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버려야 할 나이(1)
15년만의 방 도배
15년 만의 방 도배다. 이곳 둔촌동 주공아파트로 이사온 해가 88올림픽이 막 끝난 9월초 였으니
20년하고고 일년이 가까워 온다. 앞 대청 마루로 보이는 일자산 일명 김일성 별장(?) 이 보기
좋아 무조건 계약부터 하고 혹시나 계약이 해지할까 봐 한달 여 동안 노심초사 하던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작은 트럭에 지금의 이불장과 장식장, 지금은 버려져 없어진 침대는 물론, 하잘 것 없는 물건도
혹시나 하고 몽땅 싣고 이사를 오던 날, 아직도 눅눅한 구수한 도배 풀 냄새가 가시지 않은 깨끗이
도배된 아파트, 유난히도 밝고 넓어 휑하니 덩그렇게만 느껴지던 도배된 거실, 아직도 이삿짐도
많지 않아 창 밖으로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던 큰방, 조용히 일자산을 바라보며
이 모든 것들을 내가 마련했다는 뿌듯함에 고향하늘을 바라보며 빙긋이 웃던 그때 그 시절 그때는
도배를 하고 들어온 집이었다.
그 후 어느 날 마누라의 말에 의하면 15년 전이라니까 그 때는 그래도 좀 고급스러운것으로 교체했는가
보다. 크는 애들에 맞게 책상을 좀 더 크고 세련된 것으로 벽지나 천장지도 최고급 비단(?)종이라는
것으로 하고 또 장판도 최고급 럭키 모노룸으로 했으니까.
그러는 중에도
경산 촌놈이 생전처음 현대인 감각으로 누워 자던 침대가 방이 좁다는 이유로 없어져야 했고, 그
와중에 침대 밑에 나만 알고 숨어 지내던 내 일기장이 한자 숨길 자리를 잃으면서 내 손에 갈기갈기
찢기어 폐 휴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동시에 그때까지 나의 소중하고 비밀스러웠던 과거가 몽땅
‘잃어버린 20년’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지지난 주초
봄이 오면 노래처럼 ‘올 여름에는 천 없어도 가스레인지 부터 바꾸고 주방도 확 바꾸어야지, 둔촌
아파트가 오래되고 촌스러워서 추워서 세도 잘 안 나간다니까 근처에서 전세 값이 제일 사, 옆에 있는
xx아파트보다 적게 나간다니까! 이 참에 바닥에 온돌도 깔고 이제는 좀 좀 밝고 따뜻하게 살아야지!’
하며 주머니 돈과 삼지 돈을 이리저리 꿰어 맞추어 보다 도저히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는지, 재 건축
밀이 나온 10여전부터는 “재 건축 언제 되지…재 건축한다는데 돈 들여 집수리를 할 수도 없고….’
하면서 잠잠하더니, 이정부가 들어서면서 금방 될 것 같던 재건축이 하세월 진전될 기미가 없자
이제는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었던지 아니면 며칠 전에
‘가스레인지가 이젠 고쳐도 안 된데… 이젠 버리고 새로 하라고 했다’는 말대로 어쩔 수가 없는지
어차피 재건축이 될 텐데 헛돈 들일게 뭐 있느냐는 나의 논리에 동조하며 그 동안 임시변통으로 잘도
버텨온 마누라가 갑작스레(마누라에게는 벼루고 벼뤄) 다음 주에 주방도 고치고 가스레인지도 교체하고
그리고 하는 겸에 도배도 새로 하고 바닥도 새로 깐다고 한다. 이러나 저러나 금전적으로 별로 보탬이
되지 못하는 나야 가만 히 있으면 되지만 그래도 가장이라고 걱정이 된다.
그러다 어느 날 약간 늦은 밤
한잔 걸치고 집에 들어온 나는 깜짝 놀랐다. 주방이 대낮같이 밝아졌고 꾀죄죄하던 가스레인지가 덩실덩실
커다란 불꽃을 피우며 주방 한 켠에 우뚝하고, 선반이며 서랍장이 은백색으로 다투어 눈길을 끈다.
와! 좋다! 돈이 좋긴 좋다.
평소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제발 상의 좀하고 사라, 혼자 좋다고 덜렁 사지 말고!’하며 불편한 심기를
들어내곤 하던 마누라가 호랑이 남 말하듯 다음주 월화 페인트 칠하고 목금 도배하고 바닥 깔아야 하니
왠 만한 물건은 미리 밖으로 들어내 놓아야 한다고 한다. 다른 사람은 이삿짐 센터에 맡기지만 우리는
여유가 없어 그렇게는 못하고 복도에 내어 놓고 하기로 했다는 말을 덧붙인다.
더디어 올 것이 왔구나. 이제는 헤어져야 할 때구나! ….평소에 색깔이 벽지와 어울리지 않는다, 모양이
촌스럽다며 마음에 들지 않아하던 내 좋아 사들인 내 전용의 물건들과 헤어질 때가 왔구나! 즉 지금은
내가 봐도 볼품없는 장식장과 서랍장, 내가 직접 주문 제작한 잡동사니 넣는 장, 볼품없이 장소만 차지하는
검은 책꽂이 둘, 그리고 박스에 넣어져 베란다를 온통 제자리인양 점령하고 있는 골동품 책들, 벽에
걸어보지도 못한 그림들(유망 화가가 그렀다는 시골 초가집 유화. 모작 품인 듯한 추상화 등), 등등등 들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