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섬사람 <3> 남해 '노도'
서포 김만중의 눈물 배인 땅, 문학의 향기 피워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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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관광객이 노도호에서 노도를 바라보고 있다. 노도는 그동안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던 오지 섬이었으나 최근 남해군이 서포 김만중을 기리는 사업을 추진하면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
- 유배 와서 생 마감할 때까지
- 사씨남정기 등 대표작 남겨
- 직접 판 우물과 초가집터 남아
- 남해군 대대적 스토리텔링사업
- 입소문 나 탐방객 꾸준히 증가
- 주민 18명 살고있는 작은 섬에
- 추석연휴엔 하루 150명 다녀가
경남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 벽련마을 앞의 노도(櫓島).
남해섬의 남쪽인 앵강만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남해 본섬인 벽련마을에서도 직선거리로 1.2㎞의 바닷길을 건너야 하니
오지 중의 오지라고 해도 틀린 표현이 아니다.
이름의 유래는 여러가지다.
섬에 지천으로 자라고 있는 참나무로 배를 젓는 노를 많이 만들었다고 해서 노도라고 불렸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섬의 모양이 삿갓과 닮았다고 하여 삿갓섬이라고도 불렸다.
하지만 섬의 한자 이름에 '배를 젓는 막대기'를 의미하는 '櫓'자가 들어간 것을 보면
[전자 쪽]에 무게가 실린다.
■ 기지개를 펴는 섬
평범하고 조용해 오지마을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던 노도는
4∼5년 전부터 들썩이기 시작했다.
남해군이 이곳을 서포 김만중(1637~1692)의 유배지라고 밝힌 뒤
유배당시 모습을 재현하는 시설들을 만들어 [스토리텔링]화를
시작하면서부터다.
작은 초막이 만들어지고, 아름드리 동백나무가 자생하고 있는
선착장에서 초막까지의 2㎞ 길에 호젓한 오솔길이 생겼다.
이 때부터 방문객이 늘어났다.
노도는 조선 중기 무신이자 구운몽, 사씨남정기 등을 쓴
김만중과 인연이 있는 곳이다.
김만중은 숙종 15년이던 1689년, 노도로 유배 와서 56세(1692년)에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김만중은 유배 기간 사씨남정기와 서포만필을 썼다.
섬에는 김만중이 직접 팠다고 전해지는 우물과 시신을 잠시 묻었던 허묘(墟墓),
초옥이 있던 터 등이 남아 있다.
옛 문인의 자취를 찾으려는 이들이 늘어나자 남해군은 노도를 김만중을 추모하고 기념하는
성지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지난 1월 중간보고회를 갖고 실시설계를 진행하고 있다.
오는 10월말 실시설계를 마치면 늦어도 연말 내로 착공에 들어간다는 복안이다.
'문학의 섬 노도 조성사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150억 원(국비 75억 원 포함)이 투입되는 이 사업은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선박의 접안을 쉽게 하기 위해 마을 앞 선착장을 고치는 일부터 시작된다.
또 대합실격인 승선대기소를 마련해 이용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할 계획이다.
폐교를 민속체험관으로 개조하고, 마을 옹벽은 전시벽으로 활용해 서포와 관련된
시화나 그림 등을 걸어둔다는 방안도 마련됐다.
서포의 가묘와 유배생활을 위해 지은것으로 추측되는 초옥은 현대적 감각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초옥 앞에는 서포문학관을 지어 서포가 유배지에서 지은 글들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특히 노도의 남쪽 끝에는 서포의 사씨남정기에 등장하는 동정호를 만들어 윗쪽으로는 사씨남정기 정원을,
아랫쪽으로는 구운몽 정원을 각각 조성하기로 했다.
여기에다 서포문학의 골격인 충과 효를 테마로 한 산책로를 조성하고,
신진 작가들을 위한 창작실을 만들어 작품활동을 돕는다는 구상도 확정됐다.
남해군청 홍보영 문화재팀장은 "노도를 중심으로 한 앵강만은 김만중의 문학적 상상력을 키워주는 주무대가 됐다"며 "노도를 문학이 넘치는 아름다운 섬으로 꾸며나가겠다"고 강조했다.
■ 섬사람들의 치열한 삶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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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 당시 서포 김만중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터에 다시 세워진 초옥. |
추석연휴가 끝난 지난 23일 하루 4편을 운항하는
12인승 노도호를 타고 섬으로 들어갔다.
9명의 승객 가운데는 방문객이 3명,
친정을 찾아오는 딸과 아이들이 6명이었다.
선장 김재구(65)씨는 평일에는 배를 타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추석연휴에는 서포선생의 유직지를 찾으려는 탐방객이
하루 150여 명에 달했다고 귀띔했다.
김 선장은 평소 하루 4번만 운항했지만
이 때만큼은 10여 차례 배를 몰았다.
마산에서 낚시점을 운영하는 지상호(50) 씨는 "20여년 전 장롱 배달을 따라 왔다가 노도를 알게 된 뒤
낚시점을 차렸고, 지금은 매달 한 두차례 출조하고 있다"며
"아직까지는 외지인의 손을 덜 탄 까닭에 포인트마다 제법 손맛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낚시터보다 훨씬 조용한 편이어서 피서를 겸한 가족단위의 낚시객이 많은 편이라고 덧붙였다.
마을 인심이 좋고 낚시 포인트도 훌륭해 거의 노도만 찾는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친정이 있었지만 모두 외지로 나가고 지금은 4촌 오빠만 살고있다는 김경자(여·69) 씨는
"어릴 때는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으나 지금은 13가구에 18명만 살고 있는 곳으로
전락했다"며 "앞으로 이곳을 서포선생을 기리고 재조명하는 곳으로 만든다니 설렌다"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노도에 사는 손덕점(84) 할머니는 "남해 본섬에서 17살에 시집와서 지금까지 어장과 밭일을 하며 살아 왔다. 앞으로도 떠날 생각은 없다"며 노도에 대한 짙은 애정을 드러냈다.
# 유배지에 남긴 선현들의 발자취 재조명 길라잡이
■ 김성철 남해유배문학관장
서포 김만중의 유배지로 알려진 남해 노도가
오늘날 유배문학 중심지가 된 데는
남해유배문학관 관장을 맡고 있는 김성철(50·사진) 씨의 힘이 컸다.
남해에서 태어난 그는 1986년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한 뒤 줄곧 고향을 위해
일해왔다. 2002년 6월 '서포 김만중선생 남해기념사업회'를 만들어
6년간 회장직을 맡았다.
또 남해문화사랑회 회장과 남해문화원 향토사연구소편찬위원장 등을
역임해오다 지난 2010년 10월 남해유배문학관이 설립되면서 관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김 씨가 주축이 돼 만든 '서포기념사업회'는 10년 전부터 유배지에서 남긴 선현들의 글에 대해
문학적 차원으로 접근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유배문학의 재조명과 문학관 설립을 줄기차게 주장해 왔다.
남해에 유배 온 200여 명의 선비들이 임금과 조정의 잘못을 시와 글 등으로 지적하고
부모나 자식에게 전한 애뜻한 사연들을 학문적 시각에서 재조명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이런 여론이 공감대를 형성하자 유배문학관을 조성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확산됐고,
2010년 남해읍 남변리에 남해유배문학관이 문을 열였다.
이곳에는 향토역사실과 유배문학실, 유배체험실, 수장고, 유배문학연구실 등이 갖춰져 있다.
또 야외에는 행사마당, 야외조형물, 야외체험장, 초옥, 팔각정, 문학비, 산책로, 수변공원 등이
자리하고 있다.
연간 5만 여명이 이곳을 찾는다.
유배문학관은 노도의 김만중 허묘나 김만중 초옥, 우물터, 산책로 등과 연계해
우리나라 유배문학을 재조명하고 국문학의 발전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또 문학과 관광을 아우르는 남해군만의 독특한 문화인프라를 구축하는 데도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