통 그 높이가 15m에서 20m정도이다. 이런 높이에서 떨어지는 밤송이를 어쩌다 얻어맞기라도 하는 날엔 못 견딜 만큼 따갑고 아리고 쓰리다. 그 자국에 난 상처로 통증은 며칠을 시달려야했던 어릴 적 기억이 아른거린다. 알이 충실한 밤송이일수록 그 데미지는 훨씬 더 컸었다. 그땐 몰랐다. 밤나무도 생존본능이 있음을, 이제 겨우 알게 되었다.
밤이 익으면 떨어지는 이유가 있다. 밤나무가 종족번식을 위한 본능적인 활동이다. 채 영글지 못하고 떨어지는 밤송이는, 쭉정이거나 밤벌레가 기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밤벌레가 자라 성충이 되면 밤 바구미가 된다. 밤 바구미는 모양이 쌀, 보리쌀, 콩 같은 곡식에 생기는 바구미와 매우 흡사하다. 크기는 약 0.9cm정도가 된다. 8월에 밤알이 생기기 시작하면 밤 바구미가 밤알에 한두 개 알을 슨다.
밤벌레는 자라면서 과육을 파먹고 산다. 성충이 되면 밤알에서 밖으로 나온다. 밤 바구미는 흙속에다 집을 짓고 산다고 한다. 사람의 입장에서 보나 밤나무 입장에서 보나 밤벌레는 분명 해충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밤알은 밤 바구미의 먹이그물이라서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또 밤벌레 입장에서 보면 자연스러운 생명활동일 뿐이다. 그래서 밤송이는 ‘생성과 소멸’ 즉, 자연의 순환관계에 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연현상에서 보면 인간처럼 지독한 이기주의는 없을 듯하다. 밤을 주워 벌레가 있으면 기분이 언짢다. 우리는 인류가 시작된 이래 줄곧 그들 자연으로부터 먹을거리를 조달해 왔다. 더구나 문명이 발달하고 발달될수록 자연의 훼손은 그 정도가 심화되었다. 이제는 그 유전자마저 변이 변용되게 하고 있는 실정에 이르렀다. 자연을 한낱 자원으로만 여긴다면 모를까, 그 이용가치에 대해서만은 고마움을 가슴에 담아야 옳을 일이다.
밤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와 꿀로 벌을 유인하고 수정을 한다. 인간은 벌이 그 득에 채취한 먹이를 갈취하고도 당연한 것처럼 아주 태연하다. 밤나무는 꿀을 주고 수정을 했다. 벌은 그 대가로 꿀을 얻었으니 공생관계가 성립한다. 반면에 인간은 밤나무의 종자를 착취하였다. 또 벌의 먹이를 갈취하면서 미안하다거나 고맙다는 겸손은 온데간데없다. 자기편익에 도취되어 만물의 영장됨을 과시만하고 있는 것이다.
밤나무는 산짐승의 먹이를 제공한다. 그러나 밤을 제일 좋아하는 다람쥐는 흔히 볼 수 없게 되었다. 남획의 결과인지 천적의 결과인지는 모르겠다. 대신에 그 흔한 산쥐의 먹이는 풍족해졌을 것이다. 밤나무에 기생하는 벌레는 새들의 먹이가 된다.
내가 어렸을 적 기억에는 감을 따도 까치밥을 남겨 주었다. 밭에 심었던 조나 수수도 허수 레기는 남겨 놓았다. 심지어 추수 때는 새와 이삭 줍는 이들을 위해 낱이삭을 논바닥에 남겼었다.
부토(腐土)는 자기 생명연장의 자구책이기도 하다. 식물은 자기가 있는 자리에다 자생(自生)을 위해 낙엽 같이 자기의 일부를 남긴다. 그들이 썩는 부식토에는 또 다른 생명이 살고 있었다. 낙엽과 초본을 썩히는 유기물이 지렁이나 굼벵이를 살게 한다. 이들 득에 나무는 영양분을 얻고 새들은 먹이를 얻는다. 자연은 인간처럼 독식하는 법이 없다. 무언가 얻으려면 먼저 무언가를 내어주었다.
자연을 존중하는 마음은 인간본성으로의 회귀하는 길이다. 우리 마음이 무미건조할수록 자연의 고마움을 외면하는 것 같다. 자연경관이 수려할수록 쓰레기는 더 많이 널려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런 현실 앞에서도 그저 눈 한 번 질끈 감고 외면하면 그 것으로 끝인 줄 안다. 입이 즐거웠고 시장기를 달래준 그 빈껍데기들을, 남 눈치나 봐가면서 슬쩍슬쩍 버린 파렴치의 작태다. 밤을 줍거나 수확하는 것마저 이런 파렴치한 욕심에서 시작됐을 것이다.
국립공원에는 초엽이나 열매 등 임산물을 채취하는 행위를 법으로 금하고 있다. 우리 주위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철철이 임산물 채취에 나서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나물에서부터 애순이며 열매, 뿌리, 버섯, 초목에 이르기까지 그 유형도 다양하다. 그들은 그들이 갔던 곳에 과연 무엇을 주고 오는 가. 주기는커녕 오염만 시키지 않았어도 다행이라 하겠다.
밤나무 주인은 수익성이 떨어지자 밤나무를 자연에 돌려주었다. 내가 밤을 주웠던 곳은 밤나무단지였던 것 같았다. 밤나무의 개량으로 수익성이 떨어지자 버려둔 듯했다. 찾는 사람이 없는 건지, 그곳을 아는 사람이 없었던 건지, 사람이 다녀간 흔적이 없었다. 벌겋게 입이 벌어진 밤송이가 지천으로 늘려 있었다. 떨어진 밤이 많다보니 잔 밤은 그냥 두었다. 굵은 밤만 주워도 한 시간이면 한바가지는 훌륭히 주울 수가 있었다.
하지만 밤을 주워 와도 간수를 잘못하면 버리기 일쑤다. 그래 나는 먹을 만큼만 주워온다. 집에 오면 훈증을 해 냉동실에 보관한다. 그냥두면 벌레가 슬거나 삶아도 변질이 될 수 있다. 버려지지 않게 간수를 잘 해야 밤나무에게 덜 미안하다. 내 입이 즐겁기 위해 주운 밤이다. 나의 수고는 둘째치고라도 버려지는 만큼 밤나무에 미안하다. 다람쥐와 산쥐 같은 짐승들에게도 미안할 일이다.
밤나무를 나와 동급에 놓고 생각하니 감사한 마음이 절로 난다. 밤을 주우러 간 것은 밤만이 목적이 아니었다. 자연도 함께 즐기러 가는 것이다. 밤이 목적이었다면 사서 먹는 게 훨씬 이득이다. 하루 일당에 휘발유 값으로 환산하면 그렇다. 맑은 공기를 마시고 산을 오르면서 잠시 밤 줍는 재미에 빠져보는 걸 어찌 밤 값에 비하겠는가! 게다가 나무 그늘아래 앉아 쉬면서 주변경관을 둘러보는 그런 즐거움도 아주 쏠쏠한 재미이다. 그걸 어찌 밤 값에 비하겠는가!
일상을 벗어나서 자연을 벗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잠시나마 삶의 여유를 부리는 호사가 아니던가. 이 고마움을 어찌 표해야 옳겠는가. 자연에 겸손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방도가 별도로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해야 겸손한 것인가. 자연을 대할 때 내 과시를 말아야겠다는 생각이다. 나는 밤을 주우면서 ‘자연을 자연답게 대하리라.’ 하며 문득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