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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 전쟁과 양민학살- <퍼옴>
참전 유공자 <박 정환>
지난 4월23일, 태권도 월간지 발행인이며 나와 같은 무도인(武道人)으로 미국에서
크게 성공한 정우진 전우와 함께 고국을 방문해 베트남 참전 전우들을 만나러 서울
보훈 병원으로 갔다.
우리 한국군이 베트남전에 본격적으로 대규모 병력을 투입한 1966년부터 철수한
1973년까지 약 32만명의 우리 젊은이들이 참전했으며, 파월된 민간 기술자들도
거의 맞먹는 숫자다.
20만명이 넘는 전우들이 국가 유공자로서 예우를 받고 아직도 생존하고 있다.
그러나 나처럼 일찍이 해외로 나와서 국적이 바뀐 전우들은 국가 유공자 혜택을
받지못하고 그저 참전 유공자로서의 처우를 받는다. 이것은 우리 정부와 국민
정서가 아직도 세계화 하지 못한탓이 아닌가 하고 -자위하며-, 어쨌든 분명 이것은
형평성이 없는 처사라고 여겨진다.
나는 베트남전 당시 월맹군에 생포 되었다가 탈출에 성공해서 귀환한, 한국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했던 유일한 실종자 겸 포로였다.
사실 지난 45년동안 베트남과 캄보디아에 방문할 기회가 여러차례 있었으나
포로생활의 악몽으로 영육이 황폐해졌던 과거의 기억속에서 벗어나기위해 몸부림쳐
왔기 때문에 숨은듯이 조용히 살아 가려 했다.
그런데 이번은 정우진 전우의 설득과 한국의 전우들이 나를 꼭 보고싶어 한다고 해서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보훈병원에 간것이다.
백발이 성성한 수십명의 전우(戰友)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우리를 뜨겁게 환영해
주었다. 특히 경남 진주에서 우리를 만나러온 장세영 전우는, 내가 저술한 실화소설
"느시" 1,2권 10집을 가져와서 전우들에게 나누어 주며, 마치 애타게 찾던 혈육을
만난듯 눈물을 흘리며 나를 포옹했다. 그는 고엽제 환자로 백혈병에 피부암까지
발병해 치료받고 있는 터였다.
의외의 뜨거운 환영에 감격한 나는, 그동안 악몽과 싸워온 고통의 세월이 나만의
고독한 싸움이 아니라는것을 새삼 깨달았다. 우리가 비록 지금은 늙어 제한된 삶을
꾸리지만, 인생의 황금기인 20대의 청춘을 베트남 정-글에서 살점과 땀, 피를 튀기며
조국과 가족을 위해서 싸웠다.
그래서 누가 뭐라해도 그때 우리는 순진한 전사(戰士)였고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영웅이었다고 외치고 싶은 충동이 전우들을 만나니 가슴 밑바닥에서 부터
끓어 오름을 느끼었다.
그런데 배고픔과 헐벗음의 서러움을 겪어보지 못했고 전쟁이 뭔지도 모르는 철부지
소 영웅주의자들에 의해 우리가 용병이었고 양민학살자였다고 매도 당하고 있으니..
그래서 나는 전우들을 위해서라도 침묵하지 않고 내가 겪은 베트남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억울하고 분통터지는 누명에 대해 사명감을 갖고 소신을 밝히고져
결심했다.
"만약 베트남 전쟁당시, 박 선생님께서 대통령이었다면 우리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몰아 넣었겠습니까?"
2000년 7월20일경 MBC 라디오 방송프로그램 <토크쇼> 담당자인 유시민 진행자가
여류소설가를 배석시키고 내게 던진 질문이다.
유시민 진행자는 훗날 노무현 정권때 국회의원, 보건복지부 장관등을 역임한
노 대통령의 총애를 받던 실세 정치인이 된 인물이다.
이들은 박 대통령의 결정이 바람직하지 못했다는듯, 내가 "아니요-"라고 대답했으면
하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입니다." 나는 주저없이 단숨에 대답했다.
내 대답에 의외라는듯 이들은 동그란 눈을 했다. 허탈감마저 느끼는듯한 공허한
눈빛이다.
"남의나라 전쟁에 우리 젊은이들을 보내 총알받이로 피를 흘리며 살상 당하게
한것이 옳았다고 여기십니까?"
이제 이들은 완연히 본색을 드러내 놓고 내 눈치를 살피면서 저들이 원하는 답을
|얻어내고자 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약 32년전, 베트콩의 포로수용소에서 월맹군 대령이 집요하게 심문하는 과정에서
이들과 똑같은 내용의 질문을 한것이 생각났다. 나는지금, 그때 그곳에서 대답했던
기억을 더듬어 - 그 당시의 상황이나 전쟁이 뭔지도 모르는 후배들에게 거의 유사한
내용의 답변을 제시 해야하는데 대해 혼란스러울 만큼 서글퍼 졌다.
"나는 6.25 동란을 겪은 세대다. 우리 민족이 미국에 많은 빚을 지는것을 목격했다.
그리고 우리가 꼭 간과해야 할 점은 현재의 관점으로 월남전을 조명하는것을
잘못된 잣대질이다 라는 것이다. 그때는 국내와 국제상황이 박 대통령께서 파병
하지 않으면 안될만큼 절박한 시기 이므로 그렇게 결정지을수 밖에 없었을것이다."
이들은 1950년 6.25 동란때, 미국이 1백 80만명의 대규모 병력을 3년간의 한국전쟁에
동원했으며 전사 5만 4천명, 부상 10만 3천명, 그리고 8천여명이 실종된 사실을
알고 있기나 한지.. 7천명이 포로되고, 행방불명된 8천여명의 실종자 가족들이
미국인 풍습에 의해 아직까지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고있는 처지다.
지난 5월 26일 헌충일(Memorial Day)에 한국전쟁때 실종된 계급이 상사(上士)인
흑인 병사의 유해가 송환되었는데 그 병사의 아내는 결혼한지 1년만에 출정한|
남편을 63년간 재혼하지않고 수절하며 살아와, 오바마 대통령은 물론 온 국민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6.25동란때 부상당한 노병(老兵)이 지금껏 재향 군인 병원 병실에 누운채 치료받고
있다. 우리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때 피를 흘리며 도와준 혈맹(血盟)인 이들은, 어떤
명분이던 간에 우리에게 총부리를 겨눈 동족보다 낫다. 그들이 어려운 상황에
처했는데 우리가 돕는것이 무엇이 잘못 되었다는건가?|
베트남전에 우리만 참전했나? 아니다.
오스트렐리아, 캐나다, 필리핀, 타일랜드,터키군대도 참전했다.
유시민 진행자는 수년뒤, 여당의 실세 국회의원이 되었을때,우리 군대가<이라크>
전쟁에 파병되는 동의안에 찬성표를 던진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것인가?
"월남전에서 우리 군인들이 양민을 학살 했지요?"
"뭐요?! 하지 않았습니다."
"................."
이들은 내 대답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인지 서로 쳐다보며 크게 실망한 눈치다.
전쟁이 무슨 장난인줄 아나?
베트남 전 처럼 적과 양민의 식별이 여의치 않는 전쟁터가 아니더라도 -
동서고금의 어떤 전쟁이든 민간인 희생은, 직접 전투하는 군인들 보다 더 크기
마련이다.
2차대전을 종료시킨 <히로시마><나가사키>의 원폭투하로 수십만명의 민간인이
순식간에 떼 죽음을 당했는데 -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미군이 양민학살했다고 누구도
지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당시 원자폭탄을 투하하지 않았더라면,
미군이 일본본토에 상륙 했을경우, 수백만명의 일본인들은 물론, 미군들이 전쟁의
제물로 살상되었을 것이라고 두둔한다.
이틀분량의 방송프로를 마치고 복도를 통해 걸어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나를
이들은 따라와 전송하면서
"오늘 방송은 참 재미있게 잘 진행되었는데 박 선생님께서 양민 학살문제를 좀더
진솔하게 말씀해 주셨더라면..." 하고 못내 아쉬워했다.
그러나 나의 대답은 "그런일 없었습니다." 였다.
안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내심 몹시 불쾌했다.
참전한 32만명의 나의 전우(戰友)들을 감히 양민학살자로 몰고가다니...그 저의가
못마땅하고 아주 어이가 없었다.
2000년 7월 MBC TV 방송국에서 제작한 <이제는 말할수 있다>라는 특집 프로그램에서
<월남전의 포로와 실종자>라는 타이틀의 다큐멘터리가 방영 되었다.
내가 월남전 포로였기 때문에 제작진의 간곡한 청에 의해 상당한 방영공간의
활애를 약속받고 출연했다.
전 주월사령관 채명신 장군도 출연 하였으나 각자가 각기 다른 편리한 장소에서
녹화했기 때문에 사령관과 재회할 기회는 없었다.
"주월 한국군은 수색작전만 수행했기 때문에 실종자는 물론 포로도 없었다"
채 장군의 주장이었다.
"아군과 적군의 식별이 용이치 않는, 월남전의 특수성인 게릴라 전 임을 감안
한다면 우리 병사들이 수색나갔다가 매복한 적으로 부터 기습공격을 받으면
뿔뿔이 흩어지기 마련이다. 도시의 외곽지역과 지방 농촌의 다섯살배기 꼬마
들로 부터 70세의 노인네들까지 모두가 베트콩이 아니면 그들 동조자여서,
전면전(全面戰) 보다 더 포로될 확률이 높다." 는 것이 나의 주장이었다.
주월 한국군은 8만번의 대소접전(大小接戰)을 치뤘고, 그중에 대규모 전면전도
여러차례 있었다는것을 나는 상기시켰다.
또 다른 TV 방송국 인터뷰에서 채명신 사령관은 월남전에서 우리 한국군이
저질렀다는 양민학살의 문제가 일부 몰지각한, 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불거졌을때 극구부인으로 일관했다.
물론 나도 채 장군과 동감이다.
전술했듯이, 고대(古代)나 현대(現代)의 전쟁사를 고찰해 보면 어떤 양상의
전쟁이든 비 전투원인 인간인의 살상은 불가피한 것이다.
이런경우 적에게는 양민학살로 묘사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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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장군이 양민학살을 전면부인한 한달뒤인 2000년 8월, 김종수 소위 사건이
신문기사화 되어 불거졌다. 이 사건으로 베트남전에서 양민학살에 대한 실상에
의구심을 증폭 시켰다.
비둘기 부대 소속 소대장이었던 김종수 소위는 1968년 7월15일 소대원들을 이끌고
야간에 예정된 매복지점이 아닌 (국방부 보고서)곳에 매복하고 있다가 자정이 넘은
새벽 1시경, 그곳을 통과하는 베트남인 7명을 검거,체포했다.
적이 출몰하고 활동하는 작전 지역에 집단을 이루고, 그것도 한밤중에 움직이는
이들을 체포했으니 몸수색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몸 수색때 그들이 갖고 있는 시계를 포함한 모든 소지품들을 압수 했는데
나중에 시계를 강탈했다는 죄목도 김소위에게 추가 될줄이야...
이 와중에 갑자기 한명이 도주했다. 김 소위는 즉각 소대원을 시켜 추격,사살하게 했다.
아무런 죄가 없다면 도망칠 이유가 없었기에 그건 응당한 조치였다.
나머지 6명을 끌고 이동하는중에 이번에는 두명이 도망쳤다.
그 둘은 그만 놓쳐버렸다. 나머지 4명도 거세게 반항하며 도망치려 하자 다급한
나머지 부하들에게 사살할것을 명령했다.
지금은 충남 공주에서 서울로 오가며 목회를 하고있는 김종수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5명은 총기를, 2명은 무전기까지 소지하고 있어 베트콩임을 확신했다고 했다.
그 다음날 도주한 두명이 그 지역 군수에게 사건 내용을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보고했다. 양민을 학살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선동에 편승한 그 지역 베트남 주민들이 한국군 부대앞에 몰려와 대대적으로
거센 항의 시위를 벌였다.
당시 주월한국군사령부 채명신 사령관이 예하부대에 하달한 전투 개념은 두가지였다.
첫째는 "백명의 적을 놓치더라도 한명의 양민도 다치지 말라."이고
또 하나는 대항하는 적은 강력하게 응징하고, 평정된 지역과 우호적인 촌민들에게는
각종 대민봉사 사업을 통해 그들의 생계를 돌봐주고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다.
당근과 채찍의 양면 작전이다.
<게릴라 (빨치산)는 고기이고 농민(주민)은 물이다>라는 모택동 게릴라 전술논리에
근간을 둔, 물과 고기의 연결고리를 차단하려는 베트남전의 특수성에 대한
궁여지책의 일환의 발상이다. 이런 작전개념은 크게 주효 했다.
그런데 김종수 소위사건의 돌출은 주월사 작전의 큰 그림에 걸림돌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낭패가 된 사령부 지휘부는 부랴부랴 사건 수습책 마련에 부심하게 됐다.
"김 소위! 사건현장의 지휘관으로서 부하들의 신변을 위해 자네 혼자 책임지는것이
어떤가?"
"네 - 그렇게 하겠습니다."
25세의 순진한 초급장교인 김소위는 조사관의 유도심문에 고분고분했다.
스스로 책임지는 차원에서 사실 상황과 다르게 꾸며진 진술서에 서명했다.(김종수 증언)
사건 다음날이 1968년 7월16일, 현지 군 감찰부에 의해 전격 구속 기소되고 5일후인
7월21일 1심인 보통군병 회의에서 양민학살죄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한국으로 이송된후, 다음해 2월12일 국방부 고등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그후 형(刑)이 그대로 확정되었다.
모든 절차가 고속도로 질주하듯 일사천리로 처리되었다.
포로로서 베트콩들과 함께 기거한 나의 경험을 토대로 평가한다면, 도시 외곽에
한발자욱만 나가도 지방 농촌의 남녀노소 전부가, 민족통일을 열망하는 베트콩, 즉
민족 해방 전선군(民簇解放前線軍 FLN)의 일원이 아니면 동조자 내지 부역자들이다.
야간에 단체로 정-글속을 배회한 이들은 분명히 베트콩 집단임이 틀림없다.
나의 관점으로는, 김종수 소위야말로 월남전쟁이 파생한 주월한국군 참전용사 가운데
최악의 비극의 희생양이라 할수있다. 그는 15년간의 긴 세월을 옥살이로 마쳤다.
"박 전우님, 왜 내가 그때 그런 가혹한 처벌을 받아야 했는지요?"
"김 목사님, 첫째는 베트콩 두명을 놓친것이 화근이고,
둘째는 그 당시 주위 인척 가운데 소위 빽 즉, 힘있는 사람이 없었다는것이...."
"아하, 맞습니다. 아무도 없었어요.."
전라도 가난한 농촌에서 성장한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후 갑종간부 후보생 훈련
과정을 이수하여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그의 친 인척들은 모두가 농민으로 -, 만약
사건당시에 그의 주변에 막강한 분이 있었더라면 사건발생 하루만에 전격적으로
중형을 판결받는 억울함을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정치인들은 <정치(政治)는 생물(生物)이다> 라고 한다,.
전쟁은 정치보다 더 펄펄한 생물이다. 변화무쌍하고 예측불허이기 때문이다.
녹색 군복에 살상무기를 거머쥐고 방향 감각마저 혼미한 캄캄한 낯선 이역땅
적 지역 정글 속에, 생사기로에 서 있는, 긴장으로 번득거리는 병사의 눈망울을
직접 목격하지 않은자는, 그 현장에서 발생한 사건의 참된 진상에 대해 이런저런
식으로 평가할 자격이 없다.
전쟁에 숙달된 군인은, 발끝에서 머리 꼭대기까지 온 신경이 곤두선 긴장감속에서,
핏빛으로 충혈된 눈동자는 야수처럼 야광을 발하고 코 끝은 승냥이의 후각처럼
적군의 살 냄새를 맡을 만큼 예민해지는 - 인간 본질의 변화를 가슴 서늘하도록
체감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다만 적을 죽이던가 내가 죽임을 당하던가 하는 양자택일만이
있을뿐이다.
김종수 소위는 매복중에 걸려든 분명 베트콩을 사살한것이다.
도망친 두명의 베트콩의 궤변은 저들을 양민으로 둔갑시켜 민족의식이 도도한
종족의 자존심과 동족애를 자극하여 시끌벅적되며 큰 물의를 일으키자, 당황한
한국군 지휘관들은 김종수 소위를 희생양으로 삼은것이 아닌가 싶다.
국방부 기록에 의하면 베트남에 참전한 주월 한국군 가운데 561명의 장사병
(將士兵)이 범죄에 연류되어 전범(戰犯)으로 구속, 처벌되었음이 발표 되었다.
범죄 내용은 항명(抗命), 명령위반, 상관구타 및 살해, 무단이탈, 탈영등 주로
하극상이 최다로 우리 한국군 자체 내부의 문제에 연류된 사건이다.
현지 베트남인들과는 무관한 것이다.
베트남인들과 연계된 사건가운데 소위 민간인 즉 양민학살 사건에 연류되어
처벌받은 숫자는 우리 군(軍) 내부의 기강해이로 발생한 사건에 비하면
극 소위에 불과하다.
그것도 김종수 소위처럼, 정말 억울한 케이스로 간주되는 사건도 있어 실제
보고 된 것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양민학살의 주 요인이 될수도 있는 상황을 예를 들어본다면, 적의 근거지로
추정되는 마을을 공격할때는, 포격으로 그 지역을 초토화 시킨후 병사들이
진격해 들어가는 것이 군사작전의 기본 개념인데도 불구하고 그 지역 양민들의
희생을 최소화 하기위해 적에게 완전 노출된 허허벌판같은 논바닥위로 병사들을
일렬횡대로 도열시켜 걸어가 공격지점에 접근하다가, 마을의 은폐된 지형지물을
이용해 몸을숨긴 베트콩으로부터 막강한 화력의 집중공격을 받고 중령인 대대장을
위시한 많은 병사들이 희생 당한적이 있다.
결국 치열한 격전 끝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우리 병사들이 그 부락에 진입했을때,
이성을 잃은 우리 병사들은 누가 적인지 양민인지에 대한 분별력을 상실하게 된다.
살상당한 전우들이 동족이기 때문에 더했다.
그러나 그 당시 엄격한 군기아래 훈련받은 우리 장병들은 지엄한 사령관의
작전개념을 잘 따라주어 의도적인 양민학살은 없었다.
전지(戰地)강간 사건은 17건으로 보고되었는데, 이들 모두가 최하 10년에서 무기
징역까지 선고받고 길게는 20년까지 복역하는 중벌을 내렸다.
역설적으로 기술 한다면, 그 당시 우리 국방부와 주월 사령부가 우리 병사들이
월남인들에게 어떤 피해나 범죄행위도 범하지 않도록, 철저한 사전 조치에
고심했다는 흔적이기도 하다.
사건 발생시 가차없이 엄중하게 신속히 처벌,처리 했음이 여실히 입증하는 것이다.
국방부 발표에 따르면, 1998년 8월1일 까지도 미 사면자 4명, 미 복권자 36명이나
된다. 전범자들이 지어진 형기를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상관 살해, 살인, 특히
전지(戰地)강간 등은 죄질이 중하다는 사유를 들어 국방부에서는 이들 전원이
형집행 종료 내지 특별 가석방으로 출옥했지만, 종전된지 30년의 세월이 흘러갔어도
사면 및, 복권(復權)에서 도합 40명을 제외 시켰다.
"그때 굶어 죽을수 밖에 없었던 우리 가족과 마을 사람들을 먹여 살려주고 도와준
고마운 은인인 <따이한> -."
"우리에게 태권도란 위대한 무술을 무상으로 가르쳐준 고마운 교관님....."
베트남과 국교가 트이자, 조심스레 베트남을 방문한 우리 전우들은 현지 베트남인들이되려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반기어 주는것에 너무 감격하고 고무되어,
10번, 심지어는 27번까지 베트남으로 왕래하며 그들과 우애의 정을 나누고 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전우들은 그 당시 근무했던 지역의 주민들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금도 지원 봉사 하고 있으며, 장세영 전우는 고엽제 환자로 투병하면서도 남몰래
베트남 어린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기탁하며 온정을 나누고 있다.
이제 우리 참전 용사들은 70을 넘었거나 문턱에 이르러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다.
이들 가운데 많은 전우들이 고엽제 환자이고, 온갖 전쟁 증후군으로 신체적, 정신적
고통속에서 힘들게 생활을 꾸려가고 있다.
우리 참전용사에 대한 평가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중에 하나였던
대한민국을 세계 경제 10위권에 진입하게한 원동력인 역할을 했고,
우리 국군의 현대화에 크게 이바지한 공헌을 우리 모두가 인정해야 한다.
우리 민족 역사상 최초로 해외에 파병하여 의리있는 민족의 군대로 용맹성을
전 세계에 떨친 우리 전우들 -
베트남 그 뜨거운 정글속, 빗발치는듯한 포화속에서 조국만세와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빛살처럼 명멸해간 5000여명의 꽃다운 우리
젊은이들의 고귀한 희생을 어떤 명분과 이유에서든 욕되게 해서는 안될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백발이 된 우리 참전 용사들을 용병이니 양민학살자로 매도하는
이기적인 소영웅 주의자와 반 민족 주의자들에게 한가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것은 - 전쟁에서는, 용맹스러운 적을, 그 상대는 잔인하다고 평가 한다는 것이다 - .
글: 박정환 (미국 플로리다 탐파 / 태권도 9단))
(미국 Florida주 지역신문 한국군 양민학살 시리즈 연재에 반박하여 투고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