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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8월 14일 금요일
[(홍)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성인은 1894년 폴란드 즈둔스카볼라에서 태어났다. 열네 살에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1917년 성모 신심 단체인 ‘성모 기사회’를 설립하였다. 이듬해 로마에서 사제품을 받은 콜베 신부는 평생을 선교사로 살아가다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였을 때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혔다. 그곳에서 수감자 한 명이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수용소에서는 한 명이 탈출하면 열 명을 지목하여 처형하는 규칙이 있었다. 이에 따라 지목된 열 명 가운데 한 사람이 자기에게는 가족이 있다며 울부짖자 콜베 신부가 그를 대신하겠다며 나섰다. 결국 콜베 신부는 다른 아홉 명과 함께 굶겨 죽이는 형벌을 받고 1941년 지하 감방에 갇혀 세상을 떠났다. 1982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그를 ‘자비의 순교자’라 부르며 시성하였다.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나던 날부터 보살펴 주셨는데 그들은 불륜을 저질렀다며, 그래도 계약을 생각해 용서하겠다는 말씀을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내리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되냐고 묻는 바리사이들에게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내가 너에게 베푼 영화로 네 아름다움이 완전하였다. 그런데 너는 불륜을 저질렀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6,1-15.60.63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사람의 아들아, 예루살렘에게 자기가 저지른 역겨운 짓들을 알려 주어라.
3 너는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예루살렘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의 혈통과 태생으로 말하자면, 너는 가나안 땅 출신이다.
너의 아버지는 아모리 남자고 너의 어머니는 히타이트 여자다.
4 네가 태어난 일을 말하자면, 네가 나던 날,
아무도 네 탯줄을 잘라 주지 않고, 물로 네 몸을 깨끗이 씻어 주지 않았으며,
아무도 네 몸을 소금으로 문질러 주지 않고 포대기로 싸 주지 않았다.
5 너를 애처롭게 보아서, 동정심으로 이런 일을 하나라도 해 주는 이가 없었다.
오히려 네가 나던 날, 너를 싫어하여 들판에 던져 버렸다.
6 그때에 내가 네 곁을 지나가다가, 피투성이로 버둥거리는 너를 보았다.
그래서 내가 피투성이로 누워 있는 너에게 ′살아남아라!′ 하고 말하였다.
7 그러고 나서 너를 들의 풀처럼 자라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서 꽃다운 나이에 이르렀다.
젖가슴은 또렷이 드러나고 털도 다 자랐다.
그러나 너는 아직도 벌거벗은 알몸뚱이였다.
8 그때에 내가 다시 네 곁을 지나가다가 보니, 너는 사랑의 때에 이르러 있었다.
그래서 내가 옷자락을 펼쳐 네 알몸을 덮어 주었다.
나는 너에게 맹세하고 너와 계약을 맺었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그리하여 너는 나의 사람이 되었다.
9 나는 너를 물로 씻어 주고 네 몸에 묻은 피를 닦고 기름을 발라 주었다.
10 수놓은 옷을 입히고 돌고래 가죽신을 신겨 주었고,
아마포 띠를 매어 주고 비단으로 너를 덮어 주었으며,
11 장신구로 치장해 주었다.
두 팔에는 팔찌를, 목에는 목걸이를 걸어 주고,
12 코에는 코걸이를, 두 귀에는 귀걸이를 달아 주었으며,
머리에는 화려한 면류관을 씌워 주었다.
13 이렇게 너는 금과 은으로 치장하고, 아마포 옷과 비단옷과 수놓은 옷을 입고서,
고운 곡식 가루 음식과 꿀과 기름을 먹었다.
너는 더욱더 아름다워져 왕비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14 네 아름다움 때문에 너의 명성이 민족들에게 퍼져 나갔다.
내가 너에게 베푼 영화로 네 아름다움이 완전하였던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15 그런데 너는 네 아름다움을 믿고, 네 명성에 힘입어 불륜을 저질렀다.
지나가는 아무하고나 마구 불륜을 저질렀다.
60 그러나 나는 네가 어린 시절에 너와 맺은 내 계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계약을 세우겠다.
63 이는 네가 저지른 모든 일을 내가 용서할 때,
네가 지난 일을 기억하고 부끄러워하며,
수치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3-12
그때에 3 바리사이들이 다가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읽어 보지 않았느냐?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나서,
5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
6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7 그들이 다시 예수님께,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 하자,
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
10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
12 사실 모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사람들 손에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며,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지혜 3,1-9 또는 1요한 3,13-18)와 복음(요한 15,9-17)을 봉독할 수 있다.>
오늘의 묵상
누구나 하느님께 받은 역할과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에 따라 서로 다른 호칭으로 불립니다. 이를테면 아빠, 엄마, 부모, 자녀, 남편, 아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이름은 때가 되면 그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 따라 붙여집니다. 자녀가 있어 부모라는 이름이 주어지고, 아내가 있어 남편, 남편이 있어 아내라는 이름이 주어집니다. 이렇게 짝이 되는 이름들은 나 스스로 붙이는 이름이 아니라 내가 맺는 관계 속에서 붙여지는 것입니다. 곧 이 이름이 주어지는 까닭은 그 이름으로 불리게 해 준 이를 위한 것입니다. 서로를 위하여, 곧 네가 있기에 내가 있고, 내가 있기에 네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마태 19,8)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완고한 마음은 어디에서 생기는 것일까요? 부모와 자녀, 남편과 아내보다 우리에게 맨 먼저 붙여진 이름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과 짝이 되는 이름은 바로 하느님, 사람을 지으신 하느님이십니다. 이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 바로 우리 마음의 완고함이 아닐까요?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든 우리는 먼저 하느님과 우리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하느님께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나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맺고 계심을 깨달을 때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19,6)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깊은 뜻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유청 안셀모 신부)
저 울고 있는 사람 대신 내가 죽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누군가 수용소를 탈출했습니다. 도망친 사람이 끝내 잡히지 않자 소장은 모든 수용자들을 집합시켰습니다.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소장은 10명을 선발해서 아사감방으로 보내기로 했던 것입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갑자기 아사감방으로 가게 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유난히 큰 소리로 울부짖었습니다.
“아, 불쌍한 아내와 아이들을 이제 다시는 못 보게 되었구나!”
그 순간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일이 발생했습니다. 한 포로가 대열을 이탈해서 소장 앞으로 걸어 나온 것입니다. 콜베 신부님이었습니다.
“원하는 게 뭐냐?”
“저 울고 있는 사람 대신 내가 죽겠습니다!”
“도대체 왜?”
“나는 늙었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살아있어도 아무것도 못 하게 될 것입니다.”
“너는 누구냐?”
“천주교 사제요.”
길고 긴 침묵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콜베 신부님은 기다리셨습니다. 그의 시선은 소장의 얼굴 너머 먼 곳으로 향했습니다. 먼 산 너머로 활활 자신을 불태우며 넘어가는 아름다운 석양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순간 마지막 미사라도 봉헌하듯이 그렇게 당당하게 서 계셨습니다. 마침내 소장은 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좋다, 함께 가라.”
열 명의 사형수들은 맨발에 셔츠 차림으로 죽음의 감방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습니다. 모든 사람의 눈이 그들의 뒤를 따랐습니다. 콜베 신부님은 마치 양떼를 몰고 가는 목자처럼 제일 뒤쪽에서 따라갔습니다. 머리를 약간 옆으로 기울인 채, 가슴 속으로는 천국을 그리면서...
“나의 모후, 나의 주님, 나의 어머님, 오 원죄 없으신 동정녀시여, 당신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나는 지금 바로 이 시간을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콜베 신부님의 죽음은 이런 측면에서 자청한 죽음, 예정된 죽음, 계획된 죽음, 준비된 죽음이었습니다. 그는 한 평생 이 마지막 순간, 장엄하게 낙화할 순교의 순간을 꿈꾸어왔던 것입니다. 그의 평생에 걸친 순교자적 생애는 지하 감방에서 활짝 결실을 맺게 된 것입니다.
콜베 신부님의 죽음은 어쩌면 한 점 티 없는 어린 양이셨던 예수님, 순결한 봉헌 제물이었던 예수님의 삶을 판에 박은 듯이 빼닮았던 죽음이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1982년에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생각한 젊은이 104명이 함께 신학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7년의 학교생활과 3년의 군 생활을 지내면서 중도에 그만두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학업을 따라가기 어려웠던 친구도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친구도 있었습니다. 세상 안에서 다른 모습으로 하느님의 뜻을 전하겠다고 떠난 친구도 있었고, 학교의 교칙과 내규를 지키지 못한 친구도 있었습니다. 기숙사 생활을 견디지 못한 친구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991년에 사제 서품을 받은 친구는 절반가량이 되었습니다. 사제가 된 후에도 몇몇 친구는 사제직을 떠났습니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견디지 못한 친구도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새로운 길을 선택한 친구도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먼저 하느님의 품으로 떠난 친구도 있습니다. 어느덧 35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중간에 그만둔 것이 실패는 아닙니다. 지금까지 사제로 살아온 것이 곧 성공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는지만 보시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서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 하느님의 뜻을 찾았는지, 하느님의 의로움을 지켜내려 했는지를 보십니다. 어떤 자리일지라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의 자비를 붙잡고 살아간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으로 받아 주십니다.
인생의 후반전을 준비하는 부부를 만났습니다. 두 분은 각자 전 배우자와 헤어진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사람을 만나 다시 삶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저는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지나온 시간이 상처만으로 남지 않기를, 새롭게 시작하는 삶이 하느님 안에서 평화와 책임의 길이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헤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격 차이 때문에, 사업 실패 때문에, 깊은 상처 때문에, 때로는 또 다른 만남 때문에 헤어지기도 합니다. 교회는 혼인을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거룩한 성사로 고백합니다. 혼인은 가볍게 맺고 가볍게 끊을 수 있는 약속이 아닙니다. 그러나 현실의 삶은 언제나 낭만적이지만은 않습니다. 헤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도 있고, 헤어져야만 하는 아픔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혼인의 거룩함을 지키면서도, 상처 입은 이들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법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성실하게 해결해야 합니다. 동시에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이들이 하느님 안에서 다시 설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고 동행해야 합니다. 인생의 후반전을 준비하는 분들이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비록 지난 삶에 아픔과 상처가 있었을지라도, 이제 다시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의 의로움을 지키며, 책임 있는 사랑으로 살아가려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운 사랑으로 그들을 품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합니다.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그 질문은 진리를 찾기 위한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곤란하게 만들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질문을 받습니다. 저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사제 생활, 할 만하십니까?” 저는 그 질문을 제목으로 서품 25주년 은경축 기념 책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사제 생활, 할 만합니까?”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지, 아픈 이들을 위로하고 있는지, 악의 유혹과 싸우고 있는지,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인이 단순한 계약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맺는 거룩한 약속임을 말씀하십니다. 혼인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책임을 다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기쁠 때만이 아니라 힘들 때도, 건강할 때만이 아니라 병들 때도, 풍요로울 때만이 아니라 가난할 때도 함께하겠다는 약속입니다. 혼인의 약속은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 안에 드러내는 성사입니다. 그러므로 혼인은 단순히 두 사람이 행복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 하느님의 뜻을 살아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중요한 진리를 듣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셨습니다. 자비를 베푸셨고, 돌보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 맺은 약속을 자주 잊었습니다. 다른 신을 섬기고, 하느님의 사랑을 배반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셨고, 용서하셨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저지른 모든 일을 내가 용서할 때, 네가 지난 일을 기억하고 부끄러워하며, 수치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하느님의 용서는 지난 잘못을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용서는 우리가 지난 삶을 기억하게 하고, 부끄러움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게 하며, 더 깊은 사랑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너는 지금 누구를 사랑하고 있느냐?” “너는 지난 상처를 붙잡고 있느냐, 아니면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다시 시작하고 있느냐?” 인생의 전반전이 뜻대로 되지 않았어도 괜찮습니다. 후반전이 남아 있습니다. 한 번 넘어졌어도 괜찮습니다.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길을 바꾸었어도 괜찮습니다. 그 길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으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실패하지 않는 삶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넘어졌을 때 하느님께 돌아오는 삶입니다. 중요한 것은 상처 없는 삶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상처를 통해 더 깊은 사랑을 배우는 삶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과거만 보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현재를 보시고, 우리가 다시 걸어갈 미래를 열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가정 안에서, 사제직 안에서, 수도 생활 안에서, 신앙의 길 안에서 다시 묻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가? 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있는가? 나는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다시 시작하고 있는가?” 그 질문에 정직하게 응답할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 후반전도 은총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 그대 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6)
하느님께서
그대를 나에게
그리하여
나는 그대를 품고
그대는 나에게 스미어
우리는
갈림 없는
하나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그대에게
그리하여
그대는 나를 품고
나는 그대에게 스미어
우리는
갈림 없는
하나입니다
오늘의 성인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Maximilian Mary Kolbe)
신분 : 신부, 순교자
활동연도 : 1894-1941년
같은이름 : 꼴베, 막시밀리아누스, 막시밀리안, 막씨밀리아노, 막씨밀리아누스, 맥시밀리안, 맥시밀리언
1894년 1월 7일 폴란드의 즈둔스카볼라(Zdunska Wola)에서 태어난 성 막시밀리아누스 마리아 콜베(Maximilianus-Maria Kolbe, 또는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는 라이문두스(Raimundus)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1910년 9월 4일
콘벤투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면서 막시밀리아누스라는 수도명을 택하였다. 이곳에서는 그는 중등 교육과 수련을 받고 1911년 9월 5일 첫서원을 했으며, 1912년 12월 로마(Roma)에 가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는 로마의 프란치스코회 국제 신학원에 머물면서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보나벤투라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무렵 23세였던 성 막시밀리아누스 마리아는 여섯 명의 동료와 함께 신학원장 신부의 허락하에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회'(Militia Immaculatae)라는 모임을 결성하였다(1917년 10월 16일).
이 모임은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에게 자신을 철저히 봉헌하고, 세계의 복음화를 위해서 활동하는 일종의 신심 단체이다.
1914년 11월 1일 종신서원을 하고, 1918년 4월 28일 사제품을 받은 성 막시밀리아누스 마리아는 1919년에 고국인 폴란드로 돌아왔다.
귀국 직후 크라쿠프(Krakow)의 프란치스코회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동료 수사들은 물론 대학생들과 군종신부들 안에서 기사회 조직을 만들었다.
1922년부터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Rycerz Niepokalanje)라는 잡지를 발행함으로써 매스 미디어를 통한 사도직을 시작하였다.
이 잡지는 초기에 그로드노(Grodno)에서 발행되다가, 1927년에는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Miepokalanow)이라는 수도생활 공동체에서 발행하였다.
이 마을은 성 막시밀리아누스 마리아 신부가 바르샤바(Warszawa)에서 40km 떨어진 방대한 지역에 설립한 공동체이다.
그리고 1930년에는 일본 나가사키에도 이와 비슷한 형태의 수도원을 세웠다.
그 후 중국, 한국, 인도에도 공동체를 세우려고 했으나 외부적인 이유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폴란드 내에서 유명해진 성 막시밀리아누스 마리아 신부는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나치에게 체포되어 수용소에 갇혔다가 곧 풀려났다.
이후 그는 가난한 이들과 박해받는 유대인들을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에 거주토록 하면서, 이들을 보호하고 돕기 위해 노력하였다.
1941년 그가 "자유"라는 기고문을 발표하자, 나치는 유대인들을 도왔다는 이유로 2월 17일 그를 체포하여 바르샤바의 파비악 형무소에 감금했다가 2월 28일 '죽음의 수용소'라고 불리는 아우슈비츠로 옮겨졌다.
이곳에서 그는 저명한 가톨릭 신부라는 이유로 더욱 혹독한 매질과 고문과 처벌을 받으면서도, 동료 수감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끊임없이 격려하였다.
그러던 중 1941년 7월 말경, 한 수감자가 수용소를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치는 한 명이 탈출하면 그 벌로 열 명을 처형하였다.
나치에 의해 지목된 열 명의 처형자 중 한 폴란드 사람이 자기에게는 가족과 아이들이 있다고 울부짖자 이를 본 성 막시밀리아누스 마리아 신부는 자원해서 대신 죽겠다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결국 그는 다른 아홉 명과 함께 지하 감옥에 갇혀 아사형에 처해졌다.
다른 동료들이 모두 굶어 죽을 때까지 2주 이상을 물과 음식 없이 생존한 그에게 나치는 결국 독극물을 주사했고, 이로써 그는 1941년 8월 14일 아우슈비츠의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성 막시밀리아누스 마리아 콜베 신부가 죽음을 맞이한 감옥은 많은 순례자들이 찾는 장소가 되었다. 1948년 그에 대한 시복 절차가 시작되어 마침내 1971년 10월 17일 교황 복자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2년 10월 10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가 '자비의 순교자'(Martyr of Charity)라는 칭호와 함께 그를 시성하였다.
성 막시밀리아누스 마리아 콜베 신부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매우 깊었으며, 성모 마리아에게 특별한 공경을 바친 성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성 아르눌포 (Arnulf)
활동년도 : +1087년
신분 :주교
지역: 수아송(Soissons)
같은 이름: 아르놀도, 아르놀두스, 아르눌, 아르눌푸스, 아르눌프
성 아르눌푸스(Arnulphus, 또는 아르눌포)는 1040년경 벨기에 플랑드르(Flandre) 지방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기사가 되었다. 그는 프랑스의 앙리 1세(Henri I, 1031~1060년 재위) 왕의 기사로서 군 복무에 헌신하였다. 하지만 1060년경 세상보다는 하느님에게 봉사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생각이 들자 바로 수아송으로 가서 생메다르(Saint-Medard) 수도원에 들어가 베네딕토회 수도승이 되었다. 그는 모범적인 수도 생활로 실천했다. 그리고 장상의 허락을 받아 자발적으로 봉쇄된 공간에서 은수자의 삶을 시작했다. 3년 동안 작은 방에 들어가 절대 고독을 즐기며 사람들과의 접촉 없이 오로지 기도와 참회 생활에만 전념하였다. 이러한 생활은 1076년에 그가 수도원장으로 선출되어 억지로 불려 나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수도원장 직책을 피하고 싶어서 도망가려 했으나 늑대가 길을 막아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원장직은 오래가지는 못했다.
1081년에 교구 성직자와 시민들은 시노드를 열어 성 아르눌포를 수아송의 새 주교로 선출하였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교직을 수락했지만 모든 업무에서 놀라운 지혜와 정열을 보여주었다. 그는 교황 성 그레고리오 7세(Gregorius VII, 5월 25일)의 개혁을 강력히 지지했는데, 필리프 1세(Philipp I, 1060~1108년 재위) 왕의 지원을 받는 전임자와 그 추종자들에 의해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는 또한 여러 차례의 군사적 충돌에서 중재자로 활약해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평화의 사도’로 불렸다. 하지만 반대자들의 압력으로 1085년에 수아송의 주교좌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는 모든 일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플랑드르 지방 브뤼헤(Brugge) 근처 오덴부르크(Oudenburg)에 베네딕토회의 생피에르(Saint-Pierre)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그는 평화 조약을 맺으라는 부름을 받고 여행을 가던 중 병에 걸려 1087년 8월 15일 오덴부르크 수도원에서 선종하였다.
그의 무덤에서 기적이 일어나면서 그에 대한 공경이 활발해졌다. 1120년에 소집된 보베(Beauvais) 시노드에서 수아송의 주교는 성 아르눌포의 전기를 제출하며 그의 유해를 성당으로 이장할 수 있는 허락을 요구했고, 그의 유해는 이듬해 생피에르 수도원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는 제분업자와 맥주 양조업자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는데, 이는 그의 수도원에서 맥주 양조를 하여 농민들에게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중세 유럽에서 맥주는 물만큼 중요한 음료였는데, 맥주를 만들기 위해 탁한 물을 끓여 소독하고 알코올과 홉 덕분에 더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8월 15일 목록에서 프랑스의 수아송에 성 아르눌포 주교가 있었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8월 14일로 축일을 옮겨 수아송의 주교였던 성 아르눌포가 플랑드르의 오덴부르크에서 선종했는데, 그는 군인에서 수도승이 되었고 나중에 주교로 선출되어 평화와 화합을 위해 노력하다가 자신이 세운 수도원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기록하였다. 성 아르눌포는 성 아르눌(Arnoul), 성 아르놀두스(Arnoldus, 또는 아르놀도)로도 불린다.
성 파카난 (Fachanan)
활동년도: +6세기
신분: 주교 , 수도원장
지역 : 로스(Ross)
같은 이름: 파샤난, 파차난, 파캐난, 파캐넌, 파쿤도, 파쿤두스, 파흐트나, 팩트나
성 파카난은 6세기 중엽 아일랜드 남부 툴라흐테안(Tulachteann)에서 태어나 킬리디(Killeedy)의 성녀 이타(Ita, 1월 15일) 문하에서 공부하고, 먼스터(Munster) 지방 코크(Cork) 동부 욜(Youghal) 마을 근처 블랙워터강(Blackwater R.)의 어느 섬에 몰라나(Molana) 수도원을 세웠다. 그리고 몇 년 후 고향으로 돌아와 만(灣)을 끼고 있는 코크의 로스카베리(Rosscarbery)에 수도원을 설립했다. 그가 설립한 수도원 학교는 신학과 문학 교육으로 유명해졌고, 유럽 전역에서 수많은 수도자와 학생들이 모여들어 ‘순례자의 로스’(Ross of the Pilgrims)라는 뜻의 ‘로스-아일리시르’(Ross-Ailithir)로 불렸다.
일반적으로 성 파카난은 주교로 임명되어 로스 교구의 초대 주교가 되었으며 그 교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그는 현명하고 정의로우며 훌륭한 설교자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6세기 말에 40대 중반의 나이로 선종해 로스에 있는 대성당에 묻혔고, 그에 대한 공경은 1902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승인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8월 14일 목록에 그의 이름을 추가하면서, 아일랜드 로스의 주교이자 대수도원장인 성 파카난이 로스에 세운 수도원이 신학과 문학을 가르치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기록하였다. 성 파카난은 성 파흐트나(Fachtna) 또는 라틴어로 파쿤두스(Facundus, 또는 파쿤도)로도 불린다.
성인 에우세비오(Eusebius)
활동년도:+4세기경
신분:신부,증거자
지역:로마(Roma)
같은 이름:에우세비오스,
에우세비우스
4세기 후반부에 로마에서 살았던 성 에우세비우스(또는 에우세비오)의 생애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는 아리우스파(Arianism) 황제이던 콘스탄티우스를 반박했던 사제였고, 교황 펠릭스 2세(Felix II)를 공적으로 지지하였으며, 교회의 공식 집회가 금지된 후부터는 자기 집에서 미사를 집전했던 용감한 사제였다. 이 때문에 그는 자기 집에서 체포되어 7개월 후에 운명하였다. 그는 아피아 가도(Via Appia)에 있는 칼리스투스(Callistus) 묘지에 안장되었는데, 묘비명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하느님의 사람인 에우세비우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