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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2월19일 (녹)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청주] 영의 눈을 뜨십시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야고 1, 19 - 27
† 복음 : 마르 8, 22 - 26
★ 말씀에는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다. 말씀을 듣기만 하지 말고 실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유의 법에 머무르는 사람은 말씀을 실행하게 되고,
이를 통해 그는 행복해진다(제1독서).
★ 사람들이 예수님께 눈먼 이를 데려와서 그가 볼 수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시어 치유해 주신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되었다. 이 기적 이야기는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해 주시려는 예수님의 노력을 보여 준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의 야고보서는 말씀을 듣고 실행하지 않을 때에는 마치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쉬이 잊히게 된다고 알려 줍니다. 독서에서
지적하는 대로, 말씀을 자주 듣기는 하지만 제대로 실행하지는 못하는
게 우리의 일상인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어쩌면 우리의 마음가짐에
결의와 절박함이 많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실 모든 실행이
그렇듯 말씀의 실천에는 각고의 노력과 결심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대음악가 베토벤이 말년에 남긴 작품 현악 사중주
16번(작품 번호 135번)에 관한 유명한 일화는 우리 신앙인의 삶을
찬찬히 돌아보게 합니다. 베토벤은 이 위대한 작품의 마지막 악장의
시작 부분 의 악보 위에다 “그래야만 하는가?(Muss es sein?)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만 한다!”(Es muss sein! Es muss sein!)라는 메모를
남겼습니다. 이 문장의 뜻과 유래에 대한 몇 가지 설명 가운데 한 통설을,
체코의 작가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소개하고 있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악장의 시작 부분에 “힘들게 내린 결정”이라는 말을 덧붙인
것을 보면, 이 자문과 자답은 베토벤이 말년까지 소홀하지 않았던 진지한
삶의 태도, 곧 여러 가지 어려움을 이겨 내고 다다른 삶의 경지를 절묘하게
요약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젊은 나이에 청력을 잃는 등 그의 삶은 고통으로
가득 찼지만 고뇌와 결단의 순간들을 통해 가치 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 삶의 여정에 주시는 주님의 말씀과 은총의 수많은 사건은 우리의
내적 결단을 기다립니다. 이를 통하여 말씀과의 만남은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대신 진정한 말씀의 실천으로 지속됩니다. 이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적정한 무게를 획득합니다. 그러한 삶 안에서 우리와 주님의 만남은
더 이상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으로 변모되는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영의 눈을 뜨십시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2월19일 연중 제6주간 수요일(마르8,22-26)
<눈먼 이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되었다.>
+ 마르 8,22-26
영의 눈을 뜨십시오.
눈 먼 사람이 보게 된다면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그러나 보고 싶은
것도 많고, 볼 것도 많지만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보다’라는 동사는 단순한 시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해와 깨달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생명의 빵’이신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빵이 없다고
걱정하였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8,18.21)는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보아야 할 것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눈 먼 이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는 말은 단순히
‘육안으로 보이느냐?’의 질문이 아닙니다. 새로운 세상이 보이느냐? 능력을
지닌 ‘구세주가 보이느냐?’는 물음입니다.
우리는 흔히 눈을 ‘육안’, ‘심안’, ‘혜안(영안)’으로 구별합니다. 육안은
그야말로 밖으로 드러나 있는 것을 보는 눈입니다. 그러나 심안은 마음의
눈입니다. 품은 생각을 드러내는 눈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서 보이는 것이 다릅니다. 똑같은 것을 보아도 어느 사람은
긍정적으로 좋게 보고, 어떤 사람은 굽은 눈으로 봄으로써 자기 마음을
표출하게 됩니다. 어떤이는 장미꽃을 보면서도 장미꽃의 아름다움은
보지 못한 채 가시만은 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
(루카11,34-35).
영안은 신앙의 눈입니다. 영안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을 보는 눈도
아니고 내 마음의 잣대로 판단하는 눈도 아닙니다. 영적인 눈은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진 눈이요, 내 눈으로, 내 마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눈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는 눈입니다. 그야말로 “당신의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이옵니다”(시편119,105). 영안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일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지만 자기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눈먼 사람입니다. 지식이나
재물도 꼭 필요한때 쓰지 못한다면 눈먼 이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눈 먼 이는 주님의 손길을 통해 사람들을 보았는데 처음에는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았습니다. 이것은 평상시에 익숙해져 있는 대로 본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눈먼 이가 다니면서 제일 많이 부딪친 것이
무엇일까?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손을 얹으시자 똑똑히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겉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을 보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능력은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행하여지고 마침내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이루신다는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똑똑히 보기 위해서는 한두 번으로 안 됩니다. 반복과 훈련이
필요하고 서서히 알아보게 되고 깨치게 됩니다.
육안의 눈을 넘어 마음의 눈을 뜨고 영적인 눈을 뜨기까지 사랑과 정성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세상 것에 눈이 멀면 결코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무엇이 보이느냐?” 하시면 “예, 주님, 뚜렷하게
보입니다.”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보게 되었으면 어두운 과거의
마을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예수님을 통해서
언젠가 어떤 자매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자기 딸의 결혼에 대해 반대했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반대 이유가 남자 측의 조건이 너무나
좋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겉으로 보이는 외모는 작은 키에 호감형
얼굴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지방대 출신이고,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도
별로 좋은 곳이 아니라네요. 무엇보다도 그 집안이 무척 가난하며, 밑에 딸린
동생이 셋이나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은 행복한 결혼을
위해서는 서로 조건이 맞아야 하는데 전혀 맞지 않으니 결혼을 절대로
승낙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물론 남자친구가 신앙생활을 아주 열심히
한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결혼은 현실인데, 신앙생활만으로 행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재산, 외모, 학벌, 능력으로만 평가되는 모습이 올바른 모습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이 이 세상 안에서 기대하는 대표적인 것은 ‘돈’인 것 같습니다.
돈과 관계되는 것으로 평가하고, 그 평가에 의해서 사람의 높고 낮음이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사람답게 살도록 만들어주는 중요한
것은 서로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의 마음이 아닐까요?
2009년에 사망한 세계적인 팝가수 마이클 잭슨을 아실 것입니다. 그의
재산규모는 아직도 파악이 안 되고 있다고 하지요. 아무튼 그는 죽기
직전까지 엄청난 수입을 올리는 세계적인 스타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죽기 6주전부터 불면증으로 엄청난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어도 이 불면증을 고치지 못했고 그의 죽음도 잠을 자기 위해
처방한 마취제와 진정제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재산이 그 삶 안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했지요. 그를 그답게 유지시켜줬던
것은 오로지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졌던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이었습니다. 또 사람들 역시 그의 재산에 대해서는 그리 관심이
없지요. 재산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그를 사랑했던 것이 아니라, 그의
노래로 인해 얻을 수 있었던 기쁨과 희망을 통해 그를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랑의 관계에 집중할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를 고쳐주시면서
“무엇이 보이느냐?”라고 물으시지요. 이에 그는 사람인 것 같지만,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인다고 말하지요. 사람이지만 사람으로 보지 못하는
것, 어쩌면 지금의 우리들 모습과 똑같은 것이 아닐까요? 겉으로 보이는
재산, 외모, 학벌, 능력으로만 평가할 때, 그 사람의 참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참 모습을 보고 또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관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그는 자신의 눈을 가렸던 것을 모두 걷어내고,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사람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외적인 모든 것을
주님 안에서 걷어내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사랑의 관계 안에서 사람을
사람답게 바라볼 수 있으니까요.
인생을 살다 보면 한마디 더 말할 시간은 있어도, 그 한마디를 취소할 시간은
쉽게 오지 않는다. 아무리 사소한 말도 가장 중요한 말을 하는 것처럼 하라
(발타자르 그라시안).
가장 행복한 기다림(‘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기다림’ 중에서)
인터넷에서 본 글입니다. 많은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글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 그대로 올려 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많은 재산이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재산이 많다고 해서 행복한 것만은 아니지요.
오히려 너무 많은 재산이 있으면 행복보다는 불행에 빠지기 쉽습니다.
우리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신이 계획했던 일들을 이룰 때 느끼는 성취감, 기쁨, 이런 감정들이 바로
행복입니다.
행복은 돈이 많다고 해서 느낄 수 있는 값싼 감정이 아닙니다. 행복은 결코
돈으로 살수 없지요.
진정한 행복은 힘든 시련 속에서도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노력 속에 있지요.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행복하게 보이는 것은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자애롭게 산다는 것은 우리 각자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이에 가장 약하고 가난한 이들의 짐을 들어주는 것을 의미랍니다.
(교황 프란치스코)
2014년 가해 2월19일 연중 제6주간 수요일 묵상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야고보1,22)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야고보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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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인터넷을 보다가 가슴 아픈 기사가 하나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시아 선진국 중 최악의 부패국가 한국”이라는 제목의 기사였습니다.
제목부터 마음을 아프게 하는 내용인지라 기사를 열어보았습니다.
정치와 경제에 대한 위험도를 상담하는 ‘PERC 홍콩’이라는 회사가 2013년
조사 보고서에서, 아시아에서 경제적으로 먹고 살만하다는 나라들 중에서
한국이 일본, 호주, 홍콩, 싱가포르, 중에서 가장 정치적, 경제적으로 최악의
부패한 국가로 조사되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부패에 대해 둔감한 한국인의 도덕성이라고 보고하였습니다.
씁쓸한 이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면서 동시에 떠오르는 것은 최근 몇 년간
보여지는 한국의 암울한 현실들이었습니다. 너무도 불쾌한 기사였지만,
이 보고가 진실일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생각하기도 싫은
상황으로 전개되는 정치판, 돈이면 모든 것이 다 된다는 배금주의의 절정,
그 의미도 모르면서 좌니 우니 하면서 고리타분하고 선긋기를 하는 한물간
이념적 갈등, 해외 관광까지 가서 보이고 있는 추태들.
정치, 경제, 교육, 종교, 모든 분야에서 병든 사회가 되어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왜, 이 나라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을까요?
다양한 이유가 있었으리라 봅니다. 한 마디로 언제부턴가 욕망을 채우는데
급급한 나라가 되었기 때문이라 봅니다.
가난했던 시절의 기억이 더 아름답게 떠오르는 것은 왜 일까요?
온 국민이 통회해야 합니다. 모두가 이 아픔을 만들어내는데 동조했다는
마음으로, 서로에게 탓을 돌리지 말고, 깊이 반성하고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진실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정치하는 세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성실하게 땀 흘리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분배가 이루어지고, 없는 이들과는
아낌없이 나눌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참된 것을 가르치는 교육이
너무도 당연한 세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옳음과 사랑을 위해 살고 죽을 수
있는 진실한 신앙인들이 많은 세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십자가 종탑은 몇 집 건너 보이는데, 세상은 더욱 거칠어만 갑니다.
진실되게 복음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거짓 신앙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반증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하루입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야고보1,22)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야고보1,27)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Touch하시는 하느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2월19일 연중 제6주간 수요일
마르 8, 22-26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한 눈먼 사람에게 손을 갖다 대신다. 뿐만 아니라 그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다. 더 대단한 것은 그의 두 눈에 당신
침을 바르시고, 그의 머리에 안수하신다. 마무리로 다시 한 번 그의 두 눈에
손을 갖다 대신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눈먼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모릅니다.
크신 하느님께서 너무나 미소하고 하찮은 한 인간에게 한번 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Touch'하십니다.
예수님의 그 Touch는 얼마나 강렬하고 또 얼마나 은혜로운 것이었던지,
눈먼 사람의 고장난 육체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건드리시고 치유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의 Touch는 사랑과 위로의 Touch, 감동과 구원의 Touch,
기쁨과 축복의 Touch였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당신의 두 손을 활짝 펼치시고 우리를 Touch하시기
위래 다가오십니다. 필요한 것은 우리의 태도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도와주시려고, 활짝 웃으시면서 달려오시는 그분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는
개방성, 환대, 순응성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의 눈을 뜨게 하시고, 마음의 눈을 뜨게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삶에 새로운 희망을 지니게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새로운 전망을 열어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제대로 된 인생을 한번 꾸려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가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우선적인 과제를 꼽는다면
바로 ‘영혼의 눈을 뜨는 일’입니다.
영혼의 눈을 뜸을 통한 회개입니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회개란 사랑이신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일입니다. 사랑이 아닌 것 앞에서 오래도 서성거렸던
우리의 지난 삶을 접고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로 U턴하는 일입니다.
진리가 아닌 것에 목숨을 걸었던 지난 세월을 마무리 짓고 진리이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개안(開眼)의 여정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2월19일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야고1,19-27 마르8,22-26
<눈먼 이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되었다.>
+ 마르 8,22-26
개안(開眼)의 여정
오늘 묵상 중 떠오른 주제는 ‘개안의 여정’입니다.
진정한 영적 삶은 단조로운 무의미한 반복이 아니라 끊임없이 마음의
눈이 열려가는 여정이요, 살아갈수록 마음의 눈 빛 역시 깊어질 것입니다.
말 그대로 지혜의 눈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의 맹인의 치유는
세례의 상징이었습니다. 세례를 통해 마음의 눈이 열린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믿음의 삶에 급작스런 성장은 없습니다.
복음의 맹인의 치유과정에서처럼, 우리의 개안도 서서히 이루어집니다.
세례로 개안의 완료가 아니라 평생 개안의 여정 중의 삶입니다.
이게 진정 영적성장의 길입니다.
세상 탐욕에 사로잡혀 개안의 여정이 중단된 삶이라면 무의미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내적성장이 그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다 하나 실상은 죽은 삶입니다.
하여 세례성사를 통한 개안이 계속 되기 위해 평생 성사인 성체성사와
고백성사가 필수입니다. 또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 공부가 개안의 여정에
필수입니다. 몸은 쇠퇴해도 영적성장은 평생 계속되어야 하며 마음의
눈 역시 계속 열려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보는 눈이 바뀌는 것이요,
시야도 더욱 깊어지고 넓어져야 비로소 노년의 풍요롭고 지혜로운 삶이
될 것입니다.
개안의 여정에 주는 야고보의 다음 조언이 적절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움과 그 넘치는 악은 다 벗어버리고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여 렉시오 디비나의 항구한 수행이 중요합니다. 저절로 개안의
여정이 아니라 말씀을 통한 깨달음이 우리 마음의 눈을 열어줍니다.
그러나 말씀을 묵상만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실행을 통한 깨달음이 개안의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아무리 사랑에 대해 많이 알아도 사랑을 실행하지 않으면 사랑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진정한 깨달음은 실행에서 옵니다. 사랑뿐 아니라 모든 덕목이
그러합니다. 진정 말씀을 실행할 때 깨달음의 은총이 뒤따르고 진정 그
덕목은 내 삶의 일부가 됩니다.
개안의 여정과 말씀과 기도는 필연적 관계에 있음을 봅니다.
개안의 여정이 멈췄다면 살아 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귀한 품위의 삶도 개안의 여정과 함께 갑니다. 듣기는 빨리하되
말하기는 더디 하고 분노하는 일도 점차 줄어들 것입니다. 개안의 여정과
더불어 마음은 더욱 너그럽고 자비로워질 것이며 마음의 눈 빛 또한
한없이 깊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끊임없는 기도, 말씀공부와 실행에 온
힘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개안의 여정이 깊어지면서 주님을 점점 가까이 보게 되어
우리도 점차 변모되어 주님을 닮아 갈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어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보고 맛들이게 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어, 부르심을
받은 저희의 희망을 알게 하여 주소서.”(에페1,17-18참조).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서울] 디지털과 아날로그식 기적의 의미
2014년 가해 2월19일 연중 제6주간 수요일
<눈먼 이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되었다.>
+ 마르 8,22-26
디지털과 아날로그식 기적의 의미
태어나고 그 때 그 때 깨닫는 디지털식, 세월 따라 자라고 겪는 아날로그식,
이런 두 스타일이 우리 안에서 공존하며 사는 게 삶이라 생각합니다.
결단 내려야 할 때도 있지만 생각할 여유를 가질 때도 있어야 하듯 말입니다.
하늘이 사람을 살거나 죽게도 하며 변화무쌍한 환경에 적응도 시킵니다.
예수님도 구세주와 임마누엘이라는 이런 두 의미를 다 보이셨습니다.
미완성을 거쳐 완성으로 뚜렷하게 세상을 보게 하신 걸 보면 말입니다.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마르코 8,25)”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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