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ames McNeill Whistler, Symphony in White Number 1: The White Girl, 1862
현재 워싱턴의 내셔널 갤러리에 걸려 있는 휘슬러의 그림은 하얀색 옷을 입은 한 여인의 모습이다. 여인은 백합을 쥔 채 하얀색 커튼 앞에 서 있다. 얼굴은 꽤 어둡다. 다행히도 당시에 선풍적 인기를 끈 ‘블룸어브유스’를 바르지 않은 모양이다. 머리카락은 긴 붉은색(휘슬러와 같은 시대에 활동한 라파엘 전파가 즐겨 쓰던 색)이다. 이 하얀색들은 눈부시다. 그러나 오랫동안 보고 있으면 매우 흥미로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캔버스가 두 부분으로 나뉘기 시작하는데, 마치 몽롱한 꿈속에서 전혀 상반된 두 가지 개념을 보는 것 같다. 물론 여인의 얼굴이 보인다. 그리고 여인의 발밑에 늑대 혹은 곰의 얼굴이 보인다. 아마 바닥에 깐 모피의 일부인 듯하다. 그런데 휘슬러는 왜 짐승의 얼굴을 그곳에 배치했을까? 그 그림은 1862년 런던에서 첫 선을 보였다. 처음에는 제목을 ‘하얀색 옷을 입은 여인’으로 정했었다.
작가 윌키 콜린스가 그와 같은 제목으로 괴기 소설을 출간했었기 때문에 그 제목은 사람들에게 적잖은 혼동을 주었다. 휘슬러는 그러한 혼동을 경멸하는 척했지만 돌이켜보면 교묘한 마케팅 전략을 꾀한 셈이었다. 그 소설은 출간된 지 2년 만에 초대형 베스트셀러로 떠올랐다. 그래서 하얀색 옷과 하얀색 손가방, 하얀색 백합, 심지어, ‘하얀색’으로 불리는 것은 무엇이든 유행했다. 휘슬러의 그 하얀색 그림도 예외는 아니었다.
10년 후, 콜린스의 소설 속 여주인공과 휘슬러의 그림 속 모델이 전혀 닮지 않았다는 불만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휘슬러는 그림의 제목을 ‘하얀색 교향곡 제5번 : 하얀 소녀’로 바꾸었다. 그러나 그림은 곧 불운한 운명을 맞았다. 런던 미술계는 그 제목을 두고 신랄하게 비난햇다. 비평가 필립 길버드 해머톤은 그 그림에 하얀색 이외에도 노란색과 갈색, 파란색, 붉은색, 녹색이 포함되어 있는데 어떻게 하얀색 교향곡이 될 수 있느냐고 몰아붙였다. 그러자 휘슬러는 이렇게 반박했다. “그렇다면 바단조 교향곡에는 오로지 바, 바 바 음만 있어야 한단 말인가? 바보들 같으니.”
 JAMES McNeill Whistler, Symphony in no.2: The Little White Girl,1864
휘슬러의 시대뿐만 아니라 수세기 전에도 화가가 배경을 하얀색으로 칠하는 것은 대단히 파격적인 시도였다. 특히 그림 속 모델마저 밝은 색이 주를 이룰 때는 더더욱, 연백은 주로 캔버스에 광택을 내기 위한 ‘애벌칠’용이었고, 하이라이트를 주기 위해 단독으로 쓰거나 다른 색과 섞어 쓰기도 했으며, 흰자위를 칠할 때도 썼다. 그러나 배경을 연백으로 칠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보통 배경을 이루는 요소는 어두운 색과 그림자, 모델의 심리나 신분 따위를 암시하는 실내 장식 혹은 풍경이었다. 대개 밝은 색은 삼가는 편이었다.
 JAMES McNeill Whistler, Symphony in White no.3, 1865 - 1867
휘슬러의 ‘하얀색 교향곡’은 언뜻 순결을 예찬하는 듯하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과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의 모델인 조애너 히퍼넌은 차분하면서도 영묘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그러나 휘슬러는 그 여인을 ‘정열의 여신 조’ 라고 불렀으며, 하얀색 옷을 입은 그 여인을 그리던 무렵 이미 여러 달 전부터 그녀와 격렬한 사랑을 나누던 터였다. 어머니를 포함한 가족들의 적극적인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를 향한 정열에 불타고 있었다. 스물여덟의 젊은 화가는 흩날리는 납 가루를 마시며 기력을 잃는 동안에도 아일랜드의 연인과 끝없이 사랑을 속삭였다. 여인의 발밑에 그려진 포악한 짐승의 얼굴은 두 연인의 장난기에서 비롯되어 그려진 것은 아닐까? 어쩌면 휘슬러는 그 그림을 보는 이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무척 순결해 보이지요? 하지만 다시 한번 보세요 우리는 이 카펫에 장난을 좀 쳤어요.”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 귀스타프 쿠르베는 그 그림을 유달리 싫어했다. 심지어 그림 속 여인이 ‘심령술사가 불러낸 유령’ 같다고 경멸조로 말하기도 했다. 쿠르베는 4년 뒤에 휘슬러의 연인이었던 조애너와 불같은 사랑에 빠져 동거를 시작했다. 그렇기에 그가 그 그림을 재대로 보기는 무리였다.
James McNeill Whistler, Portrait of Whistler with Hat,1857- 1858
어느 날 아침, 미국의 화가 제임스 아보트 맥닐 휘슬러는 피곤에 지쳐 있었고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때 휘슬러는 며칠 전부터 하얀 소녀를 그리고 있었다.” 서구 문화권에서 흰옷을 입은 여인은 자주 순결을 상징한다. 하얀색 자체도 마찬가지로 순결 혹은 순백을 상징한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 한국에서 하얀색은 보통 죽음과 병, 특히 장례를 상징한다. 이렇듯 백색 안료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으며, 휘슬러가 모델의 옷과 우아한 주름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하얀색 안료는 급기야 그를 앓아눕게 만들었다.(물론 여인의 붉은색 머리카락과 비쭉 내민 입술 역시 그 젊은 화가의 마음에 고통을 주었을지 모른다.)
 Johannes Vermeer, Lady Standing at a Virginal, c.1670
하얀색 안료의 재료는 매우 많다. 백악, 아연, 바륨, 쌀, 그밖에 석회암에서 발견되는 바다 생물 화석 등. 심지어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얀 베르메르는 설화석고와 석영을 재료로 하얀색 발광 안료를 만들었다. 그래서 베르메르의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빛이 그림에서 반사하며 마치 춤을 추고 있는 듯하다. 1670년, 베르메르는 작은 하프시코드(혹은 버지널)를 연주하는 젊은 여인의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그림 속 여인은 건반을 두드리고 있으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의 머리 위 벽에는 커다란 큐피드 그림이 걸려 있다. 창문으로 들어온 빛이 하얀색 방을 심상치 않게 비춘다. 화가는 하얀색을 주조로 미세하게 흔들리는 빛과 차가운 분위기를 매우 섬세하게 표현했다. 그리하여 아늑하고 안정된 느낌과는 전혀 상반된 느낌이 전해진다. 그러한 효과는 그 젊은 음악가가 현실과 전혀 다른 꿈을 꾸고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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