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지제지 출판하러 천관산을 백번 오르다
1989년 9월 중순 장흥문화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강남대학(江南大學) 홍순석(洪順錫)교수와 학생 6명이 ‘고문적조사연구(古文籍調査硏究)’를 위해 관산을 방문하니 도와달라는 부탁이었다. 홍교수일행이 도착했다. 덕운은 그들을 방촌의 존재공 생가를 비롯 위성렬, 성탁씨와 당동 경량씨 댁을 안내했다.
홍교수 일행은 관산에서 여러 날 머무르며 조사 작업을 진행했다. 3일째 되던 날 성렬씨 댁에서 지제지 원본이 나왔다. 책장마다 간인이 찍혀 있었다. 교수와 학생들은 기뻐서 환호성을 올렸다. 그는 홍교수와 함께 읍내 부산광고사에 가서 지제지를 5부 복사했다. 원본은 돌려주고 복사본 2부씩을 챙기고 1부는 존재 댁에 줬다.
홍교수 일행은 그날로 귀경했다. 3일째 되던 날 주요 중앙지에 지제지 원본이 나왔다는 기사가 대문짝처럼 크게 보도됐다. 존재공께서 저술한 책이 다시 부활하는 신호였다. 복사한 원본과 1976년에 출판한 책의 내용은 서로 틀린 대목이 많이 나왔다. 사진이 들어간 책을 다시 출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광주로 도곡(道谷) 위계방(魏啓昉)씨를 찾아갔다. 출판을 위해 번역을 부탁한 것이다. 도곡은 번역을 흔쾌히 수락했다. 사진은 관산의 형제사진관에 위탁했다. 그 때부터 그는 사진사 이씨와 날씨만 좋으면 천관산으로 올라갔다. 6개월 동안 300장의 사진을 촬영, 잘 찍힌 150장을 엄선해서 송정(松亭)문화사에 감정을 의뢰했다.
그러나 한 장도 쓸 수 없다는 혹독한 감정결과가 내려졌다. 사진전문가는 우선 사진의 기초인 원근조정에서부터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므로 이미 만들어진 사진으로는 출판할 수 없다고 했다. 반년 간 어렵게 찍은 사진을 쓸 수 없다고 하니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실망의 여파로 한 달이 지나버렸다.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좋은 사진을 찍기로 했다. 기자출신 전문가를 소개받았다. 덕운은 사진기자 윤씨와 약속을 했다. 좋은 날이면 전화로 알린다. 그러면 기자와 송정문화사 정찬흥(鄭燦興)사장이 승용차로 내려와 세 사람이 함께 천관산으로 올라가 사진을 찍곤 했다.
날씨의 변덕은 천변만화였다. 사진사를 오라고 전화할 때는 좋은 날씨가 오는 도중 돌변하고, 밑에서는 좋았다가도 촬영적지에 가면 전혀 딴 세상으로 변하기 일쑤였다. 하루에 세 번도 오르고, 올라갔다 허탕치고 오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저 구름만 지나가면 되려니 하고 기다리다 하루를 산에서 보내기도 했다.
무정한 날씨로 인해 천관산을 사진에 담는데 거의 3년의 세월이 흘렀다. 100번 이상이나 오른 후에야 쓸만한 사진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사진촬영과 더불어 번역된 원고를 천관(天冠) 위민환(魏民煥) 종원에게 교정을 부탁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광주에 있는 출판사(송정문화사)에 출판을 의뢰했다.
출판사는 바로 인쇄에 들어갔다. 1992년 6월 드디어 책이 나왔다. 2000부를 찍는데 소요된 비용 1250만원 가운데 750만원은 군비 보조로, 나머지 450만원과 ‘사진으로 본 장흥 천관산’ 3000부의 출판비 500만원은 덕운이 부담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출판주체는 장흥문화원으로 했다. 기관이 공신력이 있기 때문이다.
책은 여러 기관으로 탁송했다. 전국의 문화원, 시‧군‧구청, 전국의 산악회, 군내 기관에 보내졌다. 천관산 화보집은 등산객에게 배포했다. 전남도청 문화관광과에 10부를 주었더니 “천관산이 이렇게 좋은지 몰랐다”며 놀라워했다. 천관산의 도립공원 지정(1998년)은 바로 지제지의 영향이 지대했다.
또한 등산객이 뒤늦게 많이 찾은 원인도 책과 화보의 덕이 컸을 것으로 사료된다. 만일 존재공의 지제지가 없었다면 천관산도 평범한 산에 불과했다. 그러니 오늘의 천관산은 공의 음덕으로 유명해진 것이다. 천관산이 다른 어떤 산보다 유명한 것은 국토의 서남단 끝자락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제지의 덕도 크다.
4) 길손이 쉴 영월정(迎月亭)을 건립하다
천관산은 반도의 최남단에 있지만 적잖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우리는 그들이 찾아오게 지제지도 두 번이나 발간하고, 아름다운 풍광을 사진으로 찍어 배포했다. 그런저런 이유로 근래에 와서 전국에서 찾는 이가 연간 10만명을 넘는다. 그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게 쉴 곳을 갖추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정자를 짓기로 결심했다.
1992년 여름. 광주에 있던 자녀들 학숙소를 처분할 때 약간의 경제적 여유가 있었다. 2천만원 안팎이면 쓸만한 정자 하나를 지을 수 있다고 들었다. 가족들과 상의했다. 군청에 정자를 기부채납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리고는 정자의 모델을 보기 위해 강진읍 뒷산, 작천면, 진주 촉석루 산마루의 정자를 답사했다.
다음은 건물의 주재료를 무엇으로 하느냐를 결정하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콘크리트 건물이 오래갈 것처럼 보인다. 덕운도 그럴까 생각했다. 그러나 전문가에게 물어본 결과 목조를 잘 지으면 콘크리트보다 수명이 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것을 알고는 목조건물을 짓기로 확정했다. 더구나 우리는 목조가 더 정겹다.
목조건물을 제대로 짓기 위해서는 목수에 달려있다. 수소문한 결과 장흥군 부산면 기동리 출신 일가로 위영기(魏永基)씨를 알았다. 그는 고궁이나 큰 사찰 등 문화재를 지은 대목이라 해서 추천받았다. 또 한분은 화순에서 당시 사찰건물을 건축 중인 목수로 세 번을 만나 부탁한 후 일을 해주기로 약속받았다.
목재도 잘 구입해야 좋은 건물을 지을 수 있다. 강원도로 가서 정자용 목재를 구입했다. 18톤 트럭 3대에 나누어 운반했다. 이제는 이미 정한 위치에 기반공사를 할 차례다. 1992년 8월 터파기와 함께 공사를 시작했다. 8개의 기둥은 기단에 7자의 둥근 돌에 올려 비바람을 맞아도 영향을 최소화하게 했다.
위목수는 조수와 함께 60일 만에 목공부분을 마쳤다. 화순에서 가장 질이 좋은 기와를 구입해 얹는 등 뼈대공사는 대충 마쳤다. 그러나 정자 안의 앉을 자리의 소재가 문제였다. 목재로 할까 했으나 영구적이 되지 못해 돌로 하기로 했다. 다만 가까운 석재공장에서는 기술이 없어 화순공장에 맡겨 처리했다.
정자공사는 약 90일이 소요됐다. 감역은 사형(玉泉) 욱량(彧良)께서 맡아주었다. 공사비는 3000만원이 조금 넘게 들었다. 군에 헌납하는 절차도 마쳤다. 지금 천관산을 찾는 사람들은 영월정에 앉아 장천의 경승을 보며 피로를 식히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공은 출타하지 않으면 하루 새벽도 빠지지 않고 청소한다.
이번 수련회 때 개소식 축사를 맡으셨습니다. 늘 인자하시고 포근한 문중사랑은 여전하셨습니다. 저도 나이들면 저런 모습이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천관산을 100번이나 오른 그 열정은 아무도 흉내내지 못 할 것입니다. 사랑합니다.
다들대단하시분들ㅇ십니다저절로고개가숙여지느군요ㅣ
휼륭하신 위문중 조상님들의 옛발자취와 문중사에 대해 공부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